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장. 그런 날이 온다면 (3)
마흔 아홉의 국왕 친위대와 한 명의 왕제.
그렇게 쉰 명이 성문 앞에 섰다.
- 마흔 아홉 명.
- 마흔 여덟 명.
처음에는 수를 줄어들게 하는 이들을 원망했다.
그 뒤에는 줄어드는 수를 착실히도 세어내는 두 눈을 원망했다.
그렇게 하면 원망 받을 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으니까.
- 열 다섯 명.
바라건대
혹여 어디엔가 계신다면
이제 모두 되었다
그리하시며 멈춰주실 수는 없겠느냐고.
- 다섯 명.
태어나 처음으로, 그리고 죽기 전 마지막으로.
세렌티를 찾았다.
- 두 명.
'······ 키리에.'
잠든 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한······
명.
차마 보지 못하여 눈을 감고자 하였으나 그조차 담아내야 함에 감지 못하였다.
············ 아···.
망국의 왕이 해야만 했던 마지막 일은, 지키다 죽는 이를 지켜보며 오롯이 홀로 남는 것이었다.
* * *
별관 앞 정원에 설치된 분수에서 물줄기가 뻗어나갔다. 부질없이 솟아오르다 하릴없이 떨어져내리는 물방울에 햇빛이 깃든다. 의미 없는 움직임이 끝없이 이어지며 만들어낸 그 소리가 유난히도 소슬하게 들려왔다.
체이스는 무의미하고 쓸쓸하기 짝이 없는 물소리를 감상하듯 가만히 앉아 있었다. 고요한 두 눈이 잠시 감겨들었다.
"······ 플란츠 왕자."
플란츠가 체이스의 얼굴을 응시했다.
아픈 것을 뱉는 듯 혹은 삼키는 듯한 말이 흘러나왔다.
"어디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습니까."
그 말을 들은 플란츠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혀."
플란츠는 그저 넘겨짚기만 했다. 어떤 것도 확신하지 않았다. 그러니 플란츠는 과거에 대해 조금도 알지 못하는 것이 맞았다.
겪지도 않은 과거의 일이 보내오는 상념에서 간신히 벗어난 체이스가 마른 입을 열었다.
"내 말만 듣고 알아낸 겁니까."
"비슷해."
혹시라도 같은 일이 반복될까 하는 마음에 건넨 말.
고작 그것만으로 플란츠는 여기까지 따라왔다.
따라와서는 대비하기를 종용하고 있었다.
"내가 괜한 걱정을 해서 괜한 말을 한 셈이 됐군요."
"아니야."
그것은 체이스가 사과를 해야 할 일도 아니었고 플란츠가 사과를 받아야 할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어차피 출발점은 칼리안이었다.
들키는 것 잘 하는 칼리안이 플란츠를 처음 보았을 때, 채 갈무리하지 못한 그 수많은 감정이 담긴 눈빛을 알아보는 바람에 시작된 의문이었지 않나.
그러니 누구의 말 혹은 누구의 실수 때문에 플란츠가 이 자리에 찾아왔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내 생각에 당신은 그때도 손 놓고 있었을 것 같은데."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맞습니까."
"이번에도 또 지켜볼 생각인가."
체이스가 웃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뒤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년 2월입니다."
그때부터 준비를 시작하겠다는 것인지, 그때까지 준비를 마치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말인지.
수수께끼 같은 말을 꺼내놓은 뒤 한동안 플란츠를 깊이 응시하던 체이스의 손가락이 플란츠를 향했다. 의자에 기댄 채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모습을 가리켜보인 것이다.
"그 때가 되면 플란츠 왕자는 더 이상 나를 앞에 두고 그렇게 앉아있지 못할 겁니다. 말을 낮추지도 못할 테고."
왕자 플란츠, 그리고 왕세자 체이스.
플란츠는 이미 체이스에게 예를 지키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 그보다 더 큰 격차가 생긴다면 그때는 플란츠도 지금처럼 체이스를 대하지는 못할 터였다.
국왕 체이스 듀라한 세크리티아.
그를 앞에 두고서는 말이다.
