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26화 (127/527)

제23장. 그런 날이 온다면 (5)

칼리안도 사람이다.

그러므로 칼리안도 상처를 받는다.

예를 들면, 불면 날아갈까 스치면 바스라질까 어화둥둥 우리 왕자님 해가며 자신을 아껴주던 시종의 얼굴에 이런 표정이 떠올랐을 때 그렇다.

- 방금 어디서 멍멍이가 짖었는데.

아무리 플란츠로부터 하루 걸러 한 번씩 짖는다는 말을 들어왔던 칼리안이라지만 얀의 얼굴에 나타난 이 말은 상당히 뼈에 사무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헤이시아 궁의 지붕을 날려버리라는 칼리안의 말을 한번 되새겨 본 얀이 공작가 장남 시로이안과 시종 얀을 반반 섞은 얼굴이 된 채로 말했다.

"식사 마저 하세요."

닥치고 밥이나 먹으라는 소리다.

부수는 것은 잘 하지만 거짓말과 빈말은 잘 못하는 칼리안이 실소했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키리에."

"네, 왕자님."

"네가 가."

얀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키리에가 뭐라 대답할지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으니까.

"네."

이렇게.

칼리안이 '국왕 전하 앞에 가서 칼 한번 뽑아봐라' 라고 말해도 저렇게 담백한 대답을 하고 그대로 할 사람이 바로 키리에다. 그러니 그깟 지붕 하나 없애라는 말을 아르센에게 전하는 것 쯤이야 어려운 일도 아닐 터였다.

그리고 또 하나.

보태지도 빼지도 않은 칼리안의 말을 고스란히 전달받게 될 아르센은 이 곳에 오는 길에 있는 헤이시아 궁에 잠시 들러 가벼운 마음으로 불덩이를 날리고 올 위인이었다. 정말로.

그야말로 충직한 따까리와 미친 따까리의 조합이 아닌가?

"잠깐, 잠깐만요."

개중에 그나마 내일이 있는 것처럼 살고는 있는 얀이 황급히 키리에의 앞을 막아서며 칼리안을 향해 말했다.

"왕자님. 이건 그냥 내친김에 부수고 말고 할 일이 아닙니다. 헤르츠 경 죽어요. 왕자님도 무사히 못 넘어가신다고요."

그 말에 칼리안이 잠시 웃다 대답했다.

"괜찮아."

그리고는 키리에를 보며 눈짓을 했다.

얼른 가보라는 뜻이었으니 키리에는 지니고 있던 검을 벽에 기대놓은 뒤 아르센을 부르러 밖으로 나갔다.

"걱정 안해도 돼."

"하지만요, 왕자님."

"괜찮으니까 가서 히나 오라고 해줘."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이 된 얀이 무어라 더 얘기하려 하는데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으며 그 말을 잘랐다.

"원래 내 나이 때는 사고도 좀 치고 그러면서 커."

책임은 내가 지고 뒷수습은 전하께서 해주실텐데.

뭐 어때.

* * *

드미레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본래 카이리시스에 있는 지그프리드 저택을 관리하던 것은 드미레아의 어머니인 세리에였다.

그리고 세리에는 슬레이만과 함께 지그프리드 영지로 갔다. 덕분에 생각지도 않았던 저택 일을 고스란히 떠안게 된 터였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당연한 것이니까.

"몇 번째지."

보던 책을 잠시 덮은 채 상당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어오는 드미레아를 향해 앞에 서 있던 집사장이 차분히 대답했다.

"여덟 번 째입니다."

그런 집사장이 들고 있는 쟁반에는 편지 한 장이 들려 있었다. 물론 에반 브리센 후작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칼리안과 플란츠의 일로 명예가 실추된 브리센에 대해 제대로 된 사과를 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이번에도 소각하라 이를까요."

조심스레 묻는 말에 고개를 가로 저은 드미레아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집사장이 얼른 편지를 건넸다.

