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37화 (138/527)

제24장. 이해의 초석 (7)

서류 너머로 들리던 르메인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독이 든 차 때문에 죽어가는 몸을 추스르며 앨런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왕자의 정복을 처음 입은 날이기도 했다.

플란츠를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이지 않기 위해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심장이 뜯겨나가는 기분을 참아내며 버티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 르메인과 플란츠를 살려놓으려고 부단히도 애를 쓰게 되리라는 것을 그 때의 칼리안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때문에 한 번 이해를 해보려는 것이었다. 란델도.

지금은 상상할 수 없을 지 몰라도 나중에는 란델을 살려놓으려 애를 쓰게 될까봐서.

'내가 이러는 것을 아시면 체이스 왕세자님께서 꽤 놀라실 것 같은데.'

문득 떠오른 이런 생각에 칼리안이 쓰게 웃었다.

말보다 검이 빨랐던 베른이 아니던가.

물론 그 때와 지금의 상황이 판이하게 다르다지만 이렇게까지 오지랖을 부리게 될 줄이야.

"조금 걱정했는데 그래도 다행입니다."

칼리안이 이렇게 말을 건넸다.

스치듯 지나간 분노의 감정을 어느새 사그라뜨린 푸른 눈을 향해서였다.

"장미를 건드렸을 때조차 란델 형님의 표정이 바뀌지 않을까봐 걱정했는데, 그래도 아직은 아끼시는 것이 남은 듯하니."

칼리안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잘려 떨어진 장미를 가리키고 있었다.

굳이 이렇게 고약하게 구는 것은 분노하는 것이 가장 쉽기 때문이었다. 감춰 둔 감정 중에서 가장 먼저 드러나는 것이 분노임을 베른의 삶을 겪으면서 배우지 않았던가.

르메인을 만나고 온 뒤 왕자의 정복도 벗지 않은 채로 장미 나무를 손질하던 란델이다. 갈피를 잡지 못할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가장 먼저 찾은 것이 장미라면 그것을 건드려 란델의 속내를 끄집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혹시 그것을 빼앗으면 화를 내지 않을까.

화를 내면 말이 통하지 않을까, 하고.

"이유가 무엇이냐."

"왜 장미를 꺾었는지를 물으시는 겁니까."

"이렇게까지 하며 나와 마주보려는 이유를 말함이니라."

"궁금해서요. 무엇을 알고 계시는지. 또 무엇을 숨기고 계시는지."

가벼운 어투로 답한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대화라는 것을 한 번 주고 받아 보고 싶어서요."

대화를 하고 란델이 숨긴 것이 힘이든 혹은 속마음이든. 이제는 좀 들춰봐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화를 하자는 것이냐. 나와 네가."

"어렵겠습니까. 욕심내고 협박하고 그런 어려운 것 말고 얘기나 잠깐 하는 것이."

란델의 시선이 잠시 칼리안의 손 끝을 따라 내려갔다. 그 끝에 떨어져 있던 장미를 한참 쳐다보던 란델이 입을 열었다.

"또 그리하지는 말거라."

그것이 대화의 시작이었다.

같은 것을 잠시 본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벗어난 장미는 전부 잘라내시면서 벗어나지 않은 것은 그렇게 아까우십니까. 어디에 피었든 어차피 다 같은 장미인데요."

"쓸모가 없어지지 않았느냐."

그 말에 칼리안이 다시 한번 웃는 얼굴을 했다.

베른도 란델과 마찬가지로 가지치기를 했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지치기에 쓰였다 해야겠지만.

데블란에게 해가 될 이들의 생명을 수도 없이 끊어냈다. 나이 성별 상관 없이 모두 끊었다. 물론 체이스는 모르는 일이다.

그것이 장미 나무가 아닌 정말로 생명을 가졌고 피를 뿜어대는 사람이었을 뿐. 베른이 했던 일도 어찌됐건 가지치기에 속했다. 원해서 했던 적도 있고 그렇지 않았던 적도 있지만 어차피 그것은 지금 중요한 일이 아니니.

아무튼 같은 짓을 해 봤으니 저 말이 조금 이해가 된다.

"쓸모는 만들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장미를 주워 들었다. 그 칙칙한 방에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사실 장미라면 조금 신물이 나기도 하지만.

아무튼 물에 꽂아 두면 필 테니까.

"지금 제가 란델 형님의 쓸모를 말씀드린 것처럼."

그렇게 말한 칼리안의 눈에 잠시 날이 섰다.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였다.

