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30화 (131/527)

제23장. 그런 날이 온다면 (9)

툭,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자신의 방에 내려온 칼리안이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검은색 일색인 칼리안의 방과 달리 플란츠의 방은 꽤 환했었다. 커튼이며 카펫이며 멀리 침실 안 쪽으로 보이는 침구며 대부분 밝은 색이었다.

당연히 고양이 때문일 터였다.

무시무시할 만큼 털이 빠지는 고양이가 온 방을 휘젓고 다닐테니 별 수 있겠는가. 밝은 옷만 입는 것처럼 방도 밝아진 것이겠지.

그런 생각을 하던 칼리안이 이제 막 방에 들어온 얀을 보며 말했다.

"앞으로 4층에 있을 땐 민트 차 올리지 마."

싫은 티를 팍팍 내면서도 굳이 민트 차 한 잔을 싹 비워낸 플란츠의 표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고양이한테도 맞춰 사는 플란츠 성격에 차가 입에 안맞는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으니 하는 말이었다.

"끼니 때마다 계속 올라가시게요?"

"당분간은."

칼리안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고 의외로 얀은 그리 거부감 없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그리고 헤르츠 경을 부르라 하셨는데 아무래도 오늘 오기 힘들 것 같습니다."

"왜, 무슨 일 있어?"

혹시라도 이번 일로 불이익을 받았을까 걱정되어 묻는 말에 얀이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헤이시아 궁 잔해 처리하는 것을 돕는다고 합니다."

다른 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르센이 자리를 비우고 칼리안을 찾아올 수 없는 상황인 것은 맞았다.

귀한 능력 가진 마법사 뒀다 어디 쓰냐는 앨런의 의견에 따라 헤이시아 궁의 잔해 처리에 발칸이 투입된 까닭이다. 그것은 르메인이 아니라 발칸의 군단장인 앨런이 내린 벌이었다.

툴툴거리면서 일하고 있을 것이 분명한 아르센의 모습이 떠오른 탓에 결국은 참았던 웃음이 터졌다. 한참을 웃던 칼리안이 대답했다.

"알겠어. 이따 회식이라도 하게 돈이라도 보내줘."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얀이 가지 않았다. 또 할 말이 있다는 것 같았기 때문에 칼리안이 얀을 쳐다봤고 얀이 입을 열었다.

"밖에 지그프리드 소공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누가 찾아와서 기다리고 있든 왕자가 시킨 일에 대한 보고와 알아야 할 내용의 전달이 먼저였으니 다른 내용을 모두 전한 뒤에야 그 말을 꺼낸 것이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들어오라고 해."

"네, 왕자님."

간단히 대답한 얀이 밖으로 나간 뒤 오래지 않아 드미레아가 들어왔다. 그런 드미레아를 본 칼리안이 씩 웃었다.

내가 이래서 드미레아를 좋아하지.

드미레아는 짙은 감청색의 바지 정장을 입은 채였다. 무도회에 참석하기 전에 왕궁에 왔을 때에는 가벼운 원피스를 입었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런 드미레아가 칼리안을 향해 가볍게 예를 보인 뒤 칼리안의 맞은편에 앉았다. 곧 얀이 들어와 아무 말 없이 차 두 잔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자신의 동생이며 집안의 일이 연관된 이야기가 오갈 것임을 모르지 않을텐데도 끼어들거나 간섭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얀. 너도 앉아."

얀이 듣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었을 뿐더러 어찌됐건 얀도 같은 가문 사람이니까.

가볍게 고개 숙여 보인 얀이 드미레아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 둘의 대화를 듣기는 하겠으나 끼어들지는 않겠다는 무언의 표시였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속으로 잠시 웃었다. 무엇때문에 저렇게 선을 긋는지 알 것 같아서였다.

체이스가 함께 있으면 항상 한 발 물러나 있는 것으로 체이스를 존중했던 베른을 떠올리게 했으니까.

그런 얀을 존중하기로 한 칼리안은 얀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리고 드미레아를 보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야, 정혼자님."

농담 섞인 인사에도 얀은 별다른 반응 없이 앉아있었고 드미레아는 실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 '정혼자'라는 소문에 대해 짧은 말을 전했다.

"그 소문은 바나나 값으로 치고 저도 잘 쓰겠습니다."

밖에서 칼리안을 제 정혼자라 소개하고 다니는 것으로 저택에서 칼리안이 먹어 치운 바나나 값을 대신하겠다는 말이다. 물론 칼리안도 필요에 의해 받아들인 소문이었으나 드미레아 역시 덕을 보고 있었으니까.

"바나나 두 송이에 내 이름을 판 셈이 됐네."

"워낙 많이 드셨으니, 적당한 값인 것 같습니다."

칼리안이 꽤 오랫동안 웃는 소리를 내다 물었다.

"그래. 브리센 후작은 다른 반응 없어?"

