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35화 (136/527)

제24장. 이해의 초석 (5)

하늘의 한 조각이 반짝이는 듯 했다.

수십 개의 붉은 빛이 천천히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광경이 많은 이들의 눈에 띄었다. 르메인 역시 그런 이들 중의 한 명이었다.

창가로 가보려는지 안경을 벗어 내려놓는 르메인을 향해 맞은편에 앉아있던 앨런이 말했다.

"시선 두지 마시지요."

저것이 어떤 의미인지 누구를 위한 불꽃인지 알아서는 안 되는 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르메인이 아니던가. 때문에 앨런은 진작부터 르메인의 집무실에 찾아와 앉아 있던 참이었다.

"체르밀 궁 쪽인 것 같은데."

그 말에 앨런이 입을 다물었고 르메인이 그런 앨런의 눈을 깊이 응시했다.

"무슨 일이지."

칼리안과 관련된 일들 중 앨런이 르메인에게 굳이 전하지 않는 것들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알아야 할 내용까지 숨기거나 속이는 일은 없었으므로 르메인은 그에 대해 굳이 캐묻지 않았었다.

평소 같았으면 칼리안이 장난이라도 치는 모양이니 그냥 두라는 정도로라도 얼버무릴 앨런인데 아예 보는 것조차 하지 말라 한다. 그러니 저 빛이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평소 알아서 적당히 넘어가던 르메인이 오늘따라 이렇게 구는 것이 단순한 호기심인지, 제 핏줄에 대한 막연한 예감인지. 짧게 혀를 한 번 찬 앨런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셋째 왕자님께서 길을 찾아 가시는 것뿐입니다."

이 말을 들은 르메인이 한동안 창 밖을 쳐다보다 비로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

"술이나 한 잔 하시겠습니까?"

르메인의 대답이 없었음에도, 앨런이 테이블 위에 술병과 술잔을 척척 꺼내놓았다. 마시자는 허락을 구할 생각도 없이 이미 준비를 해 온 것이다.

오전에 란델을 만났던 일로 마음이 복잡했던 르메인이 순순히 대답했다.

"그러지."

앨런은 조용히 웃으며 두 잔에 술을 채웠다. 옅은 보랏빛을 띄는 술이 잔에 채워지는 것을 보고 있던 르메인이 입을 열었다.

"오늘 다시 한번 통감했네."

"무엇을 통감하셨습니까."

그 말에 르메인은 앨런이 채 건네지도 않은 술잔을 집어들어 먼저 한 모금 마신 뒤 입을 열었다.

"현명하지 못했음을. 왕으로서도 아비로서도 자격이 없구나, 하고."

선왕의 선택으로 왕세자위를 받고 형이 반기를 들었을 때 그냥 내어주었다면 어땠을까.

"무슨 그런······."

르메인이 오전에 란델을 만났음을 알고 있었던 앨런이 이렇게 입을 열었다. 말하고 있는 눈이 굵게 휘어져 있었다.

"당연한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하시는지."

르메인이 피식 웃었다.

곧죽어도 르메인 편은 안 들어준다.

저런 성격이니 앨런이 가져온 술에 뭐가 들었을지 확인도 않고 먼저 마시고 있는 것이다.

앨런이 잠시 창 밖을 바라봤다. 어느새 붉은 기운이 거의 사라져 있었다. 칼리안의 불꽃이 하늘에 거의 닿은 것이리라.

"혹여라도 이미 늦어버린 일을 되돌리려 하지는 마시지요. 그것은 오만이니."

"하지 않네."

르메인이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는 반쯤 남은 술을 마저 마신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나 역시 길을 잘 찾아야 할 것인데."

"보이는 날이 오지 않겠습니까. 불을 밝히는 이도, 말을 건네는 이도 있으니."

이번에는 제대로 된 길을 찾으리라고.

앨런이 그리 말하며 가만히 웃었다.

* * *

생각해보면 참 우스운 일이다.

마법사단 발칸의 통솔권은 앨런에게 있고 기사단 카렌과 라온은 이제 플란츠의 손 아래 놓이게 되었다.

앨런은 일단 르메인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그리고 플란츠는 르메인의 생명연장과 무병장수를 원하는 칼리안과 손을 잡은 상태다. 그래서 르메인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습다 하는 것이다.

본래에는 모두가 국왕의 소유여야 할 것들이 아니던가.

"나라 꼴이 참······."

뒷말을 흐린 이유는 아무리 혼잣말이라지만 '나라 꼴이 개똥이다'라는 말이 왕자의 입에서 나오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때문에 칼리안은 짙은 검은색의 욕조에 몸을 담근 채로 고개만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 우웅.

