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32화 (133/527)

제24장. 이해의 초석 (2)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붉은 색과 푸른 색이 맞닿았는데 어찌 저리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앉아 있다가 창밖이 점점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완벽히 다른 두 색으로 나뉜 하늘이 전혀 이상하지 않아서, 석양이 내리는 그 하늘을 잠시 바라보던 생각 많은 대마법사가 꽤 감성적인 말을 꺼냈다.

"저 불가해한 뒤섞임도 세렌티의 가호일지."

사실 그것은 굉장히 마법사답지 않은 소리였다. 하지만 지금 앨런이 고민하는 주제 역시 마법사가 할 만한 것은 아니었으니 큰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 200여년 전 시온 제라드라는 이름의 학자가 '인간의 힘으로도 신물을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을 했다.

- 출신지와 신상과 관련된 내용은 확인되지 않으며 본인의 학설을 증명할 방법을 찾던 중 실종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에우리아가 건넨 조사 결과를 함축하면 이러했다.

마법사 협회의 자료실에 있던 신학 관련 서적을 모조리 뒤져 찾아낸 결과라 했으니 텐실을 찾아가지 않는 이상 다른 정보를 알아내기는 어려울 터였다. 사실 저 얼토당토 않은 내용에 대해 다른 정확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 나라가 있기는 할까 하는 의문도 든다.

생각이 이어지는 바람에 내려두었던 커피가 어느새 완전히 식어 있었다. 때문에 귀한 능력을 잠시 낭비하여 마력으로 커피를 데운 앨런이 쓰디 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신물을 만든다······."

전날 에우리아를 만났을 때 꺼냈던 것과 비슷한 혼잣말이 다시 흘러나왔다.

커피의 쓴 맛 때문인지 혹은 침범하지 말아야 할 선을 건너려 한 이가 있었음을 알게 된 까닭인지 몰라도 입이 아주 깔깔했다.

언젠가 르메인의 시종 라울이 챙겨줬던 코코넛 쿠키 하나를 집어먹은 앨런이 다시 한번 생각에 빠져들었다.

"우리 왕자님 안 그래도 고민하실 거리가 넘쳐날 것인데. 과연 언제 알리는 것이 좋으려나."

이번 일과 연관이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하지만 찜찜하기 그지없는 기록을 칼리안에게도 알려줘야 할 텐데.

'그러고보니 란델 왕자를 만나시겠다 하셨었지.'

그러다 이렇게 칼리안이 란델을 다시 한번 만나보겠다 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때문에 지금의 정보와 텐실이 연관되지 않았을까 하는 선입견을 가지고 란델을 대하지 않도록 우선 칼리안이 란델을 만나보고 온 뒤에 알리는 것이 낫겠다 마음을 정했다.

생각을 갈무리하며 저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던 앨런이 다시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손님이 오시나."

그리고는 이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이런 시간에 커피를 내어놓아도 괜찮을까 고민을 하다가, 조금 덜 진한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새로 내려지는 커피 향을 음미하고 있으려니 손님이 도착했다. 물론 체이스였다.

"이 시간이면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왔습니다."

자리에 앉아 이렇게 건네오는 말에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전하께서 늙은이를 워낙에 잘 써먹으시니 궁에서 나가지를 못합니다."

사실은 칼리안과 관련된 일로 고민이 깊어 가지 못했으나 그냥 일이 많아 귀가하지 못했다는 핑계만 댔다. 그리고는 조용히 앉아 커피만 쳐다보고 있는 체이스를 향해 먼저 입을 열었다.

"심기가 많이 어지러우신가 봅니다."

"마나실 경 앞에서 속내를 감추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체이스가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다.

"낮에 마나실 경을 만나러 이 곳에 잠시 왔었습니다. 그러다 발칸의 부군단장을 만나는 바람에."

아, 하고 앨런이 잠시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 아르센을 떠올릴 때 제 가슴을 쓸어내리던 칼리안과 지금의 체이스가 지어보인 표정이 같아서였다.

