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16화 (117/527)

제22장. 건드리지 말라고 (6)

최소한 억울하지는 않을 것이다.

칼리안 아니라 칼리안 그림자라도 봤다면 말이다.

"이게 무슨 어처구니 없는 소리란 말인가."

칼리안이 사라진지 채 하루도 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사라진 것도 이제 알았다. 그런데 칼리안을 내어 놓지 않으면 플란츠를 못 보내겠단다.

아니, 플란츠는 또 뭘 믿고 지그프리드의 기사들을 따라 나섰느냔 말이다. 그 밤중에 불러냈으면 의심을 했어야지 왜 제 발로 지그프리드 저택에 가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다.

그레이를 부상 입혔다는 오해도 억울하기 짝이 없었는데 아르센을 감금했다며 집을 들쑤셔 놓질 않나, 이제는 칼리안을 붙들고 있다고 하고 있으니.

"정작 르메인은 조용한데 왜 코끼리들이 자꾸 자리 싸움에 엉덩이를 들이미느냔 말이다."

레넌 브리센을 감금해둔 것과 도박장을 운영했던 것 외에는 아주 결백한 에반 브리센 후작이 분통을 터뜨렸다.

"전하께서도 상황을 살피는 중이지 않겠습니까. 3왕자님이 사라지고 2왕자님이 억류되어 있는 상황에서 지그프리드에 마음대로 공격을 가할 수는 없을테니 말입니다."

"······ 그래.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겠지. 자칫 플란츠마저 잘못되거나 지그프리드가 최초로 왕을 끌어내리는 사태를 맞이하기는 싫을 테니까."

집사장의 말에 동의하며 생각을 정리한 에반이 짜증 섞인 소리를 냈다. 르메인도 개입하지 않는 이 일을 직접 해결해야 할 처지에 놓였으니,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옆에서 물어오는 집사장의 말에 당장 기사단을 준비시키라 말하려던 에반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잠시 뒤 가까스로 분노를 가라앉히며 대답했다.

"······ 잠시 혼자 있겠다."

생각을 해야 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기사들을 이끌고 가고 싶었다.

- 하는 꼴은 승냥이인데.

하지만 손자 뻘 되는 놈 아니 손자인 놈에게 이런 말을 들었지 않나. 두 번 다시 그런 취급은 받고 싶지 않았다.

"3왕자가 사라지고 지그프리드와 브리센이 대립하게 될 때 가장 이득을 보는 것이 과연 누구인가."

볼 것도 없이 란델이다.

정신 나간 코끼리들이 거기까지 생각도 못하고 브리센을 몰아세우고 있는 듯 했다.

"그런데 3왕자는 소드마스터가 아닌가."

칼리안과 당장 맞붙었을 때 자신 역시 이기는 것을 장담하기가 어렵다. 무슨 수를 쓴 것인지는 몰라도 오러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슬레이만 정도의 무력을 지니지 않은 이상은······.

"슬레이만의 자작극인가?"

거기까지 생각하던 에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니지. 슬레이만은 어제 오후부터 조금 전까지 수도에서 벗어나 있었다 했으니 슬레이만은 아닐텐데."

세크리티아의 왕세자와 함께 왔던 기사 테일란을 염두에 두었던 에반은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그런 짓을 벌일 이유도 없고 체이스가 왕궁 안에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테일란이 그런 일을 벌이기에는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단 하나.

"그레이······ 그렇지. 안그래도 란델의 편에 한 발을 슬쩍 올리고 있던 그레이가 이번 일에 개입했을 수도 있겠군. 놈이 3왕자와 무력이 비슷하거나 더 위일 테니 3왕자를 잡아 죽이거나 가둬버리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지는 않을 터."

에반은 여전히 그레이가 오러를 쓰지 못하는 것을 모르는 상태였다.

"란델과 그레이가 합작하여 일을 벌인 것인가."

