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장. 이해의 초석 (8)
주변의 시종들과 시녀들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흐트러짐 없으나 빠른 걸음으로 루비아의 별관에 들어선 칼리안이 잠시 발을 멈췄다.
한 걸음을 디딜 때마다 크기를 늘려가는 사념 때문에 제자리에 선 칼리안이 잠시 이마를 짚었다. 루비아 본관에서 기다리도록 얀을 떼어둔 것이 다행이다.
발을 놀리려니 머리가 빙글거리고 머리를 움직이려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끌어안고 있던 짐은 가문비나무 앞에 전부 내려뒀다.
그 날 내려놓은 짐의 무게만큼 숨이 찼다.
너무 미안해서.
'정신차리자.'
바로 전날 옛 칼리안에게 '나도 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마치 '어디 한번 살아봐라' 라는 대답을 전하듯 이렇게 또 하나의 숙제가 쌓였다.
란델이 지닌 붉은 빛의 힘. 그것을 알아내야 했다. 란델의 입을 열어 퍼즐 조각을 얻어 내야 했다. 란델의 입을 열려면 속박을 풀어야 했다. 머릿속이 꼬이고 꼬여서 풀어지질 않았다. 그래서 이 곳에 왔다. 체이스에게로.
"하."
만나야지.
어디 한번 살아보라 하는데, 살아야 하지 않겠나.
이마에 가져갔던 손을 떼고 다시 발을 옮겼다. 더 멈추지 않고 그 길로 체이스가 머문다 했던 곳까지 왔다.
문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기사 테일란은 아마 방 안에 있거나 혹은 없는 모양이었다.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한 칼리안이 하얗게 변해 있던 손을 들었다. 칼리안의 몸을 얻은 뒤 단 한번도 해본 적 없는 '노크'라는 것을 하기 위해서였다.
"들어오세요."
그런데 칼리안의 손 끝이 문에 닿기도 전에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칼리안 왕자."
이번에도 기다리고 있었나보다.
허락을 구할 필요가 없었음에 실소한 칼리안이 짧은 숨과 함께 문을 열었다.
작은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닫혔다.
기사 테일란은 안에 없었다. 체이스만 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호위를 물리고 계시면 어떡합니까."
이 곳에 오는 동안 마주친 것은 오로지 카이리스 왕궁의 사람들 뿐이었다. 이 별관에 머무는 것이 체이스 외에는 없다지만 호위 하나 없이 혼자 있다니 너무 위험하지 않은가.
창가에 서 있던 체이스가 담담하게 웃었다. 아마 저 창문으로 칼리안이 이 곳에 오고 있는 것을 보았던 듯 했다.
"괜찮습니다."
이렇게 대답한 체이스의 손이 의자를 가리켜보였다. 그제야 왕세자에 대한 예도 생략한 채 먼저 말을 걸었음을 깨달은 칼리안이 잠시 발을 멈칫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알고 있다는 듯 체이스가 다시 웃으며 말했다.
"그것도 괜찮으니 앉아요."
칼리안은 죄송하다는 말 대신 고개만 살짝 숙여보인 뒤 자리로 가 앉았다. 그 뒷모습을 잠깐 쳐다보던 체이스가 손수 내린 커피 두 잔을 들고 와 테이블에 내려놨다.
커피.
칼리안의 입가에 웃음이 맴돌았다.
베른은 커피를 즐겼다. 체이스는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칼리안은 꺼려했다.
그래서 웃음이 난다.
"감사합니다."
다만 다른 말 없이 이렇게만 이야기 한 칼리안은 이 곳에 있는 누구도 즐기지 않는 향 좋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체이스가 입을 열었다.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았을텐데 커피를 마셔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그것 외에는 생각나는 것이 없었습니다."
베른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굳이 감추지 않는다. 차라리 그 편이 칼리안에게도 편하리라는 것을 아는 까닭이다.
칼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큰 이상은 없었고 지금은 다 나았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한동안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귤, 잘 먹었습니다."
습격을 당했을 때 도움을 준 것에 대해서는 감사해하지 않았다. 카이리스에서 세크리티아 세작을 마음대로 부리고 테일란을 칼리안에게 보내고. 그런 도움을 감사해하면 다음에 또 무모하게 굴까봐.
그래서 어지간한 사람은 입에도 대지 못할 그 신 귤에 대해서만 감사의 말을 전했다.
체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입 밖에 나온 말이든 아니든 다 알아들었다는 뜻이다.
'그러고보니······ 신 것 싫어할텐데.'
이제야 생각이 났다.
그날 플란츠가 귤을 먹었었는데, 하고.
