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장. 그런 날이 온다면 (6)
그렇잖습니까.
왕궁 어디에도 온전한 놈 하나 없는데.
저 분은 무엇이 그토록 억울해서 홀로 그리 되셨을까.
* * *
뚝 뚝 뚝 하고.
테이블에 점점이 떨어지던 핏방울.
거기서부터 기억이 난다.
무엇때문에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그 날이 언젠가의 이른 아침이었다는 것.
플란츠가 늘 그래왔듯이, 다만 평소보다 조금 더 심하게 화를 냈고 결국은 참지 못해 나이프를 던졌다는 것. 아마도 칼리안이 그 나이프를 손으로 잡았으리라는 것.
핏방울. 그리고 플란츠에게 건넨 말.
- 괜찮습니다.
그것이 칼리안에 대한 란델의 첫 기억이다.
그 전의 칼리안이 어땠는지 따위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이전의 칼리안은 그림자 같이 지냈다. 억눌려 있었고 말하지 않았고 고개 들지 않았다. 그런 칼리안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는 것은 란델에게 있어 굉장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다. 우스운 이야기일지 모르겠으나 란델은 르메인을 닮았기 때문이었다.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르메인의 무관심은 그저 지독했다. 채 설명하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는 사실은 그 지독함을 없애주지 못했다.
빈틈 없는 무관심 속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홀로 보내온 란델이, 어린 란델의 눈에는 그저 냉막하기만 했던 르메인에게서 무엇을 보고 배웠을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으리라.
- 장미가 곧 피겠더군요.
그랬으니.
이렇게 말을 건네오는 것이 어느 정도는 생경하고 어느 정도는 신기했다.
그래서 그리하였다.
지켜보고자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도움이 되어 줄지. 혹은 그 반대일지. 그것을 가늠할 수 있을 때까지.
- 카밀론 가서 개 키울 겁니다.
그랬더니 이런 말을 했다.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남아있지 않은 란델을 향해 숨길 생각조차 없는 살기와 분노를 고스란히 드러내면서, 당장이라도 란델의 목을 꺾어버릴 기세로.
- 탁.
다시 한번 떠오른 칼리안에 대한 생각 때문에 창 밖을 잠시 바라보던 란델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닫았다.
거칠 것 없이 날아간 화염에 부서진 과거의 잔재.
그것이 보내오는 매캐한 연기가 방 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 * *
술은 못 샀다.
'마나실 군단장님께서 찾으십니다.'
대신 불려갔다.
의외로 체포되지는 않았다.
빌헬름 관의 잡무를 보아주는 한 시종이 다가와 이렇게 말했고 아르센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앨런의 집무실로 향했다.
앨런은 수많은 마력이 비정상적으로 움직였음을 이미 느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냥 두었던 것은 아르센이 허튼 짓을 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어느정도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르센은 그 믿음을 와장창 깨부순 상태였다.
그러므로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벌였는지 물어볼 것이 뻔했다. 때문에 아르센은 아무 생각 없는 얼굴로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 똑똑
"들어오게."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가니 문에서 등을 돌린 채 창 밖을 향해 서 있는 앨런이 보였다. 헤이시아 궁이라기보다는 '옛 헤이시아 궁 터'라고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리게 변해버린 폐허의 모습이 창문을 통해 아주 잘 보이고 있었다.
실리케가 마력탄으로 헤이시아 궁의 한개 층을 망가뜨렸을 당시 대마법 보호진이 함께 파괴됐다. 그래서 '가능'했다.
"······ 설명해보게."
고개를 돌려 누가 들어왔는지도 확인하지 않은 앨런이 이렇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아르센은 정중한 말투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아르센의 말에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고 그 말을 끝까지 다 들어준 앨런이 조용히 되물었다.
"훈련 중 방벽이 깨지는 바람에 벌어진 사고인데 너무 놀라서 마력을 흩을 생각도 못했다. 51명이 하나같이 그 생각을 못했다. 맞는가?"
"네. 맞습니다, 군단장님."
믿지도 않겠지만 믿으라고 하는 거짓말도 아니었다.
앨런이라면 지금쯤 눈치 챘을 것이다. 이 일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를 말이다.
어차피 칼리안도 이 일이 자신이 계획한 일임을 앨런에게까지 숨기지는 않을 터였다. 그리고 칼리안은 아르센이라면 르메인에게 둘러댈만한 적당한 핑곗거리를 만들어가며 일을 벌이리라는 것을 믿었다.
항상 그래왔듯 아르센은 칼리안이 책임져 줄 수 있는 선 안에서 사고를 쳤으니까.
"······ 그래서 화염구 50개가 헤이시아 궁 중앙 기둥을 가루로 만들었고. 유난히 큰 불덩이 하나가 이유 없이 다른 곳으로 날아가버렸고. 그 한 개가 지붕을 무너뜨렸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건물이 폭삭 주저앉게 되었다. 그 말도 맞는가?"