이렇게 엉뚱한 결론을 지어버리고 만 에반은 책상에 앉아 편지지를 꺼내 들었다. 지그프리드에 직접 찾아가지 않고 일단 서신부터 보내 볼 생각을 했다.

란델이 그레이와 손을 잡은 것이 정말 맞다면 당장 지그프리드와 척을 지어서는 안 됐으니까.

* * *

통찰과 심연이 맞닿았던 순간.

서로가 서로를 알아봤다.

분명히 알아보았다.

전날, 플란츠를 찾아 체르밀 궁에 갔던 체이스가 잠시 장미 정원을 거닐었을 때의 일이었다.

"더는 잘라낼 것이 없어 보입니다."

장미를 살피는 란델의 손길을 보며 체이스가 그렇게 말했다.

낯선 목소리에 잠시 고개를 돌렸던 란델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시종을 뒤로 물린 채 이 깊은 곳까지 찾아 들어온 이방인에게 조용히 대답했다.

"조금만 두어도 자라있어서."

그렇게 마주하게 되었다.

둘은 첫 만남에 대한 인사를 나누지도 않은 채 가만히 서서 서로를 살폈다.

심연은 통찰을 삼키려 했고, 통찰은 심연을 꿰뚫어보았다.

"자라도록 그냥 두어도 좋지 않겠습니까."

체이스의 짙은 보랏빛 눈을 잠시 바라보던 란델이 대답했다.

"벗어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손을 다칠까."

바람이 불었다.

바람 끝에 머문 장미 향이 사라질 때 쯤 체이스가 싱긋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 걱정이 되어 하는 말입니다. 가시가 있으니."

부드럽게 맴도는 향기같은 목소리가 웃음의 뒤에 이어졌다.

다시 한번, 바람이 불었다.

* * *

루비아의 별관.

카이리스를 찾은 사신들 중에서도 귀빈을 위해 지어진 곳이었다.

카이리스에서 별관을 내어 줄 정도의 귀빈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이들은 사실 극소수였다. 때문에 이 별관 역시 자주 개방되지 않았으므로 별관에 사람이 드나드는 일 역시 많이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물론 요 근래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세크리티아의 왕세자 체이스가 별관에 든 뒤로는 루비아 관의 별관이 꽤 분주했다. 그리고 어제부터는 궁 밖과 루비아 관을 분주하게 드나드는 몇몇 사람이 유난히 눈에 띌 정도가 되었다.

그 중 한 명은 바로 기사 테일란이었다.

- 똑똑.

상당히 큰 보폭으로 빠르게 발을 옮겨 별관 안으로 들어간 테일란이 별관의 가장 높은 곳에 마련된 체이스의 방 문을 노크하며 말했다.

"카스트린입니다, 저하."

그리고는 들어오라는 허락이 없었음에도 곧바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테일란이 체이스의 호위기사이기 때문에 허락된 행동이었다.

체이스는 문에서 등을 돌린 채 창 밖을 보며 서 있었다. 창문에 비춰지는 테일란을 보며 체이스가 입을 열었다.

"지그프리드 쪽은 아직인가?"

"네. 아직 다른 소식은 없습니다."

"그래."

작은 한숨이 체이스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왜 그렇게 카이리스 3왕자의 일에 신경을 쓰는지 알지 못하는 테일란이었으나 그에 대해 물어도 대답하지 않을 것임을 익히 알고 있었다. 따라서 테일란은 질문 대신 체이스에게 전해야 할 내용을 입에 올렸다.

"협회의 마법사들이 조사를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새들을 들여보내야 할까요."

"그대로 움직여. 충돌하지 않을 테니."

"알겠습니다."

"다른 소식은?"

"수도 내 움직임은 없고, 국왕 르메인의 지시로 수도 출입에 대한 검문이 강화됐습니다만 수도를 빠져나가거나 들어오는 이들 중에 이상점이 있는 이들도 보이지 않는다 합니다."

카이리시스에서 활동하는 새들이 물어오는 정보 속에서도 놈들의 움직임이 포착되지 않았다.

