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장. 그런 날이 온다면 (8)
칼리안은 밥을 먹었다.
헤이시아 궁을 왜 저 꼴로 만들었는지에 대한 설명, 이번엔 또 무엇을 염두에 두고 일을 벌였는지에 대한 말,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 정말 밥만 먹었다. 빵을 뜯어 입에 넣고 베이컨을 씹어 삼키고 샐러드도 집어 먹고 물도 마셨다.
같이 밥이나 먹자며 올라온 주제에 '같이'는 완전히 잊어버린 것처럼, 마치 세상에서 제일 가는 진수성찬을 앞에 뒀다는 것처럼.
조용하고 우아하게 참 잘도 처먹고 있었다.
그 어처구니 없는 꼴을 한참 쳐다보다가, 문득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경박하기는.'
언젠가 그런 말을 했었지, 하는 기억이 난 탓이다.
"안 드십니까."
물컵을 내려놓은 칼리안이 그런 플란츠를 보다 물었다.
엄밀히 말하면 안 먹었다기 보다는 다 먹었다고 해야 할 일이다. 칼리안처럼 오늘만 먹고 죽을 것 같이 먹지 않을 뿐이지 플란츠도 분명 식사를 했다.
"됐어."
"네."
그래서 '다 먹었다' 하는 의미로 이렇게 대꾸하자 기다렸다는 듯한 답이 나왔다.
팍팍한 답을 꺼내 둔 칼리안이 곱게 접힌 냅킨을 들어 입을 닦았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테라스를 향해 걸어갔다. 딱 봐도 이제 식사 끝났으니 다시 내려가겠다는 모양새인 것이다.
하, 하고 짧은 한숨과 웃음이 섞인 소리를 낸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칼리안."
"네."
"앉아."
"네."
곧바로 대답한 칼리안이 다시 걸어와 본래 앉아있던 자리에 앉았다. 그것을 본 플란츠의 입에서 한번 더 헛웃음 소리가 났다.
대체, 말을 잘 듣는 것인지 안 듣는 것인지.
창 밖은 조용했고 안은 고요했다.
시녀들이 다가와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테이블의 식기를 치우는 동안 칼리안은 물끄러미 플란츠를 쳐다보고 있었다.
"고마워. 나가보도록 해."
곧 테이블에 차와 디저트를 올려둔 시녀들이 한걸음 뒤로 물러나자 칼리안이 이런 말로 그들을 내보냈다.
달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플란츠의 말이 튀어나왔다.
"왜 이러는데."
식사를 하기 전에 건넸던 질문과 같았으나 그 의미는 달랐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가며 살려주겠다 하는 그 이유를 묻고 있었다.
이해 할 수 없게도 플란츠의 말을 참 잘 알아듣는 칼리안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말씀드려야 합니까."
순간 순간, 칼리안은 계속 플란츠를 살려 왔다.
첫 조찬에서의 칼리안이 자신을 죽이지 않기 위해 얼마나 죽을 힘을 다했을지 알고 있다. 실리케의 비수를 막기 위해 숨겨뒀던 오러를 꺼내놓은 것부터 제 힘을 빌려준 것, 그리고 어제의 일까지.
플란츠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물었다.
"이해가 안 되는데."
동정심 따위로 저런 일을 벌일 놈이 아님을 안다.
애초에 자신을 동정할 놈도 아닐 뿐더러 그런 어울리지 않는 감정으로 대하는 것을 몰라볼 플란츠도 아니었다.
그러니 이제는 말을 좀 해줘도 되지 않나.
궁전까지 부서뜨려가며 살려놓겠다 하는 이유 정도는.
칼리안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옅은 녹색의 민트 차에서 시원하면서도 단 향이 났다. 차에 띄워진 민트 잎이 천천히 맴돌았다.
그것을 가만히 쳐다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그냥. 겁이 나서요."
앞으로의 일에 대한 계획도, 생각하고 있는 것에 대한 설명도 아니었다.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플란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 * *
블루베리는 보라색인지, 파란색인지.
그것을 두고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은 말싸움이 된 적이 있었다. 물론 아주 어릴 때의 일이다.
히나가 이제 막 수어를 배웠을 무렵이었다.
서툰 손짓으로 그것이 '파란색'이라고 설명을 하던 히나는 키리에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말보다는 손이 느렸고 아는 단어도 많지 않았으니까. 그 억울함에, 어린 히나는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히나가 이겼다.
그 뒤 키리에에게 있어 블루베리는 무조건 파란색이었으니, 블루베리가 들어간 아이스크림은 당연히 하늘색이었다.
"히나."
체르밀 궁의 주방장이 만들어 준 하늘색 아이스크림 두 개를 가져온 키리에가 고고한 자태로 운동 중인 레이븐의 앞에서 당근을 흔들어보이고 있던 히나를 불렀다.
키리에의 목소리를 들은 히나가 반가운 얼굴로 웃으며 달려와 키리에의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을 한 입 먹고는 손을 움직였다.
