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23화 (124/527)

제23장. 그런 날이 온다면 (2)

사라졌다.

분명히 방 안에 있었는데 플란츠가 사라졌다.

밖에 있는 호위기사들이 들을세라 크게 놀라지도 못하고 안절부절하던 플란츠의 시종 레릭이 어느 순간 헉 하는 소리를 냈다. 테라스 바깥쪽에서 플란츠가 턱 하고 나타난 까닭이다.

"왕자님, 어딜 다녀 오십니까."

이렇게 말을 꺼낸 레릭은 상당히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문으로 들어왔으면 다녀왔다고 할 일이 맞을 텐데.

그랬으면 잘 다녀오셨냐고도 덧붙여 볼 텐데.

이런 생각 때문에 지금 이것이 어딜 다녀왔냐고 물어도 될 일일까 하는 고민이 생긴 까닭이다.

"뭐가."

그리고 플란츠는 이렇게 대답했다.

무슨 소리냐는 말인 것도 같고, 뭐가 잘못됐느냐는 말인 것도 같고, 뭘 봤느냐는 말인 것도 같다.

"아닙니다, 왕자님."

정확한 뜻이 무엇이건간에 저 태연한 대꾸는 그냥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행동하라는 의미일 거다. 그간의 숙련된 눈치로 플란츠의 짧디 짧은 말을 이해한 레릭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왜."

살짝 고개만 끄덕인 플란츠가 물었다.

이럴 때면 상냥한 3왕자를 모시는 얀이 얼마나 부러운지 모른다. 그래도 항시 냉기가 흐르는 1왕자보다는 플란츠가 나으니까. 그런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한 레릭이 입을 열었다.

"점심 식사를 어찌할지 여쭈려고 했습니다."

"됐어."

플란츠는 끼니를 제때 챙기질 않았다.

그에 대해 걱정스러운 말을 하려는데 플란츠가 저벅저벅 걸어가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더니 기사들이 따라오든 말든 신경쓰지 않겠다는 듯 발을 옮겼다.

굳이 아랫층 어딘가에서 테라스로 올라와 방에 도착해놓고 문으로 나가는 것이다. 다시 혼란스러운 얼굴을 한 레릭이 빠른 걸음으로 플란츠의 뒤를 따랐다.

* * *

예상치 못한 손님의 방문은 또 있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고양이와 그 고양이 주인의 윗방 사는 사람이 다녀간 뒤의 일이었다.

조금 전 할 말 끝낸 플란츠가 테라스 난간을 디디고서 가벼운 몸놀림으로 다시 올라갔다. 그러자 고양이가 쪼르르 방문 밖으로 나갔다.

"진짜 더 좋아하네."

성격인지, 이름 때문인지.

정말로 플란츠를 더 좋아하는 고양이에게 서운함을 느낄 겨를도 없이 메를린이 들어왔다. 손에는 두 잔의 차가 들려 있었다. 하나는 얀의 것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나저나 얀이 나간 이후 플란츠가 와서 대화를 나누고 갔으니 차를 가져온다 하기에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터였다. 그런데 방에 들어온 것이 얀이 아닌 메를린이다.

"얀은 어디 갔어?"

"아무래도 아르센 경을 빨리 불러와야 할 것 같다면서 차는 저에게 맡기고 빌헬름 관에 갔습니다. 왕자님께서 답답해 하시니 말 상대라도 해드리게 해야 되겠다면서요."

"아······ 굳이 그럴 것 까지는 없는데."

괜스레 미안해하는 칼리안을 본 메를린이 빠르게 다음 말을 전했다.

"히나는 조금 전에 키리에 님과 함께 나갔습니다. 돌아오면 말씀드리도록 전해두었습니다."

시아와 히나를 만나게 해주기로 약속해놓고서는 시일이 미뤄졌다. 때문에 이제야 약속을 다시 잡고 둘을 내보낸 터였다.