"네. 특별한 반응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에반 브리센 후작을 얌전히 만들기 위해 무슨 일을 했는지 까지는 굳이 전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제 조용해진 것은 사실이니까.

"저는 무슨 일로 찾으셨습니까."

때문에 이렇게 본론을 꺼내드는 드미레아를 향해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곧 기사단을 하나 만들거야. 그것 때문에 에이프린 백작의 기사들을 지그프리드 공작저에 잠시 숨겨두려고 하는데."

"네. 그 얘기는 아버지에게 전해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아, 그럼 얘기가 빠르겠네."

"왕궁의 기사단을 대체할 예정이라 들었는데, 맞습니까."

"원래는 그랬는데 생각이 좀 바뀌었어. 계속 왕궁 밖에 있을 새로운 기사단으로 키울거야."

드미레아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왕궁 밖에 있을 기사단이라면 칼리안의 사병을 의미하는 것인지 혹은 왕궁을 공격할 기사단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 없어서였다.

"만약 왕궁을 공격할 용도의 기사단이라면 저는 돕지 않겠습니다."

"설마 내가 그런 일로 쓸 기사들을 코끼리 집에 숨기겠다 말할까."

"그럼 왕자님의 사병입니까."

"비슷해. 내 힘이 되어 줄 이들이니까."

말이 좋아 숨긴다는 것이지 실상은 그 안에서 기사단을 키우겠다는 의미나 다름 없었다. 잠시 생각을 해보던 드미레아가 입을 열었다.

"지그프리드의 이름은 못 드립니다."

칼 같이 선을 긋는 그 말에, 칼리안은 당연한 일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아. 숨겨주기만 하면 관리는 내가 할 거야. 그리고 에이프린 백작의 기사단인 것으로 해 둘 테니까 이름 달라고 할 일 없어. 그것도 걱정하지 마."

"그럼 왕자님이 아니라 에이프린 백작의 기사단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칼리안의 사병인지를 물었을 때 왜 비슷하다 대답했는지 이제야 제대로 이해를 했다.

"만일을 대비해 왕자님의 성함을 넣어두지 않겠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에이프린 백작을 브리센과 같은 힘을 지닌 무가로 키워내겠다는 의미인지 모르겠습니다."

"말했지만 내 기사단으로 키울 사람들이야. 굳이 내 이름일 필요는 없으니 백작의 이름을 빌리는 거고."

"왕자님. 기사단은 상단이나 학원과는 다릅니다. 기사단의 주인을 정해두지 않는 것은 위험한 행동입니다. 발칸과도 다릅니다. 마법사들의 신의와 기사들의 충의는 다릅니다. 검을 쥔 모든 이들이 키리에와 같을 것이라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곧바로 드미레아가 이렇게 말했다.

기사들이 어떤 이들인지를 잘 알기 때문에 하는 말이기도 했다.

"에이프린 백작을 믿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보실 문제가 아닙니다."

"알아."

기사들이 어떤 이들인지 칼리안보다 잘 알지는 않을 터였다. 칼리안이 슬쩍 웃으며 드미레아를 쳐다봤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네가 나 대신 기사들을 지켜보는 것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을까?"

드미레아가 입을 다물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칼리안의 의중을 따져보는 드미레아를 향해 칼리안의 말이 이어졌다.

"네 말대로 왕궁 안에서 언제나 내 눈 아래 둘 수 있을 때와는 또 다를 테니까. 에이프린 백작의 기사단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지는 나도 아직 확신하지 못하겠고. 그래서 이번 기회에 백작을 어디까지 믿어도 좋을지를 지켜볼까 해. 그 후에 그들을 독립된 하나의 기사단으로 만들지, 혹은 다른 방법을 강구할지에 대해서도 생각을 좀 해 보고."

"그러니까 지금 왕자님 말씀은, 그들을 어떻게 사용할지를 결정하기 위한 '감시자' 역할을 저에게 맡기고자 하신다는 겁니까."

"맞아. 정확해."

"저를 여러모로 부리려고 하시네요."

"부리는 게 내 일이니까."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었고, 그 웃음에 조금도 넘어갈 일 없을 드미레아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뻔뻔하시기도 하고."

"아니면, 정혼자 특혜로 쳐 주면 안되나?"

드미레아의 얼굴이 볼만하게 구겨졌다.

당장이라도 둘의 정혼설이 헛소문이라 말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므로, 칼리안이 재빨리 손사래를 치며 말린 뒤 다시 말했다.

"부탁할게. 드미레아."

한동안 그런 칼리안을 쳐다보던 드미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도와드리죠."

"고마워."

"지난 번 숙박비도 못 받았습니다. 이번 것도 전부 받을 생각이니 넘어가려 하지 마십시오."

"바나나 값도 잘 갚았잖아. 안 떼먹고 다 갚을게."