"당신 아버지가 얌전히 왕관을 넘겨줄만큼 욕심 없는 사람은 아닐텐데."
"네. 제대로 봤습니다."
"······ 하."
지금 체이스는 데블란의 죽음, 그리고 자신의 즉위가 이루어질 날을 저렇게 차분한 얼굴로 꺼내놓고 있었다. 플란츠가 짧은 바람 소리를 냈다.
"혹시 내가 친부의 죽음을 너무 담담하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까봐 덧붙이자면,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데블란의 사인은 의혹의 여지 없는 병사였다.
이미 아주 오래 전부터 데블란의 건강은 좋지 않았다.
"알았어."
"막을 수 있는 일은 그때부터 준비하겠습니다. 당장은 플란츠 왕자가 이야기한 것을 시행할 수 없겠지만, 나 스스로가 왕위에 오른 이후부터는 준비할 수 있을 테니까."
언제부터가 됐든 이제 가만히 두고 보는 입장에서는 벗어나겠다는 뜻이었으니 그것으로 족했다.
"그래."
"하나만 묻겠습니다."
때문에 짧게 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체이스의 말이 플란츠를 붙들었다.
"나는 플란츠 왕자와 같은 나라에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나서는 것이 이 나라에 어떤 영향을 줄지에 대해 불안해하지 않을 자신 있습니까. 본격적으로 힘을 기르겠다 마음 먹은 나의 세크리티아가 어떻게 될지, 세크리티아가 카이리스에 해를 입히지는 않을지. 그에 대한 걱정은 전혀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당신이 힘을 키우든 말든, 나와는 상관없어."
플란츠가 체이스의 오해를 짚었다.
"내 아우의 옛 형님이 마음을 바꾸면 불안해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내 아우님인데."
"설마, 칼리안 왕자가 직접 왕위에 오를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당신이 아니라."
플란츠는 대답하지 않는 것으로 긍정했고 체이스는 조금 놀란 듯한 얼굴을 했다.
체이스는 칼리안이 왕위에 오르려 한다는 것과 플란츠가 왕위에 관심이 없음을 모르고 있었다. 새들이 전해오는 정보에 왕자들의 속내까지 들어있지는 않았으니까.
"······ 의외로군요. 이번에도 플란츠 왕자를 왕위에 올린 뒤 옆에서 도우리라는 생각은 했지만 직접 그 자리에 오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내 앞에서 단 한 번도 왕위에 대한 관심을 보인 적 없었던 탓에."
"관심 없어. 지금도."
한동안 플란츠를 바라보던 체이스가 분수대의 물방울처럼 곧 사라질 듯한 목소리를 냈다.
"그렇습니까."
"······ 그러니까 당신까지 떠넘기지 말라고."
플란츠가 나지막이 말했다.
"안그래도 내 짐이었던 것을 대신 끌어안고 있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플란츠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자신은 할 말을 다 전했고 체이스도 대답을 한 셈이니 이제 정말로 해야 할 말이 없었다.
* * *
앨런은 한참동안 칼리안을 응시했다.
대답이 이어지기를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해본 적 없었던 이야기를 이제와서 만들어 낼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때문에 칼리안은 다시 한번 웃었다.
"······ 그리 하지 마시지요."
칼리안의 웃음을 본 앨런은 이렇게 말했다.
그에 대해 무슨 답을 줘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칼리안은 그냥 고개만 끄덕이며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요즘 이 말을 제일 많이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입맛이 썼다. 때문에 다시 달달한 밀크티를 한 모금 마신 뒤 입을 열었다.
"제가 세이렌 경에게 부탁해 둔 일이 있습니다."
본래부터 전하려 했던 말이기도 하고 화제를 돌리기 위한 말이기도 했다. 속아주는 기분으로 칼리안을 쳐다보는 앨런을 향해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협회장 세이렌 경에게 검은 조약돌에 대해 알아봐달라는 부탁을 했었습니다. 헌데 이제는 제가 직접 갈 수가 없으니 혹시 조금이라도 확인된 것이 있는지 종종 물어봐주셨으면 합니다."
