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장. 건드리지 말라고 (10)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수증기.
바위를 뚫고 솟아오르는 따뜻한 물.
체온보다 조금 높은 그 물에 온 몸을 담그고 살며시 눈을 감는 것을 싫어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카이리시스에서 동쪽으로 이틀을 더 가면 온천으로 유명한 슈린츠 지방에 도착할 수 있다. 카이리스 왕실의 별궁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면 먼 거리겠지만 기실 귀족들에게 있어 이틀 거리는 그리 부담스러운 걸음이 아니었다. 어차피 일 년에 한 두번은 멀고 먼 자신의 영지까지 다녀오는 이들이 대다수였으니까.
때문에 카이리시스에 거주하는 많은 귀족들이 관광 혹은 요양을 위해 종종 슈린츠를 찾곤 했다. 하지만.
"걱정은 안하셨습니까."
이렇게 입을 연 드미레아의 얼굴에는 온갖 감정이 다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그 수많은 표정 중 가장 큰 것을 해석해보자면 '아버지 당신이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정도가 될 것이었다.
그래, 물론.
제 핏줄이라고는 해도 도저히 이해해줄 수 없는 것이 꼭 한 두 가지는 있게 마련이다.
그 살기등등한 왕자를 보며 꽃 같다 말하는 얀도 당최 이해하기 어려운 족속이지만 차라리 그 쪽은 그래. 꽃 같이 생기기라도 했으니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줄 수는 있다.
"내가 설마 내새끼 걱정을 안했겠느냐?"
"걱정하셨다기엔 피부가 너무."
매끈매끈 윤기나는 슬레이만의 얼굴을 보며 드미레아가 이렇게 대꾸했다.
르메인을 찾아가 드미레아가 문을 닫아 잠근 이유를 들은 슬레이만은 가타부타 다른 말 없이 르메인에게 돈이나 좀 빌려달라 말했다.
그리고 그 돈으로 세리에와 함께 온천에 갔다.
드미레아가 그랬지 않나 며칠 더 쉬다 오라고. 그래서 갔다는 것이다. 수도에서 이틀 떨어진 거리에 있는 슈린츠에.
저 태평함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것을 이해하기엔 드미레아의 이성이 너무 건강했다.
"아주 잘 쉬고 오신 것 같네요."
두 왕자를 사이에 두고 지그프리드와 브리센이 대립하는 상황에 지그프리드의 가주인 슬레이만이 어정쩡한 곳에 있으면 오히려 독이 된다. 그러니 그냥 멀찍이 떨어지는 것으로 드미레아를 도운 것임을 알고는 있다.
그런데 저 얼굴 좀 보란 말이다.
딸 걱정 집안 걱정 나라 걱정이라고는 공기중에 퍼진 먼지만큼도 안하고 정말로 아주 그냥 푹 쉬기만 한 저 얼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냔 말이다.
그것이 고스란히 얼굴 밖으로 나왔으므로 슬레이만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장난기를 지운 채 웃음만 남긴 얼굴로 말했다.
"세리에가 걱정하지 말라 했고, 나도 그리 생각했다."
슬레이만이 허락한 '방패'의 의미를 멋대로 확장시켰다. 보호와 옹립의 뜻을 교묘하게 달리 해석하여 칼리안을 돕는 것이 자신들의 신념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는 눈속임까지 하고 있었다.
그런 드미레아를 걱정하지 않았다.
혼내기는 커녕 믿었단다.
그렇게 말한 슬레이만이 드미레아를 보며 입을 열었다.
"하나만 물어보마."
"네."
"이유가 무엇인지 내가 그것이 참 궁금했다."
"무슨 이유 말씀이십니까."
슬레이만은 들고 있던 투명한 와인을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
"너는 얀이 아니지 않느냐.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해 가며 3왕자를 도왔는지, 그걸 모르겠다. 고작해야 3왕자가 지그프리드 공작령에 방문했던 그 며칠동안 본 것으로 이렇게까지 나서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궁금하였다. 3왕자의 무엇을 보고 마음을 정했는지."
드미레아는 얀만큼 칼리안을 많이 겪어보지 않았고 만나보지도 않았다. 그렇다 해서 슬레이만처럼 칼리안의 진짜 모습을 파악한 것도 아니었다. 허나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이유를 알기가 어려웠다.
슬레이만의 물음에, 드미레아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가 웃잖아요."
하늘 아래 온갖 불행은 다 내꺼라는 얼굴을 하고 살았던 얀이 '묵은 똥 싼 얼굴'을 하더니 칼리안과 잠시 손을 잡아달라는 말을 하러 찾아왔을 땐 웃고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 준 사람이니 원하는 걸 해보도록 도와줘도 좋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 정도의 결정에 대한 결과는 제가 감당할 수 있으니까요."
