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14화 (115/527)

제22장. 건드리지 말라고 (4)

- 나는, 대사막의 위대한 전사다!

남자는 달렸다.

끝없이 같은 말을 되뇌며 달렸다.

국왕 탄신일 기념 축제가 끝난 바로 다음 날이었다.

당연하겠지만 밝은 빛이 있는 곳에는 어디에나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남자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야 했다. 때문에 골목의 어둠 속으로 숨어들어 쉼 없이 다리를 움직였다.

얼마나 왔는지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것은 진작에 포기했다. 다리를 움직이고 숨을 쉬는 것에만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 두 가지를 하기에도 벅찬 상태였다.

"헉, 헉! 허억!"

오른팔은 진작에 잘려나가고 없었다. 부여잡고 싶었지만 팔을 감싸 쥘 왼쪽 손이 없었다.

남자가 이를 악물었다.

그래도 그것만은 자유롭게 할 수 있으니 다행한 일이라 해야 할까.

잠시 스스로를 향해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넨 남자가 다리에 다시 힘을 주었다. 멈추지 않고 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점점 감각이 사라져가는 두 다리를 계속해서 채근했다.

- 쿠당탕!

그러나 오래지 않아 남자는 쓰러지듯 바닥을 뒹굴었다.

일어서려 했지만 다리가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고개를 움직여 다리를 살펴보려 했으나 그조차도 힘겨워지고 있었다.

지금 남자의 온 몸이 점점 마비되어 가는 것은 등에 입은 깊은 상처 때문일 터였다.

그들이 사용하는 치유의 힘은 스스로에게만 작용한다. 그리고 남자는 치유의 힘을 하르난만큼 다루지 못했다.

남자는 다시 한번 이를 악물었다.

아니 악물어보려 했다.

"쿨럭!"

둥글게 뭉쳐진 핏덩이가 목을 타고 올라왔다. 채 뱉어내지 못한 그것이 남자의 숨을 막았다. 고개를 돌려 토해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말해야 한다······ 알려줘야······ 한다.'

달빛 아래 진득하게 묻어나오던 살기가 떨쳐지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숨통을 비틀어버릴 것 같은 그 붉은 눈빛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렇게 피를 흘려가면서도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던 소름끼치는 얼굴을, 웃음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니 더 달려야 했다.

달려가서 그들을 보낸 이에게 알려야 했다.

'지금이 아니면······.'

전사들을 더 보내야 한다고.

전사를 전부 보내서라도 당장 죽여 없애야 한다고.

살려두면 계획이 틀어질 것이라고.

그것을······.

말해······ 줘야······.

* * *

칼리안의 손이 떨구어졌다.

푸른 빛이 감도는 회색 눈이 고요히 잠겨들었다.

모여 있던 이들이 그 모습을 모두 보았으나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눈 깜빡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적이 찾아들었다.

슬레이만과 아내 세리에는 자리를 비웠다. 내일까지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3왕자가 죽기 직전의 모습을 한 채 찾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거대한 지그프리드의 영역 안에 패닉에 빠진 이가 없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유란.'

그들의 앞에 선 소녀를 온전히 신뢰하기 때문이다.

"네, 소공작님."

드미레아의 침착한 목소리에 칼리안의 로젤리타에 함께 했던 기사 유란이 대답했다.

칼리안의 가는 숨을 확인해 본 드미레아가 집사로부터 건네 받은 수건으로 피를 막으며 입을 열었다.

"히나, 그 시녀가 와야 한다. 그리고."

드미레아가 하던 말을 멈추고 칼리안이 전한 단 한마디를 잠시 떠올렸다.

- 내 형님을 불러줘.

이런 상황에 찾는 것이, 왜.

"······ 2왕자님을 모셔오도록."

르메인이 아닌 플란츠란 말인가.

칼리안의 뜻이 너무나 명확했으므로 짧은 한숨을 내쉰 드미레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유란을 응시하며 덧붙였다.

"오라버니 외의 다른 누구에게도 내용을 전해서는 안 된다."

르메인은 물론이고 앨런에게조차도.

내용을 전달받은 유란은 다른 의문 없이 간단한 목례만 보인 채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플란츠를 호위해 올 몇몇 기사들을 골라 서둘러 움직였다.

그런 유란쪽은 더 볼 것 없다는 듯 드미레아는 칼리안을 안으로 옮겨 눕히도록 했다. 상처에서 떨어진 핏자국이 수련장과 저택의 복도를 지나 침실까지 쭉 이어졌다.

- 울컥!

침대에 뉘인 칼리안의 입에서 한웅큼의 피가 토해져 나왔다. 칼리안의 고개를 옆으로 돌려 토해내는 피를 흘려내는 드미레아를 향해, 집사장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검의 길에 오른 분이니 독은 아닐 겁니다."

"그래. 마력과 오러 때문이다."

칼리안은 더 이상 독에 해를 입지 않는다.

