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13화 (114/527)

제22장. 건드리지 말라고 (3)

대사막의 전사.

대사막의 늑대라고도 불리는, 뛰어난 칼잡이들.

그들은 한 명 한 명이 상급 기사 이상의 힘을 지닌다. 저들이 '전사'의 이름을 받았다면 왕실 기사단원 정도의 솜씨는 있다는 소리다. 그리고 칼리안은 아직 베른의 검술을 완전히 사용하지 못했다. 몸도 더 자라야 했고 오러도 더 쌓여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고작 다섯이라니.'

칼리안이 소드마스터라는 것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런데 다섯 명 뿐이다.

'숨긴 패가 있다고밖에는 보기 어려운 숫자인데.'

칼리안이 다시 한 번 웃었다.

그리고는 그 예쁜 웃음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서늘한 눈빛을 한 채로 놈들이 숨긴 패보다 더 궁금한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란델 형님은······ 아닐테고."

칼리안은 텐실과 대사막의 전사들이 손을 잡았다던 체이스의 말을 아직 전해듣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란델을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칼리안에게 해를 입히고 싶어 할 가장 유력한 인사가 바로 란델이기 때문이었다.

다만 떠올렸을 뿐.

칼리안은 란델에 대한 의심을 곧바로 지웠다.

'시기가 맞지 않는다.'

란델은 이미 신성 기사를 보냈고 실패했다. 그리고 그들은 아직 텐실에 도착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란델은 칼리안을 손에 넣으려 했다.

그런 란델의 뜻을 거부한 지 불과 사흘도 되지 않았다. 그 전까지 란델은 칼리안에게 해코지를 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 테니 만에 하나 란델이 저들을 보낸다 하더라도 보름 쯤은 뒤에나 도착해야 앞뒤가 맞는 것이다. 따라서 란델은 아니다.

"브리센 후작도 아닐텐데."

에반은 칼리안의 뒤에 지그프리드가 있음을 안다.

몸 사리기 좋아하는 에반이 카이리시스에 슬레이만과 그의 기사들이 있는 이 시기에 칼리안을 습격하려 할 리 없다. 때문에 에반도 아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한 웅큼의 바람이 칼리안의 손 끝을 스치듯 지나갔다.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바람이 한 번 불어오는 그 사이에 란델과 에반에 대한 사고를 이미 마쳤다고 해야 할 터였다.

그 바람을 타고 시린 기운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가 보낸 선물일까."

그런 칼리안의 혼잣말에 대답하듯 전사들 중 한 명이 칼리안의 앞으로 다가왔다. 허리에 검이 매여 있기는 했지만 뽑아들지는 않은 채였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아무리 살기가 아니라지만 저런 투기를 뿜어대면서 반갑게 인사라도 나누자는 것은 아닐텐데.

배후도 의도도 파악되지 않는다.

- 탁!

그때 레이븐이 제 자리에서 앞 발을 한 번 굴렀다.

칼리안은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하기사.

칼리안이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누군가를 앞에 두고 긴장한 것이 처음이었다. 그랬으니 레이븐의 이런 모습 역시 처음일 수밖에.

때문에 레이븐의 발구름이 칼리안에게는 '긴장하지 말라'는 소리처럼 들렸다. 믿기지 않겠지만 말이 사람을 걱정해주는 것처럼 들렸다는 뜻이 맞다.

얀은 물론이고 앨런부터 히나까지 주변의 모든 이들이 칼리안을 걱정해주고 있는데 레이븐의 걱정까지 받아서야 되겠는가.

"괜찮아."

따라서 칼리안은 레이븐의 목덜미를 툭툭 두드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 등에서 훌쩍 뛰어내린 뒤 그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얼굴을 가리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검은 머리, 붉은 눈.

칼리안의 얼굴을 확인한 전사가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었다. 그것은 이들이 정확히 칼리안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이기도 했다.

세 보 남짓 거리를 두고 칼리안과 대면한 그가 손을 들어 자신을 가리켜 보였다.

"하르난."