드미레아다운 담백한 이유였다.
그 말을 들은 슬레이만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큼지막하게 웃는 얼굴을 한 슬레이만이 고개를 끄덕끄덕 해보이더니 입을 열었다.
"나 내일 내려간다. 우리 세리에랑 둘이 가마."
"지그프리드 공작령으로 가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지금 그 곳에 아무도 없으니 오래 비워두기도 어렵지 않겠느냐. 여기 일은 전부 다 네 마음대로 해보거라."
드미레아는 수도에 와서 한 일이라고는 앨런과 함께 르메인을 놀리고 앨런과 술 마시고 테일란에게 시비걸었다 죽을뻔하고 집에서 쫓겨나 온천에 다녀온 것이 전부인 슬레이만을 보며 대답했다.
"네."
수도에 드미레아만 두고 가겠단다.
칼리안을 어떻게 돕든 알아서 결정하고 행동하라는 소리였다. 자신이 내려감으로서 드미레아에게 그만큼의 권한을 넘기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감사합니다."
자신의 결정과 행동을 믿겠다는 아버지를 보며 드미레아가 살짝 웃었다.
* * *
여행을 마친 슬레이만이 집에 들어가고 칼리안이 플란츠에게 고양이 키우기를 권하고 있던 그 시간.
시종장 라울에게 엘프 사신단과의 만남을 미루라 한 르메인이 창 밖으로 보이는 거대한 정원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텐실이 얽힌 증거가 나왔다는 말이더냐."
르메인의 뒤에 서 있던 렌이 대답했다.
"네 전하. 네르드라는 자가 있던 서점에서 텐실의 왕실과 주고 받은 서신이 다수 발견됐습니다. 3왕자님께 해를 입힌 일을 계획한 것에 대해서도 모두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텐실 외에 다른 이들이 관련되었다는 내용은 없었고."
"네. 그렇습니다. 텐실에 대한 내용만 확인되었습니다."
꼼꼼한 렌과 카에라가 직접 나서서 수색을 진행했으니 놓친 증거는 없을 것이다.
칼리안이 사라졌을 때 가장 큰 이득을 볼 것은 란델이었다. 란델이 왕위에 올랐을 때 이득을 보는 것은 당연히 텐실이다. 그러니 습격을 한 이유 역시 너무나 명백했다.
증거도 정황도 모두가 텐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전부 태우거라."
때문에 르메인은 이렇게 명했다. 이번 일의 배후에 대해 앨런에게 전해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르메인은 그들 중 죽은 이가 세크리티아의 세작임을 알지 못했다. 이번 일에 크게 나서 준 체이스에 대한 앨런의 배려였다.
"훗날을 대비해 보관해두지 않으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어차피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거짓 배후라 하니 그대로 둘 이유가 없지 않느냐. 훗날에 다른 문제가 있다 해도 거짓 증거를 이용할 일은 없을 테니 태워 없애도록 하거라."
렌은 반박하지 않았다.
지그프리드의 기사 로난시테 체이스의 기사 테일란 그리고 키리에가 그러하듯이.
"알겠습니다.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전하."
고개 숙여 예를 보인 렌이 밖으로 나간 뒤 르메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두 왕자와 소공작에 대한 처벌이 있어야겠지."
칼리안이 습격당한 것을 세상은 모른다.
연회장에서 멋대로 나간 란델을 체르밀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했으면서 멋대로 근 일주일간 실종되었던 칼리안을 그대로 둘 수는 없다. 한밤에 왕궁 밖으로 나갔던 플란츠 역시 마찬가지, 그리고 그런 플란츠를 억류한 지그프리드 역시 빠뜨릴 수 없었다.
물론 드미레아는 지그프리드에 대한 처벌도 자신이 받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다만 드미레아가 몰랐던 것이 하나 있었다. 벌을 내릴 르메인이 어떤 사람인지는 드미레아보다 슬레이만이 조금 더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그프리드 공이 내일 수도를 떠난다더군요."
어떤 벌을 내려야 할지 고민하는 르메인을 돕기 위해 앨런이 지나가는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르메인이 피식 웃었다.
아무리 르메인이라지만 이런 시기에 굳이 수도를 떠나겠다는 슬레이만의 의도를 모를 만큼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곧 르메인이 시종장 라울을 불렀다.
그리고 몇 가지 내용을 전달했다.
"수도에 혼란을 일으킨 지그프리드 공작을 내일 당장 카이리시스 밖으로 내보내고 해가 가기 전까지는 카이리시스 입성을 금지한다."
드미레아를 대신해 슬레이만이 처벌을 받는다.
칼리안의 방패가 되는 것이 드미레아의 몫이었다면 드미레아의 방패가 되는 것이 슬레이만의 몫이니까.
