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장. 그런 날이 온다면 (7)
칼리안일 것이다.
르메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헤이시아 궁을 박살낸 주모자는 분명히 칼리안일 것이라고.
아르센이 어떤 인물인지는 여러 번 들어왔으나 그래도 아르센이 혼자서 그런 엄청난 짓을 벌일 리 없다는 것은 알았다. 생각이 지나치게 많은 반면 눈치는 없는 르메인이라지만 이런 것까지 모르고 넘어갈 정도는 아니었다.
"어찌한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건물이 한 순간에 사라졌다.
아무 생각 없이 그리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문제는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마를 감싸 쥔 르메인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뭐라도 얘기를 해보지."
맞은편에 앉아있는 앨런을 향한 말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내 알 바 아니라는 표정으로 사과 젤리를 집어먹고 있던 앨런이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 말씀을 드리면 될지요."
"사실 그대로. 그 아르센 헤르츠와 그 발칸이 훈련 중 실수를 했다는 말도 안되는 핑계가 아닌 진짜 이유. 그것을 듣고 싶네."
앨런은 손에 들린 포크를 테이블에 내려놓은 뒤 르메인을 보며 말했다.
"사실을 따져본다면 전하께서 직접 부순 것이 되겠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되나."
"헤이시아는 전하의 실수와 잘못으로 쌓아올린 탑이 아닙니까. 그것이 너무 높아 그림자가 사라질 생각을 않으니 칼리안 왕자님께서 그냥 시원하게 없애버린 겁니다."
칼리안이 말했다.
그 전에 누가 살았든, 누가 만들었든, 혹은 얼마나 오래됐든. 그게 다 무슨 상관이냐고.
전설이 아닌 살아있는 시스파니안을 만나 보았기 때문에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제 몸 속에 카이리스의 역사같은 것은 아무 관심도 없을 세크리티아 왕제가 들어 있어서 하는 소리도 아니었다.
- 망자의 이름이 산 자의 길을 막아서야 되겠습니까.
헤이시아 궁 따위 없어진 것이 대수냐고.
또 다른 망자의 이름을 제 속에 묻은 칼리안이 그리 말했다.
"전하께서 벌인 잘못이 너무 커서 아무것도 잃지 않고 바로 잡을 수 있는 길이 아주 싹 없어진 판국이니 어찌하겠습니까. 길을 내려면 막은 것부터 부수는 것이 맞지요."
르메인은 변명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고 소파에 등을 기댄 채 고개만 끄덕였고 앨런은 칼리안이 설명했던 내용을 가감 없이 전했다.
발칸과 기사단의 힘을 합칠 것이라는 내용도 전했다. 그 중 반을 아르센이 나머지 반을 플란츠가 가지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도 전했다. 거기까지 들은 르메인이 잠시 눈을 떴다.
"왜 헤르츠 경인가. 절반을 플란츠에게 준다면 절반은 칼리안의 것이어야 할 텐데."
아무리 발칸의 총 군단장이 앨런이고 그 앨런이 칼리안의 사람이라지만 조금 이상하지 않느냐는 듯한 눈초리였다.
"상관 없지 않겠습니까."
앨런의 대답이 곧바로 이어졌다.
그것은 앨런의 말이라기보단 칼리안의 답이었다. 앨런도 같은 것을 물었던 탓이다.
칼리안은 부리는 이였다.
그 어디에도 제 이름 하나 올려놓지 않았으나, 발칸도, 마법 학원도, 폴룬 상단도, 휘트린 영지도, 곧 만들어질 아이즌의 기사단까지도, 전부 칼리안이 부리고 있지 않은가. 그들을 부리는 이들이 모두 칼리안의 사람 아니던가.
아이러니하게도 저를 따르지 않는 고양이 목줄에만 제 이름을 올려둔 칼리안을 생각하며 앨런이 그렇게 대답했다.
"일단······ 알겠네."
아무튼 저 궁이 부서진 것에 자신의 책임이 가장 크다 하니 르메인으로서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처벌은 내리셔야지요."
르메인이 아무 말 없이 알겠다고만 대답하자 앨런이 이렇게 말했다.
생각해보면 앨런은 상벌에 꽤 민감하게 구는 편이었다. 이번 일도 혹여 유야무야 넘어갈까 저렇게 나서서 처벌을 내리라 말하는 것이다. 르메인을 볼 때마다 '네가 잘한게 뭐가 있냐'며 타박을 하는 것도 그랬다.
