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25화 (126/527)

제23장. 그런 날이 온다면 (4)

칼리안을 찾아왔던 아르센이 되돌아가고 앨런이 재워버린 칼리안이 꿈 꾸지 않을 단잠에 빠진 시간.

"애오옹."

어느새 빵빵해진 배를 한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가 낑낑거리며 닫힌 문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리고 테이블 앞에 앉은 플란츠의 무릎 위로 폴짝 올라왔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본 히나가 말했다.

- 제가, 데리고 있을게요.

몸을 둥글게 말고 헤설프게 애옹거리던 고양이는 잠을 자기라도 할 것인지 꼼짝 않고 얌전히 있었다. 고양이의 따끈따끈한 체온이 전해졌다.

"둬."

짧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한 플란츠가 무표정한 얼굴로 샐러드를 집어 들었다.

그러니까 지금 히나는 플란츠에게 기어코 밥을 먹이고 있었다. 집요하게 샐러드만 주워먹고 있다지만 히나와 함께 서 있던 플란츠의 시종 레릭은 일단 그 정도로도 만족해하고 있었다. 아예 손 대지 않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억지로 먹고 있다는 티를 팍팍 내던 플란츠가 히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왜 안가는데."

레릭이 서 있는 것이야 항상 그래왔으니 이해하겠는데 플란츠의 시녀도 아닌 히나가 서 있으니 하는 소리였다.

칼리안은 새근새근 잘 자고 있을 테고 이 시간엔 할 일도 없었다. 그래서 히나는 신경쓰지 말라는 듯한 얼굴을 해 보이며 대답했다.

- 다 드시는 것, 보고, 가려고요.

저 말이 무슨 뜻인지 완전히는 아니지만 그래도 적당히 이해한 플란츠가 짜증난다는 얼굴을 했다.

"참견은 싫은데."

- 참견이 아니라, 걱정하는, 거예요.

히나는 곧장 이렇게 대답했고 플란츠는 알아보지 못한 척 했다. 달리 대꾸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였다.

그런 것을 눈치 챘는지는 몰라도 히나가 생긋 웃었다.

본래 이 곳에서 플란츠를 어려워하지 않는 것은 칼리안이나 앨런 정도였다. 그 란델도 플란츠와는 되도록 말을 섞지 않으려 했으니까.

그런데 둘이 늘었다.

아르센, 그리고 히나. 거기에 고양이까지 포함하면 셋이나 된다.

전부 다 동생 놈 때문에 늘어난 이들이 아닌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플란츠가 낮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별 수 없다는 듯 샐러드 접시에 다시 손을 가져갔다.

길어진 오후의 햇살이 창을 통해 길게 들어와 햇빛이 테이블에 반사된다.

둘의 대화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있던 탓에 아무래도 얀에게 수어를 배워봐야 하겠다는 생각이나 하며 창 밖을 보던 레릭이 입을 열었다.

"커튼을 내려드리겠습니다, 왕자님."

이 말에, 히나가 아주 조금 미간을 찌푸리며 레릭의 팔을 붙든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두라는 듯한 티를 내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 레릭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플란츠 쪽에서 답이 들렸다.

"건드리지 마."

'둬', '놔둬', '그냥 둬' 보다 훨씬 강경한 말.

그 뒤 플란츠는 잠시동안 손을 멈춘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 탁!

그리고 결국 들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석 삼아 베고 누워있던 무릎이 움직이자 깜짝 놀란 고양이가 바닥으로 내려왔다.

"나가."

그렇게 말한 플란츠가 등을 돌려 침실 쪽으로 걸어가버렸다.

갑자기 변한 태도에 놀란 레릭이 채 반도 비워지지 않은 접시를 보고 있자 함께 서 있던 히나가 손가락으로 창 밖 어딘가를 가리켜보였다.

'왜 이렇게 생각이 짧아요?'

이런 얼굴을 한 채로.

'아······.'