따뜻하게 맞춰둔 물이 식을 만큼 오랫동안 있었던지 수온 조절 장치가 작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만큼 이런저런 생각에 집중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괜스레 마음이 복잡해져서 물 속에 들어왔고 생각의 꼬리를 이어나가다가 르메인의 간당간당한 목숨에까지 가 닿은 참이었다. 곧 칼리안은 너무 멀리 가버린 생각을 붙들어 다시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물에 불어 쪼글쪼글하게 주름이 생긴 손 끝을 쳐다보면서 칼리안이 나지막한 목소리를 냈다.

"맹세의 인을 그렇게 덥썩 받다니."

안 그래도 고민거리가 산더미다.

조약돌, '그들'의 정체, 시간의 축과 세렌티, 란델의 꿍꿍이와 감춰둔 힘, 아이즌의 기사단, 히나가 말한 '좋은'의 참뜻, 만약 카밀론에 가게 되면 무슨 개를 키울 지, 등등.

그런데 형님 놈께서 하나를 더 얹어주고 갔다. 내 아우님께서 어련히 살려두리라는 태평한 소리나 하면서 말이다.

"알아서 해결하게 그냥 둬버릴까보다."

그러니까 시스파니안.

조금만 덜 사려깊었어야 했다니까요.

심장을 옥죄는 것이면 당연히 축복으로 해결이 되어야죠. 당신이 내린 축복의 힘이 당신이 만든 맹세의 인에 속박되어 버린다니.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하. 정말이지."

옛 칼리안에게 작별을 고한 일로 감상에 젖을 새도 없었다. 때문에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는 태고의 고룡에게 답답함을 토로하며 칼리안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일단 계약 조항을 들어보고."

시스파니안에게 푸념을 해봐야 답이 나올 리 없다. 휴대하기 좋도록 가볍게 개선한 것이 분명한 에반의 머리에서 나온 계약 조항이니 빠져나갈 구멍은 있을 터였다. 그런 것도 없이 맹세의 인을 받아 올 플란츠가 아니리라 믿었다. 그러므로 그 문제는 일단 조건을 들어본 뒤 다시 고민하기로 했다.

다음으로 떠올린 것은 란델이었다.

르메인과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지는 모르겠지만 란델에게 르메인이 큰 영향을 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란델은 절대로 르메인에게 마음을 열지 않을 테니까.

"세렌티께서는 내가 이 집안의 문제를 다 해결해주기를 원하신 건가."

이를테면 르메인이 저지른 잘못의 뒷수습 같은.

얼토당토 않은 상상에 피식 웃은 칼리안이 욕조에 머리를 기대고 천장을 쳐다봤다. 그렇게 가만히 물 속에 몸을 누이고 있다가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와."

또 왔다는 것을 느낀 까닭이다.

사생활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저 단호한 목소리에 잠시 인상을 찌푸린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네."

나오라시는데, 나가야지.

* * *

고양이와는 사이가 좋다.

란델과는 사이가 나쁘다.

민트는 싫어한다. 신 것은 못 먹는다. 익히지 않은 양파는 그리 내켜하지 않는다. 고기는 잘 안 먹는 것 같다. 견과류가 들어간 빵은 안 먹는다. 쨈이나 버터에는 손도 안 댄다.

풀을 잘 먹는다.

하얀 빵은 곧잘 먹는다. 계란도 먹는다. 우유는 그럭저럭, 주스는 대체로 다 마신다. 커피는 모르겠고 홍차는 잘 마신다.

입이 험한데 욕은 안한다. 아, 짖는다고는 한다.

눈치가 빠르다.

말 하는 것을 정말 귀찮아한다. 잘 움직이지 않지만 굼뜬 것은 아니다. 생각이 깊다. 한 번 생각에 빠지면 결론을 낼 때까지 가만히 있는다.

그리고 의외로 성격이 급하다.

배려심은 고양이한테 다 퍼준 것 같다.

"애옹!"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가 플란츠의 품에서 울음소리를 냈다. 이번에는 창문 말고 문으로 들어왔는지 몰라도 아무튼 고양이까지 데리고 당당히 들어왔다는 소리다.

"무슨 일이십니까."

"계약 내용."

"맹세의 인을 맺은 내용을 못 전하셔서 이 시간에 오신 겁니까. 내일 식사 때 말 해도 될 것을요."

"안그래도 고민하실 테니."

"굳이 이 밤중에 그걸 궁금해할 만큼 고민하지는 않았는데요."

칼리안이 여전히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답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그대로 둔 채 개인적인 시간을 방해받았다는 티를 고스란히 내고 있었다.

물론 플란츠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때문에 칼리안은 소리 없는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얘기해주세요."

"브리센을 배반하지 않는다."

"네. 세부조항은요."

"없어."

"겨우 그것 하나를 말했습니까."

"그래."