분명 오러와 마력을 무리하여 운용한 것이리라.

드미레아가 하인들을 내보냈다. 그리고 거추장스러운 왕자의 재킷을 벗겨내고 셔츠를 들어올려 상처를 살폈다.

깊다.

칼에 베인 채로 무리하게 움직인 탓에 상처가 크게 벌어진 것이 바로 보였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드미레아는 상처 부위를 다시 압박했다.

'소드마스터의 짓이다.'

똑같은 오러 사용자가 아니라면 불가능할 상처.

상대방이 죽었을지 살아서 다시 칼리안을 노려올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당장 칼리안을 살려두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하나 더 있었다.

"로난시테."

지그프리드가의 수석 기사단장 로난시테를 부른 드미레아가 빠른 말로 지시사항을 전달했다.

"공격에 대비한다."

"알겠습니다."

로난시테가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이며 짧게 답했다. 하지만 드미레아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대문은 닫지 않는다."

이토록 모순적인 행동이라니.

대문을 활짝 열어둔 채로 언제 들어올지 모를 적에 대비하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사 로난시테는 유란과 마찬가지로 의문을 보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가 있을테니 따르는 것이다. 드미레아가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다음 지시를 내렸다.

"제인. 핏자국을 따라가 알아낼 수 있는 것을 전부 다 찾아오도록. 데카르는 제인이 찾아낸 흔적을 모두 지워라. 시신이 있다면 저택으로 보내고 작은 핏방울 하나 남기지 않아야 한다."

"네, 소공작님."

짧게 답한 두 기사가 다시 방에서 나간 뒤 드미레아는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집사장을 향해 그가 해야 할 일을 알렸다.

"입단속을."

"알겠습니다, 소가주님."

당장의 조치를 모두 마친 드미레아가 다시 칼리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몸이 차갑다. 상처를 덮은 수건이 어느새 붉게 물든 것이 보였다.

"약품과 붕대를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필요없다. 섣불리 건드리면 축복의 힘과 치유사에게 오히려 방해만 되니까."

집사장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한 드미레아가 새로운 수건을 들어 상처를 다시 눌렀다. 그리고 칼리안을 내려다보며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말을 건넸다.

"죽지 않을 자신으로 이 곳에 오셨으면 버티십시오."

지그프리드의 저택은 수도 중심에서 꽤 먼 곳에 있었다.

칼리안이 어디에 있었든 이곳까지 오는 것보다는 왕궁으로 가는 것이 빨랐을 것이다. 왕궁으로 갔다면 곧바로 안전해졌을 것이고 히나의 치유도 받을 수 있었을 터였다.

그것을 전부 포기하고 이 곳으로 왔다. 그리고 플란츠를 불렀다.

알려지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

따라서 드미레아는 대문을 닫지 않도록 했다. 흔적을 지우고 입을 다물도록 했다.

그것이 '방패'가 되기로 했던 드미레아의 몫이었다.

* * *

고양이는 잠들고 플란츠는 깨어 있었다.

고양이가 잔다 해서 사람까지 잠자리에 들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던 탓에 플란츠는 여전히 불 꺼진 방의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그렇기 때문에 방문 밖 복도 먼 곳에서 들리는 작은 대화 소리를 곧바로 들을 수 있었다.

"아니, 지금은 어려울 것 같구나."

"혼자 계시고 싶다 하셨으니 돌아가거라."

시종 레릭의 목소리만 들렸으나 레릭은 분명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듯한 말투였다. 그렇다는 것은 찾아온 이가 히나라는 뜻이다.

고양이를 찾으러 온 것 같아서 플란츠는 슬쩍 고개를 내려 무릎 위를 쳐다봤다.

무엇이 그렇게 편한지 몰라도 놈은 또 무릎 위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들어올리면 깰 테니 플란츠는 밖의 대화를 못 들은 척 고양이를 건네주지 않고 그냥 두기로 했다.

그런데 레릭의 목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나도 들어가기가 어려우니 어찌하겠느냐?"

"내가 내일······."

- 달칵.

결국 플란츠의 방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레릭의 말이 멈췄다. 복도의 소란스러움이 불편했던 플란츠가 밖으로 나온 것이라 생각한 레릭이 얼른 허리를 숙여 보이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그리고 히나를 향해 어서 돌아가라는 손짓을 했다.

그것을 본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특유의 낮은 음색이 복도를 작게 울렸다.

"와서 데려가."

그 말에 히나가 레릭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보인 뒤 플란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와 동시에 플란츠의 목소리가 히나를 향했다.

"뭔데."

히나가 아주 잠시 플란츠를 쳐다봤고 플란츠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고. 고양이 때문에 온 것 아니잖아."

고양이 찾아가겠다고 그렇게 고집을 부릴 리가 없지 않은가.

고개를 끄덕인 히나가 저도 모르게 수어를 해보이려다 수첩을 꺼냈다. 플란츠가 알아보기 힘든 말이 너무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 칼리안 왕자님이 플란츠 왕자님을 찾아요.

