제25장. 있어야 할 곳 (2)
없던 숙취가 생기는 기분이다.
아르센은 지끈거리기 시작한 머리를 휘휘 가로저었다. 그리고 앞에 서 있는 열 세 명의 마법사를 하나하나 쳐다봤다.
말이 좋아 군단이지 고작 쉰 명이다.
칼리안이 생각하는 규모에 비한다면 턱없이 부족하다 하기에도 모자란 수다. 이제 시작하는 단계가 아니던가.
그런데 아르센은 고작 쉰 명뿐인 발칸의 대원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
물론 누가 됐든 왕궁 밖에서까지 그들을 따라다니며 통제할 수는 없음을 안다. 마법사들을 통제한다니. 차라리 앨런을 찾아가서 당신의 제자도 정상인은 아니라는 걸 혹시 아시는지 넌지시 물어보고 살아서 나오는 게 쉬울 것이다.
그러니 통제하지 않아도 별 탈이 없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르센의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 일을 통해서 그동안 아르센이 헛짓거리를 했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싸워서 지지 말라고 배운 마법인데 싸울 때 써봐야지 언제 써보겠나. 그건 이해한다. 나도 화 나면 마법 쓰니까."
이렇게 대원들을 훑어보던 아르센이 혼잣말인 듯 혼잣말 아닌 소리를 꺼냈다.
"싸우다 보면 가게가 날아갈 수도 있지. 너희가 취해서 이상한 곳에 쏜 게 아니라 가게가 거기 있던 것을 어쩌겠나. 그러니 그것도 이해한다."
나도 몇 번 날려 봤어. 괜찮아.
그럴 때마다 그냥 조금 가난해졌을 뿐이지 별 탈은 없었어.
"마법사답게 싸웠고 안 졌고 안 다쳤으니 됐다. 잘 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아직 체계가 완벽하게 자리잡은 것도 아니고 매일매일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으니 쌓인 스트레스가 있는 것도 안다. 신이 나서 술을 마셨고 시비도 붙을 수 있다. 참지 못하면 마법을 꺼낼 수도 있다. 말했지만 그러라고 배운 마법이니까.
"마법사 우습게 보고 덤빈 놈들이 잘못이지."
앞에 서 있는 놈들을 봐라.
딱 봐도 또라이같은 게 누가 봐도 마법사 아닌가. 그런데도 덤볐으면 각오는 했어야지.
마법사가 일반인을 공격하는 게 억울할 거였으면 지들도 마법을 배워놓던가. 그걸 못했으면 입을 조심하며 살든지.
"그런데 문제는······."
전부 이해하고 넘길 것 같던 아르센이 어울리지 않게 뒷말을 흐렸다. 잘못한 것이 있음을 알고는 있는지 열 셋의 마법사는 하나같이 입을 꾹 다물었다.
"사고는 어제 쳤고 치안대에는 새벽에 들어갔는데 나는 그 사실을 전하와 군단장님과 플란츠 부군단장님께서 모두 알게 되신 뒤에 전해들었다. 아, 칼리안 왕자님께서도 알고 계신다지."
숨도 쉬지 않고 억양도 없이 줄줄 이어져 나오는 말에 마법사들의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게다가 치안대에 붙들려가서는 발칸과는 관련이 없다 했군."
이 부분은 넘어갈 수가 없었다.
다시 한 번 대원들을 둘러본 아르센이 말을 이었다.
아니, 이으려 했다.
"헤르츠 부군단장."
누군가의 어여쁜 목소리가 아르센의 말을 자르지 않았다면 말이다.
* * *
"애오옹!"
하고, 이런 곳에서 들리지 말아야 할 소리가 들렸다.
플란츠가 고양이 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니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가 어느새 가까이 와 있었다.
칼리안과 함께 빌헬름관으로 가지 않았다.
기분이 나빠진 것인지 고민할 거리가 생긴 것인지 혹은 다른 이유인지는 플란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칼리안만 보냈다.
그 뒤 후원의 산책길을 찾아왔고, 고양이를 만났다.
플란츠를 부르기가 무섭게 다가와 다리에 제 몸을 부비는 것을 보니 아마도 플란츠를 찾아온 모양이었다. 차마 미워할 수 없을 녀석을 쑥 안아 든 플란츠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겁이 없지."
장미 정원에도 불쑥 들어가고, 플란츠의 방에도 불쑥 들어오고. 이렇게 외진 곳까지 겁도 없이 찾아와서는.
"······ 길 잃으면 어쩌려고."
"미야옹!"
꼭 플란츠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고양이가 소리를 냈다. 플란츠는 결국 피식 웃으며 고양이를 안은 채 벤치에 앉았다. 손바닥을 찾아 제 머리를 가져다 대는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플란츠가 잠시 고개를 올렸다.
하늘이 참 파랗기도 하다.
