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34화 (135/527)

제24장. 이해의 초석 (4)

적막한 방.

한편으로는 놀라고 또 한편으로는 이해가 됐다.

정원에는 그렇게나 화려한 꽃을 피워내면서 방 안에는 그 흔한 화병 하나 두지 않았다. 시계조차 없는 이곳에 늘 홀로 앉아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의 손에 칼리안의 피가 묻고 자신의 눈으로 플란츠의 결핍을 보고 아무것도 없는 이 방에 발을 들이고 나서야 그것을 깨닫는다. 이미 너무 먼 곳까지 와버렸다는 것을 함께 느낀다.

국왕이기 이전에 아버지여야 했고 아버지이기 이전에 국왕이어야 했던 르메인은 입 밖에 내지 못할 후회를 담아 란델을 바라봤다.

"심한 감기에 걸렸다 하던데. 괜찮은 것이냐."

자신을 피하기 위해 핑계를 댄 것임을 당연히 안다. 알면서도 찾아왔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탄신일 축제 중 마지막으로 보았고 체르밀 궁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벌을 주었다. 그 뒤로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란델은 변함 없는 모습을 한 채 담담하게 대답했다.

변함 없이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래."

내가 서툴렀다.

서툴러서 그렇게 눈을 돌렸다.

눈을 돌리니 보이지 않았고 보이지 않으니 잊고 지냈다. 잊고 지내니 시간이 흘렀고 시간이 흐르니 알게 되었다.

잘못했다는 것을.

"······ 그래."

르메인은 속말을 차마 꺼내지 못하고 같은 말만 다시 했다. 당장 이 자리에서 사과의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저 변명이었고 나를 이해하라 종용하는 폭력임을 알았다.

그리 잘 알았으면서.

꾹 다물고 있던 입을 비집고 수만마디 말이 담긴 한 줄기 한숨이 기어코 새어 나왔다.

"아프면 혼자 참지 말고······ 혹여 내가 또 모르거든 말해주거라."

고작 이런 말이나 건넨 르메인이 앞에 놓인 차를 꾸역꾸역 마셨다. 마주 앉아 있던 란델은 말 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다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한참만에 꺼내진 이야기에도 란델의 대답은 간결했다. 그만큼의 간극이었다.

그 곳에 더 있는 것조차 무언의 강제가 될까 걱정되어 르메인은 그만 자리에서 일어섰다. 함께 일어난 란델의 눈을 들여다보던 르메인이 한참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또 오마."

란델은 대답하지 않았다.

* * *

세상에서 이보다 기꺼운 초대는 없을 것이다.

"칼리안 왕자님께서 잠시 와주시기를 청하셨습니다."

어여쁜 제자가 찾는다는 말에 앨런은 보고 있던 서류를 곧바로 뒤집어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칼리안의 청은 그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얀의 뒤를 따라 체르밀 궁에 들어서니 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수련장으로 가시면 됩니다."

그 말을 들은 앨런이 생각 많은 얼굴로 웃었다.

"명색이 왕자님의 스승인 앨런 마나실인데, 왕자님 방이 아닌 수련장에서 만나자는 말이 이렇게나 생소해서야."

"왕자님께서는 혼자서도 워낙 잘하시니까요."

칼리안이 워낙 알아서 잘 수련해왔던 탓에 정작 스승 노릇은 몇 번 해보지 못했다. 이것이 민망했던 앨런은 얼른 수련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검술 수련장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마법 수련장에 들어서니 널찍한 공간 한 가운데 앉아 눈을 감고 있는 칼리안이 보였다. 르메인과의 조찬 때문에 매일 아침 해오던 마나 축적을 이제야 하는 중이었다. 방해 되지 않도록 조용히 서서 그 모습을 보던 앨런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실로 방대하구나.'

그것이 시스파니안의 축복 때문인지 옛 칼리안이 유난히 뛰어난 재능을 가졌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정확한 것은 정제되어 쌓이고 있는 마나의 양이 다른 마법사들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많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랬으니 오러를 숨기는 마법을 상시 유지하면서 때에 따라 검과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테지.