"아직 몸을 사리며 상황을 주시하고 있거나, 다음 기회를 노리며 물러났거나, 아니면 이미 모두 죽었거나."

"네. 다만 모두 죽었을 가능성은 배제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새들이 싸움의 흔적을 발견했을 땐 이미 시신이 없다 했으니, 누군가 치웠다고 봐야 할 테니."

"네, 저하."

고개르 끄덕이던 체이스가 창에 비춰진 테일란으로부터 시선을 옮겼다. 창밖의 분수를 바라보던 체이스의 입이 다시 열렸다.

"브리센 후작가는."

"네. 아직 별다른 반응이 없습니다."

"생각보다 느리네."

다시 잠시 생각에 잠겼던 체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어."

"네."

테일란은 여전히 창 밖을 바라보는 체이스의 뒷모습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은 체이스가 전날 만났던 란델을 떠올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란델 왕자는 아직 아닌 것 같고······."

체이스는 란델이 칼리안에게 무엇을 이야기했는지까지 알지는 못했다. 다만 텐실의 왕이 된 그의 성향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베른보다 조금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란델이 다른 두 형제를 어떻게 여기고 있을지 짐작하는 것은 체이스에게 있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란델은 칼리안에게 당장 검을 보낼 만큼 구석으로 몰리지 않았다. 그렇게 어리석은 행동을 할 인물은 아니었다. 이번 일에 대해 란델이 아는 것이 없으리라는 것도.

"그렇다면 누굴까."

창문에 비춰지는 체이스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 * *

"소문을 좀 냈으면 좋겠는데."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침대에 기대 앉아 있던 칼리안이 이렇게 입을 열었다.

"이번 일에 대한 소문 말씀이십니까."

"응. 나 사라졌다고."

소문이라는 것에는 완전히 관심을 끄고 살아왔던 드미레아의 질문에, 칼리안은 당장 다시 정신을 놓아도 이상할 것 없을 안색에 전혀 어울리지 않을 짖궂은 얼굴로 대답했다.

귀족들이 소문을 얼마나 신경쓰는지 가장 잘 아는 것은 칼리안이었다. 그들의 명예와 가장 직접적으로 연관된 일이니까. 때문에 칼리안 역시 지금까지 몇 번이고 거짓 소문의 힘을 이용해먹지 않았던가.

"브리센 후작이 더는 함부로 움직이지 않을 거야."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침대 옆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플란츠를 잠시 쳐다봤다.

조금 전 플란츠는 마지막으로 칼리안과 만난 뒤부터 지금까지 있던 일을 모조리 칼리안에게 주입시켰다. 무도회 자리에서 에반을 만나 무슨 말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때문에 에반이 이번 일을 조용히 넘어가고 싶어할 것이라 판단한 칼리안은 다시 한번 소문의 힘을 빌기로 했다.

"후작이 가만히 앉아서 서신만 보내면 너무 조용하잖아."

"브리센 쪽에 불리한 이야기를 만들어 퍼뜨리라는 말씀이십니까."

"응. 그래야 이번 일까지 같이 퍼질 테니까."

칼리안이 들고 있던 바나나 껍질을 까며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협회의 마법사가 인근에 있을테니 전달해 두겠습니다."

"협회에서 나섰을 거라고 얘기를 했던가, 내가?"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잘 알고 있네."

"칼리안 왕자님과 관련된 일이라면 알아서 나설 이들 아닙니까."

얼마 전에 평생 똑똑한 것을 다 써버린 얀과 너무 다른 드미레아의 모습을 보며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그래. 그나저나 새끼 코끼리가 또 징징대고 있겠네. 나 일어난 것도 전해달라고 얘기해줘."

드미레아가 잠시 웃는 얼굴을 하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고마워, 드미레아."

정말 여러모로 신세를 지고 있었다.

방패에 대한 내용은 명분일 뿐이었으니 이렇게 대문까지 걸어 잠그며 나서주는 것은 동맹에 따른 결정이라기보단 드미레아가 일방적으로 칼리안을 도와주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대가는 나중에 다 받을 겁니다. 비싸게요."

