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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33화 (134/527)

제24장. 이해의 초석 (3)

아침 햇살이 깃든 호수의 윤슬이 참 아름답다.

오늘따라 창 밖의 저 모습이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지금 칼리안과 플란츠가 있는 곳이 2층에 위치한 식당이었던 탓이다.

그리고 이들이 굳이 식당까지 와서 식사를 하는 이유는 딱 하나.

"셋째에게 검을 배우기 시작했다 들었다."

굳이 체르밀 궁까지 와서 조찬을 가지겠다며 갑작스레 통보해 온 르메인 때문이었다.

덕분에 아침 잠 많은 칼리안은 새벽부터 울리는 종 소리에 부스스 눈을 떠야 했다. 플란츠라 해서 그리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란델은 심한 감기를 이유로 나오지 않았다.

'조찬 후에 잠시 들르겠다 전하게.'

르메인은 그런 란델의 태도를 책망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그 후 지금까지 다른 말 없이 식사를 이어나가다가 검술 수련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참이었다.

마시던 물을 조용히 내려놓은 플란츠가 간단히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검을 배우기 시작했다 하기에는 이제 고작 하루 지났다. 정확히는 하룻밤이 지났다. 전날 밤에 대련 두 번 해본 것이 다였다. 그나마 두 번째 대련은 칼 한번 부딪혀보지 못하고 끝났다.

빛이 번쩍하는 느낌과 동시에 첫 번째보다 조금 더 깊은 상처가 생기고 끝났으니까.

"그래. 둘이라도 사이 좋게 지낸다니 기쁘구나."

사이 좋단다.

칼리안과 플란츠의 손이 동시에 잠시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는데 플란츠는 접시에 둔 시선을 바꾸지 않은 채였다. 칼리안에게 대답을 넘기는 것이다.

정신 나간 동생놈과의 사이를 표현해 낼 만한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였다. 혹은 세상에 저런 미친놈과 사이 좋을 사람은 세크리티아 왕세자밖에 없을 것이란 말이 튀어나올까 걱정된 탓도 있었다.

거기에 더불어 짖는다는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인지 몰라도 동생놈이 좀 무는 것 같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플란츠를 슬쩍 쳐다본 칼리안이 르메인에게 대답했다.

"네. 사이가 아주, 좋습니다."

못한다던 거짓말이 술술 잘도 나온다.

"스스로의 단련도 해야 할 텐데 네 형의 검술까지 보아주겠다 하니 좋은 일이다. 다만 서로 다치지는 않도록 조심하거라."

칼리안이 속으로 웃었다.

'어쩐지 갑자기 찾아오셨다 했더니.'

어젯 밤 두 형제의 대련이 끝나고 히나가 수련장을 찾았더라는 말을 전해듣고 플란츠가 걱정된다는 이유로 와 본 모양이다.

부수는 것 좋아하는, 아니. 잘 하는 칼리안의 손이 행여라도 과했던 것은 아닌지 살펴보려고.

"네, 전하.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물론 굳이 말하지 않는 진짜 이유도 알 것 같았지만 칼리안은 짐짓 모르는 척 대답하며 생긋 웃었다.

창 밖의 호수처럼 반짝이는 그 웃음을 본 르메인이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플란츠는 그냥 물만 한 모금 더 마셨다.

남들은 못알아볼지 몰라도 칼리안은 지금 플란츠가 얼마나 많은 말을 물처럼 꾸역꾸역 넘겨내고 있는지 아주 잘 알았다. 다리 위에 얌전히 올려놓은 칼리안의 손 끝이 허벅지 위에 곡선 하나를 그려냈다. 진지해야 할 입을 대신해 웃어주는 것이다.

"네 몸은 좀 괜찮은 것이냐? 무리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구나."

칼리안이 너무 멀쩡한 얼굴로 야무지게 아침 식사를 하고 있던 탓에 셋째 아들이 죽을 고비를 넘긴지 며칠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야 상기한 르메인이 물었다.

질문 순서가 조금 바뀐 것이 아니냐는 말 대신 칼리안은 다시 한번 걱정 말라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 나았습니다."

······ 그래 보이는구나.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다행히 속마음과 조금 다른 제대로 된 대답을 꺼낸 르메인이 칼리안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근신이 풀리더라도 혼자 밖에 나서는 일은 절대 없도록 주의하거라."

주의라는 강경한 표현까지 쓰는 것을 보니 근신이 풀리더라도 호위기사는 절대로 물리지 않을 분위기다. 칼리안이 조금 풀 죽은 얼굴이 되자 르메인이 살짝 웃는 얼굴이 되어 말을 덧붙였다.