'4서클의 끝도 가장 빨리 보게 될 것이다.'

이미 앨런보다 앞선 나이에 3서클을 마스터했던 칼리안이 아니던가. 때문에 앨런은 자신이 4서클 마스터가 되었던 나이가 언제였는지를 기억해보고 있었다.

"스승님!"

그러던 중 변함 없는 반가움을 가득 담은 목소리가 앨런을 불러냈다. 곧바로 기억에서 빠져나온 앨런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칼리안이 자신을 왜 불렀는지 알 것 같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수련장으로 불러내셨으니 막힌 것이 있을 터인데, 제가 무엇을 가르쳐드리면 될는지요."

칼리안이 웃는 낯을 바꾸지 않은 채 수련장 한쪽에 놓인 의자를 가리켜보였다.

"네. 배우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만, 먼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로 가 앉았고 마주 앉은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헤르츠 부군단장은 좀 어떻습니까?"

"마법 쓰는 족속들은 어찌 다들 그모양인지 모르겠습니다."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앨런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섞인 답이 나왔다.

그 족속들의 우두머리가 그 족속들을 모아서 써먹어보자 했던 왕자에게 이렇게 말한 뒤 말을 이었다.

"지금 아주 영웅이 되었습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칼리안의 한 마디 말을 곧바로 실행했던 대쪽같은 신의. 적절한 위치에 표적을 세워 헤이시아 궁을 한방에 날려버리도록 유도한 칼 같은 계산. 건물 값 정도는 자신의 급여에서 제하라 외치던 멋짐까지.

아르센은 지금 발칸의 우상이 되어 있었다.

"이러다 빌헬름 관에 동상 세우게 생겼습니다."

실로 마법사다운 반응이 아닌가.

칼리안이 재밌다는 듯 소리내어 웃었다.

"일 처리가 그렇게 확실하니 제가 헤르츠 부군단장을 신용할 수밖에요."

"그리 부리지 마시지요. 다음에는 무엇이 없어질지 가늠도 되지 않습니다."

"아. 사실 저도 다음에 제가 뭘 부술지 모르겠네요."

헤실거리며 웃어보인 칼리안이, 앨런의 핀잔이 나오기 전에 얼른 본론을 꺼냈다.

"발칸에 자리 하나만 더 만들어주세요, 스승님."

"왕자님의 것입니까? 드디어 무얼 하나 손에 쥘 생각을 하셨나봅니다."

반가워하며 물었으나 애석하게도 칼리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아니라 히나요. 이제 발칸에 둘까 하는데, 앞서서 준비를 좀 해주셨으면 해서."

전날 밤 플란츠가 수련장에서 나간 뒤 마음을 굳혔다며 다부진 얼굴로 이야기하던 히나를 떠올린 칼리안이 이렇게 말했다.

"본래 헤르츠 경에게 말하려고 했는데 잔해 처리에 열의를 쏟는 중인 것 같네요."

"그리하지요. 어려울 것이 있겠습니까."

"고맙습니다, 스승님."

언제 무슨 말을 하든 흔쾌히 따라주는 앨런만큼 든든한 조력자가 또 있을까.

"그리고 헤르츠 경은 제가 시켜서 일을 벌였을 뿐이니 너무 타박하지 말아주세요."

타박이라니.

앨런이 무슨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지금 꾹 누르면 노래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얼굴을 한 채로 건물 잔해를 치우고 있습니다. 제가 얼굴을 맞대 본 이래 그렇게 신나있는 꼬락서니를 처음 보니 걱정 마시지요."

거짓이 아니었다.

그런 아르센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은 앨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치유술을 위해 부르시는 것일 테니, 오후에는 베로니카를 불러 돕게 하면 좋겠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나오는 바람에 앨런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는 표정을 했다.