"그렇습니다."
아르센의 대답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때문에 앨런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마지막 질문을 건넸다.
"그래. 그럼 이제 이 일을 어찌할텐가?"
여기에 대해서는 매우 확실하게 생각해 둔 대답이 있었다.
"제 급여에서 제하시면 됩니다."
멋지게 대답한 아르센이 씩 웃었다.
* * *
밥.
그래 밥.
밥 때문이란다.
세상에어떤미친놈이
자기형밥먹이겠다고
궁전을날려버리는지
"제 형님께서 헤이시아 궁이 신경쓰여서 식사를 못하신다는데. 능력이 닿는대로 좀 도와드리는 것이 아우의 도리 아니겠습니까."
500년 넘게 이어져 내려온, 그것도 시스파니안이 직접 짓고 직접 사용했던 그 아름다운 헤이시아 궁을 그 꼬라지로 만들어놨다.
아르센도 예견한 바와 같이 훈련중 실수라는 얼토당토 않은 말은 애초에 믿지도 않았다. 앨런은 아르센이 어떤 놈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이건 분명 칼리안이 뭔가를 또 꾸민 것이리라.
다만 이 일에 칼리안이 개입했음을 함부로 언급하기는 힘들었으므로 일단 르메인에게만은 아르센이 일러준대로 똑같이 알렸다. 그리고 곧장 체르밀 궁으로 왔다.
그 후에는 칼리안에게 가서 자초지종을 물었고 너무나 어여뻐서 환장해버릴 듯한 꽃 같은 제자는 거짓말도 안했다. 차라리 아르센처럼 눈에 빤히 보이는 핑계거리라도 대면 좋으련만.
"그러니까 플란츠 왕자의 끼니거름이 걱정되어 저리 만들어두셨다는 말씀이 맞으신지요?"
이 몸이 늙고 늙어 이제 귓구녕에 주름이 졌나.
딱 이런 표정으로 물어오는 앨런을 향해 칼리안이 방긋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스승님. 맞습니다."
아······!
시스파니안이시여.
제 앞날 생각 않고 형님들만 챙긴다고 걱정했더니 그야말로 주옥같은 인생을 불태우며 살아가고 계시는 이 제자님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칼리안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앨런이 관자놀이를 아주 꾹꾹 눌러댔다.
"왕자님. 헤이시아 궁은."
"시스파니안이 지냈던 곳이라는 건 압니다."
그런 것은 몰랐다는 거짓말이라도 제발 좀 해주시면 안되겠느냐 물어볼까 하는 생각을 집어치운 앨런이 애써 침착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다른 이유가 또 있으시겠지요?"
칼리안은 주고 받는 값이 꽤 정확한 사람이다.
물론 플란츠를 걱정하여 저런 일을 벌인 탓도 있겠지만 그것 하나만 가지고 궁을 없애버릴 만큼의 인사는 아니리라고 생각했다.
정말.
참으로 다행하게도.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극히 평범한 하루를 보냈다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분란의 여지도 좀 필요했고, 과시도 해야 했고. 그래서요."
앨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칼리안을 쳐다봤다. 방금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는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담담한 얼굴로 있던 칼리안이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었다.
"잘 재워주신 바람에 제가 생각보다 일찍 잠들어서요, 스승님. 스승님께 드리려던 말씀을 다 못드렸습니다."
앨런이 자신을 재워버린 것에 대해 툴툴거리는 것이다. 어찌됐건 칼리안을 위해 한 일이니 앨런은 그에 대해 사과하는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구체적으로 계획이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일단 말씀 드릴게요."
"듣겠습니다."
칼리안이 웃음을 지운 채 이야기를 시작했다.
"왕실의 두 기사단과 발칸이 하나로 통합될 겁니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초석이랄까요."
"발칸을 통합하기 위해서 분란의 여지를 만들고 과시도 하셨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맞습니다."
그러니까 칼리안의 계획은 이것이었다.
만약 평화롭지 못한 방법으로 브리센을 흡수하면 브리센 후작을 따르던 수많은 귀족들의 세력이 분열될 수 있었다. 게다가 당장은 왕궁 안에 있는 플란츠가 그들을 제대로 관리할 상황도 되질 못했다.
더불어, 그레이 브리센과 레넌 브리센에 대한 처분 방향도 결정되지 않은 상태가 아닌가. 그러니 왕궁 밖에서는 브리센 후작이 후작가를 잘 유지하고 있어야 했다.
"지금 상황에서 형님께서 왕궁 내 기사 세력을 '평화롭게' 가져오는 방법은 딱 하나뿐이지 않습니까. 에반 브리센 후작이 두 기사단의 통솔권을 제 손으로 직접 형님에게 넘기는 것."
"그것 때문에 헤이시아를 건드리셨습니까."
"형님께서는 다른 방법으로 가져올 생각을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만. 어차피 이렇게 되었으니 시간을 앞당기면 더 좋지 않겠습니까."
