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장. 이해의 초석 (10)
칼리안은 없거나 한 번.
그리고 플란츠는 세 번 쯤 될 것이다.
한 번에 발휘할 수 있는 인내심의 수가 그렇다는 말이다. 물론 항상 똑같지는 않겠지만 대충 따져본다면 그 쯤 될 터였다.
"갑자기 왜 오지 말라 하시는 겁니까?"
하, 하는 토막난 숨이 플란츠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뭐 하나 한 번에 '네' 하는 법이 없는 놈 때문이었다.
말 한번 더럽게 안 듣는 저 미친 마법사를 정말 어떻게 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일단 한 번 참았다.
"너. 마법사."
"부군단장입니다, 부군단장님."
플란츠가 잠깐 눈을 꾹 감았다. 두 번째로 참는다.
참는 김에 상식과 이성을 토대로 생각을 해 본다.
그래. 저 미친 마법사가 하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놈도 발칸의 부군단장이고 플란츠도 발칸의 부군단장이 맞다. 그런데 플란츠는 누구나 익히 다 알고 있는 대로.
왕자다.
속으로 조용히 덧셈을 해 본다.
아르센 저 놈은 그냥 부군단장이다. 플란츠는 부군단장에 더해 왕자다. 플란츠를 지칭하는 말이 더 길다.
이제 반대로 뺄셈을 해 본다.
놈에게서 부군단장을 빼면 쥐뿔도 없다. 플란츠에게서 부군단장을 빼면 왕자가 남는다. 시스파니안의 혈통을 가진 고결한 왕족이다.
"여기가 빌헬름관이던가."
르메인의 집무실에서 나와 아르피아 궁의 계단을 내려오던 플란츠. 그리고 앨런의 집무실에 가려고 아르피아 궁의 계단을 올라가던 아르센. 이 둘이 만났다.
그러므로 이 곳은 분명 아르피아 궁이었다.
빌헬름관이 아니었으니 플란츠는 발칸의 부군단장이기 전에 왕자라는 뜻에서 한 말이었다.
"발칸의 일로 만나자 하신 일을 오지 말라 하실 때에는 부군단장으로서 말씀하신 것 아닙니까."
그리고 아르센은 이렇게 말대꾸를 했다.
칼리안은 발칸의 일원이 아니다. 그냥 아르센을 부리는 왕자였다. 불러서 할 말이 발칸과 관련된 일이었든 아니든 어쨌거나 칼리안은 아르센을 '그냥' 불렀다.
그런데 칼리안이 부른 것을 플란츠가 오지 말라 한다고 저 말 같지도 않은 이유를 들어가며 이렇게 대서는 것이다. 저 미친 마법사가!
아무튼.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해 본다. 세 번 참았다.
플란츠의 악다문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렇게 대단하신 내 아우님께 오늘 심기 불편한 일이 생겼으니 오지 말라고. 내가 그 대단하신 내 아우님 시간 되실 때 잘 모시고 빌헬름관으로 가겠다는데. 대체 왜, 넌."
"부군단장입니다, 부군단장님."
여기서 잠시 짚고 넘어가자면 플란츠는 열 여섯 살이다.
즉, 아르센은 플란츠보다 열 세 살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싸움이 가능한 이유는 둘 중 한 명의 정신연령이 지나치게 높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낮거나. 혹은 둘 다이기 때문이리라.
아무튼 이렇게 플란츠가 가진 세 개의 인내심이 바닥났다. 천천히 머리를 쓸어넘기는 플란츠의 얼굴에 아이같이 예쁜 미소가 그려졌다.
"부군단장, 너. 계속 그렇게 오늘만 짖고 영영 꺼질 것처럼 구는데."
여기까지.
그 대상이 무엇이든 폭발 지점 하나는 기차게 알고 있는 아르센이 급격히 정중해진 말투로 돌아와 입을 열었다.
"일단 알겠습니다. 지금은 제가 계속 외근중이어서 자리에 없을 수 있으니 빌헬름 관에 오셔서 부르시면 바로 찾아뵙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봐도 괜찮겠습니까."
외근이란다.
헤이시아 궁의 잔해를 청소하는 벌을 참 듣기 좋게 포장해 내보인 아르센이 고개 숙여 예를 보였다.
그 꼴을 보다 다시 한 번 눈을 감은 플란츠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고개를 살짝 옆으로 움직였다. 눈 뜨기 전에 빨리 사라지라는 의미였다. 그 모습을 보며 씩 웃은 아르센이 앨런의 집무실을 향해 다시 발을 옮겼다.
"······ 하."
칼리안은 참지 않거나 한 번 쯤 참는다.
그리고 플란츠는 세 번까지는 참는다.
그 참을성이 끝났을 때 칼리안은 칼이나 몽둥이를 꺼낸다. 그리고 플란츠는 눈을 감는다.
레이븐과 아르센, 이 두 마리가 무조건적으로 칼리안을 따르는 이유 중 하나가 그것임을 플란츠도 모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형이 되어서 동생 놈처럼 짖고 물고 할 수는 없지 않겠나. 그래서 플란츠는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인내심을 발휘하며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아르피아 궁 쪽으로 걸어오는 체이스를 보게 되었다. 서로 눈이 마주친 플란츠와 체이스의 발이 동시에 멈췄다.