- 팔락!

그것은 두 장의 편지였다.

빠르게 훑어내리며 내용을 대충 대충 살핀 드미레아가 편지를 돌려줬다.

"어떻게 처리하면 되겠습니까?"

"플란츠 왕자님이 이 저택에서 훼손이나 파손하신 것이 있던가."

"없습니다, 소가주님. 칼리안 왕자님은 물론이고 플란츠 왕자님도 밖으로 거의 나오지 않고 계속 방에만 머무셨습니다."

방에 박혀 나오지도 않는 사람 손에 훼손되거나 파손된 것이 있을 리 없었다. 짧게 고개를 끄덕인 드미레아가 집사장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보상은 됐으니, 입 안다물면 플란츠 왕자님 앞으로 숙박비와 식비를 청구하겠다고 답장하도록."

"숙박비와 식비 말씀이십니까?"

"그래. 우리가 플란츠 왕자님을 강제로 억류한 것이 아니라 플란츠 왕자님이 원해서 있었던 것으로 상황을 바꿔놓겠다 하면, 조용해지겠지."

드미레아가 숙박비와 식비를 청구하게 되면 플란츠는 별 말 없이 대가를 지불할 테고, 그 순간 그 일은 억류가 아니라 자의 방문이 된다. 정말로 억류하고 있던 사람에게 숙박비와 식비를 받을 리도 없거니와 억류 당했던 사람이 그것을 줄 리가 없으니까.

어차피 칼리안이 이 저택에 숨어 있어야 했던 목적은 이미 달성했다. 그러니 지그프리드에서 플란츠를 '억류'하고 있었다는 오명 역시 계속 떠안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플란츠에게 식비와 숙박비를 청구하겠다 으름장을 놓으라 얘기한 드미레아가 느긋한 목소리를 냈다.

"유명해진 김에 이름 한번 제대로 나 볼까."

사람들은 지그프리드 저택에 칼리안이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 그들이 아는 것은 플란츠가 한밤중에 제 발로 소공작이 '혼자'있는 저택에 몰래 찾아와서 일주일을 지냈다는 것 뿐이다. 그런데 공작가 소가주는 칼리안의 정혼자로 소문이 나 있다.

2왕자와 3왕자, 그리고 소공작.

셋 모두 분명한 성인이니 말 많은 귀족들이 이 셋이 얽힌 상황을 보고 또 얼마나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낼까.

"하지만 그리 되면 소가주님께 피해가 있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심한 추문이 돌아도 소공작 자리가 없어지지는 않고, 공작 가문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지 않나. 누가 더 손해일지는 후작이 잘 판단할 일이지."

무슨 추문이 돌든 누가 봐도 플란츠만 손해를 볼 일이다.

"네 소가주님. 말씀하신대로 바로 회신하겠습니다."

집사장이 저도 모르게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한 뒤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드미레아의 서재에서 나갔다.

드미레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덮어놓았던 책을 다시 펼쳐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히나의 품에 고양이가 안겨 있었다.

칼리안은 이제 꽤 묵직해보이는 녀석을 히나로부터 건네 받아 안았다. 고양이를 안은 채로는 수어를 할 수 없을 테니까.

맞은편 소파에 히나를 앉힌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히나. 물어볼 게 있어."

히나가 고개를 끄덕였고 칼리안은 작은 애옹 소리를 내는 고양이를 살살 쓰다듬으며 말했다.

"발칸에서 일할 수 있다면 할 생각이 있어?"

생각지도 못한 말에 히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발칸은 마법사들의 군대가 아니던가.

마법사가 아닌 이는 능력과 특기와 할 줄 아는 것이 왕자인 플란츠 뿐이었다.

그래서 잠시동안 칼리안의 말 뜻을 생각해보던 히나가 뭔가를 알아챘다는 듯 '아!' 하는 입모양을 만들더니 손을 움직였다.