하기사 플란츠의 검이었을 발칸의 군단장이 아니던가. 그러니 왕과 왕제 모두 아르센이 직접 마지막을 내렸으리라.

"아. 나는 괜찮습니다."

앨런의 표정을 본 체이스가 이렇게 말했고 앨런이 작게 혀를 찼다.

플란츠를 살리고 란델에게도 손을 내밀어보려는 그 칼리안조차 제 심장을 꿰뚫었던 냉기를 잊지 못했다.

체이스라 해서 다를 리 없다.

그런데도 고스란히 그 감각을 기억해내고 있는 얼굴로 괜찮다 하고 있으니.

심지어 체이스는 한 번을 보고 한 번을 겪었을텐데.

"직접 겪은 일이 아님을 알고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니 괜찮습니다."

"보통은 그리 하지 못합니다. 사람이니까요."

칼리안은 아르센을 받아들였다. 플란츠를 살려냈다. 체이스는 그런 칼리안을 믿으니 괜찮다 한다.

그런데 베른은 체이스를 죽음에 이르게 할 뻔 했던 데블란을 평생 용서하지 않았다 했다. 체이스는 칼리안을 공격하게 만든 하얀 수리를 용서하지 않았다.

칼리안은 플란츠가 옛 칼리안을 괴롭힌 이유조차 알려 하지 않는다. 옛 칼리안을 대신하고 있음을 미안해하고 있는 것과 별개로 르메인이 왜 그리 무관심했는지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이유를 알고 생각을 하면 이해하게 되고, 그러다 결국 용서를 하게 될까봐.

"두 분 모두 이해의 범위가 어찌 그모양이신지."

아무리 과거의 일이라 해도 감정이 섞이게 마련인데 어쩜 이렇게 철저하게 과거의 일과 아닌 것을 자로 재듯 나누어 대처하고 있는지. 체이스까지도.

"결국 범위를 정한 것은 그 아이입니다. 나는 따르고 있을 뿐이니."

"참 대단들 하십니다."

결국 앨런이 안타까운 목소리를 냈고 체이스는 조용히 웃었다.

"그 일로 온 것이 아니라 그 아이에게 전할 말이 있어 왔습니다."

"왜 직접 만나지 않고 말만 전해달라 하십니까."

"텐실의 마차 축이 부러진 것은 사고가 아닐 겁니다."

앨런의 질문을 듣지 못했다는 듯한 부탁의 말. 그 말을 들은 앨런이 살짝 눈을 찌푸렸다. 그 눈초리를 읽었음에도 체이스는 앨런의 생각에 대한 다른 반응 없이 말을 이었다.

"그것을 염두에 두라 전해주셨으면 합니다."

텐실의 마차 축.

텐실의 현 국왕과 왕세자가 한꺼번에 사망했던 사고를 말함이었다. 그리고 그 일은 앨런이 알지 못하는 내용이었다.

때문에 지금 체이스가 하는 말도 채 이해하지 못했지만 아무튼 텐실과 관련이 있는 내용인 듯 했으므로 일단 앨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리 전해드리지요."

"고맙습니다."

"해서, 언제쯤 출발하실 요량이십니까?"

체류하기로 예정했던 날이 채워져 가고 있으니 하는 소리였다.

"고민 중입니다. 어찌 해야 할지."

"왕자님을 생각하면 영영 가지 못하게 해두고 싶다가도, 또 다시 생각을 해보면 지금 당장 세크리티아로 돌아가라 등을 떠밀고 싶어지니······."

복잡한 마음을 가득 담은 앨런의 말에 체이스의 입에서 낮은 한숨 소리가 나왔다.

스스로도 같은 생각을 했기 때문이리라.

* * *

칼리안이 만들어내는 검은 그 어떤 것보다 예리했다.

때문에 그것을 온전히 받아내며 상대할 수 있는 이는 슬레이만과 아르센, 그리고 드미레아와 키리에 정도였다.

칼리안의 손에 들린 그 독특한 검을 쳐다보는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길게 말려 올라갔다.