그 많은 빚 중에 이제 고작 바나나 값 갚은 왕자의 말에, 결국 드미레아가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조금 많이 유명해진 것은 알고 계십니까. 사고를 치려면 나처럼 치라고 외치듯이 대형 사고를 일으키셨다고 말이 많던데요."

"아, 헤이시아 궁."

칼리안이 짐짓 모르는 일이라는 듯 뻔뻔한 얼굴로 대답했다.

"나 아니야. 발칸이 실수한 일이지."

"발칸이 왕자님의 것임을 모르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에 대해 칼리안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것을 잠시 보던 드미레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알겠습니다. 기사단 들어오는 날짜 정해지면 말씀해주세요."

"아, 드미레아."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드미레아를 불러세운 칼리안이 얼마 전에 히나가 보여줬던 바로 그 수어를 보여줬다.

"이거. 혹시 무슨 뜻이야?"

서툰 손짓이긴 해도 알아보기 어려운 단어는 아니었다. 때문에 드미레아의 얼굴이 묘하게 바뀌었다.

'맴매'라니.

"왕자님 시녀에게 그런 말을 듣고 다니십니까."

"역시 욕이구나."

그리고 드미레아 옆에 앉은 얀을 흘깃 보며 말했다.

"무슨 뜻인지 아무도 안 알려줘. 얀도 말을 안해."

"무엇을 잘못하셨기에 그런 말을 들으십니까."

칼리안이 작게 웃으며 대꾸했다.

"내가 잘못하는 게 한 둘이 아니라서."

드미레아가 마지막 한 모금의 차를 넘긴 후 찻잔을 내려놨다. 그리고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신차리고 사시면 됩니다. 같은 말 듣지 않도록."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올리고 밖으로 나갔다. 결국 히나의 말이 무엇인지는 알려주지 않은 채였다.

"대체 무슨 말이기에 드미레아도 안알려주나."

칼리안의 의문만 커졌다.

* * *

드미레아가 나간 뒤.

칼리안은 한나절이 지나도록 그냥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정신차리고 살라는 그 말이 오전에 플란츠가 했던 이야기와 얽혀든 탓도 있었고 딱히 할 일이 없었던 탓도 있었다.

수련장도 가질 못하고 발칸이 있을 빌헬름 관에도 가질 못하고 하다못해 산책도 못 가는 처지가 아니던가.

그나저나, 정신차리고 살라니.

"······ 뭘 알고 하는 소리인지."

축 늘어져 앉아 이런저런 생각이나 하며 중얼거리고 있는데 얀이 다가와 맞은편에 앉으며 차게 식힌 민트 차를 내려놨다.

오늘만 두 잔 째다.

굳이 얘기하지 않는 이상은 같은 차를 두 번 내오지 않았던 얀이었으나 칼리안은 별 말 없이 그것을 들어 입에 가져갔다.

"생각 깊을 땐 항상 민트 차를 달라고 하셔서요."

칼리안이 작게 웃으며 고맙다는 말을 했고 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왕자님께서 4층에 계속 가셔서 식사 하실 것 같다고 마나실 백작에게 말했습니다."

"그걸 얘기했어?"

칼리안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네. 어차피 그렇게 움직이실거면 그냥 편히 다니게 해달라고 얘기했어요. 전하께 허락 받는 것은 마나실 백작이 알아서 할 테니까 내일쯤 부터는 체르밀 궁 안에서라면 자유롭게 움직이셔도 될 것 같아요. 위험한 방법으로 4층에 가거나 이렇게 심심하다고 우울해하지 않으셔도 되고요."

"그래."

얀의 마음 씀씀이에 고맙다는 말을 덧붙이려는데, 얀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러지 마세요."

수어는 멀리서도 보인다.

운동을 마친 레이븐을 다시 데려다 놓기 위해 밖으로 나갔던 얀은 히나가 하는 말을 보았다.

하늘색 아이스크림을 옆에 내려놓은 히나의 수어는 빨랐고 얀이 모두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래도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알아듣고 나니 숨이 멎기 딱 일주일 전에 제 물건을 전부 가져다 불태우던 형이 생각났다.

"살았으니까 빈 자리가 나는 거예요. 그걸 어떻게 없애요. 그러니 빈 자리 걱정할 시간에 그냥 사세요."

잠시 말을 멈춘 얀이 창 밖을 쳐다보다 다시 칼리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곧 그 시선이 민트차로 향했다가 다시 칼리안에게로 갔다.

청량한 민트 향과는 정 반대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 일을, 또 겪지는 않게 해주세요."

나는 그냥 만일에 대비한 것뿐이라는 말.

당장 죽겠다 생각하고 있지도 않다는 말.

나도, 살고 싶다는 말.

"그래. 알았어."

그런 말 대신 칼리안은 그냥 웃었다.

이렇게 붙드는 손이 있으니 죽어도 못죽겠다 싶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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