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장. 있어야 할 곳 (1)
하얗고 긴 손가락들이 가지런히 모였다.
그 손에 쥐는 검이 이 세계의 어떤 명검보다 특별했던 까닭인지 아니면 시스파니안의 축복이 그런 곳에까지 영향을 주는지 모르겠지만, 아직 다 자라지 않은 흰 손에는 흉터는 물론 굳은살조차 없었다.
진득한 피는 물론이고 흙탕물에도 닿지 않았을 것 같은 그 손이 조용히 올라갔다. 스스로는 핏빛이라 여기고 남들은 루비의 색이라 말하는 붉은 눈이 손 아래 감춰졌다. 그렇게 칼리안은, 손을 올려 자신의 얼굴을 잠시 덮었다.
웃음을 참고 있었다.
가느다란 어깨가 잠시 들썩이더니 흐느끼는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크게 움직였다. 그 후에는 참아내지 못한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리고 결국은 웃음보가 터졌다.
앨런의 집에 갔을 때 꾸물꾸물하는 꽃 모양의 석상이 노래를 하는 것을 보고 이렇게 웃음이 터졌었는데. 이번에도 한결같다.
"아, 마법사들이란."
정말이지.
마법사들이란.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손에 들린 것을 다시 들여다봤다.
[우리는 왜 가게를 부쉈나?]
[내 이성이 지극히 감성적이었던 시간을 회상하며.]
[떠오르는 의문. 우리는 왜 멀쩡한가.]
이런 제목이 적힌 종이들, 정확히는 보고서 형식의 무언가를 손에 든 채로 칼리안은 허리를 펴지도 못하고 숨이 넘어갈 듯이 웃었다.
"다 돌았나봐."
그리고는 정말 간신히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칼리안이 손에 쥔 이것은 마법사들의 경위서, 정확히 말하자면 반성문이다.
전날 술 마시러 나갔던 발칸의 마법사 몇몇과 일단의 무리 사이에 시비가 붙었단다. 그것이 말싸움이 됐고, 하나같이 입심 좋은 마법사들이 이겼다. 그것에 분개한 무리가 친구들을 데려왔다. 그리하여 평화로운 대화의 장이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했다.
거기까지는 괜찮다.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다.
마법으로 사람을 팼다.
사람만 팬 게 아니라 가게도 팼다.
가게는 왜 팼냐고 물어보니 기억이 안난다 했단다.
"술은 왜 처먹은거야? 이미 돌았는데."
아.
이미 돌아서 마시기도 하지.
"돌아서 마실 만큼 심하게 돌아있는 놈은 없었는데."
이렇게, 얀이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던 칼리안이 경위서를 다시 쳐다봤다.
경위서 제목이 이따위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물론 칼리안을 우습게 봤다거나 놀리려는 마음에서 저런 식으로 쓴 것이 아님을 안다. 그래서 웃었다.
누군가 작성한 [집중 탐구 : 술기운과 폭력성의 상관관계] 라는 제목의 경위서가 가장 위에 있었다. 이번 일의 책임자라서 혹은 그들 중 가장 윗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나마 가장 '진지해보이는' 제목이라서 맨 위에 올려두었을 터였다.
자신들도 아는 것이다.
마법사라는 것이 얼마나 웃기는 족속들인지.
그동안 마법사들의 보고서는 앨런과 에우리아가 전해주는 것만 받아왔던 칼리안이었다. 그러니 진짜 마법사들이 보고서를 어떻게 쓰는지 지금 처음 봤다. 그리고 그 안에 적힌 내용은 제목보다 더 했다.
"왕자님, 말씀을······."
꽃 같은 왕자의 입에서 험한 말이 쏟아져 나오자 옆에 서 있던 얀이 잠시 주의를 주려다 멈췄다. 분명 웃었고, 웃는 눈이었고, 웃는 입이었으나 분위기가 달랐다.
화가 나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얀이 자신의 눈치를 보는 것을 느낀 칼리안은 경위서를 향한 고개를 그대로 둔 채 시선만 돌렸다. 그리고는 굳어있는 얀을 향해 표정을 풀며 말했다.
"눈치 보지 마. 안 그래도 돼."
얀이 살짝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말을 좀 곱게 해라'라는 소리를 다시 꺼내놓지는 않았다.
하, 하고 짧은 한숨을 쉰 칼리안이 다시 말했다.
"다른 사람은 안 다쳤대?"
여기서 말하는 사람이란 싸움 한 놈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마법사들은 빌헬름 관에서 숨죽이고 있었다.
