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장. 그런 날이 온다면 (1)
칼리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틀간 얌전히 자리를 지켰다. 언제까지가 될지 기약도 없는 외출 금지령도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런데 이건 좀 너무 과하지 않나.
"호위기사라니."
르메인이 세 왕자에게 호위기사를 보냈다. 왕자들에게는 호위기사를 붙이지 않는다는 왕실의 규율을 깨버린 것이다.
물론 그것을 과한 행동이라 보기는 어려웠다.
자식들이 연중행사인 양 번갈아가며 피를 쏟고 있으니 카에라의 기사를 차출하여 보낸 정도면 르메인도 꽤 많이 자제한 것이라 볼 수 있을 터였다. 솔직히 앨런은 체르밀 궁의 기사들을 전부 빼버리고 그들을 모조리 카에라 단원들로 채우지는 않을까 걱정했었으니까.
그에 대해 브리센은 생각 외로 조용했다. 란델이 한번 브리센을 노렸다 실패한 뒤 혹여 플란츠에게 칼 끝을 돌리는 것은 아닐지 우려한 탓이리라.
문제는 칼리안에게 있어 그들이 '방문 잠금장치' 그 이상도 이하도 되지 못한다는 점에 있었다.
'잠깐 산책만 갈 거라니까.'
'불가합니다 왕자님.'
발칸의 훈련 모습도 보고 아르센도 좀 만나야 하는데 이 우직한 기사들은 절대로 내보내주지 않았다. 히나가 권고한 '7일'을 정확히 채우지 않는 이상은 결코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리라는 것이 그들의 설명이었다.
"붙어보자고 해볼까."
저 기사 나부랭이들이 나를 이기면 말 듣겠다고.
결국 칼리안이 눈을 빛내며 이렇게 무서운 말을 꺼내들었고 옆에 서 있던 얀이 깜짝 놀라면서 작은 목소리로 칼리안을 달랬다.
"그러다 또 다치시면 어떡하시려고요."
누가, 누구에게?
칼리안이 딱 이런 눈이 되어 얀을 쳐다봤다.
아무튼 얀은 한결같은 얀이었다.
"쉬셔야 합니다. 또 키리에에게 업혀 오시면 안되잖아요. 헤르츠 경은 제가 불러올게요."
결국 칼리안은 깊은 한숨을 쉬며 테라스로 향했다.
순간 얀은 칼리안이 그대로 테라스를 넘어 도망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으나 다행히 칼리안은 테라스의 의자에 얌전히 앉았다.
"안 갈 테니까 차나 한 잔 가져다 줘."
"네, 왕자님. 금방 가져다 드릴게요."
나가기를 포기했음을 안 얀이 웃으며 얼른 밖으로 나갔다. 방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있던 칼리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무 답답한데. 해야 할 일이 태산인데 이렇게 안에 처박혀 있으니."
심지어 앨런도 오지 않았다.
앨런이 오면 분명 일거리를 만들어낼 것을 알아서 이 참에 아주 그냥 푹 쉬라는 의미로 아예 발도 들이질 않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런다 해서 일거리를 만들지 않을 칼리안은 아니었다. 이렇게 무료하기만 해서야 사는 낙이 있다고 할 수 있나 따위의 생각이나 하는 사람이 아니던가.
'일단 헤르츠 경을 만난 뒤에 드미레아를 불러서 잠깐 얘기를 좀 하고. 그 후에는······.'
따라서 칼리안이 테이블을 손 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방에 갇혀 할 수 있을 만한 일을 정리하고 있을 때.
"니아앙!"
칼리안의 무료함을 떨쳐 줄 고양이 한 마리가 테라스 밖에서 날아들어왔다.
* * *
라즈베리 잼을 넣고 구운 오트밀 쿠키에서 달큰한 향이 났다.
쿠키 하나를 통째로 입에 넣고 씹던 앨런은 딱 그만큼 달큰한 이야기를 전해듣고 있었다.
- 카이리스의 3왕자와 지그프리드 소공작의 관계 칼리안과 드미레아가 정혼한 사이일 것이라는, 만약 정혼이 아니더라도 일반적인 사이는 아니리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는 것이다.