바쁜 에우리아를 계속 왕궁으로 불러들일 수도 없으니 조금 더 바쁘지만 더 능력 있는 앨런에게 부탁을 하기로 했다.
이미 화제가 바뀐 이상 다시 말을 꺼내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씁쓸한 마음을 잠시 접어 둔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하지요. 헌데 왜 갑자기 그 돌에 대해 알아보려 하십니까?"
"사실 제가 그동안 스승님께 말씀드리지 못했던 것들이 꽤 있습니다. 특히 란델 형님에 대해서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조금 많이 있었습니다."
앨런은 이미 더할 나위 없이 칼리안을 걱정하고 있었으니, 앨런에게 불필요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다는 욕심은 조금 전에 버렸다. 그러니 까짓거 걱정하는 김에 조금 더 하시라는 마음이 된 칼리안이 오랜 시간에 걸쳐 그간의 이야기를 전했다.
대사막의 전사들이 붉은 빛의 힘을 썼고, 그들이 힘을 사용할 때마다 조약돌이 붉게 빛났던 것. 란델이 피웠던 장미에 조약돌이 반응했던 것. 장미 정원에서 칼리안을 앞에 둔 란델이 사용했던 힘에 대해서.
"안됩니다, 스승님."
그리고는 지금 당장 5층으로 워프할 것 같은 앨런을 뜯어말렸다.
도대체 마법사들은 왜 이렇게 하나같이 호전적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단 말이지.
피식 웃으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4서클의 바람 마법사를 향해 앨런이 물었다.
"란델 왕자의 그 못돼먹은 짓을 그냥 두셨습니까?"
딱 친구들과 싸우다 다치고 온 손자에게 말하는 할아버지가 건네는 것 같은 핀잔이었다.
"궁금해서요. 란델 형님이 왜 그렇게 구시는지. 이유를 알게 되면 이해를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고요."
어쩐지 르메인이 벌인 일을 자신이 다 감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애써 지우며 칼리안이 그렇게 대답했다.
"그래서, 이 방에서 나가도 된다 하실 때 란델 형님을 한번 만나볼까 합니다. 분명 같은 건물에 있는데 도무지 만나지를 못하니 따로 찾아뵙기라도 해야죠."
"다시 만나보셔도 문제가 없을는지요."
"그냥 둘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해의 초석이 되든, 혹은 틀어짐의 연속이 되든. 뭐든 해보기는 해야죠."
"그래요. 아무튼 오지랖 넓으신 분의 아량이니 제가 무엇인들 반대하겠습니까."
더없이 다정한 표정을 지어 보인 앨런이 따뜻한 목소리를 꺼냈다.
"대신, 뭘 하시든 그때 가서 하시지요."
그리고 손가락을 튕겼다.
- 딱!
칼리안의 눈이 스르륵 감겨들었다.
어여쁜 제자가 푸르딩딩한 낯으로 계속 일을 하시겠다 하니 아주 그냥 푹 재워드리는 것이 스승의 도리 아니겠는가.
아르센이야 헛걸음을 하든지 말든지.
* * *
시종 레릭이 얼른 방문을 열었다.
저벅 저벅 들어간 플란츠는 별 말 없이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혼자 있겠다는 소리였으므로 레릭은 코앞에서 닫힌 문을 잠시 쳐다보다가 돌아섰다.
그리고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바로 뒤에 누가 서있던 탓이다.
고개를 숙이니 은색 머리의 정수리가 보였다.
히나였다.
"고양이 데리러 왔느냐?"
이렇게 물어오는 레릭의 말에 히나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시아를 만나고 돌아온 뒤 밥을 먹일 때가 되어 찾아온 참이었다. 레릭이 다시 한번 난처한 얼굴을 했다. 분명히 플란츠는 혼자 있고 싶다는 의사 표현을 했으니까.
- 달칵.
그때 작은 소리와 함께 방문이 다시 열렸다. 그리고 잠시 뒤 방문 안쪽에서 플란츠의 목소리가 들렸다.
"데려가."
언젠가와 같은 순서였다.
플란츠의 말을 들은 레릭이 고개를 끄덕였고 히나가 살짝 인사한 뒤 플란츠의 방으로 들어갔다.
