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18화 (119/527)

제22장. 건드리지 말라고 (8)

하얀 수리.

세크리티아 세작들의 근거지를 관리하던 이였다. 1년 전 칼리안에게 독과 지도를 팔았던 이였기도 했다.

"세작이라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지 않겠나. 자국에 충성하기 위해 다른 나라에 숨어들어 그들을 속여가며 정보를 얻어내는 이들인데, 그런 이들이 마음을 바꾼 것을 배신이라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늘 하던 것을 했을 뿐이라 여겨야 하는가. 알 수 없는 일이지."

혼잣말인듯 아닌듯한 말을 꺼낸 앨런이 잠시 웃었다.

"어찌됐건 자네가 이제 더 이상 세크리티아의 세작이 아닌 것은 분명하겠지. 주인에게 변절하고 새장에서 스스로 빠져나갔으니."

'진짜 이름이 뭐였는지 생각나질 않네요.'

오래 전 언젠가 앨런과 함께 차를 마시다 문득 그를 떠올려보던 칼리안은 이렇게 말했었다.

몇 번인가 사적인 대화도 나눠보았던 푸른 솔새와 달리 하얀 수리와는 그리 가깝게 지내질 못했다고.

외눈 안경을 즐겨 쓰는 점잖은 인상의 중년 남자. 그러나 사실은 누구와 견주어도 지지 않을 잔악함을 숨긴 자.

칼리안은 그 정도로만 기억을 하고 있었다.

본래 하얀 수리가 누구였는지는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고 그렇게 얘기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베른으로서의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는 충직한 하얀 수리였으니까.

"그만하시오."

앨런의 손에 떠오른 세 번째의 플레임 스피어를 보고 있던 하얀 수리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입 속에 숨겨두었던 독을 뱉어냈다. 그런 하얀 수리를 응시하던 앨런이 손가락을 한 번 튕겼다.

- 달칵.

앨런이 잠궈두었던 가게 문이 잠시 열렸다. 이 곳에 누군가를 더 들여보내도 괜찮으리라 판단한 까닭이었다.

딸랑, 하고 문에 달린 종 소리가 다시 한번 울리며 누군가가 더 들어왔다.

- 저벅, 저벅.

조용하지만 주저하지 않는 발소리.

그 주인의 성격을 꼭 닮은 걸음 소리가 뒤를 이었다.

- 저벅.

소리가 멈춘 뒤에는 한동안의 침묵이 찾아왔다.

하얀 수리도 앨런도 입을 열지 않았다.

"네르드."

정적을 깨뜨리는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보랏빛의 고요한 시선이 하얀 수리였던 이에게 닿았다.

* * *

그것은 칼리안의 생각이었다.

앨런과 함께 지그프리드의 저택 대문을 나서기 직전 서둘러 움직이던 레이븐의 발이 우뚝 멈췄다. 그것을 본 앨런도 말을 멈춰 세웠다.

"그러고보니 좀 이상합니다."

칼리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문득 떠오른 의심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이 이상하다는 말씀이신지요?"

"수상한 이들이 지그프리드 공작과 브리센 후작의 집을 살피고 돌아갔다는 정보. 너무 명확한 정보가 갑자기 전해졌지 않습니까."

칼리안은 그들이 언제 어디로 향했는지 확인이 되자마자 앨런을 불러왔고, 그들이 있다 알려진 곳으로 곧장 찾아가려던 참이었다.

"숨어들려는 이들은 의외로 사람이 적은 곳을 꺼립니다. 눈에 더욱 잘 띄니까요. 그런데 그들이 숨었다 전해진 곳은 인적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혹시 그들이 만든 함정일지를 걱정하시는 겁니까."

"함정일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함정이어도 상관 없다 여겼고요. 저를 불러내기 위한 거짓 정보라 해도 상관 없이 그들을 제대로 상대하고 배후를 파악하면 되니까요."

"갑자기 명확히 전해진 정보가 거짓인지에 대한 부분이 아니라면, 무엇이 이상하다 여기셨는지요."

레이븐의 안장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스승님. 혹시 그 동안 새들의 정보와 마법사의 정보가 일치했습니까."

질문을 하고는 있었지만 사실을 이미 다 파악했다는 듯 확신이 어린 목소리였다.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그럼. 확실히 이상하네요. 정보가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스승님께서는 세크리티아의 세작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하시겠지만 저는 아니니까요."

앨런이 말 없이 칼리안을 쳐다봤다.

한 번 더 생각을 정리한 칼리안의 입이 가만히 열렸다.

