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장. 이해의 초석 (6)
커튼 밖에서 작은 발소리가 났다.
시녀들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침실의 두터운 커튼을 걷어올렸다. 그리고 잠시 후 침실로 들어온 얀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설마 또 밤을 새셨습니까, 왕자님?"
침대 헤드에 기대 앉아 손인사를 건네는 칼리안을 본 탓이다.
어지간해선 칼리안이 먼저 일어나 있는 경우가 없었다. 만약 깨어 있다면 대부분 밤을 샜을 때였다. 사실 베른일 때에도 아침 잠이 많았는데, 스승이었던 테일란보다 먼저 나와 준비한 날이 드물 정도였다. 그런데 몸이 바뀌어도 그 버릇만은 고쳐지질 않는다.
어김없이 잔소리를 준비하는 얀을 향해 칼리안이 얼른 입을 열었다.
"좋은 꿈 꿨어?"
저도 모르게 '네' 라고 대답할 뻔한 얀이 입을 꾹 다물자 칼리안의 눈꼬리가 둥글게 말렸다.
"미안."
에반 브리센 후작이 생각하는 '배반'의 범위가 어디부터 어디까지일지. 그 수많은 가정에 대한 각각의 해결 방법들을 가늠해보다 그대로 밤을 새웠다.
"잠이 안 왔어."
"그래도요. 아직은 잘 쉬셔야 할 때가 아닙니까."
르메인이 칼리안 안부 묻기를 깜빡 할 만큼 좋아진 혈색은 얀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눈 앞에서 테라스를 넘어 4층으로 간 것은 진작에 홀랑홀랑 잊어버렸으리라.
그런 얀을 본 칼리안의 입에 소리 없는 웃음이 걸렸다.
결코 싫지 않은 얀의 잔소리와 함께 여유롭게 준비를 끝내고 나온 칼리안이 복도로 나왔다. 당연하겠지만 고양이 울음소리가 머무는 조용한 방에서 아침을 먹기 위해서였다.
계단으로 향해 가던 중 칼리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늘 저녁 식사에 헤르츠 경을 불렀으면 좋겠어."
"네 헤르츠 부군단장에게 전달해둘게요. 두 분께서 드시는 겁니까?"
"아니. 내 형님도."
그 말을 들은 얀이 저도 모르게 웃는 소리를 냈다. 그것이 어쩐지 기분이 좋아 웃는 느낌이 아니었으므로 칼리안이 잠시 뒤를 쳐다봤다.
"죄송합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왕자에게 '내가 네 말 듣고 좀 웃기는 했지만 신경은 쓰지 말아주세요'와 같은 의미를 가진 말을 꺼낼 수 있는 시종은 얀 뿐일 것이다. 물론 시종에게 이런 말을 듣고도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말 왕자도 칼리안 외에는 없을 테지만.
아무튼 얀이 웃은 것은 칼리안의 호칭 때문이었다.
작년 초 즈음까지만 해도 칼리안은 플란츠와 란델을 굳이 구분해 부르지 않았었다. 굳이 말해야 할 때에는 '형님들' 혹은 '두 형님' 정도로만 언급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플란츠' 라고만 부르던 호칭이 잠시 '플란츠 형님'이 되었다가 지금처럼 바뀌었다.
분명 플란츠의 '내 아우님' 소리 때문에 저도 모르게 저렇게 말하게 되었을텐데 그 변화를 좋게 받아들여야 할지 여전히 알 수가 없어서 웃음이 나온다.
아무튼 서둘러 웃음을 집어 넣은 얀이 칼리안의 말에 대한 대답을 꺼냈다.
"그런 자리면 식당에서 드시는 것이 낫겠네요. 플란츠 왕자님께서도 그 편이 편하실 테고요. 시간 확인되는대로 준비해놓도록 일러두겠습니다."
얀이 이렇게 말하자 칼리안이 의외라는 눈으로 다시 한 번 얀을 쳐다보며 말했다.