입구 쪽에 서있으려니 플란츠가 고양이 있는 곳을 가리켜 보였다. 들어가서 데리고 가라는 뜻이었다.
생긋 웃은 히나가 플란츠를 보며 손을 움직였다.
- 감사합니다. 좋은, 왕자님.
매번 뭐가 그렇게 감사한지.
그리고 '감사합니다'와 '왕자님' 사이에 있는 그 말은 대체 뭔지.
그것을 묻는 대신 플란츠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 왕자님은, 식사, 하셨어요?
그리고 히나가 이렇게 물어왔다.
레릭이 오기 전까지 칼리안의 시녀들이 플란츠를 같이 챙겼었으니 히나 역시 플란츠가 끼니를 잘 거르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생각없어."
히나의 표정이 엄하게 변했다.
- 드세요. 자꾸 거르시면······.
그리고 칼리안이 이해하지 못해 고스란히 외워뒀던 말을 플란츠에게도 똑같이 했다.
- 맴매 할 거야.
물론 플란츠도 못알아봤다.
[외전] 아브턴던트
아픈 것 잊는 마법을 뭐하러 익히느냐?
네가 있는데.
* * *
태평.
아니, 태만.
그래. 굳이 고르자면 그것은 태만이다. 리베른 놈들은 대체로 태만하다.
카이리스 놈들은 계산적이며 사치하고, 세크리티아 놈들은 지독하기가 이를 데 없으며, 텐실의 놈들은 믿음을 가장한 허울 투성이다.
그리고 대사막의 전사들은 의뭉스럽거나 잔혹하다.
대사막 너머, 혹은 해룡 아르나이젤이 지킨다는 대해 건너 어딘가에 다른 대륙이 있다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멀고 먼 길을 떠나보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냥 남쪽 나라 가서 남은 여생이나 보낼까보다."
"아버지 불러주는 곳이 그렇게 없을 줄 몰랐습니다."
잠시 지냈던 텐실을 떠나 이제는 리베른에 가겠다는 앨런의 선언에 곁에 서 있던 로닐이 싱긋 웃으며 말을 받았다.
시시껄렁한 농담이었다.
카이리스와 세크리티아에서 보낸 초대장이 불쏘시개로 변해 사라진 지 오래였음을 로닐도 잘 알았다.
세상 떠난 앨런의 아내가 물려주고 간 감청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넘실넘실 휘날리는 꼬락서니가 앨런이 보기에도 꽤 근사했다. 로닐은 앨런의 얼굴을 빼다 박았으니까.
"카이리스에는 왜 안가세요? 지그프리드 공과 친하시잖아요."
"재미 없어 안 간다."
만약 슬레이만이 '첫째 아들이 아프니 치료 방법이 있을지 함께 찾아주면 안되겠느냐'는 말을 했다면 고민도 않고 당장에 갔을 터였다. 로닐은 꽤 쓸만한 약제사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때 슬레이만은 그 말은 쏙 빼고 그냥 와서 잠시 지내보면 어떻겠냐는 말만 했었다. 때문에 거절했고, 그 일은 그 첫째 아들이 결국 세상을 떠난 뒤에야 알게 되었다.
어찌됐건 그때는 그런 속내를 몰랐었으니 7서클이 목전인데 뭐 좋다고 시골 구석에 들어가 술이나 퍼먹겠나 하는 생각 때문에 카이리스로는 가지 않았다.
그래서 정한 곳이 리베른이었다.
"너도 같이 갈테냐?"
텐실은 약제사가 지내기에 그리 좋은 곳이 아니었다.
치유사가 있는 나라였고 치유사를 찾지 못할 이들은 약을 살 돈도 없었으니 돈벌이가 될 리 만무했다.
물론 그것은 로닐의 아내인 레이첼도 마찬가지였다. 능력있는 마법사 앨런이 아닌 다른 마법사에게 있어 신성왕국은 지내기 어려운 곳이었다. 때문에 식견을 넓히겠다며 앨런을 따라 텐실까지 왔던 레이첼은 괜한 고생을 하고 있었다.