곧 메를린이 자신의 손에 들린 차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밖에 마나실 백작이 와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의 눈에 반가운 기색이 가득 차올랐다. 그 모습에 소리 없이 웃은 메를린이 테이블에 차를 내려놓은 뒤 가벼운 인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갔다. 그 후 방문이 다시 열리며 앨런이 들어왔다.

"스승님!"

칼리안의 목소리가 잔뜩 들떠 있었다.

날을 채워 방문이 열리기 전까지는 절대 만나지 못할 것 같던 앨런이 왔으니까.

때문에 칼리안은 또 헤실헤실 웃었다.

물론 지난번처럼 다른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정말 반가워서 짓는 웃음이었다. 그것을 본 앨런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강제로 방 안에 발이 묶여있는 것이 그리 싫으시면 앞으로는 몸을 좀 조심히 다루시지요. 밖에 있는 저 친구들 베어 버릴 생각도 하시면 안됩니다. 전하께서 보내신 이들이니."

그리고는 이렇게 칼리안의 속을 훤히 들여다 본 것처럼 주의부터 주었다.

"아, 안 그래도 이삼일 뒤 쯤 대련을 청해볼까 날을 재고 있었는데. 안 그럴게요."

"때려 눕히셔도 안 됩니다."

"······ 네. 노력해볼게요."

"다행입니다. 그나마 노력이라도 하겠다 하시니."

칼리안이 얼마나 거짓말을 못하는지 세상에서 가장 잘 알고 있을 앨런이 만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메를린이 내려놓은 다디단 밀크티를 홀짝홀짝 마시기 시작했다.

그동안 앨런이 자리에 앉아서 저렇게 오랫동안 차만 마시던 적이 없었다. 때문에 칼리안이 조금 불안한 듯한 얼굴을 하며 물었다.

"꺼내시기 어려운 얘기입니까?"

왕궁 밖에 못 나가고 방에 갇히고 감시인인지 호위인지 모를 방문 잠금장치 두 명이 생긴 것으로 모자라 또 무슨 처벌이 있는지를 걱정하는 것이었다.

시간을 끄는 바람에 괜한 불안감을 만든 셈이 된 앨런이 말했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걱정 마시지요."

그저 밀크티가 입맛에 맞았을 뿐이라는 말을 꺼내기가 어쩐지 민망했던 탓에, 앨런이 장난기 짙은 웃음을 지어보이며 용건을 꺼냈다.

"축하드립니다. 일찌감치 정혼자가 생기셨으니."

그렇게 말한 앨런이 다시 한번 밀크티를 목으로 넘겼다. 그 사이 앨런의 말 뜻을 파악한 칼리안이 물었다.

"혹시 드미레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습니다. 할 일 없이 배부른 입들이니 전해지는 말이 참 많기도 합니다."

그제야 드미레아와 자신 사이에 의도하지 않은 소문이 생겼음을 안 칼리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괜한 수고가 줄었네요."

앨런의 말을 괜히 빨리 알아들은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소문이 안 났다면 소문을 낼 생각이라도 했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네. 그럴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시기가 그렇지 않습니까. 브리센 후작은 어떻게든 이번 일을 되갚아주려 할 텐데, 그것을 무마하려면 더 큰 소문이 나야 하니까요."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앨런과 동시에 밀크티를 한 입 마셨다. 달달한 소문에 딱 걸맞을 법한 단 맛이 확 느껴졌다.

"안그래도 드미레아만 괜찮다면 한번 더 지그프리드 이름을 빌려볼까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소공작이 과연 이 일을 달가워 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좋아할 겁니다."

"어찌하여 그리 보십니까."

장래 지그프리드의 주인이 되기에 더할 나위 없는 드미레아를 떠올려 보던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드미레아가 수도에 왔고 저와 함께 무도회에 참석을 했으니, 이것이 귀족들에게는 지그프리드가 이제 정치에도 관심을 둔 것으로 여겨지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소공작과 자신의 자녀를 어떻게든 연결시켜 보려는 이들이 줄을 이어 나타날 텐데 드미레아는 그런 것을 반겨할 리 없으니까요."