"형님이 불편해하든 말든 신경 안 쓸것 같더니."
"왕자님께서 신경을 쓰시니까요. 플란츠 왕자님이 여전히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왕자님께서 그렇게 신경을 써주고 계시는데 계속 마뜩찮게 여길 수는 없잖아요."
얀이 플란츠를 완전히 이해해주는 날은 절대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칼리안도 알았다. 얀은 플란츠의 옛 모습을 절대로 잊지 않을 테니까.
"그래."
때문에 칼리안은 이렇게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계단에 발을 디디며 통보하듯 말했다.
"그리고 오늘부터는 수련장에 좀 더 오래 있을 거야."
"네? 왕자님 지금······."
또 한 번 우려 섞인 말을 꺼내려던 얀이 입을 다물었다.
- 타박, 타박.
누군가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를 들은 탓이었다.
이미 진작부터 그 소리를 듣고 있었지만 굳이 말을 멈추지 않았던 칼리안이 그런 얀의 얼굴을 일별한 뒤 계속 계단을 올랐다.
마치 시계바늘처럼 정확한 간격을 두고 이어지는 발소리. 란델이었다.
- 탁.
칼리안을 마주한 란델의 발이 멈췄다.
그리고 칼리안의 입에는 숨길 생각 없어 보이는 냉소가 자리를 잡았다.
'어찌나 한결같으신지.'
딱 두 계단.
칼리안이 밟고 선 곳보다 두 계단 위에서 발이 멈췄다.
지난 번에는 세 칸이었는데 이번에는 두 칸이다.
이렇게 두어 번을 더 마주치면 그때는 같은 높이에서 보아 주려나.
"얀."
"네. 왕자님."
"내 형님께 전해."
칼리안의 발이 계단을 밟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두 계단을 더 올라가 란델과 나란히 섰다. 그리고 그 짙푸른 눈을 향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오늘 식사, 같이 못하겠다고."
란델을 향한 인사보다 플란츠에 대한 전언 먼저.
'계단 두 칸'에 대한 칼리안의 화답이었다.
란델에 대해 이해를 해보겠다 했지, 져주겠다고는 안 했으니까.
* * *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크림 스프, 모락모락 김이 나는 흰 빵, 넘칠 듯한 샐러드, 삶은 계란과 구운 콩, 향신료 없이 소금으로만 간을 한 훈제 햄, 몽글몽글하게 잘 구운 양파, 그리고 토마토 주스.
그야말로 '싫어하는 것은 다 뺐으니 팍팍 먹고 운동해라' 식단인 것이다. 사용하는 검술이 다른 만큼 칼리안보다 근력을 더 많이 써야 하는데 음식만 앞에 두면 깨작거리고 있으니 그것이 꼴 보기 싫다는 뜻이리라.
"······ 검을 괜히 받았군."
지나치게 좋은 검을 선뜻 주면서 사람 좋게 굴 때 알아봤어야 했다. 놈이라면 분명히 이런 상황을 계획하고 있었으리라. 좋은 검을 받았으면 좋은 검사가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일 테지.
"니아아, 애옹!"
느지막이 일어난 친구를 반기듯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가 플란츠의 발목 언저리에 제 몸을 부대끼며 맴돌길 반복했다.
그런 고양이를 안아 든 플란츠가 시종 레릭이 내려놓은 말린 닭고기를 들어 고양이에게 건넸다. 그 사이 레릭은 얀으로부터 전달된 내용을 플란츠에게 알렸다.
"칼리안 왕자님께서는 오늘 불참하신다 합니다."
그 말을 들은 플란츠가 고개를 돌려 테이블을 다시 쳐다봤다. 스프도 두 개, 주스도 두 개, 접시도 두 개. 미리 알리지 못하고 식사를 준비시킬 만큼 갑작스러운 일이 생겼다는 뜻이다.
"란델 형님이라도 만났나."
그 정도 일이 아니고서는 식사를 거를 칼리안이 아니지 않나.