지금껏 대화의 우위는 항상 란델이 가져갔다. 칼리안을 자신의 수중에 넣으려 했으니까. 때문에 이번에는 칼리안이 위에 서야 했다.

란델이 웃었다.

지난 번의 그 때만큼 감정이 없던 것은 맞았으나 한 번 겪고 나니 좀 익숙해졌다.

때문에 칼리안이 마주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형님의 힘, 무엇입니까. 무엇을 알고 계십니까."

란델의 웃음이 그쳤다. 그리고 답했다.

"너무 미약하여 느끼지 못하는 것이더냐."

그렇게 말하는 란델의 목소리에 두 번째의 감정이 들어섰다. 그것에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아마 '아쉬움' 정도가 되지 않을까.

란델의 얼굴에 스치듯 나타난 그 의외의 감정을 보던 칼리안의 얼굴이 굳었다. 그 뒤 잠시동안 란델을 살피던 칼리안의 입가에 긴 호선이 그려졌다.

"······ 빌어먹을."

그려내듯 만들어진 웃음과 어울리지 않을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막말을 꺼내놓는 막내를 보면서 란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맹세의 인.

정확히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래된 언젠가의 약속. 그 약속의 힘이 심장을 묶고 있음을 이제야 눈치챈 것에 대해서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텐실입니까."

"그래."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말씀 못하십니까."

"그래."

맹세의 인을 나눴다는 말조차 먼저 꺼낼 수 없을 계약. 에반 브리센 후작보다는 똑똑한 것 같은 누군가와 아주 자세한 계약.

텐실은 란델에게 힘을 주고 아마도 란델은 그런 텐실을 돕고. 그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칼리안의 미간이 다시 찌푸려졌다.

둘째 형이 덥썩 받아 온 속박도 머리가 아픈데 첫째 형까지 난리다.

다시 한참동안 란델을 보던 칼리안이 물었다.

"브리센 때문입니까. 신성기사로 하여금 브리센을 공격하려 하셨지 않습니까. 혹시라도 브리센을 없애기 위해 계약을 한 것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일이 복잡해진다.

칼리안은 지금 브리센을 살려놓으려 하고 있었다.

란델은 대답하지 않았다. 온갖 것이 뒤섞인 감정의 흔적이 그 얼굴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니면······ 설마. 그 원한의 끝이 전하께 닿아 있습니까."

르메인을 끌어내리기 위해 텐실과 맹세의 인을 나누고, 똑같이 어미를 잃었던 칼리안의 검을 필요로 했느냐고.

"그것도 말씀 못하십니까."

심연 가득한 푸른 눈이 생명인지 죽음인지 알 수 없을 붉은 눈을 조용히 응시했다.

"피곤하구나."

그리고는 이렇게 대답한 뒤 그 길로 체르밀을 향해 걸어갔다. 그 걸음을 좇던 칼리안의 시선 끝에 길고 긴 한숨이 매달렸다.

* * *

이거. 아무래도.

플란츠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검을 맞대고 있는 키리에로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진 까닭이다.

애석하다 여겨야 할지 아니면 다행이라 해야 할지 몰라도 아무튼 그 심상치 않은 기운이 오러는 아니었다. 그렇다 해서 투기도 아니었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자신을 내리누르는 키리에의 검을 힘 주어 올려 친 플란츠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만."

잠시 말 없이 그런 플란츠를 쳐다보던 키리에가 검을 거둬들이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그것은 살기였다.

저도 모르게 살기를 보낸 키리에를 가만히 쳐다보던 플란츠가 검을 집어넣었다.

대련이 너무 길었다.

플란츠는 키리에의 움직임을 읽고 다음을 예측하는 것이 빨랐고 키리에는 일반적인 감각을 뛰어넘어 플란츠의 검을 짚어 낼 수 있었다.

실전에서야 키리에를 이길 수 없을 테지만 키리에가 몇 수를 접고 벌이는 대련이었으니 검을 마주하는 시간도 길어졌다. 그러다 키리에로부터 살기가 흘러나왔다.

대련에 심취한 키리에가 자신을 정말로 죽이려 들었던 이유를 플란츠가 눈치채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내 아우님이 숨긴 것을 너도 알고 있던 건가."

"······ 죄송합니다."

칼리안이 독을 마셨던 날 찾아온 시종.

체이스가 오고, 칼리안이 흔들린 것을 안 뒤로 하게 된 첫 대련.

그리고, 살기.

무슨 관계였을까.

저 시종은 '아는' 것일까, 아니면 '들은' 것일까.