- 맛있어.
왕궁의 세 왕자 모두 아이스크림을 즐기는 이들이 없었지만 주방장은 시시 때때로 갖가지 맛의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두었다. 히나가 아이스크림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알게 된 칼리안이 부탁한 까닭이었다.
물론 그런 부탁이 없다 하더라도 히나가 좋아했다면 선뜻 수고해 주었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 이거 주려고, 온 거야?
키리에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히나의 앞에서나 보여주는 꽤 시원스러운 미소였다.
- 잘 됐다. 오빠한테, 할 말이 있어.
이렇게 말한 히나가 예전에 키리에와 얀이 함께 이야기를 나눴던 체르밀 궁 후원의 산책로 쪽으로 걸어갔다. 벤치에 앉아 두 개의 아이스크림을 모두 히나의 옆에 내려놓은 키리에가 검을 풀어 무릎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
히나는 잠깐 대답하지 않다가 키리에의 손을 끌어와 그 위에 '발칸' 이라는 글자를 써 보였다.
- 자상한 왕자님이, 여기에서 일하고 싶으면, 말하랬어.
생각지 않았던 이름이었다.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키리에가 물었다.
"발칸? 치유사로 일하라고 하신 건가?"
그 말에 히나가 깜짝 놀라는 얼굴을 했다. 곰 같은 키리에가 히나도 한 번에 알아듣지 못했던 칼리안의 의도를 바로 알아차렸음에 대한 놀라움이었다.
- 어떻게, 알았어?
키리에가 웃었다.
조금 전 보여줬던 시원한 미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의 웃음을 지으며 무릎 위에 올려두었던 묵빛의 검을 잠시 쳐다보았다.
'운철이야.'
칼리안은 그 검을 건네주며 그렇게만 말했고 키리에는 그것을 준 뜻을 이해했다.
운철이 무엇인지는 키리에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오러를 담아낼 수 있는 몇 안되는 귀한 재료 중 하나가 아니던가. 그러니 운철 검을 주었다는 것은 키리에가 빨리 '일곱 번째 검'이 되기를 바란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연습했고 벽 하나를 넘었다. 그리고 칼리안을 이겼다.
칼리안이 말했던대로 칼리안의 몸이 정상은 아니었고 또 오러도 사용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순수한 검술로 칼리안을 이긴 것은 분명했다.
칼리안이 히나에게 다른 길을 보여줄 생각을 한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키리에가 칼리안을 이겼다는 것은 칼리안의 '검'이 되는 것에 한 발 다가섰다는 의미였으니까.
언제 죽음을 맞이할지 모를.
"너만 괜찮으면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칼리안은 키리에를 잘 알았다.
자신을 믿고 기회를 줬다는 이유만으로 제 목숨을 바칠 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 왜, 좋을 것 같아?
칼리안은 과거의 키리에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지만 키리에는 분명히 자신이 베른보다 먼저 죽었을 것이라 믿고 있었다. 어떤 방법이든 어떤 이유든 할 것 없이 베른을 지켜내고 죽었으리라고.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키리에는 생각했다. 물론 칼리안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왕자님께서 언제까지고 도와주실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계속 왕궁 시녀로 있는 것보단 낫잖아. 도움 없이 살 방법도 생각해야지."
혹여 칼리안이 없더라도, 그리고 키리에가 없더라도 히나는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제 앞가림은 하고 살 수 있도록 히나에게 길을 내어 준 것임을 이해했다.
그런 키리에를 잠시 쳐다보던 히나가 말했다.
- 둘 다, 왜 그래?
두 개의 아이스크림이 하나는 고스란히, 그리고 또 하나는 몇 입 대지도 않은 채로 녹아가고 있었다. 하늘색 물이 되어가는 아이스크림에는 눈도 두지 않은 채 히나가 이야기했다.
- 오빠도, 자상한 왕자님도, 이상해.
"왕자님과 내가 이상해?"
이렇게 물으니 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칼리안 앞에서 애써 숨겼던 화를 키리에에게 냈다.
- 죽을, 생각을, 하면서 살아, 왜?
히나의 손짓이 빨라졌다.
- 자상한 왕자님은, 아무것도 안 가지려고 해. 고양이 목걸이에서도, 이름을 지우래. 아무것도, 안 남겨놓으려고 해. 그런데, 오빠도 그래. 왜?
"히나. 그런 게 아니야."
카이리스에서 가장 안전한 왕궁에 살면서 언제나 목숨을 내어놓고 살고 있는 왕자. 그리고 그 왕자의 호위가 아닌가.
그러니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대비해두는 것 뿐이라고. 죽을 생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고.
칼리안의 생각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라도 말하려 했다. 그런데 히나가 키리에의 말을 막았다.
- 저기, 갈 거야. 가서, 치유사 할 거야. 늙어 죽을 때까지, 오빠랑 왕자님 도우면서, 살 거야.