독차 사건 이후 몸을 빨리 키우겠다며 이것저것 잘 먹던 칼리안이기는 했지만 그때와 지금은 조금 달랐다.
근육이 타들어갈 정도로 빠른 속도를 내는 검술, 그리고 오러를 숨기기 위해 언제나 유지하고 있는 4서클의 마법. 이 두 가지로 인해 칼리안이 소비하는 에너지는 상상 이상이다. 그러니 그렇게 먹어대면서도 근육이 붙기는 커녕 살도 안 찌는 것일 터였다.
플란츠도 그것을 알았다.
덕분에 반드시 식사를 해야만 하는 칼리안이 식사 자리에 불참하는 이유를 어렵지 않게 가늠해냈다. 란델을 만난 정도의 일이 아니라면 식사를 미루지 않을 것이라고.
플란츠가 다시 침실로 발을 옮기는 것을 본 레릭이 얼른 물었다.
"식사를 거르시려는 겁니까?"
"이따가."
거를 생각이라기 보다는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탓에 조금 더 자려는 심산이었다. 칼리안만 밤새 고민했던 것은 아니니까.
레릭이 플란츠의 걸음을 잠시 붙들었다.
"밖에 칼리안 왕자님의 그 호위 시종이 기다리는 중입니다. 조금 더 쉬시겠다면 잠시 후에 찾아오도록 전하면 될까요?"
플란츠가 짜증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오후에 르메인을 만나러 아르피아 궁에 갈 생각이었으니 오전에 검술 수련을 하겠다 했었다. 때문에 벌써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 생각보다 약하시다더니.
어제 저녁 플란츠와 검을 맞대 본 키리에는 저렇게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키리에는 말수가 적었다. 플란츠만큼 적었다. 뒷말이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애석하게도 플란츠 역시 말을 귀찮아하는 타입이었다. 때문에 물어보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것이 '그래도 생각보다는 강하시군요' 따위는 아니었으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기도 했고.
"둬."
그래서 플란츠는 키리에를 보내지 말고 그냥 두라고 했다.
큰 키의 키리에를 떠올려보던 플란츠가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리고 입에 거슬리는 것 하나 없는 아침 식사를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동생 놈의 시종에게까지 계속 지고 싶지는 않았다.
* * *
- 텐실의 마차 축이 부러진 것은 사고가 아닐 것이다.
만약 체이스가 전해달라 했던 이 말을 칼리안이 이미 알고 있었다면 란델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쯤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몰랐고 그래서 란델을 대하는 칼리안의 모습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굳이 두 계단을 더 올라온 뒤 플란츠를 먼저 입에 담았다. 그 뒤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태도로 예를 보였다. 제 밑으로 안 들어오면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에 카밀론에서 개 키우겠다 했던 그때와 똑같았다.
그런 칼리안을 잠시 쳐다보던 란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 따라오거라."
어차피 이야기를 나눌 참이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그 길로 란델의 뒤를 따라 장미 정원으로 갔다.
흔들림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란델의 뒷모습을 보던 칼리안이 잠시 기억을 떠올렸다.
'텐실의 왕이 된 뒤 어땠더라.'
열심히 머리를 써봐도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텐실이었기 때문이다.
세크리티아와 텐실은 완벽한 적대 관계였다.
서로 이를 드러내고 지낼 정도는 아니었지만 항상 그랬다. 당장 둘 사이에 언제 전쟁이 벌어져도 이상할 것 없다고 늘 그렇게 여겨왔다.
하나의 기원, 두 개의 국가.
그것이 바로 세크리티아와 텐실이었으니까.
과거 양신 전쟁을 승리로 이끈 8명의 영웅 중 초대왕 하츠아라와 고룡 시스파니안 그리고 시스파니안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기사 퀴트로스 혼 지그프리드. 이들이 세운 나라가 바로 카이리스다.
그런데 이들보다 앞서 나라를 세운 이가 한 명 있었다.
세렌티를 모셨던 마지막 신관.
바로 세크리티아 대왕이다.