속으로 잠시 웃은 칼리안이 체이스를 보며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것이 있어 왔습니다."
"네. 얘기해요."
곧 칼리안이 란델과 관련된 이야기를 입에 올렸다. 조금 전 정원에서 만나 나눈 이야기까지 전부 다 체이스의 앞에 풀어냈다.
"제가 텐실에 대해 아는 것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혹시 체이스 왕세자께서 기억을 하고 계시는 것이 있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묵묵히 칼리안의 말을 모두 들은 체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조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내용이 없습니다. 과거에도 있었는지 혹은 미래가 바뀐 것인지도 알아내지 못했고."
그것은 칼리안 역시 짐작하는 바였다.
플란츠나 아르센의 기억이 되살아나지 않는 한 아무리 체이스라 하더라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만약 새들을 통해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면 과거에 이미 알았어야 하니까.
"다만 텐실이라면."
이렇게 말한 체이스가 잠시 기억을 되짚었다.
직접 겪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관련된 내용들을 떠올려보는 것에 시간이 필요했다.
"란델 왕자가 어떻게 그 곳의 왕이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되었는지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마차 축이 부러진 사고 말씀이시군요."
그 말에 체이스가 잠시 웃었다.
앨런에게 이야기를 전해달라 했는데 아마 아직 듣지 못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만 체이스는 앨런이 중간에서 묶어 둔 말이 있었음을 알리지 않았다. 앨런이 아직 칼리안을 만나지 못했거나 말을 전하지 않은 다른 이유가 있었으리라 여긴 것이다.
곧 체이스가 설명을 시작했다.
"사고가 아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달칵.
테이블의 커피를 다시 집어들려던 칼리안이 잔을 도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른 말 없이 눈을 내리떴다. 여전한 버릇이 튀어나오자 체이스가 눈으로만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이다.
체이스가 이 말을 전하고자 한 이유는 간단했다.
란델이 그저 숨죽여 지내다 텐실로 도망친 것이 아니니 주의하라는 뜻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혹시 그 일이 언제 있었는지 알고 계십니까."
체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이번에도 대답은 조금 느리게 나왔다.
"내년 9월입니다.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플란츠가 왕세자위에 오르는 것은 내년 11월, 18세의 생일을 지낸 뒤였다. 그리고 6년 후 르메인이 의문사하며 이 나라의 왕이 되었다.
일련의 상황을 가늠해보던 칼리안이 말했다.
"란델 형님이 있었다 해도 세자위는 당연히 플란츠 형님에게 갔을 겁니다. 실리케가 왕궁 안의 병력을, 브리센 후작이 왕궁 밖의 병력을 붙들고 있었고, 상권은 레넌이 틀어쥔 데다 주요 변경백 세력은 그레이를 중심으로 단합되어 있었으니까요."
특히 지금 그레이가 수비하고 있는 곳은 텐실과의 접경지역이다. 그말은 곧 란델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텐실에서 곧바로 군사를 보낼 수 없다는 뜻과 같았다. 그레이가 막을 테니까.
그랬으니 란델은 절대로 카이리스의 왕세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 란델 형님께서는. 텐실의 왕이 되고 싶었거나, 맹세의 인을 나누었다는 모종의 인물이 원했거나. 아니면······."
"죽고 싶지 않았거나."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다 입을 열었다.
"란델 형님은 제 앞에서 왕이 되고자 하는 뜻을 비춘 적이 있습니다."
두 칸, 세 칸의 계단으로 그 뜻을 보였다. 그러니 왕이 될 생각이 아주 없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그것은 '저를 손에 넣을 것'을 염두에 둔 지금의 란델 형님에게 주어진 선택지입니다. 아마도 과거의 란델 형님은 왕이 될 생각을 진작에 접었을 가능성이 높아요. 브리센이 있는 한 절대 이루지 못했을 테니 말입니다."
"네. 칼리안 왕자의 생각이 맞으리라 여깁니다."
"란델 형님의 즉위 이후 카이리스와 텐실의 관계가 그리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때문에 아이샤 전 왕비가 어떻게 죽었는지 몰랐으리라 생각했고요. 그런데 제 예상과 달리 란델 형님은 아이샤 전왕비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아마 과거에서도 알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
란델은 이미 내용을 알고 있었고 그 일에 칼리안의 변화가 영향을 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 과거의 란델 역시 실리케가 아이샤를 해쳤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란델 형님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맹세의 인을 나눌 만큼 감정적입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지독할 만큼 이성적이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이 아이샤 전왕비가 죽은 원인을 알면서도 카이리스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이 단순하게 보여지질 않습니다."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마치 의견을 구하는 것처럼 잠시 체이스를 쳐다봤다. 하지만 체이스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칼리안이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텐실의 왕이 된다 하더라도 카이리스에 복수할 수 없음을 아는 란델 형님이 굳이 그 곳까지 가서 왕위를 잇기를 원했을까. 그것이 어떤 나라든 상관 없이 '왕'이면 족하다 여겼을까. 그런 생각을 해본 결과 제가 낸 답은 '아니다' 였습니다. 란델 형님은 왕위 때문에 직접 그런 일을 계획할 사람은 아닙니다.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하고요."