어찌됐건 조용히 넘어갈 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은 르메인도 알고 있었으므로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 해야지."
"헤르츠 경이 궁 재건 값을 자신의 급여에서 제하라 하였으니 참고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한 앨런이 젤리 하나를 더 집어먹었다.
부하 직원의 급여에 대해서는 그리 걱정하지 않는 모습이었는데, 이전에 아르센이 그레이의 마차를 부쉈을 때에도 같은 말을 했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 마차 값은 칼리안이 지불했지 않았던가.
뭐, 정확히 말하자면 실리케가 아르센을 처치하라며 기사 테일에게 전달했던 돈을 주운 칼리안이 그레이의 마차값이라며 실리케에게 되돌려줬다. 그러니 결과적으로는 실리케가 마차 값을 낸 셈이었지만 본래 칼리안이 지불하기로 했던 것은 맞았다.
그리고 이 일은 르메인 역시 아는 내용이었다.
따라서 르메인은 살짝 웃는 얼굴을 한 채 시종장 라울을 불러 말했다.
"헤이시아 궁 재건이 끝날 때까지 헤르츠 부군단장의 급여를 1플로린으로 감하도록. 더불어 재건 완료 전까지는 칼리안 왕자에게 어떤 지원금도 지급하지 않겠다."
앨런이 웃었다.
그야말로 보여주기 식 처벌이었으니까.
착실한 상단주 멜피르는 폴룬 상단뿐 아니라 마법 학원에서도 좋은 수익을 내고 있었다. 휘트린 영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지원금이 사라진데다 본래 아르센이 받던 급여의 두 배에 해당되는 금액이 매달 빠져나간다 하더라도 칼리안의 금고는 건재할 터였다.
과일 향이 진한 홍차를 들어올린 앨런이 입을 열었다.
"왕자님께서 지원금이 없어진 것을 알기나 하실는지."
그리고는 호로록 소리를 내며 따듯한 홍차를 한 입 마셨다.
하여튼 얄미운 입이다. 칼리안의 금고가 자신의 것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넉넉하다는 것을 르메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다 뜬금없이 온천 갔던 슬레이만이 왕궁에 들르지 않고 지그프리드 영지로 간 것이 떠올랐다.
"아."
슬레이만이 빌려간 돈이 생각나 버렸다.
* * *
베른.
다른 이들의 앞에서는 국왕과 호위기사였고 왕가가 모인 자리에서는 국왕과 왕제였다. 그리고 둘이 있을 땐 형과 동생이었다.
'그래도 제가 형님보다 잘 하는 것이 하나는 있어 다행입니다.'
사석에서는 늘 이렇게 편한 호칭을 올리며 말을 하곤 했었다. 그리고 항상 이렇게 자신을 낮췄다. 검을 쥐는 것 말고는 체이스보다 나은 것이 없다면서.
'네가 나보다 못한 것이 무엇인지 나는 모르겠구나.'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체이스는 항상 이렇게 대답했다. 모든 것이 체이스와 같은데 검까지 다루니 오히려 베른이 나은 것이 아니냐고.
거짓이 아니었다.
물론 베른은 이 사실을 단 한번도 인정한 적 없었다. 그리 생각하며 체이스를 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음을 체이스도 알았다.
- 어찌 보면 나보다 더 나았지.
베른은 구분을 잘 했다.
말이 필요한 곳 칼이 필요한 곳 포용이 필요한 곳을 정확히 알았다. 그렇게 사람을 회유하고 내치고 제 것으로 만들었다.
사람을 상대하고 부리는 것이 뛰어났다.
때문에 데블란은 베른에게 왕위를 주고자 했었다. 왕에게 있어 사람을 잘 모으고 제대로 쓰는 것 만큼 중요한 능력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베른은 그 능력으로 자신이 왕이 되는 대신 왕이 된 체이스를 도왔다.
"여전하구나."
잠시 기억을 짚어보던 체이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앨런으로부터 대략적인 내용을 듣자마자 칼리안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를 알 수 있었다. 세크리티아에서도 비슷한 일을 한 번 저질렀던 베른이었다. 칼리안은 여전히 구분을 잘 했고 머뭇거리지 않았고 제 사람을 잘 부렸다.