그러니 칼리안은 칼리안대로 자신의 소문을 가라앉히고, 드미레아는 드미레아대로 밀려드는 관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둘의 '정혼설'을 한번 내보는 것이 어떨지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드미레아만 괜찮다면 해명하지 않고 싶은데, 전하께서는 어떻게 하신다고 합니까?"

"당황하고 놀라는 것을 기대했는데 재미가 사라졌습니다. 어찌보면 국혼이 걸려있을지도 모를 소문을 이용하겠다며 그렇게나 태연하게 말씀을 하십니까."

앨런이 단박에 재미가 사라진 얼굴로 이렇게 툴툴거렸다.

"어디 가서 그리 굴지 마시지요. 제 나이로 안 보입니다."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의 고개가 위로 휙 치켜올라갔다. 천장을 올려다보는 채로 말하는 탓에 조금 웅얼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체르밀에 그런 분이 둘이나 더 계시는데요. 이 건물 4층이랑 5층에 한 분씩 있습니다."

특히 4층에 사시는 분이요.

고양이 키우랬더니 왕실의 기사단을 장악해 주겠다 하고 가셨는데요.

······ 저는 뭐.

"그리고 지그프리드 저택에도 한 명 있네요. 드미레아는 정혼자가 있는지에 대한 첫 질문을 받자마자 저를 떠올릴 테니 말입니다."

그것이 이번에 세워 준 방패 값이든 내어 준 바나나 값이든. 그 값으로 칼리안의 이름을 내놓으라고 할 것이 뻔했다.

"그것이 또 참으로 궁금할 일입니다."

앨런이 짧은 웃음을 터뜨리다 이렇게 말했다.

"전하의 아들들이나 슬레이만 따위의 딸이 도무지 범상치 않으니. 이것을 신기하다 하여도 좋을는지."

천재 마법사 앨런 마나실의 손녀인 베로니카는 아주 평범한 소녀이자 마법사였다. 자식들이 하나같이 부모를 안닮았으니 이를 두고 어떻게 신기하지 않다 하겠나.

"아무튼 그 일은 전하께서도 그대로 두는 것이 낫겠다 하셨으니 그리 알고 계시지요."

"아, 이미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다행이네요."

"네. 그리고······."

한가지 더 전해야 할 이야기를 꺼낸 앨런이 사일런트를 발현한 뒤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에이프린 백작의 기사단 체류를 허락하셨습니다."

"아, 그럼 마침 잘 됐네요."

칼리안이 의미심장한 얼굴을 했다.

"무엇이 또 잘 되었다는 말씀이십니까."

의아해하며 쳐다보는 앨런을 향해 칼리안이 조금 전 플란츠와 나눈 대화를 전했다.

"플란츠 왕자가 그렇게 나서준다 하였습니까."

"네. 생각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이는게 신기할 정도입니다."

"나쁘지 않겠지요. 그런 일을 겪었으면 이제 다른 곳에 신경을 좀 쓰는 것도 필요할 터이니."

실리케의 일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일을 치른 왕궁에서 계속 살고 있으니 다른 곳에라도 눈을 두어야 하지 않겠나.

"네. 말씀하신대로 나쁘지 않은 일입니다. 아무튼 저는 날을 보아서 백작의 기사들을 조금씩 수도로 들여보내겠습니다. 그러려면 오늘 드미레아를 한번 만나기는 해야겠네요."

"하루도 지체하지 않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지체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시간이 아깝기도 하고요."

당근을 썰다 베인 상처가 아니었다.

칼리안은 정말 죽을 뻔했다. 여전히 얼굴이 창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쉬질 않았다.

시간이 아깝다 말하는 그만큼, 칼리안은 자신을 혹사하고 있었다.

- 달칵.

방금 내려놓은 찻잔을 가만히 응시하던 앨런이 입을 열었다.

"왕자님."

"네, 스승님."

불러놓고 한동안 말이 없다.