물론 란델에 대한 예상이 한 번 빗나가기는 했지만 이번에도 틀리지는 않으리라 여겼다.
차라리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카이리스에 남아서 기회를 엿보다 플란츠의 심장을 노릴지언정 힘 없는 나라의 왕위를 탐내서 텐실의 국왕을 해칠 방법을 계획할 사람은 아니었다. 만약 계획한다 하더라도 그 일을 텐실까지 가서 직접 수행해 줄 만한 인사가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칼리안이 잠시 놓친 것이 있다는 얼굴로 체이스를 쳐다봤다.
"그런데 왜 사고가 아닐 것이라 말씀하신겁니까."
"그 때 그 일을 알아보던 새들이 전부 죽었습니다."
당연히 베른은 모르는 일이다.
텐실에 대한 정보는 체이스가 관리했으니까.
한동안 말 없이 앉아있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맹세의 인을 파기하려면 계약 당사자가 사라져야 합니다."
"네. 나도 알고 있습니다."
실리케가 죽는 순간 심장에 묶인 속박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것만이 맹세의 인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니 칼리안이 선택해야 할 방법은 둘이다.
"맹세의 인과 관련된 놈들을 찾아서 다 죽여버리거나 란델 형님에게 비밀 듣기를 포기하거나, 결국은 둘 중 하나를 해야 되겠네요."
"지금 텐실을 이끄는 국왕과 반대되는 세력이 있을 겁니다. 란델 왕자가 카이리스에 복수를 할 수 있도록 돕겠다며 회유한 뒤 텐실의 왕이 된 란델 왕자를 수족처럼 부리려는 이가 있을 테니까요. 마치 카이리스의 브리센 같은 이들."
이렇게 말한 체이스가 소파 옆의 협탁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두꺼운 종이 뭉치를 꺼내 칼리안에게 내밀었다.
화려하지 않은, 아주 부드러운 느낌의 글씨체.
체이스가 직접 쓴 것이었다.
"텐실은 카이리스와 달라서 세력이 꽤 여러갈래로 나뉘어 있습니다. 필요하면 참고하세요."
종이를 잠시 넘겨보던 칼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은 바로 란델이 즉위한 이후 하나씩 사라진 귀족 세력의 정보였다.
칼리안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 가지치기."
혈혈단신으로 텐실에 망명해 곧바로 즉위한 란델. 그런 란델이 귀족 세력을 숙청했다.
"누군가 란델 형님을 도왔다는 말이군요."
"맹세의 인을 나눈 대상이 도왔거나, 맹세의 인을 나눈 대상을 죽이기 위해 란델이 새로운 세력과 손을 잡았거나. 그것도 둘 중 하나일 겁니다."
새로 맞춰 봐야 할 퍼즐을 받은 얼굴로 칼리안이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런 칼리안을 가만히 쳐다보던 체이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일 돌아갈 겁니다."
확인하고자 했던 것을 알았고 도울 수 있을 것을 도왔다.
이 곳에 더 있을 이유가 없었다.
물론 그리 할 수도 없는 일이고.
자연스러운 듯 아닌 듯 갑작스럽게 꺼내진 체이스의 말에 칼리안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런 칼리안을 보며 체이스가 다시 말했다.
"내년 초에 마법사들을 모을까 합니다. 나도."
갑자기 내일 당장 카이리스를 떠나겠다는 말도 놀라웠지만 지금의 말은 더더욱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칼리안이 아는 체이스라면 그러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체이스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누가 찾아와서는 한 짐 더 얹어놓지 말라며 한참 동안 잔소리를 하고 갔는데. 칼리안 왕자는 모르는 일이었나 보군요."
칼리안이 아, 하는 소리를 냈다.
플란츠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한참 동안' 잔소리를 하는 플란츠가 잠시 상상이 되지 않아서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그런 칼리안에게 체이스는 나지막한 목소리를 냈다.
"칼리안 왕자. 혹여 같은 일이 되풀이됐을 때, 세크리티아는 지켜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칼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하였으니."
그것은, 형이자 왕이었던 이가 내려준 베른에 대한 면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