그리고는 쌓여 있는 바나나 껍질을 가리켜보이며 덧붙였다.

"바나나값까지."

"아, 바나나 좀만 아껴먹을걸."

"공짜 아니니 마음껏 드십시오."

칼리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드미레아는 간단한 인사 후 밖으로 나갔다. 저택 주변 어딘가에 숨어있을 에우리아의 마법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드미레아가 나간 뒤 칼리안이 플란츠를 보며 입을 열었다. 다만 그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기 전에 플란츠가 먼저 말했다.

"필요없다."

"네."

이번에도 고맙다는 말은 그냥 때려치운 칼리안이 마지막 남은 바나나 하나를 플란츠에게 들어보였다.

"형님 드시겠습니까."

"아니."

"네."

같은 말 두 번 안하는 칼리안은 같은 권유도 두 번 하지 않았으므로 고개를 끄덕이며 바나나를 까먹었다. 그리고는 플란츠를 보며 말했다.

"······ 대사막의 전사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말은 아직 드미레아에게 알리지 못할 내용이었다. 란델이 사용한 것과 비슷한 느낌의 그 힘에 대해 다른 이들에게 말을 할 수가 없었던 탓이다.

"란델 형님께서 사용하셨던 힘을 대할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오러와 비슷한 능력을 가진 이가 하나 마법과 비슷한 능력을 가진 이가 넷이었습니다. 가장 강한 것은 검사였고 다섯 모두 치유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사막의 전사들이 신력을 썼다는 소리인데."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플란츠가 감고 있던 눈을 살짝 뜨며 물었다.

"신력이라고 불러도 된다면요. 사실 이번 일의 배후에 텐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란델 형님과 별개로 그들이 따로 나선 것은 아닐까 하고요."

지금껏 알려진 정보는 명백하게 텐실을 지목하고 있었다. 적당한 명분도 있었다. 란델의 앞길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바로 칼리안이었으니까.

만약 란델이 카이리스의 국왕이 되면 텐실에 그보다 더 큰 이득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란델과 별개로 칼리안의 목숨을 노려볼 법 했다.

"내 아우님이 워낙 특출나시니."

플란츠의 말에 잠깐 웃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가능한 상황이 아닌 것 같아서 일단 의심은 접어뒀습니다. 아무리 대사막과 손을 잡았다지만, 일이 틀어질 경우 즉각 전쟁으로 번질 일을 과연 텐실이 저질렀을까 싶어서요."

"그래."

"그렇다면 누구일까······ 생각나는 이들이 따로 없네요. 저는 형님과 달라서 수도에서 공격 당할 만큼 나쁜짓하면서 살지는 않은 것 같으니 말입니다."

"짖지 말고."

농담처럼 덧붙인 말에 따라온 플란츠의 반응을 본 칼리안이 씩 웃었다.

그렇게 이런 저런 가능성을 따져보며 고민에 빠져 있는 칼리안을 쳐다보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생각 그만 하지."

배터지게 바나나를 먹고 아무렇지 않게 말을 하고는 있다지만 곧 죽을 얼굴을 한 채였던 탓이다.

"네."

두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곧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그 후 칼리안은 하루를 꼬박 더 보낸 뒤에야 다시 눈을 떴다. 그 사이 에우리아가 충실히 퍼뜨린 소문에 결국 브리센 후작이 찾아와 한 차례 으름장을 놓은 뒤 돌아갔다.

그렇게 닷새가 더 지나자 카이리시스는 온통 칼리안의 실종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찼다. 칼리안을 지지하던 귀족들이 매일같이 왕궁을 찾았고 르메인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놈들이 움직였다.

소식을 전해 들은 칼리안이 웃으며 말했다.

"스승님 불러줘."

다섯 놈 상대하고 죽을 뻔했다.

미쳤다고 혼자 가겠나.

제자 사랑 가득한 앨런 마나실의 실력을 볼 때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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