불투명한 찻물이 잠시 잔 속에서 흔들리다 가라앉을 때가 되어서야 다음 말이 나왔다.

"카밀론에는 왜 가려 하십니까."

"그야 당연히······."

시간을 돌려야 했을 일.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도 다 드러나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니 그것이 무슨 일이었든 관계 없이 대응할 수 있으려면 제가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미 했던 그 말을 다시 꺼내는 대신, 혹은 개를 키우러 가겠다는 농담 대신, 칼리안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닐 테니까.

칼리안의 반응을 본 앨런이 이렇게 다시 물어왔다.

"왕자님께서는 무엇을 하고자 하십니까."

막고자 하는 일에 필요하다면 왕좌에라도 오르겠다고.

앨런을 처음 본 날 칼리안은 그리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칼리안을 위한 계획이 아니었다.

"원하시는대로 모든 것을 다 지켜낸 이후의 왕자님을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신지요."

칼리안이 부드럽게 웃었다.

대답은 이어지지 않았다.

* * *

"이 곳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체이스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불쑥 찾아온 것에 꽤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그리고 언젠가 플란츠가 했던 것을 따라하는 것이 분명한 말을 덧붙였다.

"내 동생의 현재 형님께서."

장난이나 치고 놀 만큼 친해진 사이는 아니지 않나.

이런 생각에 플란츠가 짜증난다는 얼굴을 감추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얘기 좀."

"네. 들어와요."

체이스가 손을 내밀어 안쪽을 가리켜보였다.

저벅저벅 안으로 들어간 플란츠가 창가에 놓인 의자에 가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리고 맞은편에 체이스가 앉자마자 입을 열었다.

"마법사들로만 구성된 군대는 만들고 운영하는 것은 가능할지 몰라도 제대로 된 공격을 감행하기 어렵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한 해결 방법은······."

나른한 목소리.

키우는 고양이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설명하는 것 같은 말투. 하지만 그 안에 든 내용은 그리 가볍지 않았다.

"날씨 얘기 정도는 하고 나서 본론을 꺼내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플란츠 왕자."

"듣기나 해."

말을 한다는 것도 귀찮은데 날씨 얘기라니.

평생토록 그런짓을 해본 적 없는 플란츠는 체이스의 당혹스러움을 싹 무시해버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이 파악한 발칸의 구성과 훈련 방법을 포함한 여러 정보를 줄줄이 알려주기 시작했다.

상세한 설명은 없었다.

그런 것을 말하지 않더라도 체이스라면 충분히 알아 들으리라는 것이 플란츠의 생각이었다.

혹은 이미 알고 있을 수도 있고.

"······ 그렇게 하면 마법사가 적은 세크리티아에서도 충분히 쓸만한 군대가 나올 것 같은데."

반 년치 할 말을 한꺼번에 다 꺼내놓는 것 같은 플란츠를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던 체이스가 말이 끝난 뒤 입을 열었다.

"기밀일텐데 그런 이야기를 나에게 해줘도 괜찮습니까."

지금 무슨 말을 한 것인지는 아느냐는 얼굴을 본 플란츠가 한쪽 입꼬리를 틀어 올리며 대꾸했다.

"상관없어."

"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 해주는지 모르겠지만 괜한 일을 했습니다. 이미 내 의견은 전했을텐데요. 내가 기억하는 모든 것은 칼리안 왕자가 쥐어야 할 힘이라 생각하고 있다고."

플란츠를 찾아왔던 날, 체이스는 분명 미래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겠다고 말했었다. 칼리안이 알고 있는 일들에 기반한 모든 것은 오로지 칼리안만이 가져야 할 힘이라고 말했었다.

"카이리스의 마법사단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해. 당신도."

플란츠의 눈에 서늘한 달빛과도 같은 예리함이 담겼다.

"나는, 별 것 아닌 이유로 전쟁을 벌일 사람이 아니야."

그러니 알고 있는 것이 있으면 같이 움직이라고.

플란츠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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