- 이름 없는 왕.
카이리스보다 3년 먼저 세크리티아라는 나라를 세운 그녀는 마지막 순간 자신의 흔적을 모두 지우고 이름조차 남기지 않고 죽었다. 무슨 이유였는지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오로지 '세크리티아 대왕'이라고만 알려진 이름 없는 왕이 세운 세크리티아는 처음에는 그리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카이리스에서 시스파니안이 종적을 감췄을 그 무렵, 세크리티아의 신관들을 중심으로 반란이 일었다. 세크리티아 왕실에서 신물을 이용한 치유술의 이용을 허락하지 않아서였다.
세크리티아는 군사력이 그리 강하지 않은 나라였다.
때문에 반란은 곧 독립이 되었다.
그것이 텐실이다.
이런 이유로 세크리티아와 텐실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작을 관리하던' 베른이 텐실에 대한 정보에 어두운 것은 베른이 왕제였기 때문이었다. 텐실에 대한 정보는 국왕인 데블란과 체이스가 직접 관리했으니까.
"다쳤던 것은 이제 괜찮은지 정도는 물어보실 줄 알았는데요."
때문에 란델이 앞으로 어찌 되는지 알지 못하는 칼리안이 이제 벌어지기 시작한 붉은 꽃봉오리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기껏 따라오라 말한 란델이 아무 말 없이 장미 손질을 시작한 까닭이다.
란델은 뒤에서 들려온 칼리안의 목소리에 잠시 손을 멈추고 있다가 대답했다.
"네가 그 정도에 당할 아이더냐."
······ 역시 내 걱정 해 주는 건 얀 뿐이야.
죽을 뻔 했다는데 르메인은 밥 잘먹는다고 안심하고 란델은 아예 걱정도 안했다는 투다. 칼리안이 짐짓 농담인 것처럼 대꾸했다.
"전사들의 칼이 생각보다 날카로워서요."
"전사라니."
잠시 칼리안이 꺼낸 말의 의미를 새겨보던 란델이 몸을 돌려 칼리안을 마주 보고 섰다.
텐실과 대사막이 손을 잡은 것은 란델도 안다.
칼리안을 공격한 것이 대사막의 전사들이었음을 란델은 모른다.
칼리안과 플란츠가 그 난리를 피우는 사이 벌을 받는다는 이유로 체르밀 궁 안에 들어앉은 채 태평하게 책이나 보고 지냈을 란델에 대한 억울한 마음. 그리고 아무리 그래도 다른 이의 손을 빌어 제 동생을 해치려 할 놈은 아니었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음에 대한 안도의 마음. 딱 그렇게 반반 나뉜 마음이 들었다.
그 묘한 마음을 그대로 담은 칼리안의 입이 호선을 그렸다.
"란델 형님께서도 모르시는군요. 그들이 누군지."
란델은 대답 없이 칼리안을 들여다봤다.
칼리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 시선을 거부했다.
칼리안이 팔을 뻗어 방금 전까지 란델이 살피던 장미에 손을 가져다 댔다. 긴 손가락 끝에 오러의 힘을 담은 채였다.
"저 좀 보시죠."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에 스친 장미가 툭 하고 부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것을 본 란델의 눈에 아주 잠시 감정이 스쳤다.
그런 란델을 향해 칼리안이 냉랭한 목소리를 냈다.
"이거. 말고."
다시 말하지만.
이해를 해보겠다 했지 져주겠다고는 안했다.
[외전] 키리에
- 내가 아직 말을 안했던가?
-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 네 이름의 뜻. 여기서는 꽤 그럴듯한 의미가 있거든.
* * *
툭 툭.
한낮의 볕에 적당히 마른 흙 위로 짙은 점이 하나 둘 생겨났다.
코 끝과 이마에 툭 하고 떨어져 닿은 물방울들은 이내 비가 되었다. 적당히 마른 흙에서 적당히 기분 좋은 비 비린내가 풍겨나오다 곧 흩어졌다.