'하필, 지금.'
플란츠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다시 나왔다.
이미 체르밀로 돌아갔는지 칼리안은 없었다.
아르센을 석찬에 오지 못하도록 한 것이 칼리안 때문인 것은 맞았다. 내일 간다는 체이스를 만나고 온 뒤 플란츠와 아르센을 쌍으로 앞에 두고도 괜찮으면 그야말로 미친놈이니까.
그래서 억지를 부려가며 아르센을 못 오게 했다.
궁까지 부숴가며 밥 챙겨 준 것에 대해 값은 치러야 하지 않겠나. 대충 이런 생각이었다. 값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체이스를 마주쳤다.
플란츠는 체이스가 이미 아르센을 만났음을 몰랐다. 대신 체이스와 아르센이 어떤 악연일지 정도는 대충 눈치를 챘다. 그래서 앨런의 집무실에 이미 누가 있으니 그냥 돌아가라는 정도로는 이야기를 해주려 했다.
때문에 열렸던 입을 플란츠는 도로 꾹 다물었다.
체이스 역시 이런 시점에 플란츠를 보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덕분에 체이스가 미처 가리지 못한 것이 플란츠의 앞에 드러났다.
그것을 봐서 입을 다문 것이었다.
그 보라색 눈에 비춰지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한 플란츠의 눈꼬리가 가늘게 변했다.
* * *
단 하나도 잊히지 않는다.
피 웅덩이를 고스란히 짓밟으며 똑바로 걸어오던 모습. 세상의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듯한 오만한 얼굴. 마주한 이의 목을 틀어쥔 것 같은 낮고 차가운 목소리.
애통하여 온 뼈가 다 부스러지는 기분으로, 절망하여 온 살이 다 저며드는 기분으로, 끝끝내 마지막 남은 피 한방울까지 문드러지는 기분으로 마주했던 광경을 똑똑히 기억한다.
체이스는 그를 보자마자 깨달았다.
- 미쳐버린 왕.
모두가 그를 향해 이렇게 말했던 이유를 곧바로 알았다.
그 눈.
마치 사방으로 금이 간 유리구슬 같았다. 어디든 살짝만 건드려도 산산이 조각나 깨어질 것 같은 연두색의 유리구슬.
이제 막 생명을 머금은 풀잎 같은 색의 눈에 어떻게 아무런 빛도 담겨있지 않을까.
그 비통한 가운데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었다.
우습게도.
* * *
스치듯 지나친 눈빛.
아르센의 창이 심장을 꿰뚫으며 끝난 마지막 기억. 그 직전에 마주보았던 플란츠의 눈. 그 기억이 채 막을 새도 없이 머릿속을 헤집고 튀어 나왔다.
지금 자신을 보고 있는 이의 눈을 보며 문득 치미는 기억을 떠올려버린 체이스가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말했다.
"잠시만."
지금껏 의연하게 플란츠를 대했으면서도 이렇게 갑자기 동요했다. 과거의 환시가 앞에 서 있는 플란츠와 겹쳐졌다.
칼리안과 오랜 이야기를 나눈 뒤였기 때문이다.
칼리안이 걸어갈 길을 염려하느라 베른이 지키려던 것을 떠올리느라 베른이 채 지키지 못하고 떠난 이후의 기억이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
만나면 항상 말을 많이 하거나 많이 걷게 만들던 체이스의 이런 모습에 플란츠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물론 보지는 못하겠지만.
잠시 뒤 손을 내린 체이스가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를 건넸다.
"이렇게 또 보는군요. 플란츠 왕자."
"······ 왕자를 본 게 아닌데."
인사에 대한 화답이 아니었다.
정확한 지적에 어느새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온 체이스가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플란츠의 눈치가 빠르고 생각이 많은 것도 이미 알았으니 이런 말을 하는 것에 놀라지는 않았다.
"오늘 조금 시끄러웠어서. 괜찮습니다."
플란츠가 낮은 한숨을 쉬었다.
괜찮은지 아닌지는 플란츠가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괜찮다 하니 그런가보다 하는 얼굴을 해 보일 수밖에.
"내 아우님을 만나고 있는 줄 알았더니."
"만났습니다. 다시 돌아갔고."
체르밀 궁으로.
그리고 칼리안으로.
돌아간 것이 무엇인지 알아들었는지는 몰라도 이번에도 플란츠는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체르밀 궁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마나실 백작은 이따 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체이스가 내일 출발하는 것은 안다.
르메인과의 조찬이 있겠지만 르메인이 굳이 왕자들을 동석시키지는 않을 터였다. 이 어마어마한 집안의 혈기왕성한 세 아들이 전부 다 사고를 쳐서 전부 다 근신 중이 아니던가.
그러니 플란츠 역시 오늘이 지나면 당분간 체이스와 이야기 할 일이 없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앨런에 대한 내용만 전한 채 돌아가려 한 것은 묻고 싶은 말이 생길까봐서였다.