앨런은 입에 든 것을 다 넘긴 뒤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런 소문이 날 만 하지 않겠습니까?"
함께 무도회에 입장한 것으로 모자라, 무도회가 진행되는 내내 둘이 따로 앉아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거기에 더해 드미레아는 칼리안이 사라졌다며 플란츠를 붙들어두고 브리센에 항의를 하기도 했다. 그 신분과 능력만 따져보더라도 서로만한 배필을 찾기 어려울 정도인데 심지어 나이도 똑같았다.
그러니 말 만들어내기 좋아하는 귀족들 사이에 그런 말이 안 생기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나는 해명하지 않고 그대로 둘까 하는데."
"두 분이 정혼한 것처럼 소문을 그대로 두고 그냥 묵인할 생각이십니까."
왕실에서 그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으면 귀족들은 그것을 기정 사실로 믿을 것이 분명했다.
"내 생각은 그러하네. 다만 그 전에 칼리안의 의견을 물어야 하겠지만."
"칼리안 왕자님에게는 제가 한 번 다녀오지요. 그런데 그것은 전하의 욕심입니까 아니면 왕자님을 위함입니까."
르메인의 말에 앨런이 슬그머니 웃으며 이런 말을 했다.
"또 떠보는 소리를 하는군. 이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나를 꼭 칼리안의 경쟁자 보듯 하면서."
"지그프리드 공작가를 사돈으로 두어 전하의 힘을 늘리려는 것인지, 아니면 칼리안 왕자님의 입지를 단단히 만들어주려는 생각인지가 궁금해지니 그렇습니다."
르메인은 별다른 반응 없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나를 위해 지그프리드를 쓸 생각 없으니 걱정 말게."
곧 르메인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그 소문 덕에 칼리안이 사라졌던 일에 대한 쓸데없는 이야기가 줄어들었지 않았나. 브리센 후작이 가만히 있질 않아서 피곤한 와중에 차라리 다행한 일이지."
이 말에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오트밀 쿠키 하나를 하나 더 씹어 삼킨 뒤 대답했다.
"브리센 후작이 원하는대로 '왕자의 직무에 부담을 느낀 칼리안이 수도 밖으로 도망갔다 잡혀 들어온' 것으로 이야기가 굳어진다면 추후 칼리안 왕자님에게 굉장히 큰 결점이 될 수는 있겠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귀족들이 그 일에 대한 관심 자체를 가지지 않도록 했으면 하는데. 왕자의 위신이 깎이는 것보다는 정혼설이 나을 테니."
드미레아에게 제대로 놀아난 에반은 그 일을 어떻게든 부풀리기 위해 안달이 난 상태였다. 그 날에 있었던 일의 진상을 제대로 밝혀 브리센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시키고 칼리안이 왕자로서의 자질이 있는 것이 맞는지를 정확히 알려달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다 정말 국혼으로 이어져도 나쁠 것 없고."
덧붙여진 르메인의 말에 앨런의 미소가 짙게 변했다.
드미레아와의 실제 나이 차이를 의식할 것이 분명한 칼리안도 칼리안이지만, 드미레아가 공작위 버리고 왕궁에 들어 올 위인이 아니지 않나.
"그럴 일은 없을 터이니 염두에 두지 마시지요. 소공작은 지그프리드 버리고 왕자비나 왕비 노릇이나 하겠다고 나설 사람이 아니니. 그것이 아니라 전하의 셋째 아드님을 코끼리 땅으로 보내시겠다는 생각이라면 국혼을 기대하셔도 나쁘지는 않겠습니다."
"······ 되었네."
"란델 왕자님에 대한 혼담은 오가는 것이 없습니까?"
칼리안이나 플란츠는 아직 그만한 나이가 되지 않았다지만 란델은 이제 곧 있으면 19세가 되니 슬슬 정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가 아니던가.
"없을 리가. 안그래도 이제 생각을 해보려는데. 텐실과 대사막이 손을 잡았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로 유난히 많아졌군."