"가게가 좀 부서졌고, 다친 사람들이 있기는 한데 크게 다치거나 죽은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그나마 다행이네. 헤르츠 경은 말리지 않고 뭘 했다는데? 함께 나서서 싸움을 하지는 않았을 것 아냐."
전해진 경위서에 아르센과 관련된 이야기가 없기도 했고, 아르센이 있었다면 이런 일이 생기지는 않았으리라 믿었다.
"싸움 시작되기 전에 집에 돌아갔다고 합니다."
아르센은 술 좋아하고 술 약한 마법사였다.
그런데 뭐가 좋다고 술을 처먹으러 나간 거야. 술도 못 처먹는 놈이 왜 술을 처먹다 먼저 처들어가서 일을 만드느냐고.
이런 말을 입 밖에 내면 새끼코끼리가 또 무어라 염려하는 소리를 할 테니, 칼리안은 얌전히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보나마나 한 경위서를 대충 훑어 본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단 보상부터 해주고, 헤르츠 경 불러줘."
치안대에 붙들려 간 마법사들은 이 일이 발칸이나 왕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치안대에서는 이에 대해 곧바로 왕궁에 알렸다.
그날 앨런은 이른 아침부터 계속 칼리안과 함께 있었다. 그래서 급히 전해진 보고는 칼리안이 함께 듣게 되었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앨런은 이 일에 대한 뒷처리를 어찌해야 할지 칼리안의 의견을 물었다.
르메인이 아닌 칼리안의 의견을 물은 것이다.
어차피 놈들이 '발칸이 아닌 개개인'으로 사고를 쳤다 말했으니까.
해서 칼리안은 잠시 생각을 해보겠다 말하고 앨런을 먼저 돌려보냈다. 마법사들이 스스로 제 무덤을 팠으니 굳이 나서지 않고 지켜 보기만 할 이유가 없었다.
"네, 왕자님. 알겠습니다."
"아니다. 잠깐만."
마음을 바꾼 칼리안이 생긋 웃었다.
그와 동시에, 맞은편에 앉아 조용히 포크를 움직이던 플란츠가 잠시 손을 멈췄다. 그 무릎에 누워있던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가 털을 세우며 낮게 위협하는 소리를 냈다.
둘 모두 식사 자리에 어울리지 않을 미미한 살기를 느낀 탓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동그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새끼코끼리를 향해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그냥 내가 간다고 해."
첫 실수.
일이 일어난 김에 두 번 다시 이런 실수는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을 생각이었다.
자신들이 무엇을 실수한 것인지 알고 있다면 말이다.
* * *
시종장 라울이 올려두고 간 쿠키를 한 입 먹어본 앨런이 흡족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엘린느가 보낸 것입니까?"
보존 마법 덕에 코코넛 특유의 식감이 그대로 살아있는, 담백하고 부드러운 맛이 일품인 쿠키였다. 리베른의 국왕 엘린느의 식사를 담당하는 요리사가 직접 만든 그 쿠키는 리베른에 머물 당시 앨런이 가장 즐겨 먹던 것이기도 했다.
발칸의 일로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르메인이 그런 앨런을 보며 무어라 말을 하려다 그냥 입을 닫았다. 왕궁에 무슨 일이 있든 칼리안과 연관된 일만 아니라면 크게 신경쓰지 않는 앨런임을 상기한 것이다.
그리고 앨런이 저렇게 태평하게 구는 것에는 항상 믿는 구석이 있음을 알았다. 때문에 르메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네."
체이스가 칼리안을 위한 귤을 르메인에게 주었다면, 엘린느는 앨런을 위한 쿠키를 르메인에게 보냈다.
그것을 르메인이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 재밌기도 하고 괜히 미안하기도 해서 앨런이 잠시 웃었다.
"그리 큰 일은 아닙니다. 심려 마시지요."
"왕궁의 정예 병력이 왕궁 밖에서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렸는데 그것을 어떻게 심려하지 않겠나."
"두 왕자님께서 그리 큰 일이 안 되게 잘 해결할 터이니 괜찮을겁니다."
"그런 일을 왕자들에게 맡겨뒀다는 말인가."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전에 한 입을 먹고 남은 반 쪽의 쿠키를 입에 넣었다. 그것을 본 르메인이 입을 열었다.
"군대를 훈련시키는 것과 그들이 벌인 사고의 뒷수습을 하는 것은 다소 차이가 있지 않겠나."
"어려울 것 있겠습니까. 누구보다 잘 하실 겁니다. 지금껏 왕자님들께서 해 온 일이 그것 아닙니까."