"그리고 2왕자와 3왕자 모두 왕궁 밖 출입을 금지시키겠다. 허락이 있기 전까지는 외부 행사에도 참여하지 못할 것이다."
꽤 강한 처벌이었으나 앨런이 보기에 그것은 '보호' 였다. 카이리스에서 시스파니안의 손길이 어린 이 왕궁만큼 안전한 곳은 없을 테니까.
"딱 좋은 처벌입니다."
그 마음을 모를 리 없을 앨런이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래.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이 왕궁 안에 갇혀 있는 순간 순간이 생의 마지막이 될 것처럼 숨이 차올라서 그리 말했다.
왕이 되고 싶지 않다고.
살고 싶다고.
칼리안은 플란츠가 그런 말을 한 이유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왕의 아들로, 그리고 왕의 동생으로 플란츠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을 왕궁에서 보냈을 테니. 때문에 플란츠의 말에 공감하고 고개를 끄덕였을 수도 있다.
그래도.
그렇다고 해도.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플란츠가 지그프리드의 저택에서 혼잣말처럼 꺼냈던 말을 다시 내보냈다.
"내 아우님이 나를 너무 믿으시는데."
설마했지만 브리센을 넘기겠다니.
태연한 얼굴로 귤 껍질을 까며 할 만한 이야기라 하기에는 너무 크고 무겁지 않은가.
플란츠는 그렇게 생각했다.
"겁을 잃으신 건지. 자신이 넘치시는 건지."
처음 칼리안의 방을 찾았을 때부터, 그리고 지금까지. 칼리안은 단 한번도 플란츠를 의심하지 않았다.
손에 쥔 것이 없으면 죽는다며 발칸을 빌려주더니 브리센까지 쥐어주려 하는 칼리안을 보며 플란츠가 그렇게 말했다.
대체 뭘 믿고 이러느냐고.
내가 당장 마음을 바꿔먹으면 어찌하려고.
"그러다 내가 또."
이렇게 말하던 플란츠가 입을 다물었다.
말을 멈춘 것을 느낀 칼리안의 움직임도 잠시 멈췄다.
플란츠가 무엇을 되삼켰는지 칼리안도 느낀 탓이다.
그렇게 아주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내 형님께서는 어찌나 눈치가 빠르신지."
칼리안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는 신 귤의 껍질을 다시 벗겨내기 시작했다. 붉은 두 눈이 연두색 귤 껍질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였다.
"거기까지만 생각하십시오."
시디 신 귤의 향이 코 끝을 맴돌았다.
그 끝에 한 사람이 자꾸 떠올라서 혼자 먹질 못하고 굳이 여기까지 왔는데.
떠올리지 말아야 할 것을 알게 된 사람이 앞에도 있었다.
"넘겨짚는 것 까지만, 하십시오. 확신하지 말고."
전쟁이 있었다는 말도, 그 안에서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설명도, 그것이 누가 일으킨 전쟁이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칼리안 혼자 겪은 과거의 일이다.
체이스가 기억해주고 있다지만 결국 아무 의미 없는 일이 아닌가. 지금에 와서는 일어나지도 않은 그 일을 왜 혼자 알아내서는 저러고 있느냔 말이다.
"······ 플란츠."
살짝 눈을 감았다 뜬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과는 상관 없는 일이었으니까."
지금의 플란츠와 아무 관련 없는 일이니까.
그 일은 절대로 되풀이되지 않을 테니까.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플란츠는 대답하지 않았고 다시 한번 눈을 감았다 뜬 칼리안은 귤을 한 조각 떼어내어 입에 넣었다. 유난히 신 맛에 저도 모르게 쓴웃음이 났다.
한참을 오물거리며 귤을 씹어 삼킨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형님께서는 스스로 왕이 되는 것이 결단코 싫다 하셨고, 란델 형님께서 왕위에 오르셔서 형님과 저를 나란히 탑에 가둬두는 것은 더 싫으실 것 아닙니까. 그러니 믿는 겁니다."
나도 무턱대고 너를 믿어줄 만큼 좋은 사람은 아니라고. 그러니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며 미련 떨지 말라고.
"혹시라도 마음이 바뀌어서 세자위가 필요해지면 그냥 달라고 하세요. 생각해 볼 테니까."
남의 것 탐내본 적 없는 플란츠에게 칼리안이 그렇게 말했다. 그 꼴을 본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버릇없는 새끼."
칼리안이 양쪽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웃어보였다.
그리고는 마지막 남은 귤을 들어 플란츠에게 내보였다.
"형님 드시겠습니까."
플란츠가 작은 소리를 내며 실소했다.
그리고 칼리안의 손에 들린 귤을 건네받았다.
시고 시고 또 셔서 머릿속에 든 생각이 싹 사라져버린다.
그러니 어쩌겠나.
쓸데없는 생각 말고 고양이나 키워야지. 브리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