비가 오기 시작했음을 진작부터 알았지만 굳이 손을 뒤집으며 하늘을 쳐다본다. 여지없이 툭 하고 떨어진 물방울이 손바닥 위에 얌전히 자리를 잡았다.
"아침에는 그렇게 맑더니. 이상하구나."
"제가 그랬잖습니까. 비가 올 것 같았다니까요."
핀잔과 놀림이 조금씩 섞인 말을 꺼내든 베른이 씩 웃었다. 그리고는 체이스를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내기에서 졌으니 걸었던 돈을 달라는 뜻이다.
그 의기양양한 웃음을 본 체이스가 마주 웃으며 말했다.
"지금은 없으니 들어가서 주마."
"또 잊어버렸다 하시려고요."
"내가 언제 그런 것을 잊은 적이 있었느냐?"
"네. 많이요."
또 티격태격.
이 형제의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키리에가 조용히 미소지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이 일은 뜬금없이 건네진 베른의 한마디 말에서부터 시작됐다.
'형님. 오늘 비가 올까요?'
아침에 체이스를 만나자마자 이렇게 물어오는 베른을 향해 체이스는 대수롭지 않게 '비가 오지 않을 것 같다'는 대답을 했다. 그러자 베른은 곧바로 내기를 하자 말했다.
베른이 걸어오는 내기는 한 번도 사양한 적 없었으므로 체이스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웃음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베른이 뒤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키리에, 잘 봐둬. 형님께서 분명히 비가 안 온다 하셨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기사 베른이 아닌 왕제 베른에게 충성 서약을 한 유일한 기사 키리에는 이렇게 대답했었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베른이 먼저 내기를 제안하고 체이스가 받아들이면 키리에가 증인이 됐다. 그렇게 내기가 시작되면 어김없이 이렇게 투닥거리며 끝났다.
"나는 네게 줄 돈을 잊어버린 기억이 나질 않는구나."
"그런 말씀도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시죠."
아마 귀족들은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할 터였다.
그 왕제 베른이 고작 은화 한 개를 가지고 국왕 체이스에게 툴툴거리는 소리를 하고 있으리라고는.
그런 형제의 모습을 보는 키리에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그려졌다. 한 명은 국왕이었고 한 명은 왕제였으나 그들은 그저 형제였다. 그것이 그저 좋았다.
그들이 왕과 왕제가 아니었을 때.
그래. 키리에가 그들을 처음 만났던 그 날에도 둘의 모습은 지금과 다르지 않았었다.
특히 베른은 지금과 완전히 똑같았다. 지금에 비해 입이 조금 더 거칠고 눈빛이 조금 더 사나웠지만 아무튼 똑같았다.
적어도 키리에가 보기에는 그랬다.
* * *
베른을 처음 만났을 그때.
텐실에는 큰 홍수가 났었다. 이제 막 봄이 오는 시기에 일어난 재해였다.
밀은 넉넉했고 소금이 부족했다.
귀족들을 위한 밀은 본래 비쌌다. 소금은 더 비쌌다.
밀과 소금을 구하지 못할 가난한 이들의 몸은 썩어들어갔다.
그것을 버티지 못한 이들은 국경을 넘었다.
병력이 넘쳐나는 카이리스보다는 세크리티아에 숨어드는 것이 나았다. 적어도 세크리티아는 난민을 무조건 사형시키진 않았으니까.
물론 그것은 난민들의 사정이었다.
세크리티아에서는 국경을 넘어오는 이들을 무조건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전염병을 옮겨올 수 있었고 범죄가 늘어날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 그들의 정착을 전부 지원해주기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어찌하라 하십니까?"
귀족들이나 데블란이 앞에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베른은 데블란을 꼭 '아버지'라 불렀다.
친근해서가 아니었다.
그렇게 부르지 않으면 언제 어떻게 인륜을 배반할지 스스로도 장담할 수 없어서였다. 그만큼 데블란을 증오했다.