나무마다 비춰진 햇살이 플란츠가 앉은 곳까지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것을 보고 있으니 칼리안의 말이 또 떠올랐다.
- 평생 제 그림자 노릇이나 하면서 죽은듯이 살 생각도 마시라는 겁니다.
플란츠가 왜 그렇게 구는지 이미 알면서 그딴 소리를 하고 있다. 알면서 하는 소리임을 알아서 플란츠도 어쩔 수 없이 짜증이 나는 것이다.
"······ 미친 놈."
"애옹!"
제 주인 욕 하는 것은 어떻게 알아듣고 고양이가 타박하는 듯한 소리를 냈다. 플란츠가 저도 모르게 고양이를 향해 대꾸했다.
"미친 놈 보고 미친 놈이라 하는데. 왜."
"애오옹! 애옹!"
하.
플란츠가 짧은 한숨을 쉬었다.
고양이나 앞에 두고 말싸움을 하는 꼴이라니. 차라리 아르센을 상대하는 게 덜 우습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고양이와 투닥거리는 사이 잠시 바람이 불었다.
- 사아아······.
자작나무 잎은 작았고 잘 흔들렸다.
햇빛 가득한 바람에 나뭇잎 스치는 소리가 한가득 지나갔다.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가 눈을 찌른다. 때문에 고개를 들고 머리카락을 대충 치워내던 플란츠의 손이 문득 멈췄다.
히나가 서 있었다.
아무래도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봐 버린 기분에 오도가도 못하고 서 있던 히나가 얼른 플란츠를 향해 예를 보였다.
고양이랑 말싸움하던 왕자가 그런 히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왜."
왜 그렇게 보고 있었느냐는 말인 것 같아서 히나가 생긋 웃었다. 당연하겠지만 칼리안의 생긋거림과는 그 본질부터 다른 순수한 웃음이다.
한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던 히나는 손가락으로 고양이와 플란츠의 발치를 가리켜 보였다. 고양이를 데리러 가까이 가도 괜찮은지를 묻는 것 같아서 플란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몇 걸음을 더 걸어온 히나는 플란츠에게서 조금 떨어진 옆에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놨다. 슬쩍 쳐다보니 컵에 담긴 하늘색 아이스크림이었다.
히나가 말을 하려면 당연히 손에 든 것이 없어야 했다. 때문에 플란츠는 자신의 옆에 무언가를 내려놓은 시녀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 햇살이 반짝반짝해서, 고양이를 데리고 나왔는데, 또, 도망을 갔어요.
모두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말이었다.
때문에 플란츠는 히나가 무언가 이유가 있어서 고양이를 데리고 나왔다는 정도로만 알아들었다.
- 고양이가, 좋은 왕자님을, 따라갔어요. 좋은 왕자님을, 정말 좋아하나봐요.
'고양이가 '어떤' 왕자님을 정말 '무엇' 하나봐요.'
그리고 이번에는 이렇게 보였다.
두 단어가 퍽 비슷하게 생겼다. 뒤만 달랐다.
그것이 무슨 말이었는지 이제야 알았다.
'좋은 왕자님.'
플란츠는 최소한 칼리안보다는 이성적인 사람이다. 때문에 앞에 나온 '좋은'과 뒤에 나온 '좋아하는'의 차이를 오해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좋은 왕자라니.
평가가 많이 잘못됐다. 너무 많이 잘못됐다.
바람에 이리저리 뒤척이는 나뭇잎들은 연두색으로 반짝이는 물결처럼 고요하고 평화롭다. 히나는 플란츠가 지금 꼭 같은 모습의 눈을 하고 있다고 말을 해줄까 하다가 그냥 미소만 짓고 말았다.
지금의 플란츠가 알아듣기에는 너무 어려운 말이니까. 대신 옆에 놓인 아이스크림을 가리켜보이며 말을 건넸다.
- 아이스크림, 좋아하세요? 안 먹은 건데.
의자에 내려놓았던 음식을 왕자에게 권하는 시녀는 아마 히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대담함에 피식 웃은 플란츠가 대답했다.
"싫어해. 파래서."
파랗고 둥글둥글한게 꼭 윗층 사는 누구 눈깔 같아서, 라는 말은 뺐다. 히나에게 들려줄 만한 말은 아니었다.
블루베리가 파란색이라서 싫다는 사람은 처음 본 히나가 소리없이 웃었다.
- 그럼, 무슨 맛, 좋아하세요?
플란츠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궁금해하는 질문을 처음으로 받아서였다.
내가 뭘 좋아했을까.
금방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주는대로 보여져야 하는대로 필요한대로 지냈으니까. 싫어하는 것은 많았어도 좋아하는 것은 생각이 나질 않았다.
때문에 단 것은 다 별로라고 대답하고 말까 하는 생각이 들 때 쯤 기억이 났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 딸기."
그래서 이렇게 한참 늦은 대답을 했다.
