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39화 (140/527)

제24장. 이해의 초석 (9)

짙은 갈색 혹은 옅은 검은색.

무엇이라 해도 좋을 커피에서는 쓴 맛이 났다.

나중에야 그 맛을 즐기게 됐었다지만 어린 시절 처음으로 커피를 마셨을 때에는 향기와 다른 그 쓴 맛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단 향이 나면 단 맛이 나고 쓴 향이 나면 쓴 맛이 나야지, 그렇게 고소한 향을 내면서 시큼하고 씁쓸한 맛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 이미 충분히 하였으니.

아이러니하게도 아르센 역시 그 날의 베른에게 비슷한 말을 했다. 의미가 같았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을 체이스로부터 다시 듣게 되었다.

체이스의 말이 코로 맡으면 향기롭고 입에 머금으면 쓰기만 한 커피 같이 느껴진 까닭에, 칼리안이 조용히 웃었다.

"······ 감사합니다."

체이스가 무엇을 위해 그리 말했는지 모르는 것이 아니다. 알기 때문에 담담하게 대답했다. 알기 때문에 다른 말 없이 체이스의 뜻을 받았다.

이미 충분하다.

귀로 듣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한 말.

마음에 담는 순간 심장을 조각내는 말.

어떻게 충분할 수 있겠는가.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하였든 오로지 비극만 남기고 끝나버린 것을. 참극인 것을.

그것을 어찌 충분하다 하겠는가.

칼리안은 이미 잊혀진 이가 홀로 즐기던 커피를 한 모금 더 삼켜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봤다. 속절 없이 올랐다 떨어지는 분수를 쳐다보던 칼리안이 시선을 그대로 둔 채 입을 열었다.

"혹시 배 안고프십니까?"

떠올려 보니 아침도 안 먹었다.

그러므로 지금 이렇게나 속이 쓰린 것은 방금 들은 말 때문이 아니라 빈 속에 마신 커피 때문일 것이라고. 짧은 머리가 유난히 허전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냥 속이 비어서 그런 것이라고.

체이스를 언제 다시 마주할 수 있을지 모르니 어울리지도 않게 감상적인 사람인 척 하지 말고 밥이나 먹자고. 그렇게 생각했다.

여전히 뜬금없이 건네오는 말에 체이스가 웃었다.

* * *

르메인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알겠다."

시종을 먼저 보내지도 않고 갑작스레 찾아와서는 참으로 담백하게 본론만 꺼내놓은 플란츠를 향해서였다.

예상한대로, 르메인은 왕실 내 기사단을 플란츠의 손 아래 두는 것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다.

"헌데······."

다만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던 르메인이 이렇게 다시 입을 열었다. 에반 브리센 후작이 두 기사단의 통솔권을 흔쾌히 내어주었을 리 없다 여긴 까닭이었다.

- 똑똑

그런데 이렇게 집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르메인의 말을 막았다.

시종장 라울일 터였다. 플란츠와 대화를 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문을 두드렸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뜻이리라. 때문에 르메인은 플란츠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눈길을 준 뒤 라울을 들여보냈다.

라울의 손에는 쪽지 하나가 들려 있었다. 플란츠를 앞에 두고 말로 전하기 어려운 소식이었던 까닭이다.

잠시 라울이 전해 준 것을 본 르메인이 고개를 돌려 플란츠를 쳐다봤다.

"칼리안이 루비아 관에 걸음했다 하는구나. 아직 그리해도 될 날이 아니거늘."

그 목소리와 표정에 참으로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르메인이 최선을 다해 좋게 풀어 말했으나 플란츠의 눈에는 '이 망할 막내놈이 또 도망갔단다' 정도의 말로 바뀌어 보였다. 때문에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올라갔다.

아침에 예상했던대로 칼리안과 란델이 만났음을 안다. 장미 정원에서 나오는 란델과 정원에 홀로 남아 우두커니 서 있던 칼리안의 모습도 보았다.

그러니 두 번 다시 안 만날 것처럼 굴던 체이스를 칼리안이 찾아갔다면 이유가 있으리라.

"검술에 막히는 것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때문에 플란츠는 이렇게 말했다.

찾아간 이유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르메인이 칼리안과 체이스를 연관짓기보다는 그 기사에게 용건이 있다 생각하는 것이 나을 테니까.

그것을 굳이 왜 오늘 찾아갔는지 궁금해하면 어떻게 말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잠시 플란츠의 말을 곱씹어 본 르메인이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그렇구나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그래. 내일 떠난다는 말을 어디서 들었나 보구나."

슬레이만을 계속 보아왔기 때문에 칼잡는 놈들의 성향을 얼추 아는 르메인이었다.

