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17화 (118/527)

제22장. 건드리지 말라고 (7)

덫에 걸려든 이가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기 조금 전.

꽤 나른한 햇살이 가득 드는 창가에 기대 선 드미레아가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 찌이익!

손에 들려 있던 편지가 경쾌한 소리와 함께 종잇조각으로 바뀌었다.

벌써 네 통째.

에반 브리센 후작으로부터 전해진 반 협박성 편지였다.

무슨 내용이 있을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때문에 드미레아는 그의 편지를 그냥 봉투 째 찢어버린 참이었다. 어차피 이쯤되면 보낸 쪽에서도 내용을 읽으리라 기대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다 조각 나버린 편지지에 씌인 '조부' 라는 단어를 보게 된 드미레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플란츠의 조부로서 혈육에 대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니 이제 그만 플란츠를 보내달라 뭐 그런 내용이 적혀있던 듯 했기 때문이다.

"웃기고 있네."

조부라니.

브리센 후작이 자신의 혈육들을 어떻게 여기는지는 드미레아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심기가 매우 불편해보이는 목소리에, 드미레아의 서재에 함께 들어와 책을 읽고 있던 히나가 고개를 들었다.

- 또, 거기예요?

"네. 정말, 강아지 오라버니보다 못한 사람입니다."

강아지 오라버니란 당연히 지그프리드 영지에 있는 강아지 얀을 이름하는 것이다. 슬레이만이나 세리에, 심지어 새끼코끼리 얀조차 아무렇지 않게 강아지 이름을 불렀으나 드미레아는 그럴 수가 없었으니까. 얼결에 강아지 오빠를 하나 더 두게 된 셈이었다.

아무튼 드미레아의 말은 에반이 개만도 못하다는 소리였다.

대단한 욕설에는 어울리지 않을 귀여운 표현에 히나가 잠시 웃었다. 그것을 본 드미레아가 같이 실소했다. 강아지 오라버니라는 말 때문임을 알아서였다.

"아버지 성격이 아무리 자유분방하시다지만 이름을 왜 그렇게 지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드미레아가 강아지 이름을 지어준 슬레이만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러다 얼마 전 체르밀에서 본 하얀 고양이가 생각났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칼리안 왕자님보단 아버지가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왕자님께서는 아예 고양이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드미레아의 말을 들은 히나가 눈을 동그랗게 떠보이더니 고개를 도리도리 가로저었다.

- 일부러, 안 지어주시는 거예요.

그리고는 세상의 누구도 지어보이지 못할 맑은 미소를 그리며 다시 손을 움직였다.

- 이름이 생기면, 제가 고양이를, 부르기, 어려우니까.

이름이 생기면 이름 철자를 손으로 만들어내며 불러야 하니 그냥 '고양이'라고만 불러도 되도록 이름을 안지었다는 소리였다.

물론 칼리안이 제 입으로 고양이 이름을 짓지 않는 이유를 말한 적은 없었다. 그저 다들 칼리안이 세심하지 못한 탓이라 했고 히나는 자신이 생각이 맞을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덕분에 엄청나게 길어진 고양이의 독특한 이름을 떠올린 히나가 다시 웃었다.

* * *

왜 플란츠를 믿었는지 굳이 말하지 않았다.

왜 자신을 믿었는지 굳이 묻지도 않았다.

- 그런 말을 나눌 만큼 우애 좋은 형제 사이는 아니지 않나.

실상이야 어떻든 똑같이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던 탓이다.

아무튼 플란츠가 알아서 해줄 것이라 믿은 칼리안이 플란츠를 불렀고 플란츠는 알아서 칼리안의 덫을 대신 놨다.

그 덫에 드디어 짐승이 걸려들었다.

"이 저택과 브리센 후작가 인근을 살펴보고 돌아가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드미레아가 전해 온 말을 들은 플란츠가 살짝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방 안을 훑어 본 드미레아가 물었다.

"3왕자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말 보러."

칼리안이 있어야 할 침실에 칼리안은 없고 플란츠가 앉아 있었기 때문에 묻는 말이었다. 플란츠는 마굿간에 있을 칼리안을 떠올리며 짧게 답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아우님에게는 내가."

칼리안이 오면 자신이 말을 전달하겠다 하려던 플란츠가 입을 다물었다. 멀리서 걸어오는 칼리안을 봤기 때문이다. 따라서 플란츠는 더 이상의 말 없이 손을 들어 칼리안 쪽을 가리켜보인 뒤 방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런 플란츠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은 드미레아가 칼리안에게 같은 말을 한번 더 했다.