"베로니카라면 스승님의 손녀 아닙니까. 지금 마법학원에 다니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요."

"맞습니다. 헌데 마법 재능은 고만고만한 것이 약에는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니 히나 그 아이의 심부름이나 하게 하면 어떠신지요."

"그렇게 두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대마법사이자 왕자의 스승인 백작이다.

유일하게 아르피아 궁에 집무실을 둔 앨런이 자신의 손녀로 하여금 시녀였던 히나의 일을 돕도록 하겠다는 말이었다.

"저 좋다는 일 시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습니다."

신분 차이 때문에 건넨 질문임을 떠올리지도 못한 듯한 대답. 얀이나 앨런이나 이런 구분이 잘 없었던 탓이다.

칼리안 역시 우려하는 것이지 스스로 신분에 구분을 두어 물은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더 이상 다른 것을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베로니카만 괜찮다면 저는 좋습니다. 일을 돕는 것을 떠나서 히나의 말 상대라도 되어 준다면 반가운 일이고요."

"그럼 당분간 왕자님의 새끼 코끼리도 좀 빌려주시지요. 발칸 놈들은 배우는 것을 참 좋아하니 수어를 배우는 데에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같은 생각을 했던 칼리안이 웃으며 대답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렇게 히나에 대한 일을 얼추 전달한 칼리안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제 자신이 배울 것에 대해 이야기를 꺼낼 차례였다.

곧 칼리안이 손바닥을 내밀어 무언가를 만들어보였다.

붉은 빛의 마력 덩어리.

칼리안이 평소 잘 사용하지 않아 불안정한 움직임을 보이는 그것을 보며 말했다.

"아무것도 담지 않거나 바람의 힘을 주로 사용하다보니 불을 다루는 것이 익숙하지가 않네요. 혹시 도와주실 수 있을까 해서 와주십사 부탁을 드렸습니다."

손 위에 올려진 것의 생김을 보고 칼리안이 배우려던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앨런의 표정에 잠시 그늘이 졌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제가 그만 잊고 있었습니다."

"저도 사실 뒤늦게 알게 되어서. 이제야 급히 연습을 해보네요."

"알겠습니다. 제가 가르쳐드리지요. 어려운 것이 아니니 금방 하실 수 있을 겁니다."

검은 돌과 텐실의 마차에 대한 이야기는 뒤로 미루는 것이 낫겠다 판단한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 * *

- 퐁당.

아침의 호수는 그리 예쁘게 반짝이더니 석양에 함께 물드는 호수는 왜 이렇게 처연하게 붉은지.

붉어서, 처연해 보이나.

돌아가는 앨런의 편에 얀을 함께 보냈다. 곧바로 수어 알려주기를 시작했는지 얀은 한나절이 지나고 저녁이 되어가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궁의 잔해를 치우는 인원과 수어를 배울 인원을 나누고 돌아가면서 알려주려면 시간이 꽤 걸리기는 할 터였다.

에반 브리센 후작을 만난 플란츠가 체르밀에 도착했다 하기에 키리에를 보냈다. 둘은 아직 수련장에 있을 것이다.

메를린이 함께 나오겠다는 것을 말려놓고 혼자 나왔다. 멀찍이 서 있는 두 명의 호위기사는 어차피 있으나 마나. 그냥 없는 취급 하기로 했다.

- 퐁당······!

그렇게 하여 혼자 남게 된 칼리안은 지금 손가락만한 마력 덩어리를 뭉쳐 물에 던지는 중이었다. 마치 작은 돌을 던져 넣는 것 같은 소리가 듣기 좋아서였다.

그렇게 아무 말없이 호숫가에 앉은 채로 밤이 되기를 홀로 기다렸다.

밤이 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차차 다가온 어둠이 짙게 내려앉고 붉었던 호수는 그저 검게 일렁였다.

곧 칼리안의 손에 붉은 빛이 어렸다.