세리에를 만나 결혼한 뒤 그래도 꽤 머리를 굴리게 된 슬레이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련이나 하겠다며 타국의 기사를 발칸의 훈련장에 데려가지 않았던가. 발칸이 얼마나 중요한 이들인지 모를 리 없으면서도.

그래서 칼리안이 검술에 막히는 것이 있어 테일란을 찾아갔다는 것에도 큰 의심을 하지 않았다. 물론 그럴만 하다 여긴 것이지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왜 그리 제멋대로 구는지. 이번에는 제대로 혼을 내야 겠구나."

"세크리티아의 왕세자가 내일 돌아가기로 했습니까."

플란츠는 그런 르메인의 말을 못 들은 척 물었다. 말을 돌리려 한 것임을 눈치채지 못한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어제 그리 전해오더구나."

그런데 이렇게 답하는 르메인은 조금 당황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플란츠가 먼저 질문을 한 것이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탓이다.

르메인이 다음 말을 바로 꺼내들지 못한 탓에 집무실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돌았다. 서둘러 원래 나누던 이야기를 떠올린 르메인은 어느새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채 입을 열었다.

"그래. 조금 전에 내가 하고자 했던 말은······ 브리센 후작이 그것을 순순히 내어줬을 리는 없을 터인데. 어떻게 그것을 받게 되었는지 알고싶구나."

플란츠의 얼굴에 아주 잠시 의외라는 표정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르메인은 보지 못했지만 그것은 분명 '놀라움'이었다. 생각은 많지만 눈치가 없는 소 같은 르메인이 꽤 예리한 것을 짚어냈으니까.

플란츠는 고민 없이 대답했다.

"맹세의 인입니다. 걱정하실 만한 계약은 아니었습니다."

사실을 감추지 않았다.

아버지인 르메인에게 숨기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이유보다는 아직도 반성할 일이 많이 있음을 되새겨 보라는 의미로 한 말이었다. 이미 매일매일을 반성하며 사는 것 같기는 했지만 플란츠의 눈으로 보았을 때에는 여전히 멀었으니까.

플란츠의 대답에 르메인의 표정이 식었다. 손을 잠시 말아 쥐고는 긴 숨을 내쉬었다.

한 번 맺은 맹세의 계약은 깰 수 없다. 그렇다 해서 무턱대고 심장을 건 아들을 나무랄 수도 없었다. 아무것도 걸 것이 없던 칼리안이 제 목숨을 걸고 독차를 마신 것처럼 플란츠도 같은 선택을 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뭔가를 얻어내려 제 것을 걸어야 하는 그런 상황 말이다.

"그래. 가진 것이 목숨 뿐이니 목숨을 걸었을테지······ 내 탓이 크구나."

미안하다는 말을 꺼낼까 했는데 이번에도 역시 그 말은 못했다. 자존심 때문이 아니라 미안하다 하기가 미안해서 못했다.

살짝 눈을 감았다 뜬 플란츠가 작게 말했다.

"하셔도 됩니다. 사과."

그리고 플란츠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목소리가 너무 담담해서 르메인은 해야 할 말을 잃어버렸다.

플란츠가 어느새 자랐다. 너무 많이 자랐다.

예전에는 허리춤에 왔었던 손녀가 지금은 더 많이 자랐을 것이라던 앨런의 말이 생각났다.

더 어릴 적의 플란츠가 어땠는지 상상이 되지 않아서 르메인은 사과를 할 수가 없었다.

"고맙구나."

그래서 이렇게밖에 말하지 못했다.

그것이 사과임을 불쑥 자란 플란츠는 알아들었다.

* * *

세크리티아에서는 주방장이 음식을 데워 왔었는데.

이 곳에서는 그럴 일이 없을 것 같았지만 칼리안과 체이스는 그런 것에 아쉬움을 느끼지 않았다. 음식이 전부 식을 만큼 대화가 오고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대화가 많지 않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동안 말없이 포크와 나이프를 놀리던 칼리안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즉위식, 미리 축하드립니다."

체이스의 손이 잠시 멈췄다. 칼리안은 데블란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제가 직접 가서 축하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한 나라의 왕위가 계승되는 자리였다.

때문에 타국의 왕족이 축하사절단과 함께 방문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다. 다만 체이스가 즉위했을 때에는 왕족이 오지 않았었다. 텐실에서 하나 뿐인 왕세자를 세크리티아에 보낼 리 만무했고 리베른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카이리스는 왕자가 둘이었다 하지만 둘 모두 방문하지 않았다. 세자위가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그것이 누구든 굳이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매년 돌아오는 르메인의 생일을 축하한다며 체이스가 이 곳에 온 행동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그 데블란을 어떻게 설득했는지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알아요. 고맙습니다."

체이스는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접시 위에 올려둔 음식에 시선을 둔 채 잠시 가만히 있었다. 그것을 느낀 칼리안이 체이스를 쳐다봤다.