모르긴 몰라도 얀보다 더 많이 놀랐을 레이븐을 살피고 올라온 칼리안이 드미레아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고생 많았어."

그리고는 눈을 내리 뜬 채 잠시동안 생각에 빠져들었다.

"놈들이 동료들의 시신을 치워가면서 칼리안 왕자님의 흔적을 쫓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왕자님께서 찾아오셨을 당시 지그프리드 저택 인근에서 수상한 이가 발견되지 않았다 하니 말입니다."

"응. 세크리티아의 세작들 역시 그들을 마주치지 않았다고 했으니 그랬겠지. 물론 내 흔적을 따라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고."

"만약 그랬다면 이번에 일부러 모습을 드러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여기서 나를 꺼내려는 함정일 수도 있지. 아무튼 나는 놈들을 다시 만나는 것이 중요하니까 그것이 놈들이 만든 함정이든 아니면 내 덫에 놈들이 걸려든 것이든 상관없어. 게다가 이번에는 혼자 찾아가지도 않을 생각이고."

칼리안은 놈들이 있을 곳에 동행해 줄 믿음직한 마법사를 지그프리드 저택으로 불렀다.

"이번에 입궁하시면 두 왕자님 모두 란델 왕자님과 오붓한 시간 보내게 되시는 줄만 아시면 됩니다."

그리고 그 마법사는 칼리안을 보자마자 이런 무시무시한 소리를 했다.

둘 다 왕궁 안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라는 말.

란델처럼 체르밀 안에서만 머물러야 할 정도는 아니겠지만 아무튼 당분간 밖에 나오는 것은 절대로 허락되지 않을 터였다.

칼리안이야 당연한 일이었고 이유야 어찌됐건 시종에게도 알리지 않고 거의 무단으로 궁을 빠져나온 플란츠도 마찬가지였다.

괜한 피해만 입게 된 플란츠를 떠올린 칼리안이 슬쩍 웃었다. 미안한 마음이 왜 없겠냐만은 플란츠라면 그리 상관하지 않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차피 칼리안이 끌고 나가지 않는 이상 플란츠가 혼자 왕궁 밖으로 나갈 일도 없었으니 말이다.

때문에 칼리안은 플란츠에 대한 미안함을 잠시 접어두고 잔뜩 화가 나 있는 앨런을 향해 말했다.

앨런의 화를 어떻게 풀어줘야 하는지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스승님 뵈니까 좋네요."

그 말에 칼리안을 잠깐 쳐다본 앨런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여쁜 제자가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양 쪽으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어떻게 더 숨긴단 말인가?

"······그래요. 무사하니 되었습니다."

그러니 결국 화가 풀린 앨런이 밖에 나갈 것이 분명해보이는 옷차림을 한 칼리안을 보며 물었다.

"같이 가시려는 겁니까?"

"스승님 혼자 가시려고 하셨습니까?"

당연한 것이 아니냐는 듯 이렇게 대꾸한 칼리안이 옆에 서 있던 드미레아를 쳐다봤다.

앨런에게 어리광 비슷한 것을 부리는 3왕자의 모습을 직면한 드미레아의 정신적인 충격에는 신경을 써주지 못한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내 형님 의외로 되게 약하시니 잘 부탁해. 지그프리드 공이 곧 오겠지만."

"알겠습니다."

소드마스터의 입장에서 약하다는 것이 어느정도일지는 가늠이 어려웠으나 드미레아는 일단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곧 칼리안이 검은 후드를 푹 뒤집어 썼다.

어느새 날이 져서 밖이 어두웠다. 그리고 이제는 사람들의 눈에 다시 띄어도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으니 이 정도면 충분할 터였다.

앨런의 얼굴에는 부상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것을 염려하는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칼리안이 플란츠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앨런의 입장에서 보면 지금의 칼리안도 그냥 칼 좀 쓰는 소년일 뿐이 아닌가.

칼리안이 그런 앨런을 보며 입을 열었다.

"스승님이 알아서 지켜 주시겠죠. 가만히 앉아서 두고 보기는 싫습니다."

"대놓고 짐덩이 노릇을 하겠다는 소리입니까?"

"네. 맞습니다. 저는 따라가서 구경만 하려고요."

앨런이 기분좋게 미소지으며 답했다.

"그리하시지요."

* * *

에우리아의 마법사들은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체이스의 새들은 조용히 움직였다.