에반 브리센이 진짜 그것만 말했느냐는 눈으로 쳐다보니 플란츠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들은 오만하니까."

내가 생각한 '배반'의 범위가 여기서부터 여기라면 다른 이들도 그렇게 여기겠지 라고 믿는 것이다. 자신의 판단이 곧 보편적인 기준이니 자신들의 생각과 다른 판단을 하는 이들은 없을 것이라고.

"이런 말씀 죄송합니다만."

너무 멍청합니다.

라는 말을 뒤에 이으려 했는데 플란츠가 먼저 대답했다.

"알아."

"네."

어쩐지 아무리 그래도 맹세의 인을 쉽게 받아들이고 왔더라니.

아마 그 자리에서 계약을 하지 않았다면 에반의 생각은 더 깊었을 터였다. 그랬다면 최소한 세부 조항 하나쯤은 더 만들어 냈을 것이다. 때문에 그 자리에서 계약을 하겠다 말했으리라. 다른 꿍꿍이를 집어넣을 시간을 주지 않으려고.

구체적이고 자세하여 틈이 없는 것보다는 차라리 두루뭉술하고 애매한 조건이 낫다. 애매한 만큼 조심해야 할 범위는 넓어지겠지만 실제로 맹세의 인이 발동하는 일이 일어날 확률은 적어질 수밖에 없으니까.

"귀찮더라도 차라리 더 안전한 쪽이 나으니. 다행이네요."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고 칼리안이 플란츠를 쳐다봤다. 더 할 말이 없으면 가 달라는 노골적인 눈빛을 또 한 번 무시한 플란츠가 말을 이었다.

"기사단. 전하께 말씀을 드려야 할텐데."

"네. 기사단이 형님에게 넘어가기 전에 전하께 미리 말씀드리기는 해야겠죠. 어쨌거나 우리가 무슨 짓을 하든 브리센 후작이 그 권한을 전하께 넘길 일은 없을테니, 차라리 형님이 가져온다면 전하께서도 꺼려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그렇겠지."

"내일 형님께서 말씀하세요. 저는 내일까지 체르밀 궁에서 못 나가니까."

그렇다고 스승님처럼 전하를 오라가라 할 수는 없잖아요, 하고 말한 칼리안이 생글거렸다.

"게다가 이번 일의 주체는 처음부터 끝까지 형님이었으니 전하를 대면하는 것도 형님이어야 맞겠고요."

플란츠의 얼굴에 민트차를 마실 때와 비슷한 표정이 떠올랐다.

당연한 일이다. 란델 만큼은 아닐테지만 플란츠 역시 르메인에 대한 골이 남아 있을 테니 단 둘이 만나는 것이 기꺼울 리 없었다.

"······ 알았어."

곧 플란츠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나왔다.

"그리고 내일 저와 같이 헤르츠 경을 좀 만났으면 하는데. 이번 일에 대해 구체적인 이야기도 해야 하니까요. 어떠십니까."

플란츠의 표정에 짜증이 가득 떠올랐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웃었다.

처음으로 플란츠가 제 나이로 보여서였다.

"너무 그렇게 싫어하지 마십시오. 알고 보면 재밌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칼리안을 보며 플란츠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곧 소파에 등을 기댄 플란츠가 나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미친 마법사를 참 잘도 받아들여선 재밌다는 말이나 하고 계시는군."

칼리안이 잠시 입을 다물고 플란츠를 쳐다봤다.

"······ 넘겨짚는 것만 하라 말씀을 드렸는데요."

"뻔한 일 아닌가. 마나실 백작 대신 누가 발칸을 지휘했을지."

짐작하고 있는 것이다.

앨런을 대신해 발칸을 이끌었을 사람이 누구인지. 그 사람을 또 누가 막았을지.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했을지.

누가 누구에게 죽음을 내리고 받았을지.

베른을 넘어선 아르센의 창이 가장 마지막에 누구를 향했을지에 대해서도 모르지 않는 칼리안이 살짝 웃었다.

"내 아우님은······ 마음이 넓으신 건지. 기억이 짧으신 건지."

"그런 것을 기억해두려니 억울한 것이 너무 많을 것 같아서요."

이미 억울한 것이 참 많은 얼굴이었으나 플란츠는 다른 말을 더 꺼내진 않았다. 그리고 칼리안은 화제를 돌리려는 듯 이제 막 생각해낸 것처럼 입을 열었다.

"그러고보니, 아무래도 내일은 저만큼 억울한 분 만나러 가봐야겠네요."

그렇게 말하는 칼리안이 손을 들어 위를 가리켜보였다. 홀로 억울한 마음에 텅텅 비어버린 한 사람을 만나보겠다고.

플란츠가 말없이 칼리안을 쳐다보다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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