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21화 (122/527)

제22장. 건드리지 말라고 (11)

히나가 웃었다.

그동안 단 한번도 보여준 적 없던 수어를 하며 생긋 웃었는데, 아무래도 그건 욕이 아니었을까.

그것이 무슨 말인지 물었을 때 키리에는 칼리안의 눈을 피했다. 그래서 칼리안은 히나의 손 모양을 고스란히 외워뒀다.

'드미레아한테 물어봐야지.'

드미레아라면 그것이 욕이든 아니든 무슨 뜻인지는 알려줄테니까.

아무튼 매우 좋지 않은 뜻임에는 틀림 없다.

칼리안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그다지 좋은 말을 할 상황은 아니었다.

기껏 살려놨더니 다 낫지도 않은 몸으로 닷새만에 밖에 나갔다. 앨런이 같이 가니까 괜찮을 줄 알았는데 따로따로 움직였단다. 그래서 또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걸 다시 고쳐놓다 잠시 쉬는 사이에 제멋대로 4층에 가서는 다 낫지도 않은 속을 한 채로 그 많은 신 귤을 다 까먹었다.

거기서 끝났으면 다행이다.

- 왕자님의 고양이도, 왕자님보다는, 말을 잘 들어요.

칼리안은 플란츠와의 대화가 끝나기 무섭게 수련장에 갔다. 꼬박 일주일을 누워있어도 모자랄 판에 도무지 가만히 있지를 않는 것이다.

결국 수련장에 있는 것을 히나에게 들켰고 혼이 났다. 축복의 힘이나 히나의 치유가 부족한 피를 채워주지는 못하니까.

- 오빠도 나빠. 말렸어야지.

키리에도 같이 혼났다.

잠시 본가에 간 얀을 대신해 칼리안을 말려야 했음에도 나란히 수련장에 있었으니 혼이 날 만도 했다.

"걱정 마. 이번에는 진짜 무리 안 할게. 키리에 수련하는 것만 조금 봐 주고 올라갈게."

- 또 다쳐도, 안 고쳐줄 거예요. 보는 것만, 하세요.

어울리지도 않는 엄한 얼굴로 히나가 이렇게 말했다.

결국 칼리안은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몇 번을 다쳤더니 전부 다 얀이 되어 버렸다. 르메인은 물론이고 앨런과 히나까지.

"고맙지만, 히나. 얀이 해주는 걱정이면 충분해. 그러니 걱정 그만하고 들어가 있어. 감기걸릴라."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것인지.

칼리안은 히나가 밖에만 나오면 감기에 걸리는 줄 아나보다.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되려 자신을 걱정해주는 칼리안을 못미더운 눈으로 쳐다본 히나가 발을 돌려 돌아갔다. 히나가 멀어지는 것을 보던 키리에가 조용히 물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움직이시기 어려운 상태로 보입니다."

분명 히나에게는 걱정하지 말라 했던 칼리안이지만 어디 고분고분 가만히 있을 사람이던가. 그랬다면 애초에 수련장으로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키리에의 생각이 맞았다는 듯, 키리에를 향해 웃고 있는 칼리안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너 하나를 상대 못해줄까."

그러더니 이렇게 꽤나 뼈아픈 말로 키리에를 자극했다.

키리에가 살짝 웃더니 묵빛의 검을 들어 그대로 칼리안에게 내질렀다. 칼리안 역시 재빠르게 팔을 들어 그것을 막아냈다.

- 카앙!

실컷 내려다보는 말을 들어도 기분이 상하지 않는 것은 칼리안의 상태를 걱정한 키리에가 제대로 싸우려들지 않을까봐 하는 소리임을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키리에는 최선을 다해 검을 움직였다.

여유로운 얼굴로 검을 받아 넘기던 칼리안은 놀란 표정이 드러나지 않도록 신경을 쓰고 있었다.

'생각보다 더 많이 강해졌는데.'

스스로의 검술과 마법, 그리고 주변 상황에 몰두하느라 꽤 오랫동안 키리에를 보아주지 못했다. 그리고 키리에는 그 사이에 엄청난 속도로 성장해 있었다.

- 카강, 캉! 카아앙!

연타를 방어한 칼리안의 검이 키리에의 심장을 노리며 뻗어나갔다. 그것을 어렵지 않게 막아낸 키리에가 다시 공격을 해왔다.