칼리안이 참으로 오지랖 넓은 이해심을 가졌다면, 플란츠는 참으로 오지랖 넓은 죄책감을 가졌으니까.
"의외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플란츠의 발을 놀림인지 놀라움인지 모를 말이 붙들어 잡았다. 고개를 돌린 플란츠가 체이스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칼리안 왕자는 플란츠 왕자가 나를 찾아왔었던 일을 모르더군요."
젠장.
호칭이 또 바뀌었다.
한여름 카이리스의 날씨만큼 변덕을 부리는 저 호칭에 플란츠는 또 한 번 인상을 찌푸렸다.
"플란츠 왕자가 칼리안 왕자를 그렇게까지 해 가며 도우려 한 것도 의외였고 칼리안 왕자가 그 일을 모르는 것도 의외였고."
"······ 그다지."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다. 굳이 알려가며 움직일 필요도 못 느꼈다. 어차피 서로 모르는 일이 한 둘도 아닌데 의외일 것 까지야.
이런 의미를 담은 세 글자의 대답을 내 놓은 플란츠가 다시 입을 열었다. 체이스는 칼리안이 아니었으니 아마 제대로 못알아 들었을 것이라 생각한 까닭이다.
"별로."
그래서 이렇게 덧붙여줬다. 별로 대단할 것 없으니 신경쓰지 말라고.
체이스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니 대충 알아들은 모양이다. 그래서 플란츠는 별다른 인사 없이 체르밀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런데."
체이스의 말이 플란츠의 걸음을 또 붙들었다.
체이스의 기억 속에서는 그 어떤 것으로도 붙들지 못할 것 같던 무감정한 걸음이 너무 쉽게 돌아선다.
"또, 뭐."
귀찮아하는 기색이 가득하지만 사려 깊은 목소리.
살짝 웃은 체이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이런 말 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어차피 이 부분은······ 칼리안 왕자가 모르는 일이라서."
이렇게 말한 체이스가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얼굴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다시 입을 열어 천천히 말을 하기 시작했다.
"지난번에 나에게 준비를 하라 했을 때. 당신이 그런 일을 벌일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던데."
시선을 돌려 플란츠의 눈을 본 체이스가 말했다.
"아마 맞을 겁니다. 내가 보기에도 그랬으니까."
내가 보기에도 그랬다.
현재의 일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체이스가 지금 베른이 겪었던 그 시간에서 플란츠와 만난 적이 있었다 말하고 있음을 알아들었다.
플란츠의 고개가 살짝 올라갔다.
관심을 보이지 않거나 혹은 듣기 싫다는 듯한 반응을 보여도 체이스가 그에 대해 실망할 수는 없을 일이었다. 그런데 반대로 플란츠는 지금껏 보여준 모습 중 가장 집중하는 모습으로 체이스를 쳐다봤다.
"이유가 있으리라고, 그렇게 느꼈습니다. 그 이유를 알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던 탓에 억울한 마음이 들었었고."
아쉽게도 그 이상 생각을 이어나갈 수는 없었다.
고갯짓.
연두색의 눈이 감기며 내저어진 고갯짓 한 번.
그와 함께 걸어 나온 발칸의 군단장.
조용히 건네진 미안하다는 말.
그것이 마지막이었으니까.
"그런 말을 왜 해주는데."
"플란츠 왕자의 행동이 돕는 것인지 갚는 것인지 모르겠어서 해주는 말입니다."
칼리안을 돕기 위해 움직이는지 아니면 칼리안에게 진 빚을 갚으려는 것인지.
"갚지 말고 도와달라고."
플란츠가 잠시 눈을 감았다.
"갚는 것처럼 보였나."
"글쎄요. 돕기로 해서인지 갚기로 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제멋대로 독을 만들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은 듭니다. 아무래도 스스로에 대한 막연한 믿음이 구명줄이 되지 못하는 듯 보이기도 하고."
그 날의 플란츠를 입에 담는 것이 플란츠에게 약이 될지 혹은 독이 될지 체이스는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알려주는 것은 만약 이 이야기가 플란츠에게 독이 된다 하더라도 지금에 비해 특별히 달라질 것이 없을 것 같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어떤 이유가 있었다 한들 그 날의 플란츠는 베른에게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플란츠가 스스로를 이해할 이유는 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알려주는 겁니다."
체이스의 이야기는 거기까지였다.
플란츠는 듣기만 했고 체이스는 그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플란츠가 조용히 눈을 떴다.
"그래······ 새겨 듣지."
체이스가 이 말을 왜 꺼냈는지 플란츠도 모르지 않았다.
때문에 플란츠는 어느새 평소대로 돌아온 얼굴로 이렇게만 말했다. 체이스는 그런 플란츠를 향해 고개만 한 번 끄덕여 보인 뒤 루비아 관 쪽으로 걸어갔다. 앨런은 잠시 뒤에 만나러 오기로 한 채였다.
만나서 반가웠다거나 다음에 또 보자거나.
그런 말을 나눌 만한 관계는 아니었으니까.
그런 인사는 먼 훗날 언젠가 하면 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