"왕실 숲까지는 가도 좋으니 정 답답하거든 그리 걸음하고."

"네, 전하. 감사합니다."

"그래."

엄마 찾는 강아지마냥 한 시를 가만히 있지 못하는 칼리안을 생각해서 해준 말. 왕궁의 북쪽에 있다는 그리 크지 않은 숲. 칼리안은 물론 옛 칼리안도 가보지 못한 곳이기도 했다.

"그런데 플란츠. 지난 번 보았을 때보다 마른 것 같구나. 혹여 아픈 곳이 있느냐."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잘 챙겨 먹어야지. 한참 자랄 때이니."

"네, 전하."

소소한 대화를 들으며 웃던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창 밖에 보이는 아름다운 전경 앞으로 붉은 두 눈이 언뜻 비쳐보였다.

'아······.'

칼리안의 얼굴에 떠올랐던 웃음기가 지워지듯 사라졌다.

평범한 아침. 어제와 다를 것 없는 하루의 시작. 숨긴 의미 하나 없이 오가는 대화. 아무것도 아닌 이 시간이 너무 평화로워서, 칼리안은 하마터면 잊지 말아야 할 것을 놓치고 그저 좋아할 뻔 했다.

- 네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얼마나 행복해했을까.

좋아할 뻔 했던 만큼의 미안한 마음이 차오른 칼리안이 오래도록 창문을 쳐다봤다. 밝은 창에 비치는 보석같은 눈동자를 그렇게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 칼리안.

* * *

"애오옹!"

배가 또 똥똥해진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입니다.' 고양이가 앞 발을 들어 플란츠의 손을 끌어당겼다. 졸린데 잠은 안오니 빨리 쓰다듬어 보라는 것이다.

다리도 꼬지 못하도록 무릎 위에 제멋대로 올라와 앉은 것으로 모자라 원하는 것이 또 남은 고양이를 본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손을 움직여 고양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른하게 감겨들어가는 서로 다른 두 색의 눈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또 다른 소리가 맞은편에서 들렸다. 애교섞인 고양이 울음과는 전혀 다른, 버석버석하기 짝이 없는 동생의 목소리였다.

"전하께서 오신 것을 너무 서운하게 여기지는 마십시오."

플란츠의 말은 앞 뒤가 없었고 칼리안은 항상 좀 뜬금없었다. 잠시 그 말의 의도를 헤아려보던 플란츠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다지. 별 생각 없는데."

그래도 대화가 곧잘 이어지는 것은 말을 나누고 있는 이들이 칼리안과 플란츠이기 때문이었다. 아마 다른 이들이었다면 이런 식의 대화가 이렇게나 자연스럽게 이어지지는 못할 것이다.

"네."

아무튼 칼리안이 서운해하지 말라 하는 것은 르메인의 방문 사유에 대한 것이었다.

칼리안이나 플란츠가 다쳐서 앓고 있을 때에는 찾아오지 못하다가 이제 와서 '플란츠가 혹시 다친 것은 아닌지'가 걱정됐다는 듯 발걸음을 한 진짜 이유 말이다.

란델.

르메인은 지금 둘째와 셋째 아들을 핑계로 란델을 만나보러 왔으리라.

그런 이유가 아니고서는 플란츠가 칼리안에게 두들겨지지 않고 무사히 잘 있음을 확인한 뒤 아프다는 란델을 굳이 만나러 가겠다 할 리 없으니까.

그래서 서운해하지 말라 한 것이다.

르메인이 이 곳에 방문한 이유가 따로 있다는 것에 대해서.

"애오옹······."

어느새 플란츠의 손이 멈췄는지 고양이가 나른한 소리를 내며 다시 졸랐다. 차 한 모금 마실 새도 주지 않겠다는 고양이의 채근에 플란츠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그래도 형님 걱정을 하신 것은 맞을 겁니다."

르메인이 변한 것을 모를 리 없었다.

플란츠는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내 아우님이 워낙 사나우시니."

그리고는 설핏 인상을 찌푸렸다. 한 곳을 두 번이나 베인 탓에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아서였다. 한동안 말 없이 있던 플란츠가 칼리안을 노려봤다.

조찬이 끝난 뒤 꾸역꾸역 플란츠의 방에 찾아온 칼리안이 어울리지도 않게 신경을 써주는 듯한 말을 왜 꺼내놓고 있는지도 알기 때문이었다.

플란츠가 짧게 입을 열었다.

"해. 사과."

"미안합니다."

준비된 듯 빠른 사과가 이어졌고 플란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왜 그랬는지 이유도 묻지 않았다.