손 끝이 가리키는 곳과 히나의 얼굴을 본 뒤에야 그 방향의 커튼이 내려졌던 적이 한 번도 없었음을 깨달은 레릭이 자신을 책망하는 얼굴을 했다.

멋대로 생각한 것이다.

시간이 지났고 티를 내지 않으니 이제는 괜찮지 않을까, 라고.

시간이 지나고 티를 내지 않는다는 것이 괜찮다는 뜻은 아닐텐데도.

도도도도, 하고 플란츠를 따라간 고양이가 안아달라 조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 * *

단 것 좋아하는 앨런은 설탕을 넣지 않은 진한 커피를 좋아했다.

만약 이것을 칼리안이 알았다면 꽤나 의외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앨런은 칼리안의 앞에서 절대로 커피를 마시지 않으니 칼리안이 앨런의 커피 취향을 알 일은 없을 터였다.

"마나실 경이 이렇게 쓴 커피를 마실 줄은 몰랐습니다."

대신 체이스가 이렇게 말했다.

처음 앨런을 보았을 때도 앨런이 커피를 내어주기는 했지만 그 날은 칼리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느라 마시지 못했기 때문에 이제야 하는 말이었다.

"버릇이 되어 그렇습니다."

앨런은 그냥 이렇게만 대답했고 체이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카이리스의 국왕 전하께 미리 전해야 할 말이 있어 왔습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한 얼굴이 되었던 체이스는 플란츠가 찾아와 하고 간 이야기를 앨런에게 전했다.

"발칸의 부군단장이 아주 나서서 기밀을 줄줄이 알렸다는 말씀이십니까. 그야말로 플란츠 왕자님다운 일을 했습니다."

발칸의 군단장인 앨런이 이렇게 말하며 잠시 웃다가 말을 이었다.

"그래요. 저도 그런 생각을 하였지요. 세크리티아가 스스로를 지켜내지 못하면 그 몫이 전부 칼리안 왕자님에게 갈 테니 그것을 걱정하였을 겁니다."

앨런은 얼마 전 칼리안이 자신을 '마나실 백작'이라 부르며 체이스를 따라 나서도록 말했던 것을 떠올리고 있었다.

"저하께서 나서서 칼리안 왕자님을 돕겠다며 홀로 나서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냥 카스트린 경을 데리고 세작을 찾아가셨다면, 저는 예정대로 칼리안 왕자님을 따라나섰을 것이 아닙니까."

"네. 그렇게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로지 앨런에게만은 자신이 짐이 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칼리안이 아니던가. 그러니 앨런과 함께 갔다면 칼리안은 앨런의 실드 안에 선 채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렇게 무리를 해서 다시 쓰러지는 일도 없었으리라.

"물론 저하께서 그런 일을 벌인 이유를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만 확실히 이번에는 걱정이 과하셨습니다."

이해는 하고 있었다.

눈 앞에서 자신의 핏줄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비참한 기분은 앨런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물론, 플란츠도.

"그 이유를 짐작했기 때문에 플란츠 왕자님께서 더 나섰겠지요. 같은 일이 또 생긴다 해도 칼리안 왕자님이나 저하나 무모한 선택을 다시 하실 분들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플란츠가 체이스를 찾아간 것이다.

"짐은 이미 충분하니 적어도 제 몸은 건사할 상황은 만들어놓고 칼리안 왕자님을 돕든 말든 하라는 뜻으로 이야기를 하셨을 겁니다."

체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알고 있습니다. 해서 저 역시 그렇게 하겠다 답했습니다. 발칸과 같은 방식은 아니겠으나 약하지 않을 힘을 지니겠다 결정을 했습니다."

"잘 하셨습니다."

"다만, 세크리티아에서 유사한 군대가 창설되었을 때 카이리스에서 그 목적을 의심할까 우려가 되어 왔습니다."

"전하께서 그에 대해 다른 걱정은 하지 않으실 터이니 마음 놓으시지요."