- 그 곳에, 시녀가 모자라요?

칼리안이 짧은 웃음 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퍽 부드러운 얼굴을 한 채 대답했다.

"설마 내가 널 다른 건물 청소나 하라며 보낼까."

- 그럼, 치료 때문에요?

"응. 정확히 얘기한 건 아니지만, 아마도 형님께서 왕실 기사단 카렌과 라온을 발칸에 합류시킬 것 같아."

플란츠가 자신의 구체적인 계획을 말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의 플란츠가 두 개 기사단을 손에 쥘 가장 평화적인 방법이 그것임을 칼리안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군단장 앨런 마나실을 주축으로 마법사단을 담당할 아르센과 기사단을 담당할 플란츠. 이렇게 구성된 발칸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훈련 방법도 달라질 거야. 마법사와 기사가 함께 훈련을 받게 되면 당연히 부상이 늘어날 수 밖에 없을 테니 치유사가 있다면 좋을 거야."

물론 어느 정도는 명분이고 핑계였다.

귀하디 귀한 능력을 지닌 히나를 언제까지고 시녀로 부려먹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히나가 그동안 별 불만 없이 시녀로서 일해왔지만 혹시라도 다른 일을 더 원하지는 않을까 싶어 꺼내 본 말이었다. 물론 그것도 히나가 좋다 했을 때의 일이겠지만.

- 할게요.

히나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했고, 칼리안이 살짝 웃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무 고민 없이 대답하는 것 같은데, 히나. 발칸은 군대야. 지금이야 왕궁 안에서 평화롭게 있다지만 나중에 때에 따라서는 전투에도 따라가야 해."

- 알고 있어요.

그렇게 대답하는 히나의 까만 눈을 잠시 응시하던 칼리안의 입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히나. 시키는 게 아니라 하고 싶은지를 묻는 거야. 그러니까 나 때문에 하겠다고는 하지 말고."

히나의 눈이 다시 동그랗게 변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지금껏 칼리안은 딱히 누군가의 의사를 묻고 일을 시킨 적 없었다. 키리에와 히나를 대할 때에만 '하겠는지' 혹은 '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깊이 생각하고 결정해. 키리에와도 얘기해 봐. 왕궁 안에 네가 할 수 있는 다른 일도 있다는 걸 알려주려고 하는 말이니까 선택은 네 몫이야. 혹시 다른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걸 얘기해줘도 괜찮고, 그냥 지금 하는 일이 좋다면 그렇게 대답해도 돼."

거기까지 들은 히나가 맑은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 네. 그렇게 할게요. 자상한 왕자님.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대화가 끝난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고양이가 다시 애옹애옹 소리를 냈다.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문득 그 목줄에 새겨진 긴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물끄러미 시선을 내려 그것을 바라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이거 바꿔줘."

- 혹시 언짢으셨어요? 제가 너무, 장난스럽게, 써놨나봐요.

"아니야.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고."

칼리안이 오해하지 말라는 듯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형님 이름만 넣어. 내 이름 지우고."

정말로 플란츠를 더 좋아하는 고양이. 그러니 누가 보아도 고양이의 진짜 주인은 플란츠가 아니겠나.

칼리안의 말에 히나는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동안 칼리안의 붉은 눈을 응시하다가 아주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 싫어요.

칼리안은 가만히 웃었다.

* * *

그리고 아르센은.

"고맙네."

신났다.

키리에의 말을 전해듣기가 무섭게 아르센은 매우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목소리는 전혀 들떠있지 않았지만 아르센은 분명 신나 하고 있었다.

때문에 키리에의 귀에는 이런 아르센의 답이 '칼리안의 말을 전해주러 이 곳까지 온 수고에 대한 고마움'으로 들리지 않았다. 오랜만에 한바탕 날뛸 기회가 왔음을 전해준 것에 대해 고마움으로만 느껴졌다.

