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장. 이해의 초석 (1)
- 팔락
오늘의 에우리아는 마법사 협회장이기도 했고 칼리안 전용 정보조직의 보스이기도 했다. 그런 에우리아가 건넨 서류를 넘겨보던 앨런이 입을 열었다.
"이건."
그리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지금 앨런은 칼리안이 에우리아에게 부탁했던 '검은 돌'에 대한 조사 결과를 확인하러 찾아온 길이었다.
'가지고 있으라고, 때가 되면 알게 된다 했습니다.'
시스파니안의 말을 전해주던 칼리안의 목소리가 잠시 떠올랐다. 그 말대로인지는 몰라도 검은 돌에 대한 내용은 고서적 어느 곳에서도 나오는 것이 없었다. 다만 에우리아는 그것과 별개로 조금 흥미로운 내용을 앨런에게 전한 상태였다.
소파에 기대 앉아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앨런이 말했다.
"자네 혼자 조사한 건가?"
"네."
앨런이 에우리아의 눈을 지긋이 쳐다봤다. 그 모습을 보던 에우리아가 다소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너무 큰 비밀을 알았으니까 이제 죽어라, 그런 말 하실 얼굴인데."
애들 가르치는 사람이 무슨 그런 재미 없는 농담을 하는건지. 하는 생각을 하며 에우리아를 쳐다보고 있던 앨런의 얼굴이 굳었다. 농담이 아닌 얼굴이다.
"나를 대체 어떻게 보는데 그런 말을 하나?"
눈 하나 깜빡 안하고 사람 태워죽이는 분이요, 하고 대답하려던 에우리아가 곱게 입을 다물었다. 칼리안의 주변에 있으면서 무력을 쓸 줄 아는 이들 중에 살생한 수가 가장 적은 사람이 바로 앨런임을 깨달은 탓이다.
"매우 이성적이고 인정 많으신 대마법사님이시죠. 제가 실언했습니다."
이렇게 말을 바꾼 에우리아를 보고 있던 앨런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앞에 놓인 사과를 집어들려다 멈칫했다. 사과 껍질이 녹색인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실 것이 분명한 사과 대신 차를 들어 한 모금 삼킨 앨런이 에우리아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무튼 이 일은 절대 입 밖에 내지 말게."
"왕자님께는요."
"왕자님께도."
에우리아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칼리안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말을 그대로 따르기가 꺼려졌기 때문이다.
"마나실 백작님. 제가 딱히 왕자님과 주종 관계는 아니긴 한데 그래도 이게 왕자님께서 알아봐달라고 말씀하신 거라서요."
이런 키리에같은.
앨런이 혀를 쯧 찼다.
아무리 칼리안이 시킨 일이라 해도 다 이유가 있으니 입을 다물라 하는 것을 키리에나 에우리아나 곱게 말을 듣질 않는다.
앨런을 그야말로 살아있는 신처럼 여기며 떠받들던 에우리아가 아니던가. 그런 그녀가 이제 싫다는 소리를 곧잘 하는 것이다.
"지금 아시면 안되네. 내가 알아서 말씀드릴테니 아무튼 자네는 입 닫게."
"······ 네."
"이 일에 더 이상 손 대지 말고. 정말 죽을지도 모르니까."
마법사 협회장이라는 이름이 헛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무력에 있어서는 아르센보다 확실한 우위에 있는 에우리아였다. 다만 '그들'이 그 칼리안을 어떤 상태로 만들었는지 잘 알고 있었던 탓에 이번에는 다른 말 없이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래도 키리에보다는 에우리아쪽이 말을 좀 잘 듣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다행이라 여겨야 하는 것이 기가 막혀서 앨런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서류를 가장 앞으로 넘겨 첫 장부터 다시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사람이 만든 신물이라······."
우려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낮은 중얼거림이 앨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 * *
언젠가 칼리안이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엘프들이 모두 나쁜 것은 아니라고.
그리고 르메인은 지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엘프라는 족속들은 왜 다 저따위인가.'
애석하게도 시아와 같은 착한 엘프가 있음을 겪어보지 못한 르메인의 얼굴은 차갑게 굳은 채였다.