적어도 앨런이 발칸을 이끄는 한 체이스가 아무리 강한 군대를 만든다 하더라도 발칸을 이기지는 못할 테니까. 게다가 소 같은 르메인은 체이스의 의도를 우려하거나 섣불리 의심을 할 만한 인사가 못되었다.

체이스가 온 목적에 대해서는 해결이 되었으니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앨런이 나지막이 말했다.

"헌데 저하께 제가 궁금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네. 무엇이 궁금합니까."

"과거의 칼리안 왕자님께서 왕위를 포기한 이유를 알고 싶은데, 혹여 이야기를 해주실 수 있을지요."

"이유라······."

"칼리안 왕자님께서는 저하가 더 나은 군주가 될 수 있다 생각해서 왕위를 포기했다 했습니다. 그것을 위해 굳이 저하에게 기사 작위까지 받아가며 포기를 했다 하였지요."

"네. 맞습니다. 그런 이유를 말했습니다."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체이스를 응시했다.

"만약 그 뿐이라면 그야말로 이해되지 않는 일입니다. 왕자님의 의도가 아니라, 그런 왕자님의 뜻대로 움직여 준 저하의 의도를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지금의 저하를 본다면 동생이 칼을 드는 것에 절대 찬성하지 않을 것 같으니 말입니다."

알려주기 힘들 일은 아니었다.

힘든 일이 아니라, 아픈 일이었다.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저를 설득했습니다."

옛 일을 떠올려보듯 기억을 훑어보던 체이스가 조용히 눈을 내려감았다. 똑같이 내려앉은 목소리가 고요하게 흘러나왔다.

귀족들은 베른을 지지했다.

베른은 왕비의 아들이었고, 체이스는 그렇지 않았으니까.

때문에 그 때의 베른은 지금과 달리 재능을 드러내지 않았다. 검술 외에는 언제나 체이스의 뒤에 서있었고 늘 말을 아꼈다. 사람들 앞에 홀로 나서지 않았다. 체이스가 빛을 볼 수 있도록, 늘 그렇게 했다.

"만약 내가 세자위에 오르지 않았다면. 세크리티아의 귀족들은 불씨를 남겨두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라서."

데블란이 베른을 바다에 던져가면서 체이스의 의중을 확인해보려던 것과 같은 생각을 세크리티아의 귀족들도 하고 있었다.

베른이 왕위에 올랐을 때 여러 면에서 베른보다 뛰어난 체이스가 과연 다른 마음을 품지 않을지에 대해서 의심을 하리라고. 그 의심의 싹이 될 체이스의 목숨줄을 자르려 들 것임을 것을 베른이 알고 있었다.

"저하를 살리려 왕위를 포기했다는 겁니까."

"둘 모두 살기 위해 포기했다 하는 것이 맞겠으나, 자신이 죽더라도 그것이 내가 사는 유일한 길이라 여겼다면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겁니다. 고민하지 않고."

앨런이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같은 것이군요."

칼리안은 앞으로의 일에 대응하기 위한 힘이 필요해서 세자위에 오르겠다는 말을 했었다. 그리고 앨런은 그런 칼리안의 말에 의구심을 품었다.

세자가 되면 힘은 생길지언정 그 행동에 제약이 생기지 않나.

처음에야 플란츠와의 관계가 극악했다지만 지금은 아니다. 때문에 플란츠와 우호 관계를 유지 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란델에 대한 일만 해결한 뒤 플란츠를 세자위에 올리고 수도에서 벗어나 제 힘을 가지는 것이 낫다. 플란츠 성격에 칼리안을 견제하지는 않을 테니까.

"굳이 세자위를 가지겠다 하시기에 이상하다 여겼습니다. 그 자리에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왜 그 자리를 얻으려 하시나, 그런 생각을 했는데. 저하의 말씀을 들으니 이제 알겠습니다."

칼리안은 베른과 달리 숨지 않았다.

스스로 나서서 두각을 드러냈고 빛을 보았다. 관심을 받고 호평을 받았다. 체이스처럼.