르메인이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두루마리 뭉치를 가리켜보였다. 순간 앨런은 그들의 명단을 알려달라는 말을 꺼낼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타국의 왕족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는 무조건 자국 내 사람과 혼인하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다시 말해 텐실의 핏줄이기도 한 란델은 다시 텐실의 사람과 결혼할 수 없다는 소리였다. 그렇게 되면 이 나라가 텐실의 손아귀에 들어갈 것이 분명하니 말이다.
그 말인즉슨 저 두루마리에 적힌 이들은 모두 란델을 지지하는 카이리스의 귀족들이라는 소리이기도 했으니, 앨런이 이참에 그들이 누구인지 정확히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을 눈치챈 르메인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안 되네."
"압니다."
왕자비 간택에 대한 내용은 국왕과 왕비의 고유 권한이다.
불필요한 권력 싸움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왕비가 없었으므로 오로지 르메인이 혼자 확인하고 결정하게 될 사안이니 앨런이 끼어들 일은 아니었다.
따라서 명단 역시 보여줄 수 없다는 말에, 앨런은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오트밀 쿠키를 하나 더 집어 먹었다.
"대신 지난번에 얘기했던 것 기사단 얘기 말인데. 지그프리드의 저택에 에이프린 백작의 기사단을 숨겨두는 것 허락하겠네."
"네. 칼리안 왕자님에게 소공작과의 정혼설을 그냥 둘지 물어보는 김에 함께 전해주고 오겠습니다."
"항시 궁금했었는데."
르메인이 앨런을 보며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연 뒤 한동안 앨런을 쳐다봤다. 얘기 해보라는 듯 가만히 앉아있는 앨런에게 르메인의 질문이 이어졌다.
"시스파니안을 닮은 왕자가 마법을 쓸 줄 알면 재미가 있지 않겠느냐고. 그렇게 말했었지."
"처음 제가 왕궁에 찾아왔을 때 말씀이십니까."
"그래. 칼리안의 마법 스승이 되겠다며 했던 말인데. 기억이 나나."
"그것을 설마 잊었겠습니까."
"······ 그렇다면 나는 자네를 어디까지 믿어도 되겠나."
그 말에 앨런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그것 참 빨리도 물으십니다. 전하 모가지 허전해지면 칼리안 왕자님 데리고 피신해달라는 부탁을 하실 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그런 것을 물으시는지."
"그때는 사제간의 정이 끈끈하다고만 생각했지."
이렇게 말한 르메인이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달칵 하는 찻잔 소리가 집무실을 잠시 울렸다.
"세크리티아의 세작까지 써가며 왕자의 일을 도울 만큼인 줄은 몰랐으니까."
칼리안의 일에 세크리티아의 세작들이 도움을 줬음을 알게 된 모양이었다.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 것인지, 칼리안을 습격했던 이들 중에도 세작이 있다는 것까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것을 어찌 아셨습니까."
"나라고 듣는 귀가 없는 것은 아니네. 물론 칼리안을 돕기 위해 나서준 것이었으니 세크리티아의 왕세자에게 다른 해가 가게 하지는 않겠네만. 나는 그대가 그 정도로 수단 방법 안 가리고 나설 만큼 칼리안을 돕는 진짜 이유를 알고 싶네. 어디까지 믿어도 좋을지."
"어딜 보아도 어여쁘고 안쓰럽기만 한 제자인데 수단 방법 안가리고 돕는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늙은이가 핏줄처럼 생각하고 키우는 중이니 염려 마시지요."
그렇게 말한 앨런이 웃음기 어린 얼굴을 했다. 그리고는 한결같이 마음에 담고 있던 말을 꺼내놓았다.
"전하께서 칼리안 왕자님 앞길 막으려 들 때 제가 전하의 숨통을 막을 일은 있겠으나 제가 왕자님을 마주보고 설 일은 없을 터이니."
"······ 그래. 다행이군."
이제는 앞에 앉아있는 마법사에게까지 목숨을 위협받은 르메인이 세상에서 제일 믿음직한 말을 들었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무료한 인생이 싫다고는 했다.
하늘에서 고양이가 떨어지는 기막힌 꼴이 보고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그러니까······."
뜬금없는 고양이 세례를 받은 칼리안이, 품에 안긴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고양이는······ 왜······?"
