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15화 (116/527)

제22장. 건드리지 말라고 (5)

- 사아아아······.

바람결에 나뭇잎 스치는 소리가 고요히 머물다 지나갔다.

체르밀 궁을 돌아 건물 뒤 후원으로 들어서면 자작나무가 몇 그루 쯤, 그리고 이름 모르는 나무들이 또 몇 그루 쯤 심겨진 작은 산책로가 있었다. 본래에는 없었던 것이나 칼리안과 플란츠가 수련장을 자주 이용하게 되니 수련장으로 향하는 길 왼쪽의 넓은 잔디밭을 산책로로 꾸며두게 된 것이었다.

플란츠는 종종 그 곳을 찾았고 칼리안은 호수 옆 산책길을 더 좋아했기 때문에 후원의 나무 사이를 거닌 적이 별로 없었다. 란델은 언제나 장미 정원으로 갔으므로 당연히 후원을 찾지 않았다.

따라서 칼리안과 플란츠가 왕궁 안에 없는 어두운 밤에 그 곳을 걷고자 들어올 왕자는 없었다.

"후우······."

대신 어울리지 않을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깊은 한숨을 내쉬는 새끼코끼리가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검을 놓지 말 걸."

많이 다치신걸까.

지금 쯤은 깨어나셨을까.

아직도 못 일어나셨으면 어쩌지.

혹시라도 영영······ 아니야.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자꾸 헤집어 두어서 얀은 결국 잠도 이루지 못하고 이렇게 밖에 나와 청승을 부리고 있었다.

- 자박, 자박.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는데 자갈을 밟고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려본 얀이 의외라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키리에."

이 시간까지 검을 수련했는지 키리에는 땀에 푹 절은 채였다. 돌아가던 길에 산책로 한 가운데 놓인 벤치에 앉아 청승을 떠는 얀을 본 모양이었다.

"왜 나와 계십니까."

칼리안이 잠에 들 시간이었으니 이 때 얀이 밖에 나오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었다. 때문에 이렇게 물어오는 키리에를 보며 얀은 아주 잠시 고민을 했다.

칼리안이 지금 이 곳에 없는 것을 이야기해줘야 할지를.

그러다 왕궁에서 나간 것이 비단 칼리안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히나도 함께 자리를 비운 것이다.

"잠깐 할 말이 있어요."

"네."

곧 얀은 키리에를 옆에 앉혀둔 뒤 키리에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전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키리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이렇게.

놀라는 것도 아니고 걱정하는 것도 아니고 알겠단다.

"걱정 안되십니까?"

"무엇에 대한 걱정 말씀이십니까."

"왕자님께서 다치셨고 히나가 그 쪽으로 갔으니까요."

"히나가 갔고 아직 아무 소식이 없는 것 아닙니까. 괜찮다는 소식도 전해지지 않았지만 괜찮지 않다는 소식도 전해지지 않았으니까요. 그렇다면 히나가 치료 중이라는 말일 테니 괜한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맞는 말이기는 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태평한 것이 아닌가.

"그럴 일도 없겠지만 만에 하나 왕자님께 안 좋은 일이 생긴다면······ 놈들도 나도 살아있지 않을 테니 그 역시 괜찮습니다."

어두운 가운데 파란 쪽의 눈이 유난히 도드라져보이는 얼굴로 키리에가 말을 맺었다.

"쫓아가서 다 죽여버리고 같이 죽겠다는 겁니까."

"네."

칼리안에게 해를 입힌 놈들이라면 키리에가 상대하기는 버거운 이들일텐데도 저렇게 말을 한다. 대책 없지만 너 좀 멋있다는 눈으로 키리에를 쳐다보자 키리에가 작게 웃다가 물어왔다.

"무력한 것이 싫어서 이러고 계셨습니까."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모두가 제 할 일이 있었다. 그 작은 히나 역시 칼리안에게 없어서는 안 될 이가 아니던가.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걱정하는 일 뿐이라서요. 한심하네요."

"왕자님은 쓸모없는 사람 끌어안고 가실 분 아닙니다. 걱정해주는 사람도 필요하니 곁에 두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칼리안이 하필이면 자신의 '검'이 되어달라 하는 바람에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무력하지 않은 적 없던 키리에가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 계속 걱정하다 왕자님 돌아오시면 걱정했다고 하면 됩니다. 그 말에 기대어 쉬시는 분이니까요."

검술이나 마법으로 도움이 되든, 가문과 기사단으로 도움이 되든, 똑똑한 머리로 도움이 되든, 혹은.