아침에 앨런에게 급히 배운 것을 운용하느라 두 번을 꺼트린 뒤에야 제대로 된 모양을 만들어냈다.

"그 날은 어떻게 하는 건지 내가 잘 몰랐어. 말로만 전해들어서."

칼리안의 입이 이렇게 홀로 열렸다.

- 찰박.

불어오는 바람에 인 잔물결이 칼리안의 발 끝에 닿았다. 칼리안은 잠시 몸을 일으켜 손에 들린 붉은 빛을 물가에 내려놓았다.

"오늘도 꽃은 없어."

고요한 말과 함께 또 하나의 붉은 빛이 물 위에 올려졌다.

망자에게 건네는 한 마디 말에 띄우는 한 송이의 꽃과 촛불. 그렇게 건네는 수많은 불빛, 그만큼의 말이 망자의 마지막 걸음과 함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강에도 못 가지만 비슷하니까 봐 줘."

세 번째의 붉은 빛, 아니. 안네루시아를 따라한 불꽃이 호수에 띄워졌다.

오늘은.

칼리안의 기일이었다.

카이리스에서는 망자의 기일을 챙기지 않는다. 그래도 굳이 이렇게 한번 더 옛 칼리안을 떠올리고 있는 것은, 보내주기 위해서였다.

"미안."

이제는 옛 칼리안에 대한 부채감도 내려놓아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

이기적이라 할지 모르지만.

"나도 살고 싶어서."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그래도 지금은.

"미안해."

그렇게 미안하다 건네지는 말의 수 만큼 물 위에 올려진 불꽃들이 붉게 빛났다.

- 자박.

수십 개의 불꽃을 물 위에 올려두고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데 뒤에서 조용히 바닥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칼리안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오셨습니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이 시간에 굳이 칼리안이 앉은 곳까지 찾아 올 사람은 한 명 뿐이다.

풀썩, 하고 곁에 앉은 플란츠가 호수를 쳐다봤다. 붉게 빛나는 크고 작은 불꽃이 무엇인지는 묻지 않았다.

잠시 고개를 돌려 플란츠를 살피던 칼리안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조찬까지만 해도 없었던 이질적인 마력의 기운이 느껴진 까닭이다.

"······ 살고 싶다더니."

살겠다는 놈이 제 심장에 속박을 걸어놓고 왔다. 분명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을 것이다.

살기 위한 길을 열기 위해선 목숨을 거는 것도 아깝지 않다는 모순은 칼리안도 안다.

"내 아우님께서 어련히 살려두실까."

나른한 목소리의 대답이 들려왔다.

다시 호수로 고개를 돌린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너무 잘 아시네요."

어차피 칼리안은 플란츠가 죽게 두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칼리안도 플란츠도 걱정할 것이 없는 일이다.

곧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장의 속박에 대한 고민은 나중에. 옛 칼리안에게 해야 할 말은 다 했고 플란츠가 에반에게 얻을 것을 얻었다. 이 곳에 더 있을 이유가 없었다.

부는 바람에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올리던 플란츠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나만."

발을 옮기려던 칼리안이 가만히 멈춰섰다. 그리고 다른 말 없이 불꽃 하나를 더 만들어 플란츠에게 건넸다. 플란츠는 조용히 그것을 받아 들었고 칼리안은 체르밀 궁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던 플란츠의 손에 올려진 불꽃이 호수 위에 올려졌다. 방 안에 들어와 열린 창 밖으로 그 모습을 보던 칼리안이 손을 움직였다.

할 말을 모두 전했으면, 보내줘야 하니까.

향할 곳 없는 호수 위에 올려져있던 수많은 미안함이 하나 둘 떠올랐다. 거꾸로 오르는 별처럼 밤하늘을 밝히듯 높이 높이 날아올랐다.

그것이 누군가에겐 아름다운 광경이겠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속죄임을 칼리안이 안다.

유난히 많은 말을 담아서 유난히 느리게 올라간 마지막 불꽃 하나가 서서히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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