큼지막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히나가 손을 움직였다. 그 손 끝을 따라 플란츠의 시선도 같이 움직였다.
- 다음에는, 주방장님께 부탁해서, 딸기 아이스크림, 가져다 드릴게요.
이번에도 모르는 단어가 있었지만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있었다. 좋아해주는 고양이와 좋아하는 것 물어보는 시녀 때문에 짜증나던 기분이 가라앉은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플란츠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묻지 않았다.
기어코 살려두겠다는 동생놈이 뭐든 다 알려주겠다 하지 않나. 그것을 배우려면 머리를 좀 비워둬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러니 모르는 단어들이 무엇인지는 나중에 묻기로 했다.
플란츠가 좋아하는, 딸기 맛 아이스크림 가져왔을 때.
* * *
칼리안은 앨런의 말을 참 잘 듣는다.
칼을 쓰지 말라는 앨런의 말을 잘 듣고 몽둥이를 들었었다. 몽둥이를 꺼내 그레이를 다져놨다.
칼리안은 플란츠의 말도 참 잘 듣는다.
엄밀히 따지자면 먼저 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칼이나 몽둥이를 꺼낼까 걱정한 것은 알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칼도 안꺼내고 몽둥이도 안 꺼냈다.
다만.
화도 내지 않겠다고는 안 했다.
- 뚜벅, 뚜벅.
칼리안은 그 누구에게도 시선을 두지 않았다. 아무런 말도 표정도 없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천천히.
그 뿐인데도 압도한다.
느긋한 속도로 가까워지는 구두 소리가 빌헬름관의 훈련장을 뒤흔드는 느낌이다. 이미 쉰한 명이 있던 곳에 한 사람이 더 들어왔을 뿐인데 공기가 달라졌다.
그냥 어른도 아니고 그냥 귀족도 아닌 알고 보면 한 명 한 명이 모두 출중한 능력을 가졌다 할 발칸의 마법사들을 완전히 내리누르고 있었다.
왕비의 거처가 부서진 것을 안 뒤 '어이쿠' 따위의 말을 하던 마법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앞에 도열해 있던 마법사들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다.
나지막한 구두 소리가 아르센의 옆에서 멈췄다.
멈춘 소리를 따라 마법사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그들이 제 입으로 불러낸 발칸의 진짜 주인.
칼리안을 향해서였다.
"헤르츠 부군단장."
오래 전 칼리안이 그레이를 상대할 때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풍겨오던 칼리안의 살기를 이미 겪었던 아르센이었다. 그 때에 비한다면 지금의 기세는 별 것도 아니었다.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름이 불린 아르센은 저도 모르게 심호흡을 했다. 그 뒤에야 '네' 하는 대답을 꺼낼 수 있었다.
그런 아르센을 잠깐 바라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내가 하겠습니다."
내가 혼을 내겠습니다. 내가 벌을 주겠습니다. 내가 잘 얘기하겠습니다. 내가 경고를 하겠습니다. 이런 거 말고.
내가 다 죽여버리겠습니다.
그게 제일 간단하잖아요.
이렇게 들린다.
아르센은 마음 속으로 번역되는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안이 나서겠다는데 어떻게 막겠는가. 이번 기회에 제대로 알려줘야 할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하십시오, 왕자님."
아르센의 대답과 함께 칼리안이 마법사들을 향해 돌아섰다.
열 세 명의 마법사를 하나하나 응시하는 붉은 눈에 그대로 심장이 타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이들입니까. 발칸과 관련 없다 한 것이."
이미 알고 있을 텐데도 이렇게 묻는다.
아르센은 대답하지 않았고 마법사들은 고개를 떨궜다.
다른 답은 필요 없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마법사들을 향해 한 발을 내딛었다. 그와 함께 아주 조용한 목소리가 모두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어찌할까."
진짜 살기가 피어올랐다.
조금 전의 것은 그냥 나 좀 보라는 인사치레였던 것처럼. 수천 수만 개의 칼날이 온 몸을 도려내는 것 같은 섬뜩한 기운이 마법사들을 향했다.
"생명 붙어 있고 숨 쉬는 내내 내 품에 있을 놈들일 줄 알았지. 나는."
마법사들의 얼굴에서 다시 한번 핏기가 사라졌다.
발칸의 명예를 지키겠다는 얄팍한 책임감.
발칸의 책임자들에게 피해가 가지 말아야 한다는 뒤늦은 걱정. 그냥 마법사와 발칸의 대원 사이를 말 한 마디로 가르려 한 잔머리.
이런 것들로 말미암아 어떻게든 그들을 보호하고 책임져 줄 수 있는 '칼리안'이라는 울타리에서도 벗어나게 됐다는 것을 이제서야 깨닫는다.
"왕궁 안에서는 발칸이고 밖에서는 마법사인 새끼들. 나도 필요 없는데."
칼리안의 품 안에서 제 발로 벗어났던 마법사들.
그들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