칼리안의 어떤 면을 보든 꽃 같기만 하다며 애지중지 해주는 것으로 도움이 되든.

칼리안에게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이들 중 하나인 눈치 없는 새끼 코끼리는 키리에가 하고자 하는 말을 잘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마음 놓고 칼리안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 * *

칼리안이 오전에 궁에서 나간 뒤 입궁하지 않았다.

한 밤에 플란츠가 시녀 한 명을 데리고 궁에서 나간 뒤 마찬가지로 입궁하지 않았다. 그런데 플란츠는 지그프리드의 보증을 받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지그프리드는 대문을 닫은 채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집무실에서 꼬박 밤을 새운 르메인이 차갑게 식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것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되겠나."

이제껏 앨런의 말이라면 대체로 고분고분 들어왔던 르메인은 별 일이 아닐 테니 조금만 기다려 보라는 말을 들어 딱 하룻밤을 참았다. 이유가 있으리라는 말에 긍정한 것이다. 칼리안이었고, 지그프리드였으니 별 탈은 없으리라고 믿은 것이다.

그런데 플란츠와 함께 사라진 시녀가 바로 히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르메인의 이성은 일단 그 사실이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릴 때까지만 유지되었다.

"반역의 의미로 보아야 하나."

"아닙니다, 전하."

그리고 얀을 불러온 후 이렇게 물었고, 그 말도 안 되는 질문에 얀이 즉각 부정했다.

르메인이 더 참지 못하고 얀을 몰아세웠다.

"멀쩡한 2왕자가 아무 이유 없이 치유사를 데리고 나가지는 않았을 터. 3왕자에게 일이 생겼다는 말이고 그 일에 지그프리드가 개입했는데."

얀이 잠시 눈을 감았다. 르메인의 오해를 살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드미레아로부터 다른 연락이 일체 없었으므로 얀 역시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했다.

"······ 그것이 반역이 아니라는 말인가."

"절대로 반역이 아닙니다."

소름이 끼칠 만큼 차디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 르메인이 얀을 응시했다. 얀은 그 눈을 피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내가 더 기다려야 할 이유를 말하게. 지금 당장 발칸과 카에라를 지그프리드의 저택으로 보내기 전에."

칼리안에게 분명 계획이 있다.

왕궁에 들어오지 않고 플란츠를 부른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니 발칸과 카에라가 지그프리드를 치면 안 된다. 그것만은 미뤄야 했다.

얀이 주먹 쥔 손에 힘을 주고 입을 열었다.

"어젯밤 칼리안 왕자님께서······."

습격을 당했다고. 부상을 입었고 치유를 위해 히나가 나갔다고. 그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유가 있을 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는 말을 꺼내려 했다.

- 벌컥!

"죄송합니다, 전하. 용서하시지요."

그리고 마법사가 개입했다.

무례한 행동에 대해 일단 사과부터 한 앨런이 집무실 안으로 성큼 성큼 걸어 들어왔다.

앨런 역시 표정이 굳어 있었다. 지금껏 칼리안이 행방불명 된 적이 없었던데다 칼리안이 부상을 입으리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칼리안에 대한 앨런의 걱정이 르메인의 것보다 많으면 많았지 모자라지는 않을 터였다.

멋대로 들어와 멋대로 얀의 옆에 앉은 앨런이 멋대로 입을 열었다.

"어젯밤 칼리안 왕자님을 습격한 무리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답니다."

언젠가 앨런은 이번 생에 르메인의 사인이 심장병이 될 것이라고 예측한 적 있었다. 그날이 바로 오늘이 될 것 같은 얼굴이 된 르메인을 향해 앨런이 계속 말했다.

"아무래도 왕자님이 직접 지그프리드로 피신을 한 것 같습니다. 더 안좋은 일이 있다면 지그프리드의 대문이 닫히지 않았을 겁니다. 소식을 전했겠지요."

지금 앨런이 하는 말은 체이스로부터 전해 들은 것이었다.

칼리안의 뒤를 따르던 것은 아니었으나 드미레아가 싸움의 흔적을 지우기 전에 세크리티아의 세작들이 그것을 먼저 보았다. 핏자국이 지그프리드 저택으로 이어진 것을 확인했다는 보고를 받았고 칼리안과 플란츠가 사라졌다는 내용도 들었다.

체이스가 칼리안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에 집중시켜 둔 세작들이 여전히 같은 활동을 했기 때문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직접 갔다는 말인가. 왕궁을 두고?"