체이스의 말은 그 후로 한참 뒤에 나왔다.

"이 곳이 많이 변해가고 있음을 압니다. 앞으로는 더더욱 그럴 테고."

그것이 전부 칼리안의 손 끝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제 할 말만 꺼내놓던 플란츠와 칼리안에 대한 굳은 신의를 보였던 아르센. 노력하기 시작한 르메인. 그리고 바람결에 흔들리는 장미 사이에 서서 자신을 응시하던 란델까지.

그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떠올려 본 체이스가 말을 이었다.

"혹여 모두를 이해하기 위해 오히려 다칠까. 그것이 걱정되어서."

발칸에 속한 저 마법사 한 명 한 명이 세크리티아를 태워낸 불길이다. 그러니 플란츠가 아니더라도 아르센이 아니더라도.

결국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이 베른에게는 칼날이다.

그들을 다 끌어안느라 생긴 상처가 얼마나 될는지.

얼마나 덧나고 얼마나 곪았을지. 얼마나 아플지. 가늠하는 것조차 어려워서.

칼리안은 차분한 빛의 붉은 눈으로 뒷말을 잇지 못하는 체이스를 보고 있었다. 그렇게 또 한동안의 시간이 지난 뒤 조용히 입을 열었다.

"······ 히나."

히나.

그 이름을 입에 올렸다.

"키리에의 동생 이름이 히나입니다. 귀가 길었는데 잘랐고 말을 못하지만 수어로 혼을 내고 새도 좋아하고 강아지도 좋아하고. 고양이도 잘 돌보는데 특히 고양이 목줄에 글씨를 잘 씁니다. 아이스크림을 잘 먹고. 그리고······ 잘 웃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두서없는 말을 시작했다.

그조차도 아까워서 체이스는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 귀를 기울였다.

"······ 살아있어요."

죽어가는 몸으로 무모하고 위험할 것을 알면서도 키리에를 찾았다. 히나가 함께 있었다.

살아있었다.

그것이 칼리안에게는 빛이었다. 구원이자 희망이었다. 치유였다.

"그래서 괜찮습니다."

아프지 않은 것이 아니라 괜찮다니.

더는 연보랏빛도 아니고 또 돌아있지도 않은 붉은 눈을 본 체이스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다는 말은 괜찮아서 하는 말이 아니다.

정말 괜찮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켜낸 그 '빛'을 보며 잘 버티고 있다는 말일 뿐이니.

"내가 하나만 부탁해도 될까요, 칼리안 왕자."

칼리안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혹여 더 이상 지킬 것이 없어지게 되면. 그 때는 스스로를 지켰으면 하는데. 과한 부탁일까요."

베른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서 하는 말이었다.

오로지 지키는 것만 해왔기 때문에 할 줄 아는 것도 생의 목적도 무언가를 지키는 것 외에는 없으리라고. 그러니 더 이상 지킬 것이 없어지면 멈추지 않던 두 발이 향할 곳을 잃게 되리라고. 베른은 그런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이번에는 붉은 눈이 보라색 눈을 응시했다. 베른의 것보다 훨씬 더 부드러운 눈매를 가진 얼굴로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과연 제가 지켜야 할 것이 없어질 날이 올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살고 싶다 하고 살겠다 하면서 정작 살 생각은 하나도 없는 얼굴로 풀만 처먹는 놈을 계속 살려놓기로 했으니까.

그런 놈이 그런 짓을 한 이유도 알아야 하고, 그러려면 맨날 애꿎은 장미만 들여다보고 있는 속 모를 놈도 살려놔야 하니까. 그렇게 해서 과거의 형제든 지금의 형제든 전부 다 지켜내야 하니까.

"사실 제가 체이스 왕세자님께 말씀드리지 못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말하지 못한 것이 하나 뿐이겠나 싶지만, 아무튼.

"커피, 싫어합니다. 콩 볶은 냄새가 아니라 르니에리 향기가 나는 것 같아서."

또 언제 보게 될지 모를 체이스의 두 눈을 머릿속에 꾹꾹 담은 칼리안이 씩 웃으며 말했다.

"커피 좋아하던 베른 말고, 커피 싫어하는 칼리안은 지킬 것이 없어져도 잘 걸어갈 겁니다."

분수대의 물 줄기가 부서져 흩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언젠가의 체이스는 그것이 소슬하다 느꼈으나 이제는 더 할 나위 없이 청량하다. 튀어오른 물방울에 얽힌 햇빛이 무지개를 띄우는 것을 깨닫는다.

체이스는 한결 가벼워진 얼굴로 베른이 아닌 칼리안을 향해 웃었다.

"다음에는 다른 것을 대접하겠습니다. 칼리안 왕자는 무엇을 좋아합니까."

"민트차요. 그러니 다음에 볼 땐 민트차 주세요."

또, 잊어버리지 마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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