때문에 '그'는 앨런 마나실이 건물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뒤에야 비로소 일이 틀어졌음을 깨달았다.

앨런이 직접 움직일 것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앨런의 움직임이 그의 눈과 귀에서 벗어났을 뿐이었다.

"상대하지 못한다."

'그'는 에반 브리센 후작과 달랐다.

앨런이 지닌 서클의 힘이 그저 숫자 6에 1을 더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아주 빠르게 움직였다.

지극히 평온한 표정의 앨런이 작은 건물의 문에 손을 올렸을 때 아홉을 도망시켰다. 그들을 비밀 통로로 내보낸 뒤에는 통로를 완전히 파괴시키는 것에도 성공했다.

- 딸랑.

그가 제자리로 돌아옴과 동시에 은적색의 긴 머리를 느슨하게 묶어내린 날카로운 눈의 마법사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 저벅, 저벅.

그는 천천히 다가오는 저 발소리가 생의 마지막을 알리는 소리임을 알아들었다. 따라서 검을 뽑아드는 대신 외눈 안경을 고쳐썼다.

그리고는,

"찾는 책이 있으시오?"

하고 물었다.

* * *

앨런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앨런이 가게 문을 닫고 한 발자국 더 걸어 들어오자 가게 안의 창문과 문 벽과 천장이 한꺼번에 울리기 시작했다.

가게에 장치해 두었던 모든 차단막이 저절로 움직였다.

문이 잠기고 덧창이 내려지고 천장의 유리 창문이 가로막혔다.

그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가 한 일이 아니었다.

가게 전체를 그를 가둘 새장으로 만든 것은, 당연하겠지만 물론 앨런이었다.

그와 어느정도 떨어진 앞에 서있던 앨런이 한 발을 더 내딛었고 사라졌다. 그 직후에 그의 등 뒤에서 여유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책은 아니고 물을 것이 있네."

손이 떨려왔다.

그것은 공포였다.

심장을 얼릴 듯 옥죄는 공포를 버텨내자 앨런의 몸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의 앞에 다시 나타났다.

"데블란이 뱀 같기는 해도 제 아들은 지극히 아낀다 들었네. 하나 뿐인 아들 놈이 왕궁에 있는데 이런 짓을 할 리 없지."

그렇게 말한 앨런이 그의 눈을 응시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앨런의 말을 듣던 그가 짧게 호흡했다.

입 속의 독을 씹으려는 것이었다.

동시에 앨런의 손에서 딱!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게 가해지는 중력이 순간적으로 증가했다.

그의 움직임이 멈췄다.

근육 하나하나가 땅으로 꺼질 것 같은 느낌에 그 어떤 것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가 간신히 눈을 돌려 앨런을 쳐다봤다.

앨런의 손 위에 사람의 눈알만한 붉은 공이 하나 생성됐다. 마치 흐르는 용암을 유리 구슬 안에 가두어 둔 듯한 모양새였다.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 아주 잘 알았다.

상상도 못할 힘의 화염을 압축시킨 불의 힘.

스치기만 해도 사람의 몸을 숙주 삼아 타올라 심장을 녹이기 전까지 절대로 꺼지지 않는 불의 힘. 이 세상에서 오로지 앨런 마나실만이 사용할 수 있는 그것은, 7서클의 플레임 스피어였다.

앨런이 그것을 가게 바닥 아래로 내려보냈다. 구체는 바닥을 뚫지도 않고 그대로 통과하여 사라졌다.

앨런의 고요한 목소리가 그의 귀를 울렸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이 아니면서 내 앞에서 독을 쓰려고 드는가."

독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질색인 앨런의 손 위에 두 번째 플레임 스피어가 떠올랐다.

먼 곳에서 끔찍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눈에 핏줄이 섰다.

그것을 본 앨런이 여전히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 명 죽었네. 고작 한 명이니 지금이라도 잘 따져보게."

그는 대답 없이 앨런을 노려봤다.

독을 뱉어낼 기색이 없었고 그것은 곧 앨런이 궁금한 것을 알려주지 않겠다는 말과 같았다.

앨런은 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앨런의 손에서 두 번째 플레임 스피어가 떨어져 내려갔다. 그리고 앨런은 그 어느때보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했다.

"나는 내 제자만큼 무르지 않으니."

또 한번의 비명이 뒤를 이었다.

세 번째 플레임 스피어가 떠올랐다.

"······ 하얀 수리."

앨런이 그의 눈을 쳐다보며 한 때 그의 것이었던 이름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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