"저희도 갈게요."
그렇게 앨런은, 아들 부부와 손녀 베로니카를 데리고 텐실을 떠났다. 리베른으로 갔다.
* * *
안 드실 거예요?
아, 이거 단 맛 나는 술이에요?
저 주세요. 아버지 단 것 질색하시니까.
집에 가서,
제가.
마실게요.
* * *
리베른의 국왕 엘린느는 항상 놀았다.
"아니야. 당장 안 할거니까 내버려 둬."
"그럼 이것들은 다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급하면 그대가 하면 되겠네."
앨런은 리베른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7서클을 달성했다. 그 일을 감격에 겨워 하기도 전에 서류에 도장을 찍어대는 일에 귀한 노동력을 착취당하기 시작했다.
어쩐지 오자마자 이것 저것 다 지원해주겠다며 10년짜리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라 마라 하더니 마법의 '마'자만 들어간 서류만 보이면 죄 앨런에게 떠넘기고 저는 놀았다.
"대관절 저를 왜 불러다 앉히셨습니까?"
"나이는 많은데 젊고 잘생긴 대마법사가 옆에 있으면, 내가 일을 안해도 아무도 말을 못할 거 아냐."
어떤 미친놈이 너한테 안 좋은 말을 하겠냐고.
딱 그 소리가 나오려는 것을 되삼켰다.
엘린느는.
게으르고 말이 험하고 항상 조금 돌아있는 강력한 군주였다. 그리고 그 권력을 넘보는 한 놈을 견제하려 앨런을 불러왔다.
국서 테이안.
엘린느의 남편이었다.
그러니 테이안의 편에 선 귀족들과 관련된 업무를 죄 미뤄놓고 팽글팽글 놀고 있는 것이다.
"괜찮아. 그놈들이 처리해달라는 일은 전부 테이안에게 득이 되는 것들이니까."
이런 말을 하루에도 수십 번은 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득이 될 일은 또 귀신같이 찾아서 했다. 결국 부부간 권력 다툼에 끼어든 형국이 된 앨런만 죽어났다.
처음 2년은 참았다.
그 후 3년은 엘린느와의 친분을 빌미로 버텼다.
6년이 되던 해 기어코 폭발했다.
"계약 파기 해주시지요. 더는 참지 못하겠으니."
테이안이 국왕과 대마법사의 사이를 의심하고 있었다. 한시를 떨어져 있지 않았으니 의심을 이제껏 미뤄왔으면 많이 참은 셈이라 해야 할까.
결국 테이안은, 권력과 아내를 제 손에 쥐겠다는 욕심에 해서는 안 될 일을 벌이고 말았다.
그는 앨런에게 독이 든 술을 보냈고.
앨런은 마시지 않았고.
로닐이 그것을.
* * *
무력하고 무력하고 또 무력하여.
[······ 아브턴던트]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 * *
리베른의 작은 땅.
그 작은 땅보다 더 작은 심장에 하나 뿐인 아들을 묻었다.
사고는 사건이 되고 사건은 마무리됐다.
리베른을 떠나지 않았다.
모두가 떠나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앨런은 리베른을 떠날 수가 없었다.
엘린느는 사죄했다.
테이안은 사형됐다.
앨런이 채 용서를 하기도 전에.
앨런이 채 용서를 구하기도 전에.
모든 것이 그렇게 끝났다.
용서를 하지도 못했고 구하지도 못하여서.
하지 못한 것이 그리 많아서.
리베른을 쉬이 떠날 수가 없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2년은 참았다. 그 후 3년은 엘린느와의 친분을 빌미로 버텼다.
이미 잃었으니 두 번 다시 같은 일을 겪지는 않으리라고. 그 사실 하나로 스스로를 위로해가며 버텼다.
그렇게 다 묻었다고 여겨졌을 때.
비로소 리베른을 떠났다.
그리고, 만났다.
* * *
그렇게 만났다.
비로소 만났다.
그리하여 기꺼이 다짐하였다.
"칼리안 레인 카이리스."
이 앨런 마나실이,
너를.
"스승님께 인사드립니다."
살려주겠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