칼리안이 잘못했고 사과 받겠다는 말에 사과를 했고 플란츠는 그 사과를 받았으니 더 필요한 것이 없었다. 물론 히나가 지금 이 광경을 봤다면 참 어처구니 없다 했을 일이지만.

"브리센 후작은 언제 만나십니까."

"오늘."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만나는지는 아시는 것 맞습니까."

아직 칼리안은 헤이시아 궁을 폭발시킨 또 다른 이유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플란츠가 이미 가늠을 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알아."

플란츠는 이렇게만 대답했다.

알고 있는 것이 어떤 내용인지 물어보고 확인하는 대신 칼리안은 슬쩍 웃기만 했다. 플란츠라면 알아서 잘 할 테니까.

"다녀오시면 오늘은 키리에에게 배우십시오. 저는 다른 일이 있어서. 그리고 지금은 저보단 키리에가 나을 겁니다."

칼리안의 검은 빠르고 날카롭다. 슬레이만의 검술은 묵직하고 강렬하다.

플란츠는 그 중간이었다.

칼리안의 것보다는 무겁고 슬레이만의 것보다는 날렵했다.

때문에 처음 배우기에는 키리에가 적격이었다. 플란츠보다는 가볍고 날렵한 검술을 쓰지만 칼리안보다는 무거웠으니까. 게다가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키리에에게도 큰 도움이 될 터였다.

플란츠는 다른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 * *

에반 브리센 후작의 얼굴이 그리 좋지 않았다.

근 1년 사이 이런 저런 고생을 많이 하긴 했지만 그 중에서도 지금만큼 마음 고생 심한 시기는 없었으리라.

실리케가 축출되고 난 뒤 브리센을 지지하던 귀족들은 열에 한 명 꼴로 등을 돌렸다. 그나마 그 정도 선에서 멈춘 것에는 플란츠를 붙들어 둔 덕이 한 몫을 했다. 그런데 그레이가 사고를 치고 칼리안이 지그프리드와 손을 잡으면서 상황이 악화됐다.

게다가 이번 사건은 브리센에 있어 악재중의 악재였다.

다섯에 한 명.

다섯에 한 명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슬금슬금 연락을 끊고 에반을 피하는 것이 눈에 확 보였다.

- 발칸!

바로 칼리안 때문이었다.

그 헤이시아 궁이 순식간에 무너진 것으로 모자라 르메인의 처벌이 지나치게 경미했다. 그것이 귀족들의 눈에는 칼리안에 대한 르메인의 총애로밖에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상황이 좋을 것 같지는 않은데."

때문에 에반을 보자마자 이렇게 물어오는 플란츠를 보며 에반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본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다 자라지도 않은 지그프리드의 코끼리에게까지 이용당하는 꼴을 보고 있으려니 할 말이 없군."

아니 지금 이게 누구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그러니까 대체 그 시간에 거기는 왜 기어들어가서 일을 이렇게 꼬아놓느냐는 눈을 한 에반을 향해 플란츠가 말을 이었다.

"내가 검을 쥐면 뒤집힐 것 같은데. 어때."

"무엇을 어떻게 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칼리안이었다면 이 정도 말로도 충분했겠지만 애석하게도 에반은 그렇지 못했다. 불필요한 말을 덧붙여야 함에 답답함을 느낀 플란츠가 짜증 섞인 말투로 입을 열어 계획을 말했다.

"기사단 카렌과 라온의 통솔권을 나한테 넘겨. 발칸을 반으로 나눠놓을 테니까."

자신만만한 말에 에반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것을 본 플란츠가 나른한 얼굴로 말했다.

"안 믿네."

"아닙니다 왕자님. 믿지 않는다기 보다는······."

그렇게 말을 얼버무린 에반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참동안 생각을 이어나가던 에반의 입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 의뭉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고스란히 매단 채로 에반이 입을 열었다.

"기사단 통솔권 드리겠습니다. 대신."

그렇게 말한 에반이 자신의 심장을 가리켜보이며 말을 맺었다.

"맹세의 인을 걸고 약속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브리센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맹세의 인.

약속을 어긴 이의 심장을 옥죄는 계약.

"내 심장을 걸라는 말이군."

에반은 지금 플란츠에게 칼자루를 주는 대신 목숨을 걸라 말하고 있었다. 그리하지 않으면 믿지 못하겠다고.

에반을 쳐다보는 플란츠의 입에 아주 오랜만에 그려보는 미소가 지어졌다. 그 언젠가의 실리케를 꼭 닮은 해맑은 미소였다.

"해."

그까짓것.

아깝지도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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