"협회장이 저를 도와 이런 저런 정보들을 모아다 주고 있다고는 해도, 협회의 마법사들은 정보원이 아닙니다. 그에 비해 새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시기의 카이리시스에 얼마나 많은 세작이 얼마나 활발히 활동했는지는 칼리안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정보가 똑같은 건 말이 안돼요. 세크리티아에서 알아낸 정보가 더 많았어야 합니다. 그런데 정보가 똑같았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입 밖으로 꺼내놓는 것인지, 칼리안의 말이 빠른 속도로 이어졌다.

"그 외진 곳에서 카이리시스에 떠도는 소문을 접하고 대응책을 세우려면 왕복하는 이들이 있었어야 합니다. 새들은 그들의 움직임을 놓쳤을 리 없습니다. 그러니 아무래도······."

세크리티아의 세작들이 얼마나 능력있는지를 설명하는 카이리스 3왕자의 말에도 앨런은 웃지 않았다. 칼리안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짐작한 까닭이다.

"체이스······ 왕세자께서."

칼리안은 자연스럽게 붙어 나오려던 '형님'이라는 단어를 가까스로 집어넣었다. 고삐를 쥐고 있던 주먹에 잠시 힘을 준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스승님께 전하지 않은 말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체이스가 무언가를 알아냈지만 저에게 전달하지 않았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그런 것 같습니다. 전달하지 않았다기보다는 전달하지 못했다 해야겠죠."

"저나 왕자님에게, 혹은 카이리스에 전하지 못할 내용을 알게 되어 전달하지 못했다고 보아야 할는지요."

"네. 상황을 보면 저를 습격한 것과 세크리티아의 누군가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을 수 있습니다. 카이리스에서 저를 습격한 이들과 관련이 있을만한 세크리티아의 인물이라면······."

칼리안이 조용히 읊조렸다.

"새."

가장 유력한 것은 세작이다.

"저 역시 세크리티아에서 마음을 돌렸던 푸른 솔새를 이미 만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그런 이들이 더 있지 말라는 법 없습니다. 새장에서 나간 새가 또 있었고 그 누군가가 이번 일에 연관되어 있을 것 같습니다. 세크리티아의 왕세자께서 그것을 알게 되신 듯 하고요."

앨런의 눈꼬리가 가늘게 좁혀졌다.

"체이스가 세크리티아의 세작들 중 변절자가 있으리라는 사실을 숨기고 협회장과 똑같은 정보만 추려내어 앨런에게 전달했을 것이라는 말씀이신데. 굳이 그럴 이유가 있었겠습니까."

"혹시 이 곳에 오시기 전에 체이스 왕세자님을 만나보셨습니까."

"아닙니다. 만나지 못했습니다."

언제나 체이스는 앨런을 직접 찾아왔다. 다만 오늘만은 체이스가 보낸 사람을 통해 내용을 들었다.

앨런은 그것이 돌아가는 상황을 주시하기 위해 자리를 비우기 어려웠던 탓이리라 생각하고 넘겼었다. 위치를 확인하자마자 칼리안을 만나러 왔기 때문에 그것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을 시간도 없었다.

앨런의 답을 들은 칼리안이 파리한 웃음을 지었다. 재미가 있어서 웃는 것이 아니었다.

"세크리티아의 새들이 제가 습격당한 것과 관련되었음을 아셨고 새들을 직접 만나보려고 마음을 바꾸신 것 같습니다. 자리를 비우지 못해서가 아니라 비워야 하기 때문에 스승님에게 사람을 통해 내용을 전한 것 아니겠습니까."

체이스는 지금 칼리안을 속이려는 것이 아니었다. 세크리티아의 왕세자로서 이번 일을 카이리스에 알리지 못한다는 것을 알 뿐이다.

대신 칼리안을 위해 따로 움직이기로 했을 것이다.

베른의 형으로서.

체이스는 베른과 비슷했다. 겁이 없었다.

무턱대고 혼자서 그리고 직접 움직이는 것을 좋아했다. 데블란이 베른을 바다에 빠뜨렸을 때 겁도 없이 그 깊은 물 속으로 뛰어들었던 체이스다. 플란츠까지 우려 섞인 생각을 했을 만큼 제멋대로 왕궁을 활보하던 이가 아니던가.

그러니 이번에도 직접 움직인 것이다.

변절한 세작들에 대한 일을 알아보기 위해서.

"변절한 새가 있는 곳. 그 곳으로 따로 가셨을 겁니다."

마법사들과 새들이 알려준 위치는 칼리안을 잡기 위한 함정이 맞을 것이다. 그 쪽으로 칼리안이 가면 습격자들의 공격이 있을 터였다.

"체이스 왕세자님만 알고 있을 놈들의 본거지가 다른 곳에 또 있을 테니 그 쪽으로 혼자 가셨겠네요. 놈들의 공격이 저에게 집중된 틈을 타서, 공격에 가담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을 변절한 세작들을 만나러요."