그런 칼리안이 세자위를 포기한다면, 그래서 플란츠가 그 자리에 오른다면.

여러모로 비범한 칼리안이 왕위에서 멀어진 뒤 다른 마음을 품지 않을지를 생각하는 것은 세크리티아나 카이리스나 다르지 않을 터였다. 다만 다른 것은, 체이스와 달리 칼리안을 암살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으리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상황이 역전될 수 있다.

칼리안을 옹호하는 세력이 세자위에 올라있을 플란츠의 목숨을 노리게 될지도 몰랐다. 거기에 더해 플란츠 역시 왕위를 원하지 않고 있으니, 스스로가 그 자리에 서기로 한 것이다.

플란츠를 살리겠다고.

그것을 모를 리 없을 똑똑한 플란츠가 그렇게 나서서 칼리안을 돕는 것일 테고.

"이 얼마나 눈물겨운 형제애인지."

앨런이 이렇게 말하며 커피를 한 입에 털어넣었다.

결코 칭찬의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 * *

하루를 꼬박 잠으로 보냈다.

어쩐지 눈만 감았다 뜨면 날짜가 휙휙 바뀌어 있는 것에 실소한 칼리안이 서둘러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전날 하지 못한 것들을 빨리 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헤르츠 경을 좀 불러줘."

이렇게 말하는 칼리안을 본 얀이 조용히 키리에를 쳐다봤다.

- 눈 뜨자마자 또 일 하겠다는 말 하시면 그냥 기절시켜요.

칼리안이 일어나기 전 얀은 키리에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키리에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고 싶고 말고 할 것 없이 일단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얀의 눈에는 당연히 스치기만해도 픽픽 쓰러질 왕자겠지만 자칫 그렇게 건드렸다가 칼리안이 무의식중에 반격이라도 하는 순간 키리에 팔이 잘려나갈지도 모를 일인 것을.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얀의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난 투기를 본 칼리안이 경계하는 낯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얀이 툴툴거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식사 준비 해뒀으니 식사부터 하세요."

안그래도 하루 내내 잠을 잤더니 속이 꽤 허했으므로 칼리안은 얀이 시키는대로 얌전히 자리에 앉아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들었다.

칼리안은 플란츠와 달랐다.

끼니는 절대 거르지 않았다. 밥이 보약 아니던가?

따라서 아주 야무지게 음식을 먹어치워가는 칼리안을 보던 얀이 말했다.

"그래도 저는 다행이네요. 레릭은 플란츠 왕자님이 밥을 잘 거르신다고 걱정이 크더라고요."

"여전히 식사를 안하신대?"

실리케의 일 이후 끼니를 잘 안챙긴다는 것은 알았지만 여전히 그러고 있는 줄은 몰랐다.

칼리안이 잠시 고개를 들어 창 밖을 쳐다봤다.

층수 차이에 따른 높이만 달랐을 뿐, 칼리안의 방이나 플란츠의 방이나 테이블이 놓인 위치는 똑같았다. 그리고 그 곳에서 아주 잘 보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헤이시아 궁.

실리케가 머물던 곳.

유난히 높은 지붕 탓에, 르메인의 집무 공간인 아르피아 궁의 뒤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까지 보이고 있었다.

"저걸 보면서 밥이 넘어가는 게 이상할 일이긴 하지."

놈이 밥을 왜 안 처먹는지 아주 잘 알고 있는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은 뒤 손가락을 움직여가며 아주 잠시 고민을 했다.

지금 생각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을지, 혹은 없을지.

곧 생각을 마친 칼리안이 얀을 향해 말했다.

"헤르츠 경에게 여기 오는 길에 뭐 하나만 하고 오라고 전해줘."

"네. 어떤 것을 하라고 할까요?"

칼리안이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창 밖의 헤이시아 궁을 가리켜 보였다.

"저 지붕 날려버리라고."

어차피 갇혀 사는 김에 그냥 조금 더 갇혀 있으면 되는 일 아니겠는가?

우리 형님, 밥은 제 때 드셔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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