특별히 의식해서 떠올렸다기 보다는 단순한 호기심과도 같은 생각이 이어졌다.

- 거기까지만 생각하십시오.

그러다 문득 떠오른 목소리에 플란츠는 생각을 접고 한 발을 더 뒤로 물렸다. 그런 플란츠의 행동을 보던 키리에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당분간 대련은 왕자님과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스스로 제어할 수 없게 될까 우려하는 듯 보였으므로 플란츠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본 키리에가 말을 이었다.

"왕자님께서는 플란츠 왕자님을 탓하지 않고 계십니다. 오해하지는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평소보다 조금 더 낮아진 목소리였다.

플란츠에게 말을 하는 것인지 플란츠에게 살기를 내비친 스스로를 다스리려 하는 것인지.

조금 전 자신을 향해 날아오던 살기등등한 검을 떠올린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내 아우님이 나를 탓하지 않는 건 나도 아는데. 정작 너는 아니군."

키리에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정하지 않는 것이다.

"귀가 밝습니다. 제가 플란츠 왕자님에 대해서 눈치채게 된 것은 왕자님도 모르십니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을 덧붙였다.

칼리안은 키리에에게 플란츠와 관련된 일을 말하지 않았다. 그저 칼리안이 플란츠와 대화를 나눴던 날이 많았고 키리에가 밖에서 다 들었을 뿐.

플란츠가 실소했다.

자의였든 타의였든. 칼리안이 자신의 비밀을 어디부터 어디까지 흘리고 다닌 건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체이스를 마주했을 때 생각한 것처럼 정말로 비밀을 모르는 이들을 세는 것이 빠를 지경이 아닌가.

"칼 겨눌 생각이면 지금 해."

이번에는 절대로 칼을 막지 않을 것 같은 그런 표정을 한 채로 플란츠가 말했다. 그것을 본 키리에가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왕자님께서 원하실 때 하겠습니다."

플란츠의 입가에 다시 한번 비웃음이 걸렸다.

"그러던지."

그리고는 수련장 한 가운데 키리에를 남겨 둔 채 미련 없이 밖으로 나갔다.

* * *

기사들이 칼리안의 앞을 막아섰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체르밀 궁의 정문을 지키는 기사들이었다. 칼리안의 앞을 꼿꼿하게 막아선 채로 한 명의 기사가 입을 열었다.

"오늘까지는 이 곳에서 나가실 수 없습니다."

란델이 체르밀 궁으로 들어간 뒤.

한참동안 가만히 서 있던 칼리안이 장미 정원에서 나와 향한 곳은 체르밀 궁이 아닌 정문이었다. 체르밀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였다.

당황한 얀이 빠르게 뒤로 따라 붙었으나 칼리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칼리안이 화가 났거나 당황했거나 놀란 표정을 한 것이 아니라 생각에 깊이 빠진 얼굴이라는 것을 얀이 알아봤다. 때문에 얀은 일단 아무 말 없이 칼리안의 뒤를 따라왔다.

"나가야 해."

칼리안이 이렇게 말했고 기사들이 다시 한 번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만······."

"막아. 그럼."

막을 수 있겠으면.

그런 의미가 담긴 칼리안의 눈에 미약한 살기가 어렸다.

다행인 것은 칼리안을 마주한 기사들이 주춤거리거나 뒤로 물러서는 실수를 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저도 모르게 허리춤에 찬 검에 손을 가져가는 실수도 하지 않았다.

"비켜. 전하께는 내가 말씀 드릴테니까."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한 발자국을 더 움직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들이 움직이지 않자 뒤에 있던 얀이 입을 열었다.

"왕궁 밖으로는 나가시지 않게 할 테니 비켜주세요."

그리고는 칼리안의 뒤에 선 채로 자신의 머리 위에 손가락 뿔을 만들어 보였다. 우리 꽃 같은 왕자님이 심기가 많이 불편하시니 사달 나기 전에 적당히 비켜달라는 뜻이었다.

그것을 본 뒤에야 어쩔 수 없다는 듯 기사들이 양 옆으로 비켜섰다.

"고마워. 미안."

그들을 향해 짧은 말을 남긴 칼리안이 다시 서둘러 발을 옮겼다.

"왕자님. 마나실 백작에게 가시는 겁니까?"

이제야 비로소 칼리안의 행선지를 묻는 얀의 목소리에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전한 속도로 발을 재촉하는 그의 뒤로 작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루비아 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어."

그리고 별관에 머물고 있는 체이스를 만나기 위해 발을 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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