어찌됐건 할말을 전했으므로 키리에는 곧바로 자리를 빠져나왔다. 아르센이 수행하고 칼리안이 책임을 질 일이니 거기에 키리에가 끼어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아무튼 그렇게 키리에가 자리를 벗어난 뒤 아르센은 빠른 걸음으로 훈련장에 내려갔다. 그리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발칸의 마법사들을 향해 말했다.

"실전 훈련을 진행할 테니 모두 따라오도록."

그 말을 들은 마법사들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무슨 실전 훈련이란 말인가? 플란츠만 오면 그것이 바로 실전이며 지옥인 것을.

다만 이런 말을 입 밖에 내기는 힘들었으므로 그저 시키는대로 아르센을 따라 빌헬름 관의 훈련장 밖으로 나갔다.

빌헬름 관은 헤이시아 궁과 매우 가까운 곳에 있었다.

체르밀에서 헤이시아의 지붕만 보였다면 이 곳은 건물 전체가 다 보였다. 중간을 가로막는 것은 오로지 몇 그루의 가로수 뿐이었다.

바로 그 헤이시아 궁을 향해 선 아르센이 자신과 헤이시아 궁 사이에 얼음 방벽 하나를 세운 뒤 말했다.

"표적이다."

그저 야외라는 것만 제외하고는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아르센은 항상 이렇게 얼음 방벽을 세운 뒤 화염구 실습을 해왔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법사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아르센이 검지를 들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딱, 한 방."

아르센의 손가락이 얼음 방벽을 향했다.

"있는 마력 없는 마력 전부 쥐어 짜서 딱 한 방만 한꺼번에 쏴라. 그래서 저 방벽이 부서지면 오늘 훈련은 여기서 끝내고 술 한잔 사지."

어때?

하고 물어 볼 필요도 없었다.

그 칼리안이 그리 생각하지 않았던가. 마법사들은 대체 왜 이렇게 호전적이냐고. 그리고 발칸은 일반적인 마법사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 호전적이지 않았다.

녀석들의 눈은 이미 불타오르고 있었다.

"셋 하면 쏜다."

이렇게 말한 아르센의 앞에 시뻘건 불덩이가 생성됐다. 그리고 그 몸집을 거대하게 부풀리기 시작했다.

그레이의 마차를 날려버리던 그 날의 불덩이와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과연 아르센의 주종이 얼음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거대한 크기였다.

그것을 본 마법사들의 앞에도 일제히 화염구가 떠올랐다.

"하나."

마법사들의 집중력은 대단했다.

지금 아르센이 얼음 방벽을 유지한 채로 화염구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둘."

불과 얼음.

완벽한 상극인 두 힘을 함께 운용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렇게 간신히 만든 얼음 방벽이 얼마나 약할지도.

"셋."

당연히 생각하지 못했다.

- 쌔애애액!

얼음의 방벽은 첫 화염구가 닿기도 전에 부서져 사라졌다. 막아 줄 방벽이 사라진 51개의 거대한 화염구가 날아갔다. 그야말로 장관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날아간 방향의 끝에, 이제는 아무도 없는 쓸쓸한 건물 하나가 있었다.

- 콰아아아앙!

지축이 흔들리고 주변의 나무들이 휘청거렸다.

앨런의 책상이 진동했다.

체르밀 궁의 유리창이 흔들거렸다.

드미레아의 귀에 폭음이 들렸다.

화염폭풍과 자욱한 먼지가 걷히고 난 뒤.

방금 저지른 일의 결과를 확인한 아르센이 중얼거렸다.

"어이쿠."

칼리안은 지붕을 부수라고 했고, 아르센은 지붕도 부쉈다.

"방벽이 못버틸 것을 계산 못했네."

그것은 엄연히 훈련 중 실수에 의한 사고였다.

* * *

시간이 조금 지났다.

앨런으로부터 자초지종을 전달받은 르메인이 잠깐 혼자 있고 싶다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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