"그것이군."

플란츠 때문에 들켰다고, 그래서 망했다고 했던 힘.

그것을 이제야 보게 되었다.

지금껏 계속해서 수련용 철검만 들어 플란츠와 대련을 해왔던 칼리안이었다. 그런 칼리안이 제 힘을 꺼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플란츠도 잘 알았다.

칼리안이 정말로 자신의 검을 가르쳐 줄 셈인 것이다.

"브리센 후작의 검을 본 적은 없습니다만. 형님의 것과는 많이 다를 겁니다."

칼리안이 검 끝으로 바닥을 톡톡 치다 이렇게 입을 열었다.

"에반 브리센이 기사들에게 전수하고 기사들이 형님에게 알려줬던 것은 브리센 가문의 진짜 검술이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그럴 만한 인물이 아니라서."

"그렇겠지."

플란츠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터였다.

브리센 후작가를 누군가 잇는다면 그레이 혹은 그레이의 아들이 물려받게 될 테니 플란츠에게 브리센의 검을 알려 줄 이유가 없었다. 왕위에 오르게 될 지도 모를 이에게 브리센의 검을 알려줘봐야 에반에게 득이 될 것이 없지 않겠나.

늘어뜨린 검을 쥐고 있던 칼리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물론 저 역시 같습니다. 저 역시 형님께 제대로 된 제 검을 보여드린 적 없습니다."

에반과 비슷한 이유였다.

브리센의 인물에게 베른의 검술을 알려줘서 좋을 것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칼리안의 검 끝이 살짝 올라가는 것을 본 플란츠의 눈빛이 바뀌었다. 포식자를 마주한 늑대와 같은 날카로우면서도 긴장감 가득한 눈을 한 채 칼리안의 검 끝을 내려다봤다.

그것을 본 칼리안의 입이 긴 호선을 그렸다.

"그리 보고만 계시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칼리안의 모습이 플란츠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실전에서 그 누구도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라는 말과 함께 검을 보내지 않는다. 때문에 칼리안은 스스로가 약자가 아님에도 항상 기습적으로 대련을 시작했다.

"······ 죽습니다."

속삭이는 듯한 작은 목소리가 방향을 가늠하지 못할 곳에서 흘러나왔다. 플란츠가 검을 휘둘렀다.

- 카아앙!

키리에의 것보다 조금 더 묵직한 검이 칼리안의 공격을 막아냈다. 뒤이어 플란츠의 검이 대기를 갈랐다. 공기를 찢는 소리와 함께 무게감 있는 타격음이 연이어 터져나왔다.

플란츠의 검 역시 약하지 않다.

결코 약하지 않다.

드미레아에게 쉽게 질 만큼은 아닐 터였다. 열 번을 싸우면 두 세 번은 플란츠가 이길 것이라 여겼다. 수련하는 시간의 차이를 생각한다면 플란츠 역시 재능이 있다는 소리였다. 지닌 핏줄이 있으니.

- 쌔애액!

- 카강! 캉!

한기를 내뿜는 듯한 칼리안의 검과 묵빛의 검이 얽혀들며 강렬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예리한 날을 세우며 쇄도해오는 검격이 둔중한 기운의 검에 막혔다. 그리고 다시 공격을 이어간다.

심장을 향해 달려드는 검을 쳐낸 칼리안이 힘이 뻗어나간 방향으로 몸을 회전시키듯 검을 내질렀다. 재빨리 허리를 틀며 공격을 흘려보낸 플란츠가 대각선으로 검을 내리그었다.

- 카앙!

언제 회수했는지 모를 검으로 공격을 막은 칼리안을 본 플란츠가 칼리안의 검을 밀어냈다. 그 후로 몇 수가 오갔는지는 아무도 세어보지 않았다. 날카로운 공격과 틈 없는 방어가 계속 이어졌을 뿐이다.

칼리안의 모습이 다시 사라졌다.

이전에 보여주던 움직임과 격이 다를 만큼 빠른 속도.