로젤리타 중인 카이리스 3왕자를 이용해먹으려 든 것도 모자라 제대로 된 사과도 하지 않은 엘프들이 아닌가.
그런 엘프의 사절단이 르메인의 생일을 축하한다며 방문했다. 때문에 르메인은 그들의 왕궁 내 체류를 허락하지 않았다. '굳이 왕궁에 머무르고 싶다면 이번에 사과하고 다음에 다시 와라' 정도로만 내용을 전달했다. 물론 르메인이 엘프들의 카이리시스 방문을 허락했을 당시에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던 사후 통보였다.
그러니 한 마디로 그것은, '내 아들이 맞은 뒤통수 너희들도 맞아봐라' 라는 이름의 큰 몽둥이라 할 수 있겠다.
이에 대해 엘프들은 곧바로 항의하지도 못했다. 르메인이 칼리안의 잠적과 왕궁 내 폭발사고를 이유로 만남을 계속 미루다 이제야 그들을 대면하고 있었던 탓이다.
"대장로께 내용을 미리 전했다면 좋게 끝났을 일을 이렇게 키우다니요. 문제를 일으켰던 이들은 지금 우리의 규율에 따라 처벌을 받고 있습니다."
"문제 일으킨 엘프가 벌을 받았든 말았든."
중요한 것은 그 부분이 아니었으므로 르메인은 냉랭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것까지 내가 염두에 두어야 하나."
사실 이 정도 참았으면 많이 참았다 할 일이다.
칼리안이 굳이 전하지 않았던 일을 앨런을 통해 들었을 때 당장 군대를 보내 그 숲을 싹 태워버리라 명하고 싶던 마음을 간신히 되돌렸다.
"불편한 점이 있었으면 그대들의 대장로가 직접 말하라 전하게. 물론 그 전에 사과와 감사가 있어야 할 터."
"사과와 감사라니. 무엇을 사과하고 무엇을 감사하라는 겁니까."
"일국의 왕자를 우롱한 것에 대한 사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살려둔 왕자의 자비에 대한 감사."
이렇게 말하는 르메인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 * *
시종을 미리 보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텐데.
뒤늦은 후회를 해보아야 이미 늦었음을 안다. 알면서도 굳이 이런 생각을 하며 자신을 책망하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숨겨야 할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버릴 것 같아서였다.
"카이리스 마법사단 발칸의 부군단장 아르센 헤르츠입니다. 세크리티아의 왕세자께 인사드립니다."
앨런을 만나기 위해 르메인의 집무 궁인 아르피아에 잠시 들른 길이었다. 그런데 앨런이 외부 일정으로 부재중이라는 말을 듣고 아르피아 궁에서 나오던 중 마주치고 말았다.
- 왕제는 전사했다.
조금 어려진 얼굴과 조금 더 긴 머리.
여전히 당당하고 여전히 정중하며 여전히 냉철한 태도.
체이스가 잠시 자신의 가슴께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고요한 미소를 애써 지어보이며 앞에 선 아르센을 향해 대답했다.
- 그 왕제를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는데. 안타깝게 됐군.
"이렇게 만나는군요."
체이스의 화답에 아르센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보였다. 늘 '반갑다' 하던 평소의 인사와 다르다는 것을 느꼈으나 기사 테일란은 다른 말 없이 체이스의 뒤에 서 있었다.
- 너무 원망하지는 말았으면 하네.
어떻게 원망하는 마음이 안 들까.
어떻게 다 접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겪지 않은 일의 기억만 떠올린 채로도 이렇게 흔들리는데, 너는.
상념이 지워지지 않은 탓에 체이스가 잠깐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여전히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아르센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 헤르츠 부군단장. 이름을 많이 들었습니다. 칼리안 왕자를 따르고 있다고요."
왕세자님 저 놈이 왜 남의 나라 사정에 신경을 쓰고 계시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의 아르센과 우리 주군께서 또 세작들이 알아온 비밀을 입에 올리시는구나 하는 표정의 테일란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
그렇게 테일란과 무언의 감정을 담은 눈인사를 주고 받은 아르센이 입을 열었다.
"발칸은 전하를 따릅니다."
이렇게, 발칸의 부단장인 아르센 헤르츠는 르메인을 따른다고만 답했다.