키리에는 대답 없이 히나의 손만 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히나를 달래주려 생각했던 말을 다 잊어버렸다.
키리에가 대꾸하지 않자 히나가 다시 말했다.
- 미련 없이 죽는게, 엄청, 멋있는 줄 알지, 멍청이들아.
그리고는 일어나서 체르밀 궁으로 돌아가버렸다.
하늘색 물이 되어버린 아이스크림이 잠시 흔들렸다.
* * *
항상 꽁꽁 얼어붙어 있다는 북쪽의 대사막.
그 곳에 꽃이 피고 나비가 팔랑거린다 하면 차라리 그 말을 믿을 것이다.
그런데 칼리안이 겁이 난단다.
밑도 끝도 없이 그냥 그렇게만 말했다. 티 스푼을 들어 찻잔에 띄워진 민트 잎을 툭툭 건드리면서 다른 말은 하지도 않은 채로.
연세가 몇이신지도 모를 동생의 한 마디를 조용히 곱씹던 열 여섯의 플란츠가 툭 내뱉듯 말했다.
"그리 겁 많으신 내 아우님께서 어제 내 어머니의 궁을 없애주셨군."
"내 어머니께서 머무르시던 곳은 아니니까."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작은 웃음 소리를 냈다.
"다른 이유도 있었고, 겸사겸사요."
굳이 플란츠 하나 때문에 없앤 것은 아니었으니까.
대충 무슨 생각으로 일을 저질렀을지는 밤새 가늠해봤던 탓에, 플란츠는 그것이 무엇인지 묻는 대신 다시 원래의 주제를 꺼내들었다.
"몇 번을 묻게 할 셈이지."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질문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으므로 그냥 적당히 넘어가려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을 때.
"애옹!"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가 플란츠의 방에 들어왔다. 그러더니 웬일로 플란츠가 아닌 칼리안의 무릎으로 올라와 자리를 잡았다.
고양이를 안아들곤 목줄을 내려다보던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내용이 바뀌지 않은 것을 본 탓이다.
"싫다더니. 진짜 안 지워놨네."
"······ 짜증나게 하네."
칼리안은 플란츠의 짧은 말을 참 잘 알아들었고 플란츠는 칼리안의 속내를 참 잘 읽었다. 칼리안의 속에 든 말을 또 눈치채버렸다.
칼리안이 고개를 들어 플란츠를 쳐다보다,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무 똑똑하셔서 형님 앞에서는 말 한마디도 못 꺼내겠습니다."
"짖지 말고."
기껏 체이스에게까지 찾아가서 준비해라 마라 오지랖을 부리고 왔는데 앞에 있는 동생 놈이 생에 대한 미련이 없음을 알아채버렸다.
그래서 플란츠를 살리려는 것이다.
만에 하나 칼리안이 없을 때 칼리안을 대신해서 왕위에 앉으라고.
플란츠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렇게 앉아 붉은 눈을 응시하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싫다고 했을 텐데."
"자리에 관심 없으신 것은 압니다. 그냥.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무슨 생각."
"세렌티의 장난일지 배려일지 모를 저주스러운 행동 때문에 망자가 될 육신을 빌려 이렇게 움직이고 있는데······."
칼리안이 웃었다.
"제 쓰임새가 다하는 그런 날이 온다면. 아니, 그런 날이 왔을 때. 그 이후에도 제 생이 이어질까. 알 수가 없어서요."
그것에 겁이 났다고.
죽는 것은 겁나지 않았는데 그 빈 자리가 드러날까 겁이 났다고.
푸른 솔새를 만나고, 시스파니안을 만나고, 체이스를 만나고, 하얀 수리의 일을 겪으면서.
베른이 사라진 그 빈 자리를 느끼게 된 이후 계속 키워 온 그 생각을 칼리안이 지금 저보다 한참 어린 원수 같은 형의 앞에 풀어놓고 있었다.
"저는 이미 누구보다 절실하게 살고 있습니다. 쉽게 사라질 생각도 죽을 생각도 없지만. 그래도 만약에."
그래도 만에 하나 그런 날이 온다면. 어쩔 수 없는 그런 날이 온다면.
"지그프리드의 저택에 찾아오셨던 그 때처럼 똑똑하신 내 형님께서 어떻게든 해주셨으면 해서."
칼리안이 웃었다.
플란츠는 웃지 않았다.
말 없이 차를 들어올렸다. 재수없는 칼리안의 시종은 칼리안의 입맛에 딱 맞을 차를 가져다 놨다. 영 익숙하지 않은 민트 향이 입안을 맴돌았다.
"그만 짖어."
민트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은 플란츠가 이렇게 입을 열었다.
"······ 내 아우님이 원하시는대로 살아 드릴테니."
원하는대로 밥 먹을 테니까 아르피아 궁에서 평생 고생하는 건 너 혼자 하라고. 그런 뜻이었다.
알아들었을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