체이스가.

세작들은 칼리안을 직접 상대할 만큼의 무력이 되지 못했다. 그러니 칼리안을 기다릴 놈들은 대사막의 전사들일 것이고 변절한 세작들이 본거지에서 상황을 지켜볼 터였다. 때문에 앨런은 질린 얼굴을 한 칼리안을 달래듯이 말을 꺼냈다.

"체이스가 따로 움직인다 해도 카스트린 경이 있을 터이니 걱정은······."

"마나실 백작."

칼리안의 단호한 목소리가 앨런의 말을 잘랐다.

"궁으로 가세요. 마법사들이 행적을 파악했을 겁니다. 그 분께서 가신 쪽으로 따라가세요."

제자로서 스승에게 부탁하는 것이 아니었다.

카이리스 3왕자가 백작 앨런 마나실에게 명령하는 것이었다.

앨런은 놈들에게 행적을 들키지 않기 위해 궁의 입구에서 지그프리드의 저택까지 워프했다.

그 후로 지금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그러니 앨런이 빠르게 움직이면 말을 타고 가는 체이스를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다.

앨런이라면 가능하다.

"분명히 다른 호위기사들만 데리고 가셨을 겁니다."

세크리티아 왕궁의 탑 꼭대기에 서면 내성을 이루는 성벽이 고스란히 내려다보였다.

그날.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베른은 홀로 성문 앞을 지켰다. 내성을 등지고 선 이는 단 한 명 베른 뿐이었다. 먼 곳에 있던 체이스가 베른을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성벽을 등지고 선 베른이 죽어가는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보았을 것이 분명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지켜보았으리라.

"카스트린 경은 제가 가야 할 곳으로 올 테니."

체이스는.

같은 일을 또 겪고 싶지 않아 할 것이다.

* * *

하얀 수리, 아니.

네르드라 불린 이를 부른 체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용히 선 채로 그 어떤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묻는 눈으로 네르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변절했는지.

왜 전사들을 돕고 있는지. 전사들의 뒤에 누가 있는 것인지. 전사들은 칼리안의 목숨을 왜 노렸는지.

"이 곳까지 오셨는데, 제가 내어 드릴 것이 없습니다."

그 수많은 질문에 네르드는 이렇게 대답했다.

정보를 사러 찾아온 칼리안에게 물을 내어놓았던 그였다. 그는 언제나 찾아온 이들에게 무언가를 꼭 건네주었다. 하지만 그의 주인이었던 이에게만은 줄 것이 없었다.

그것이 한 잔의 물이든.

혹은 정보든.

"죄송합니다, 저하."

체이스가 올 것은 네르드 역시 예상하고 있었다.

이 곳으로 향하는 체이스와 호위기사들에 대한 소식을 이미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예상하지 못한 것은 단 한 사람.

가게 문 바로 앞으로 워프하여 이 곳을 찾아온 앨런 뿐이었다.

네르드는 웃지도, 화내지도, 결연한 표정을 짓지도 않았다. 시간을 끌어서 도망친 이들이 비밀통로를 빠져나가게 할 생각만 하고 있었다.

"알겠다."

체이스는 이렇게만 대답했다. 분노하지 않았다.

체이스는 분노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체이스의 시선이 앨런에게로 가 닿았다.

그리고 조용히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앨런이 함께 왔으니 우선 앨런이 하는대로 지켜보겠다는 뜻이었다.

앨런이 그의 방식대로 정보를 알아내면 체이스는 자신의 방식대로 네르드를 처분하면 될 일이다.

"나는 내 제자만큼 무르지도 않지만, 여기 이 세자 저하처럼 차분한 성격도 되질 못한다네."

체이스가 물러서자 앨런이 다시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 조금 더 길어진 설명을 덧붙이며 웃었다. 그 모습을 본 네르드가 마주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아는 것이 너무 없어서 실망할텐데. 괜찮겠소?"

"그것은 자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네."

앨런의 손에서 세 번째 플레임 스피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런 개 같은!"

체이스를 대할 때와는 달랐다.

네르드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터져나왔다.

"새장에서 나간 새끼 새가 여섯 남았네."

다시 한번 비명이 들려왔다.

다만 이번에는 이전처럼 긴 비명이 들리지 않았다. 아마도 함께 있던 이들이 마법에 당한 이의 목숨을 끊어낸 듯 했다.

앨런의 손에 여섯 개의 플레임 스피어가 한꺼번에 떠올랐다.

"하나만 묻지. 자네들이 도와준 전사들의 뒤에 텐실이 있는가?"

네르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앨런은 이번에도 주저 없이 손을 아래로 내렸다. 붉은 구체가 스르륵 움직이는 것을 본 네르드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들은 국가에 소속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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