쿠키를 입에 넣은 채 이렇게 대꾸한 앨런이 그것을 모두 삼킨 뒤 느긋한 대답을 꺼내놨다.
르메인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무슨 말이 이어질지 알 것 같아서였다. 때문에 거기까지만 말해도 잘 알아들었다 하려는데, 앨런의 입은 닫아지지 않았다.
"전하께서 벌인 일의 뒷감당."
그래.
전부 내 탓이다.
발칸의 마법사가 술 먹고 싸움질을 한 일을 얘기하다 또 한 소리를 들은 르메인이 포기한 듯 긴 숨을 내쉬었다.
* * *
플란츠가 잠시 칼리안을 쳐다봤다.
늦은 아침이라 하기보다는 점심에 가까운 시간에 식사를 시작한 참이었다.
햄을 썰어내던 칼리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제가 그렇게 폭력적이진 않습니다. 혹여 발칸의 마법사들에게 직접 검을 들거나 몽둥이를 꺼내들지는 않을 테니 그렇게 보지 마십시오."
플란츠가 짧은 웃음 소리를 냈다.
칼리안이 거짓말 못하는 것을 플란츠도 안다. 그러니 칼리안이 한 저 말은 진심일 터였다.
자신이 폭력적이지 않다 생각하는 놈이 저지른 짓들을 생각해보던 플란츠는 대충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그냥 무시하고 말지, 뭐 이런 생각이었다.
"같이 가시죠. 헤르츠 경도 볼 겸. 어제 보기로 했었는데 못 봤으니 겸사겸사 같이 얼굴이나 보러 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알았어."
동행은 하겠으나 이번 일에 개입할 생각은 없는 얼굴을 한 플란츠가 이런 대답을 했다. 어차피 아르센에게도 '아우님 모시고 내가 직접 가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던가.
칼리안이 하얀 치즈를 올려 구워낸 납작한 빵을 한 입 삼키는 플란츠를 향해 물었다.
"어떻게 처리했으면 하십니까."
"알아서 해."
관심 없다는 듯, 플란츠는 시선을 내리며 이렇게 대답했다.
"관심 있으신 것 같은데요."
칼리안이 발칸의 마법사들을 어떻게 처벌할 것인지.
관심이 없을 리가 없다. 그럴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던 플란츠가 처음으로 키워내고 있는 무언가가 아니던가. 비록 온전히 플란츠의 것이라 할 수 없을 '대여품' 정도로 여기고 있다지만, 플란츠는 분명히 발칸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랬으니 잠깐 흘린 살기에 걱정하는 빛을 보였겠지.
혹시라도 칼리안이 마법사들에게 크게 화를 낼까봐서.
"마법사들이 술 마시고 사고쳐서 화난 것 아닙니다."
"알아."
"제가 왜 화를 내는지, 알고 계십니까."
칼리안이 씩 웃으며 플란츠를 쳐다봤다.
안다고 하면, 지금까지는 적당히 이해했겠거니 하고 넘어가던 칼리안이 아니던가.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확인을 하려 들고 있었다.
플란츠가 눈꼬리를 찌푸리며 말했다.
"내 아우님이 내 말을 믿지 못하시는 것도 아닐 텐데."
"네. 아닙니다."
"그럼 왜 갑자기 태도가 바꾸시는지."
"태도가 바뀌다니요."
"확인 안했었잖아. 원래."
칼리안이 책장이 팔락이는 듯한 가벼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그랬습니까."
그래서 플란츠가 기분 나빠 하는 것이다.
칼리안이 갑자기 왜 태도를 바꾸었는지, 그것도 알 것 같아서.
칼리안은 옆에 놓인 붉은 토마토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는 여전한 얼굴로 자신을 계속 쳐다보고 있는 플란츠를 향해 말을 이었다.
"형님 그렇게 반만 똑똑하시면 오래 안가 죽습니다."
"······ 매일 짖는 게 일이 됐군."
평소와 같았다면 칼리안은 플란츠의 이런 말도 그냥 웃어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저는 가르쳐드릴겁니다. 전부 다."
잔뜩 날 선 붉은 눈이 플란츠를 직시했다.
"그러니, 입으로만 살겠다 하지 말고, 몰래 배려해주지도 말고, 적당히 돕다 뒤로 빠질 생각 말고, 일부러 관심 없는 척하지 말고."
플란츠의 눈이 고요하게 잠겨들어갔다.
"평생 제 그림자 노릇이나 하면서, 지금처럼 죽은듯이 살 생각도 마시라는 겁니다."
제대로 살 수 있게.
남김없이 전부 다 가르쳐 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