믿을 수 없다는 소리였다.

체이스는 소문의 출처가 세크리티아의 세작임을 밝혀도 좋다 했다. 양국의 관계에 큰 문제가 생기겠지만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칼리안의 계획이 망쳐지지 않게 돕기로 한 것이었다.

다행히 르메인은 이야기의 근원지를 묻지 않았다. 더 확실한 확인처가 있었으니까.

르메인의 눈이 다시 얀을 향했다.

조금 전 할 말이 이것인지를 묻는 얼굴이었고 얀은 무거운 얼굴로 대답했다.

"맞습니다."

"데려오겠네."

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르메인이 이렇게 말했다.

"지그프리드 영지도 아닌 저택에 부상당한 왕자를 그냥 둘 수는 없네."

때문에 앨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싸움의 흔적이 사라진 뒤 플란츠가 찾아갔고 그 후 대문이 닫힌 것까지 알게 된 체이스가 두 왕자가 무슨 계획을 짰을지를 어느정도 가늠하여 앨런에게 전했다.

"전하의 검이 향해야 할 곳은 지그프리드가 아닙니다. 수일 내로 지그프리드가 브리센과 대치하게 될 테니 그 쪽을 주시하셔야 합니다."

내용을 모두 전한 앨런이 이렇게 말했다.

"지그프리드 공작이 함께 있을 테니 왕자님의 안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우선은 상황을 주시하시고 방향이 정해지면 그 곳으로 발칸을 보내십시오."

그 말이 끝난 후 르메인은 거의 한 시간 가까이 깊은 생각에 빠져 들었다. 그리고 앨런의 말에 따라 일단은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렇게 르메인을 진정시키는 것에 간신히 성공한 앨런은, 몇 시간이 지난 뒤 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르메인을 끌어내리는 것에 한번 더 애를 써야 했다.

'내 새끼가 내 집 문을 안 열어주는데 혹시 이게 무슨 일인지 아는 사람?'

따위의 말을 지껄이며 왕궁을 찾아온 슬레이만을 보았기 때문이다.

* * *

- 틱, 톡, 틱, 톡.

밤이 새도록 저 소리만 듣고 있었다.

칼리안의 상처는 많이 아물었다.

완전히 아물지 않은 것은, 더 두었다가는 히나에게도 문제가 생길 것 같다 판단한 플란츠가 히나를 내보내 재웠기 때문이었다.

"브리센 후작저에 서신 보냈습니다."

꼬박 밤을 새고 난 뒤에도 미동 없는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플란츠를 찾아온 드미레아가 이렇게 말했다. 중간에 슬레이만이 찾아왔으나 들여보내지 않았다는 말은 굳이 꺼내지 않았다.

슬레이만을 들이지 않은 것은 만에 하나 왕궁에서 이 일을 '반역'으로 여겼을 때 그 책임을 슬레이만에게까지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드미레아는 별 일 아니니 며칠만 더 나갔다 오시라는 말만 대문 너머로 전했다.

"그래."

억지 주장이 가득한 편지를 받고 불같이 화를 낼 에반의 얼굴이 눈에 훤했다. 혼자 찾아오든 기사들을 이끌고 찾아오든 오래지 않아 두 가문의 대치가 시작될 것이다.

드미레아는 몰랐으나 플란츠는 왕실의 개입에 대해서는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히나가 온 것으로 칼리안이 이 곳에 있음을 눈치 챌 것이고 그렇다면 누구든 르메인을 말려 줄 것이라 믿고 있었다. 앨런이든, 아니라면 체이스든.

- 틱, 톡, 틱, 톡.

시간이 다시 흐른다.

'누가.'

밤이 새도록 생각했다.

대사막의 전사. 그리고 텐실. 그들과 란델. 오러 사용자에게 입은 듯한 칼리안의 상처. 알고 있는 모든 내용을 떠올리며 습격자의 배후가 누구일지에 대해 고민하고 다시 고민했다.

'무슨 이유로.'

플란츠의 날카로운 연두색 눈이 칼리안을 향했다.

더 이상의 출혈은 없었으나 칼리안은 여전히 잠든 채였다.

레이븐의 털이 온통 피에 젖어 있었다 했다.

"······ 감히."

플란츠의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 틱, 톡, 틱, 톡.

시간이 흘렀다.

얼마나 흘렀는지 따져보지 않았다. 그저 앉아있었다.

"오셨습니까."

그리고.

"형님."

비로소 깨어났다.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길게 말아올려졌다.

하.

실로 애증하는 아우님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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