플란츠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플란츠는 칼리안의 방에 오려던 것이 맞기는 했다. 다만 고양이까지 데려올 생각은 없었다. 그럴 성격도 아니었을 뿐더러 고양이를 안고 조심조심 아랫층에 방문할 만큼 여유롭지도 않았다. 대낮이니까.
테라스 아래에서 칼리안이 내는 소리를 들었을 때 안고 있던 고양이를 내려놨고, 테라스 문을 열고 뛰어 내렸다.
그리고 고양이가 같이 뛰었다.
그리 어렵지 않은 움직임으로 고양이를 잡아챈 칼리안을 향해 일련의 상황을 떠올리던 플란츠가, 그 상황을 잘 설명해줄 수 있을 대답을 내놨다.
"어쩌다보니."
저 불친절한 대답을 그냥 '일부러 데려오려던 것은 아니지만 부득이한 사정으로 같이 오게 됐다' 정도로 생각하고 넘긴 칼리안은 조용히 고개만 끄덕여보였다.
"알겠습니다. 앉으십시오."
고개를 끄덕인 플란츠가 자리에 앉자, 분명 칼리안의 고양이인 플란츠를 더 좋아하는 고양이가 플란츠의 무릎 위로 올라갔다. 자연스럽게 고양이 위에 손을 올리는 플란츠를 보며 칼리안이 웃음을 참느라 얼마나 힘들어했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럼, 고양이 말고 형님은 왜 오셨습니까. 그것도 또 창문으로."
멀쩡한 대낮에 테라스로 온 이유야 뻔했다. 르메인의 호위기사를 피해야 했다는 것 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호위기사를 통해 르메인이 알지 못해야 할 말이 있다는 뜻일 터였다.
플란츠의 연두색 눈이 사일런트를 발현한 칼리안에게 향했다.
"혹시 조만간 기사단이 들어올 예정인가."
"무슨 기사단 말씀이십니까."
"내가 빌헬름 관에 불러들인 그 백작. 아우님이 쓰실 기사단을 만들고 있는 것 같았는데."
칼리안의 눈이 길게 구부러졌다.
지난 가을의 사냥대회에서 아이즌을 포함한 기사 가문의 이들을 만날 것이라는 이야기는 칼리안이 플란츠에게 직접 했었다. 그 이야기 후 시간도 꽤 지났고, 그 뒤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려 준 적 없었다.
플란츠의 말마따나 르메인의 탄신일 축제 기간 중 플란츠가 칼리안과 아이즌이 만날 자리를 마련해줬던 일이 있었을 뿐이었다.
"역시 형님은 참 똑똑하십니다."
"짖지는 말고."
칼리안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조만간 에이프린 백작의 기사단을 수도에 들일 생각입니다. 카렌과 라온을 견제하려면 그들을 왕궁 안에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요. 그것은 왜 물으십니까."
"카렌, 라온. 내가 쥐려고."
왕실의 두 기사단, 카렌과 라온.
그들을 떠올리며 잠시 입 속으로 말을 고르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되면 굳이 새 기사단을 왕궁에 묶어 둘 필요 없는 것 아닌가."
"형님께서 두 기사단을 제대로 통제하실 수 있다면 그렇겠네요."
"할 테니까. 새 기사단은 아우님이 가졌으면 하는데."
칼리안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카렌과 라온의 칼이 르메인을 향할 것을 대비한다며 힘들게 모은 기사단을 왕궁 안에 묶어두지 말고 그냥 아이즌의 기사단을 칼리안의 것으로 만들라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브리센에서 고양이 키울 준비를 벌써 하시는 겁니까. 브리센을 드리겠다 말씀은 드렸지만 이렇게까지 나서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내 아우님께서 고양이나 키우라고 하시니."
"발칸을 드린 것에 대한 대가로 제 기사단을 선물받은 셈이네요. 알겠습니다. 저도 지그프리드와의 동맹 말고 손에 직접 쥔 것이 있는 편이 좋으니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씩 웃으며 물었다.
"말씀드릴까요?"
"필요없어."
그리고 이번에도 고맙다는 말은 생략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