분명 실제로는 저보다 더 빠를 터였다. 대체 어떻게 하면 저런 속도를 낸단 말인가.

- 쌔애액!

어느새 뒤에서 달려드는 예기를 느낀 플란츠가 몸을 틀며 검날을 앞으로 했다. 여지 없이 강렬한 타격음이 터져나오며 보이지도 않던 검이 플란츠의 미간 바로 앞에서 막혔다.

"생각이 많으셔도, 죽습니다."

짜증나는 놈!

"그만 좀 짖으라고."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꾸한 플란츠의 눈에 다시 한번 날이 섰다. 화려한 궤적이 허공을 가르며 뻗어나갔다.

칼리안이 서 있던 곳도 아닌 나아가고 있던 곳도 아닌 완전히 다른 방향을 향해서였다.

- 카아앙!

날붙이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공기를 찢었다.

급히 발을 멈추고 플란츠의 공격을 쳐낸 칼리안의 입가에 웃음이 그려졌다. 플란츠가 그 짧은 사이 칼리안의 동선을 읽고 다음 위치를 '눈치' 챘다.

역시 똑똑한 플란츠.

칼리안이 땅을 박찼다.

제 키보다 높이 솟은 몸이 한 순간 형체를 일그러뜨리며 사라졌다. 이번에도 칼리안이 향할 곳을 빠르게 판단한 플란츠가 오른쪽으로 몸을 돌리며 검을 뻗었다.

그리고,

- 사아악!

목 언저리의 기분 나쁜 느낌과 함께 뼛속까지 치미는 한기가 플란츠에게 전해졌다.

예상한 방향과 완전히 반대되는 곳에서 뻗어나온 유리조각 같은 검이 플란츠의 목을 가볍게 스치듯 베어냈다.

또 목을 베였다.

칼리안의 승리였다.

* * *

히나의 손에 온기가 어렸다.

한 차례 칼리안 혼내기를 끝낸 히나가 플란츠의 목에 난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보던 칼리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문득 떠오른 기억 때문이었다.

과거의 플란츠가 굳이 운철을 얻어다 검을 만들어 사용했던 이유. 어쩌면 단순히 귀한 재료라는 이유만으로 운철을 가져간 것만은 아닐 지도 몰랐다.

'나머지 한 자루의 주인은 지그프리드 공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는데.'

한 자루는 플란츠가 사용하고 그리고 또 한 자루는 지그프리드 공작저로 보냈던, 오러를 담을 수 있는 검. 어쩌면 슬레이만을 위해 보낸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또 어쩌면.

"제 기대가 큽니다, 형님."

"또."

분명 '또 짖지' 라는 말일 테니 칼리안은 그 말을 가볍게 무시해버렸다. 이런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히나가 가만히 웃으며 손짓했다.

- 다, 됐어요.

그리 큰 상처가 아니었으니 아무는 것도 금방이다.

상처 치료가 끝난 플란츠가 자리에서 일어나 별 다른 말 없이 수련장 밖을 향해 걸어나갔다. 플란츠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히나가 칼리안을 향해 손을 움직였다.

- 다행이에요.

"뭐가?"

그리고 히나는 늘 그래왔듯 햇살같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대답을 건넸다.

- 자상한 왕자님이랑, 좋은 왕자님이랑, 많이 친해진 것, 같아서요.

······ 음. 잠깐만.

섞이지 말아야 할 말이 하나 들어있는데.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우리 히나'의 손짓을 보던 칼리안의 발이 조용히 멈췄다. 언젠가 한 번은 보겠지 했지만 벌써부터 보고 싶은 마음은 눈꼽만큼도 없었던 한 단어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좋아하는'과 '좋은'의 차이는 구분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이성적인 사고는 그냥 깔끔하게 집어치운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잠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형님."

애증해 마지 않는 우리 형님 너 이 새끼 잠깐 저랑 대련 한 번만 더 하고 가시라고.

그런 의미를 담은 예쁘디 예쁜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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