즐거운 마음이 든다.

확실히 키리에는 노력하는 천재다.

'괜한 걱정을 한 것일지도.'

대사막 전사들의 습격이 있던 날, 에우리아를 만나고 궁에 돌아온 뒤 봐주려던 것이 바로 키리에의 검이었다. 플란츠와 수련장 앞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던 날 키리에가 '벽'을 마주하고 있음을 느낀 까닭이었다.

마법사가 깨달음을 얻어 다음 서클을 완성하듯이 검술 역시 스스로의 한계를 넘고 다음 단계로 성장하게 되는 때가 있다. 지금의 키리에가 바로 그 시기를 겪고 있었다.

수련장 한 가운데에서 검을 내려놓고 앉은 채 깊은 생각에 빠져있기에 수련장에 들어가려던 플란츠를 붙들어 앉혔지 않나.

다만 지금까지는 칼리안이 알려준 검술을 수련했다면 이제는 스스로가 깨우쳐 나가야 할 일이라 생각했으므로 그저 지켜봤다. 그러다 아무래도 조금쯤은 도움을 줘야 할 것 같아서 궁에 들어오면 키리에부터 보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일이 꼬였었다.

- 카강! 카아앙!

날카로운 쇳소리가 수련장 전체를 끊임없이 흔들어댔다. 대부분의 공격은 키리에가 했고 칼리안은 간혹 반격하며 키리에의 반응을 살폈다.

"느려."

그리고 이렇게 한계를 파악하기 위한 말로 계속해서 키리에를 몰아세웠다.

키리에의 움직임이 끝을 모르고 빨라졌다.

그 때마다 칼리안은 대단할 것 없다는 듯한 얼굴로 그것을 받아냈다.

이 정도라면 슬레이만의 기사 유란과 견주어도 승패를 알 수 없으리라. 문득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 때 키리에의 검이 칼리안의 미간을 노리고 쏘아져 나왔다.

칼리안이 알려 준 공격 방식이 아니었다.

칼리안의 입이 긴 호선을 그렸다.

- 카앙!

그것을 막아낸 칼리안의 모습이 키리에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뻗어낸 검을 즉각 회수한 키리에가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상체를 숙였다.

- 쉬익!

조금 전까지 키리에의 머리가 있던 곳으로 칼리안의 검이 지나갔다. 그것을 느끼며 몸을 돌려세운 키리에의 귀에 아주 미세하게 바닥을 스치는 칼리안의 발소리가 들렸다.

키리에는 주저하지 않았다.

곧바로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검을 뻗어냈다.

"말했잖아."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 칼리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느리다고."

실로 어마어마한 속도의 움직임이다.

곧 쓰러질 것처럼 비척비척 이 곳으로 걸어온 사람이 과연 맞을까 싶다.

뻗어낸 검을 다시 한번 회수한 키리에가 바닥을 박찼다. 그와 함께 키리에의 신형도 사라졌다.

- 카아앙! 캉! 카앙!

흐릿한 그림자가 서로 얽히며 다시 한번 맞붙었다. 칼리안이 자신의 공격에 절대로 당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한 키리에는 온 힘을 다해 검을 다뤘다.

그렇게 수십 차례의 공방이 다시 오갔을 때.

- 피잉······!

키리에의 눈빛이 깊이 가라앉았다.

수련장이 아닌 오로지 칼리안과 키리에만이 존재하는 그런 공간에 들어선 듯한 느낌을 받았다. 키리에는 지금껏 가져보지 못한 그 이질적인 느낌에 아주 깊이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엄청난 변화가 찾아들었다.

칼리안의 움직임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바닥을 디디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칼리안이 어디로 움직일지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이유는 몰랐다. 그저 알게 되었다.

- 쌔애액!

주저할 시간이 없었다.

알았으니, 공격할 뿐.

예리한 파공음이 대기를 갈랐다. 키리에의 검이 당장이라도 칼리안의 심장을 꿰뚫을 기세로 뻗어나갔다.

그리고 칼리안은,

[실드]

아주 치사했다.

* * *

오러로 만들어진 실드는 그 자체로 위협적이다.

칼리안의 실드는 당장이라도 키리에의 검을 조각낼 기세였다. 물론 칼리안의 의지가 그것을 원하지 않았으므로 그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무엇이든 조각낼 기세의 '실드'라니.

참으로 모순된 힘이 아닌가.