이번 일에 가장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한 마법사의 이름을 떠올리던 체이스가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아르센 헤르츠.
얼음창을 쓰는 칼을 부서뜨리는 기사의 바로 앞에서 싸움을 하는 발칸의 마법사. 그리고 이제는 칼리안 왕자의 사람이 된 천재 마법사.
"너는······ 버리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에도 경계가 없는 것인지."
베른의 마지막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당연히 기억한다. 직접 겪지 않은 일이라 해도, 만에 하나 그것이 단순한 악몽이었다 해도, 그 참담함만은 결코 잊지 못하리라.
그것을 떠올리자 스스로도 겪었던 시리디 시린 마지막 기억이 함께 떠올랐다.
아무래도 그 일만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며 자신의 가슴을 쓸어내린 체이스가 짧게 웃었다.
확실히 베른은, 그리고 칼리안은, 체이스보다 나았다.
* * *
누구나 우습게 여겼던 마법사들의 군대.
그들이 얼마나 강한 힘을 지니게 되었는지 보라.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 발칸!
르메인은 헤이시아 궁에 설치되어 있던 시스파니안의 대마법 방어진이 파괴된 상태임을 외부에 알리지 않았었다. 복구할 예정이었고 보안에 문제가 있음을 알려보아야 좋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소문은 더더욱 부풀려졌다.
딱 한 번.
고 서클의 마법도 아니었다. 마법 학원의 학생들 중에 화염구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아이들은 극소수였다.
그런 화염구를 모았을 뿐이고 모아서 딱 한 번 쏘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 공격에 '마법으로 보호되고 있는' 헤이시아 궁이 무너졌다. 50여개의 화염구가 궁전 하나를 돌무더기로 만드는 데까지 단 1분도 걸리지 않았다.
느긋한 얼굴로 소파에 앉은 칼리안이 긴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유명해져서야."
물론 유명해진 것은 칼리안이 아니라 발칸이었고 르메인이었다. 르메인의 목이 조금쯤 단단하게 바뀌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런 소문이 난 시기가 참으로 묘했는데, 드미레아와의 정혼설로 시끄러운 상태에서 발칸의 이름이 난 상황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발칸의 군단장 앨런 마나실과 그 제자인 칼리안의 관계가 연상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칼리안과 발칸을 함께 입에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얀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 꽃 같은 우리 왕자님과 내 동생이 정혼했다는 말을 할 수 있느냐면서 볼멘 소리를 중얼거렸다. 그것이 아마 드미레아가 아깝다는 뜻은 아닌 것 같았으므로 칼리안은 그냥 난처한 얼굴로 웃기만 했다.
"왕자님 지원금 끊겼대요."
하루 사이에 왕궁 밖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꼼꼼하게 알려준 얀이 전날 밤 르메인의 시종장 라울로부터 전달된 내용을 전했다.
"지원금이 있었지, 참."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적당히 끄덕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이번 달부터 헤르츠 경 급여는 내가 직접 챙기는 걸로 할게. 본래 급여에서 두 배 쳐서."
"알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헤이시아 궁 재건 비용도 보태실 겁니까?"
"그럴까 했는데, 안하려고. 에이프린 백작과 기사단을 꾸려야 할 때가 되었으니 일단은 좀 아껴 쓸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네, 왕자님."
"그럼 밥 먹자. 배고프다."
보고도 다 받고 지시도 모두 내린 칼리안이 이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테라스를 향해 걸어간 뒤, 테라스 난간을 밟고 가볍게 뛰어올라 사라졌다.
'밥은 오늘부터 4층에서 먹을거야. 내가 알아서 왔다갔다 할 테니까 4층으로 가져다 줘. 호위기사들 눈에 안 띄게 적당히 잘 숨겨오는 것 잊지 말고.'
이미 얀에게 말해두었던 것이었으니, 얀은 놀라는 대신 짧은 한숨만 내쉬었다.
문을 막으면 뭐하냐고.
창문이 열려 있는데!
* * *
- 뭐야.
- 빵이요.
- 무슨 짓이냐고 묻는거잖아.
- 밥 먹자는 것 아닙니까.
- 왜 이러냐고. 계속.
- 살고 싶다면서요.
그러니까 사시라고요.
계속.
살게 해드릴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