그런 베른을 모르는 것이 아니면서도 체이스는 그에 대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겉보기와 달리 체이스 역시 데블란과 그리 좋은 사이가 아니었던 탓도 있었고 베른의 성정을 잘 알았던 까닭이기도 했다.
"살펴보고 결정하자꾸나."
"아버지가 난민에 대한 문제를 형님에게 일임하셨습니까?"
"그래. 그리 말하시더구나. 그러니 직접 보고 결정할까 한다."
데블란이 수백 혹은 그 이상에 이를지 모를 난민들의 생사여탈권을 이제 막 열 아홉이 된 왕세자에게 넘겼다. 그로 인해 텐실과 세크리티아의 사이에 어떤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는 상태로.
"저는 호위나 보겠습니다."
이렇게 말한 베른이 슬쩍 웃었다.
데블란이 왕세자에게 내어 준 첫 시험에 끼어들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살펴보고 결정하자'며 베른과 함께 문제를 풀 의중을 보였던 체이스는 별다른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게 국경을 넘어서다 붙들린 이들이 있는 곳에 왕세자와 왕자가 발을 디뎠다.
천막 하나 없는 너른 공터에 모여있는 난민의 수는 딱 생각한 만큼 많았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그들을 쭉 둘러보던 베른의 눈이 한 곳에서 멈췄다. 연보랏빛의 날카로운 눈이 수많은 난민 사이에 섞여 있는 한 명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었다.
"······ 저거."
체이스가 낸 문제를 마주했을 때.
상대하기 버거운 적을 만났을 때.
죽여버려야 할 세력을 찾았을 때.
그것이 무엇이든 흥미가 동하는 무언가를 앞에 대했을 때 짓곤 하던 표정이 베른의 얼굴에 떠올랐다.
"난민 아닌데."
물빛 머리의 소년을 보며, 베른의 입술이 긴 호선을 그렸다.
* * *
체이스보다 한 살이 어렸다.
그러니 베른보다는 한 살이 많았다.
물론 그들은 왕족이었으니 나이 차이가 사람의 위 아래를 바꿔놓지는 않았다.
"열 여덟이라고."
베른의 연보랏빛 눈에 짙은 호기심이 돌았다.
왜 텐실의 사람들 틈에 끼어 있었을까.
왜 세크리티아로 오려 했을까.
왜 카이리스를 떠나왔을까.
고작 열 여덟인데 왜.
저렇게 짙은 피냄새를 풍길까.
나만큼.
"그렇습니다."
서로 다른 두 색의 눈동자가 베른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을 본 베른은 다시 한 번 웃었다.
"이 새끼, 눈이 돌았는데."
그것도 나만큼.
그것이 키리에에 대한 베른의 첫 인상이었다.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고 훗날 언젠가의 술 취한 베른이 그렇게 말했었다.
눈이 돌아 있어서.
"칼 쓰나? 아니면 주먹 쓰나."
"다 씁니다."
"그래."
그 말과 동시에 은색의 긴 검이 검집에서 뽑혀 나와 키리에의 앞에 던져졌다. 베른의 검이었다. 그것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으려니 베른의 입이 열렸다.
"써 봐."
주변의 기사들이 잠시 긴장하는 눈빛을 했다.
베른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난민 앞에서 어린 소년을 베어 죽일 셈인가 하는 눈빛이었다. 그런 기사들을 슥 훑은 베른이 씩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 이 새끼 이런 데서 죽을 새끼 아니야."
- 타앗!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베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키리에의 몸이 벼락같이 움직였다.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워 그대로 베른을 향해 내질렀다.
베른이 제 자리에 선 채로 몸을 틀었다.
맥락 없이 곁눈질로 배운 검은 베른의 옷깃 하나 스치지 못했다. 그리고 베른은 발을 내밀어 그대로 키리에를 걷어찼다.
- 쿠당탕!
그러더니,
"거봐."
하고.
멀찍이 나가 떨어진 키리에를 향해 씩 웃었다.
* * *
"이름."
"키리에입니다."