달빛이 밝았다. 덕분에 히나가 글자를 적어감과 동시에 플란츠도 내용을 봤다.

- 지금 밖에 있어요.

거기까지 읽은 플란츠가 방 안으로 들어갔고 히나는 몇 마디 말을 더 적기 위해 수첩을 다시 들었다. '칼리안 왕자님이 다쳤고 주변에 알리지 않고 몰래 나가야 한다' 라는 말을 다시 전하려 한 것이다.

"애옹!"

그런 히나의 팔에 고양이가 얹어졌다.

밖에서 칼리안이 기다린다는데 왜 고양이를 돌려주나 했더니 플란츠의 설명이 따랐다.

"고양이 찾으러 왔잖아."

고양이 찾으러 왔다는 핑계를 댔으니 데리고 나가라는 뜻임을 이해했을 때, 플란츠가 짧은 말을 하나 더 했다.

"나와. 나갈 테니까."

히나를 내보낸 플란츠가 검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창문을 통해 체르밀 궁 밖으로 빠져나갔다.

* * *

- 탁.

칼리안의 방 안에 귤 바구니를 내려둔 앨런이, 옆에 선 얀을 향해 물었다.

"이 시간까지 수련을 하신다는 말이냐?"

"요즘 게을리 하셨다며 수련장에 드신 뒤로 나오질 않으시네요. 과일은 왕자님 오시면 제가 전달하겠습니다."

얀이 어깨를 으쓱여 보이며 대답했다.

얀의 얼굴을 한동안 쳐다보던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 그리하거라."

그리고는 다른 말 없이 걸어 밖으로 나갔다.

앨런의 발 소리가 멀어짐과 함께 얀의 얼굴에 띄워져 있던 미소가 조금씩 사라졌다.

주먹 쥔 손은 이미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얀의 입에서 자책과 자괴감 가득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 * *

칼리안을 앞에 둔 플란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드미레아는 란델과 칼리안의 관계가 좋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고 체이스와 칼리안의 관계는 알지 못했다. 때문에 칼리안이 드미레아에게 불러달라 한 것이 플란츠 자신인 것은 맞다.

그 이유 역시 안다.

칼리안의 옆에 선 채로 플란츠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내 아우님께서······."

타국의 왕세자 신분인 체이스는 제대로 나서기 어렵다. 그리고 체이스는 '세자위를 원하는' 지금의 칼리안이 어떤 사고를 하는지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상황에 칼리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선택을 할지 그것을 가장 잘 알만한 이는 오로지 플란츠 뿐이었다. 그것을 알고 플란츠를 부른 것이다.

"나를 너무 믿으시는군."

누군가에게 건넨 말이 아니었으므로 그 자리에 있던 히나와 드미레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히나는 그저 칼리안의 상처에 치유술을 쏟아내고 있을 뿐이었고 드미레아는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드미레아의 방패는 이미 세워졌으니 그 안에서 행동해야 할 것은 플란츠였으므로.

조용히 눈을 뜬 플란츠가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등받이에는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 창백하게 질린 칼리안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한참 뒤 생각을 마친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소공작."

"네, 왕자님."

즉각 대답해오는 드미레아를 향해 플란츠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브리센 정도는 막을 수 있겠지."

"공격 없는 방어입니까."

드미레아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칼리안은 놈들의 배후를 모른다.

왕궁에 돌아간 칼리안을 르메인이 밖으로 내놓겠는가.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때부터 앨런의 경호가 시작될 것이고 놈들은 다음을 노릴 터였다.

언제 올지 모를 적을 얌전히 기다리는 것은 칼리안의 성격에 절대 맞지 않는 일이다.

그러므로 칼리안은 놈들의 배후를 알아낼 때까지 왕궁에도 가지 않고 모습을 내놓지 않을 생각이리라.

축제의 여흥에 취해있던 이들에게 어둠속에 숨어 달리는 검은 말은 거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칼리안이 이 곳에 없음을 주장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문제는 그 이후다.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지그프리드는 내 아우님이 사라진 것을 브리센의 짓으로 착각하고 나를 불러들여 인질 삼았다. 내 아우님을 내놓기 전까지는 나도 브리센에 못 보내준다 하면 되겠는데. 어려운 일인가."

칼리안은 왕자다. 아르센과 다르다.

그냥 '없다'고 해서 없어질 수 있을 인물이 아니다. 그러니 칼리안을 습격한 배후의 인물이 그것을 믿게 할 만큼 큰 판이 벌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3왕자의 행방불명을 이유로 한 지그프리드와 브리센의 대립 같은.

때문에 플란츠를 불렀다.

뒷수습도 맡길 겸 인질 노릇도 해줄 겸. 겸사겸사.

플란츠의 말을 들은 드미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문 닫겠습니다. 편하게 지내십시오."

그리고는 살짝 웃으며 덧붙였다.

"지키는 것은 우리가 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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