마법 잘 쓰고 싸움에 물러서지 않고 폭발을 즐기는 아르센 헤르츠는 칼리안의 말만 듣는다는 소리는 타국의 왕세자에게 알릴 만한 내용이 아니었으니까.
그것으로 대답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체이스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대비 없이 아르센을 딱 마주친 탓에 잠시 평정심을 잃을 뻔 했던 체이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왕비궁과 관련된 일은 유감입니다."
아르센이 잠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지금까지 저 말을 수백 번은 들은 것 같았다. 각오하긴 했지만 타국의 왕세자까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그나저나, 오래된 건물이던데 주저함이 보이지 않더군요."
이런 체이스의 말은 아르센에게 있어 꽤 의외의 것이었다.
아르센이 체이스의 보라색 눈을 쳐다봤다.
내막을 모르는 이의 말투라기에는 지나치게 느긋한 감이 있었다.
"지나간 시간에만 얽매여서 더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있겠습니까."
때문에 아르센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 정도의 건물은 카이리스 어디에나 있다는 말도 붙일까 하다 그만두었다. 아무리 아르센이라지만 타국의 왕세자에게 싸움을 걸 정도의 인물은 아니었다.
"그렇군요."
체이스가 작게 웃었다.
아르센은 칼리안이 의도한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로 일을 벌였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웃은 것이다.
체이스가 이런 질문을 한 이유는 아르센이 마법사이기 때문이었다. 마법사에게 있어 시스파니안이 머물렀던 장소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체이스도 잘 알았다. 때문에 아르센이 그러한 궁을 칼리안이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무너뜨렸는지 확인을 좀 했다. 아르센에게 그 정도의 신의가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아르센이 칼리안이라면 저 건물보다 더 중요한 것을 위해 일을 시켰으리라 믿고 일을 저질렀음을 알게 됐다.
체이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정말 미안하네.
그 날.
아르센이 마지막으로 건넨 말이 문득 떠올랐다.
* * *
"브리센 후작은 만나셨습니까?"
갑작스레 건네진 질문이었으나 플란츠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아직."
"네."
칼리안과 플란츠의 대화는 여전히 이런식이었다. 대화의 길이도 짧고 오가는 말도 적었다.
실리케가 비수를 들었던 날 이후 왕자들의 조찬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래도 그 전까지는 꼬박꼬박 침묵 속에서 식사를 함께 했던 형제였으니 대화가 적다는 것은 플란츠에게 있어 그리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불편한 것은 딱 하나.
"왜 자꾸 오는데."
동생 놈이 식사 때마다 앞에 앉아있다는 것 뿐.
처음 이틀은 그러려니 했다. 플란츠를 생각한다며 4층까지 올라와 식사를 할 만한 놈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유를 모르는 것도 아니었으니 그냥 조용히 넘어갔다.
그래서 이틀 동안 별 말 없이 꾸역꾸역 식사도 했다.
그런데도 계속 오는 것이다. 마치 그 날 이후 플란츠의 방에서 나가지 않았던 그 때처럼.
"말 상대 해드리고 좋지 않습니까."
"또 짖지."
진심이라고는 조금도 섞이지 않은 저 뻔뻔한 대답에 플란츠가 짜증 가득한 목소리를 냈다. 그 많은 빵과 고기와 샐러드를 먹은 뒤에도 배가 차지 않았는지 바나나를 까먹던 칼리안이 손에 들린 것을 흔들어보이며 말했다.
"벌써 다 드셨습니까. 과일은 손도 안 대시고."
"참견 말고, 대답."
"검 가르쳐드릴게요."
칼리안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것이 과연 왜 자꾸 오는지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는지는 신경쓰지 않은 채, 별 것 아니라는 듯한 투로 계속 말했다.
"키만 크지 생각보다 약하시던데. 검술 배울 수 있을 만큼 잘 드시고 쑥쑥 크셔야죠. 그래서 계속 옵니다."
······ 아니. 계속 짖었다.
애초부터 선택지 따위를 준 적이 없던 듯한 저 태도는 마음에 안 들지만 검을 배우는 일이 싫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겨하리라는 것을 아니 저렇게 당당하게 굴고 있는 거다.
"나가."
"네."
이럴 때만 말을 잘 들으니 결국 짜증이 치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