그 말을 들은 베른이 피식 웃었다.
"이름 한 번 거창하네."
키리에는 베른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있었다. 더는 무릎 꿇리지 말라는 베른의 명 때문이었다.
왕자를 공격하려 했음에도 체포되지 않았다. 베른은 키리에에게 씻을 물을 내어주고 새 옷을 주고 밥을 먹였다. 그리고 이렇게 마주앉아 다시 이야기를 시작한 참이었다.
분명 씻고 나온 꼴은 맞았다.
그럼에도 풀풀 풍겨오는 피비린내가 가시질 않았다. 기사들은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약했으나 베른에게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베른은 그에 대해 묻지 않았다. 카이리스를 왜 도망쳤는지도 묻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것을 입에 올렸다.
"키리에. 기사가 되고 싶은가?"
서로 다른 색의 두 눈.
키리에의 두 눈이 처음으로 생기를 찾았다.
어쩌면 열망이라 불러야 할.
"검입니다."
검이라.
베른의 눈이 날카롭게 벼려졌다.
키리에는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데블란마저 마주보기를 꺼려하는 살기어린 눈동자를 앞에 둔 채 키리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검이 될 것입니다."
그 검이 사람을 베는 검일지 사람을 지키는 검일지. 이런 고리타분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베른은 그런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좋아."
해봐, 하는 말과 함께 베른이 씩 웃었다.
"내가 만들어주지."
* * *
- 안 궁금해? 네 이름 무슨 뜻인지.
- 궁금합니다.
- 이름은 짧은데 뜻은 좀 길어.
- 무슨 뜻이기에 길다 하십니까.
- 안 가르쳐 줄 건데. 평생.
- ······ 왜 안 알려 주십니까.
- 그럴듯 하다고 했지 좋다고는 안 했어.
- 네.
- 뭐야. 뭐가 안 좋은지는 안 궁금해?
- 어차피 그런 것은 하나도 안 맞습니다.
- 그런가.
그럼, 내 이름도 안 맞으려나.
* * *
"또 내기를 하셨습니까."
"아아. 했지."
"얼마 전에는 비가 올지 오지 않을지를 두고 내기를 하셨지 않습니까."
조금쯤 타박하는 말투의 키리에를 향해 베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것은 좀 장기적인 내기였어. 한 3년쯤 전에 했나."
조금 장기적인 내기여서 내깃돈도 컸던 모양이다. 뿌듯한 얼굴로 체이스에게 받아낸 금화 한 개를 튕기며 베른이 웃었다.
"공돈 생겼다. 술 먹으러 가자."
베른은 유일하게 키리에에게만 왕자 시절의 말투를 그대로 썼다.
그리고 술이라면 사족을 못 썼다.
그러면서도 늘 '나보단 네가 더 술을 좋아하지.' 하고 키리에 핑계를 댔다.
술집은 잘 안 갔다.
베른이 술집 문을 열고 들어서면 술집 공기가 딱딱하게 얼어붙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그런 역할을 자처했으니 어쩔 수 있겠냐만은 술에 취한 베른은 그런 분위기를 썩 달가워하지 않았다.
술에 취한 베른은 그렇게 독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이 베른의 진짜 모습임을, 함께 취했던 키리에만 알았다.
왕궁의 주류 창고에서 온갖 술을 죄 꺼낸 뒤 빈 자리에 금화 하나를 올려 둔 베른이 씩 웃었다.
"이 정도만 꺼내면 형님께 안 혼나겠지."
그리고는 왕궁 첨탑 꼭대기로 올라갔다.
세크리티아의 수도 세크레타.
그곳은 온 세크레타가 전부 보이는 유일한 곳이었다. 베른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다.
그런 곳에 올라간 뒤 취하도록 술을 퍼마셨다.
종류도 따지지 않았다. 안주 같은 것도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 술을 마시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기분이 좋아서 마시고 기분이 나빠서 마셨다.