마치 파열된 유리조각을 다시 모아둔 듯한 형상의 실드 안에서 칼리안이 씩 웃었다.

"미안. 죽을 것 같아서."

그러더니 변명을 했다.

실드에 가로막힌 정확히 칼리안의 심장 앞에서 멈춘 자신의 검 끝을 보던 키리에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됐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기특한 손주를 보듯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졌어."

그 말을 듣고도 키리에는 한동안 가만히 서있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깨달았다.

- 이겼······ 다.

이겼다.

칼리안을 이겼다.

한 순간에 검의 이치를 깨닫거나 오러를 방출하는 기적이 생기지는 않았다. 그것은 정말 말 그대로 기적에 가까운 일일 뿐이다. 키리에는 그런 것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 키리에는 감각을 확장시키는 법을 깨달았다.

뛰어난 청력을 이용해 싸우는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타인의 기운을 느끼고 동화하며 오직 상대와 나만이 존재하는 상태로 검을 나누게 되는 능력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리 크게 기뻐하지 않는 목소리였으나 키리에의 얼굴을 쳐다본 칼리안이 웃었다. 그 얼굴 속에 숨겨진 감격스러운 웃음을 읽어내지 못할 리가 있겠나.

'어쩌면 이번 생에서는 키리에도 검의 길에 오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렇게 흐뭇한 기분으로 한 발을 내딛던 칼리안의 걸음이 휘청였다.

깜짝 놀라 부축해오는 키리에를 보며 칼리안이 웃었다.

"배고파서 그래."

키리에가 낮은 한숨을 쉬었다.

체이스가 온 뒤로 제 속은 썩어가면서, 얀을 다독이고 플란츠의 짐을 덜어주고 히나를 걱정하더니 키리에까지 신경을 쓰고 있다. 그 고집을 어떻게 이기냐 싶어 검을 꺼내 대련에 응했지만 당장 걷지도 못하는 것을 보니 원망스러운 마음이 든다.

곧 죽어도 아프다는 말을 안 하는 것이다.

이유를 모르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말해줘도 좋지 않을까.

지금 너무 힘드니까 조금만 미뤄달라고.

이런 상태로 찾아와서 도와주면 고마울 줄 아느냐고. 오히려 미안하기만 하지 않느냐고.

그런 말을 하는 대신 키리에는 그냥 고개를 숙여 보였다. 잠깐 실례할 테니 이해하라는 뜻이었다.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걸어갈 수 있겠냐는 말을 해봤자 소용이 없을 테니, 키리에는 그냥 덤덤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칼리안을 냅다 들춰 업었다. 어차피 저대로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은 모양새도 아니었다.

의외로 칼리안은 얌전히 키리에의 등에 업혔다. 그러더니 그 등에 머리를 기댄 채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를 냈다.

"아, 오랜만이다."

분명히 웃고 있는데 그 말 끝이 아프다.

그것이 무엇 때문일지 알아들은 키리에가 짧게 물었다.

"제가 업어드린 적이 있습니까."

"응."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열 다섯 살의 입에서 나오지 말아야 할 이야기가 이어졌다.

"내가 취했을 때. 많이."

키리에.

칼리안이 유일하게 마음 놓고 붙잡을 수 있는 과거의 끈이 아니던가.

"술 좋아하셨습니까."

"나보다는 네가 더 좋아했어."

기분이 참 묘하다.

과거의 일일텐데도 과거가 아니니 이것을 어찌 받아들일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칼리안이 잠겨드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사실 다 안 나았어. 움직이는 것도 내 맘 같지 않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더 열심히 해. 다음엔 안 져."

"네."

그렇게 답한 키리에가 피식 웃었다.

과거의 일이야 어찌됐건 키리에는 그저 들어주면 될 일이다. 가끔씩 이렇게 약한 소리가 나올 때마다 고개만 끄덕여주면 될 일이니 어려울 것이 있을까.

지그프리드 덕에 당분간 란델도 얌전히 있을 테고 란델에 대한 처벌로 텐실에도 경고를 했으니 또 기사를 보내는 식의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브리센은 플란츠가 막고 서 있으니 그도 괜찮다. 습격자들도 일단 물러났다.

"걱정 말고 쉬십시오."

"응."

그러니 우선은 다 내려놓고 쉬시라고.

그렇게 말했고, 그렇게 알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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