비록 지금은 주인이 없다지만 헤이시아는 브리센이 휘두르던 권력의 상징이다. 그것을 발칸의 부군단장인 아르센이 부숴버렸다.
"헤르츠 경이라면 알아서 적당히 면피할 구실을 만들어두고 일을 벌일 것이라 생각을 했습니다. 헤르츠 경은 그런 사람이니까요. 아무튼 그리 되면 헤르츠 경은 처벌을 받지 않을 텐데, 헤이시아 궁이 부서진 것도 모자라 헤르츠 경에 대한 처벌도 없다면 브리센 후작 기분이 좀 많이 나쁠 겁니다."
안그래도 칼리안의 세력에 대해 이를 갈고 있을 에반은 플란츠를 만날 테고, 플란츠는 적당히 에반을 구슬리면 된다. '무시하지 못할 무력을 지닌 마법사들과 대치할 만한 힘이 필요하니 기사단 통솔권을 달라'고.
"판은 제가 깔아드렸으니, 브리센 후작을 만나서 기사단 통솔권을 달라며 설득하는 것은 밥 많이 드시고 속 든든해진 형님께서 알아서 하시겠죠."
그래서 그냥 속 시원하게 헤이시아를 치워버린 것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겸사겸사.
"아무리 기분이 나쁘다 하나, 브리센이 그 말을 덥썩 믿겠습니까."
"통한다면 빠르게 일이 진행되니 좋고 안 통하면 형님께서 생각했을 원래 계획대로 다시 진행하면 되는 일입니다. 그러니 스승님께서는 더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 아무리 그래도 다음에는 그리 큰 것을 부수지는 마시지요."
"네. 노력해볼게요."
어차피 부서진 궁이다.
부순 이유까지 확실히 확인을 했으니 더 혼낼 여력도 없다.
"아무튼 브리센 후작이 속는 것을 보는 것도 슬슬 지겨워질 판입니다. 이렇게나 자꾸 이용만 당하니 이제는 좀 딱하게 느껴지는 것도 같습니다."
말은 그렇게 한다지만 그리 얘기하는 앨런의 얼굴에는 조금의 동정심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다행한 일이죠. 브리센 자작이든 변경백이든 후작이든, 셋 중 단 한명만이라도 드미레아 같은 사고가 가능한 사람이 있어서 그 강력한 칼을 제대로 썼다면 저는 지금 여기 있지도 못했을 겁니다. 죽었거나, 진작에 탑에 갇혔을 테니까요."
칼리안이 대답을 전하며 살짝 웃었다.
"그럼 왕자님께서는 발칸의 절반을 플란츠 왕자에게 아예 나눠주시려는 생각이신지요."
"네."
절반은 아르센에게, 나머지 절반은 플란츠에게.
칼리안은 고민도 하지 않고 모두 다 나눠주겠다 대답했다.
* * *
플란츠는 가만히 서 있었다.
굉음이라는 말만으로는 부족할 소리가 폭발하듯 터져나왔다.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흔들, 흔들, 흔들.
하얀 오팔을 가루내어 채색해두었던 탓에 언제나 신비로운 빛을 내던 헤이시아 궁의 지붕 한 면이 그대로 사라진 채 위태롭게 흔들거렸다.
- 쿠구궁······.
그리 오래지 않아 바닥이 우르르 진동하는 것과 함께 불안한 소리가 다시 울렸다. 화염이 치솟고 재 섞인 검은 연기와 뿌연 먼지가 퍼져나오며 이전과는 또 다른 굉음을 토해냈다.
그래도 플란츠는 계속 가만히 서 있었다.
더운 열기가 담긴 바람이 불어왔다.
플란츠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매캐한 냄새가 열린 창을 통해 방 안까지 들어왔으나 미동도 않은 채 창 밖을 지켜봤다.
얼만큼의 시간이 지났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어느새 먼지 구름이 걷혔다는 것만 알았다.
자욱한 먼지가 걷히고 난 뒤 아르피아 궁 뒤로 보이는 것은 그저 새파란 하늘 뿐이었다.
그 하늘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새파란 하늘에 노을이 지고 붉게 물들다가 어둑해지는 것을 보며 계속 서 있었다.
그렇게 완전한 어둠이 내려앉았을 때.
- 사락······.
플란츠가 걸치고 있던 긴 가디건의 끝자락이 바닥에 닿았다.
우두커니 서 있던 그 자리에 천천히 주저앉은 플란츠가 자신의 무릎을 끌어안았다. 실리케를 꼭 닮은 연두색 눈이 느리게 감겼다.
이번에도 알 수 있었다.
어미를 배신한 아들이라는 죄책감.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모정에 대한 갈망 혹은 원망.
짙고 짙어서 잊혀지지 않을 것 같은 르니에리 향.
그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도 좋지 않겠느냐고, 칼리안이 묻고 있음을.
"미친 새끼······."
더운 바람이
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