취기를 흩어낼 수 있으면서도 굳이 그러지 않았다. 그렇게 머리 꼭대기까지 술에 취해서는 항상 키리에의 등에 업혀 첨탑을 내려왔다.
"무슨 내기 했는지 안 궁금해?"
키리에의 등에 업힌 채 혀 꼬인 발음으로 베른이 물었다.
"궁금합니다."
"그럼 물어봐야지."
키리에는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먼저 묻는 법이 잘 없었다. 베른은 늘 그것이 답답하기도 했고 안쓰럽기도 했다. 물론 티는 내지 않았다.
"무슨 내기를 하셨습니까."
"네 키가 얼마나 자랄지."
기사 수련실 문을 지날 때 네가 고개를 숙여야 할 만큼 키가 자랄지 그렇지 않을지. 그런데 오늘 아침에 보니까 네가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더라고. 그래서 내가 이겼지.
이렇게 중얼거리는 말에 키리에가 작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일국의 국왕과 왕제가,
비가 올까 오지 않을까 하며 은화 한 개를 걸고.
수하의 키가 얼마나 클까 하며 금화 한 개를 걸고.
그런 내기를 하다 결국은 티격태격 해버리는 곳.
세크리티아는 그런 곳이었다.
언제까지고
그런 곳이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 * *
마지막 날.
베른이 그리도 좋아했던 첨탑 위에서.
'··· 키리에.'
체이스가 흘려보낸 말은.
어느 누군가의 이름이었으나
그 누군가의 이름인 것만은 아니었다.
키리에, 그것은.
잠든 신의 자비를 청하는
세렌티를 향한 기도의 마지막 구절이었다.
* * *
잊혀지지 않을 영웅.
이 세크리티아의 마지막 영웅. 체이스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영웅. 모든 것을 포기했던 키리에에게 생을 준 영웅.
베른.
왕의 곁을 지켜야 할 베른이 성문을 나섰다.
이미 늦었음을 안다. 베른을 포함한 모두가 알았다. 알면서도 검을 쥐었다. 알았기 때문에 검을 쥐었다.
그들은 모두 왕의 검이었으니.
- 플란츠 루 룬 카이리스가 시간의 축을 요구했다.
- 세크리티아는 거절했다.
갑작스러운 전쟁 앞에서 세크리티아는 강인했으며 나약했다. 저들이 내세운 마법사들, 그 새하얀 악마들의 손길 앞에 마지막까지 제 목숨을 불태웠다. 불길이 치솟은 몸뚱이로 마법사를 끌어안고 죽었다.
지옥.
그래. 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 곳이리라.
플란츠의 발칸은 세크리티아를 지옥으로 만들었다. 국왕과 왕제가 은화 한 닢을 두고 내기를 하던 세크리티아를 지옥으로 만들었다.
"정신 차리십시오."
테일란이 죽었다 했다.
베른은 울지 않았다.
"멈추지······ 마십시오."
울며 막아서는 체이스를 밀어내고 성문 앞에 나섰다.
"보은을······."
마흔 여덟의 기사가 앞서 죽어나갔다.
"······ 고작 이것 뿐이지만······."
핏물 가득한 키리에의 말이 멈췄을 때.
베른은 비로소 오열했다.
제 앞을 막아서고 화살에 꿰여 죽어간 키리에를 보며 울었다. 이제 막 검의 길에 들어서려던 그 웃음이 떠올라서 울었다. 내기 좀 그만하라며 정색하던 얼굴이 우스워서 울었다. 술에 취한 베른을 업고 내려오려 항상 남겨두었던 마지막 잔이 생각나서 울었다.
제 동생을 보고싶어하던 눈이 안타까워 울었다.
고작 이렇게 가려고. 이렇게 가려고.
충성이랍시고 바쳐진 그 목숨이 아까워 울었다.
그 목숨이 서러워 울었다.
이것이 모두의 마지막임을 알아서 울었다.
* * *
그러니 세렌티시여.
부디 자비를 내리소서.
나의 생을 다하여
보은할지니.
[키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