이름을 말한 것이리라.

칼리안은 고개만 끄덕였다. 칼리안은 왕자였고 저들은 이미 칼리안의 이름을 알고 있을 테니까.

"싸움, 대화. 어느 쪽이야."

대신 칼리안은 언젠가의 플란츠에게 했던 것과 비슷한 질문을 건넸다. 하르난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이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싸움."

그리고 칼리안이 매우 마음에 들어할 대답을 했다.

- 카앙!

숨막히던 정적이 찢겼다.

* * *

"애오옹!"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가 긴 울음소리를 냈다.

문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고양이의 입에서 고소한 냄새가 났다. 나갔다 오더니 뭔가를 얻어먹고 온 모양이다.

플란츠가 피식 웃으며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곧 못들어오겠군."

아닌 게 아니라 살이 많이 쪘다.

정작 손으로 잡아보면 아직 작은가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꽤 묵직해졌다. 이러다가는 저 문틈을 넓혀 놓지 않는 이상은 들어오다 끼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익숙해진 손놀림으로 안아달라는 고양이를 들어올린 플란츠의 눈에 목걸이가 다시 보였다. 목줄에 적힌 동생의 이름에 시선이 닿았다.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방 달빛에 비춰진 그 이름을 한동안 응시하고 있으려니 불가피한 사념이 떠오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새 고양이를 쓰다듬던 손은 멈추고 고양이가 게으른 하품을 했다.

그리고 그때까지 이어져 나간 생각의 끝에 선 채로 플란츠가 낮게 읊조렸다.

"눈치 채기 싫었는데."

칼리안은 하루 아침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식당에서 자신을 노려보던 칼리안의 그 눈빛을 플란츠는 잊지 않았다.

세크리티아의 왕세자와 그 동생, 그리고 지금의 칼리안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왕위에 올랐을 카이리스의 2왕자. 그런 이들이 서로 얽힐 만한 일.

그 일을 겪은 칼리안이 '죽이지 않도록' 사력을 다하는 눈빛으로 플란츠를 직시하게 만들 만한 일.

"미오옹!"

고양이가 다시 울었다.

플란츠가 고양이의 목덜미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혼잣말을 다시 꺼내들었다.

"확실히 나는······."

플란츠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았다.

왕이 된 자신이 무슨 짓을 하게 됐을지를.

이유는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예상이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왕이 될 재목은 아니었나보군."

그 나라의 형제는 플란츠가 벌인 전쟁으로 인해 죽었으리라.

* * *

- 두근!

가히 오랜만에 듣는 소리다.

축복의 힘이 이 정도로 크게 느껴진다는 것은 허리에 생긴 상처가 꽤 깊다는 뜻이었다.

조금 전 하르난의 검에 허리를 베였을 때 칼리안 역시 하르난의 어깨를 벴다. 그러나 하르난의 상처는 오래지 않아 흔적 없이 사라졌다.

- 툭 투둑. 투두둑.

굵은 핏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그것을 느낀 칼리안이 씩 웃었다.

상처에 개의치 않고 검을 뻗었다.

- 카아앙!

검과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고요한 밤하늘을 다시 한 번 뒤흔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누군가 이 곳에 직접 발을 들이지 않는 이상 이 한적한 곳에서 카이리스 왕국의 3왕자가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하르난을 제외한 나머지 네 명이 칼리안과 하르난을 감싼 채 대규모 사일런트 막을 생성하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다섯 명이 칼리안을 찾아 온 이유였다.

붉은 기운이 감도는 저것을 사일런트라 칭해도 된다면 말이다.

- 카앙! 카강! 캉!

눈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칼리안의 빠른 검격을 막아낸 하르난의 검에 붉은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앨런이 발현했던 그레이트 실드에 감도는 붉은 빛과 다르다. 그것은 앨런의 주종인 불꽃의 힘이었으나 저것은 아니었다.

- 타다다당!

란델이 보여줬던 바로 그 빛이었다.

칼리안의 손에 들린 투명한 방패가 쏟아지듯 이어진 하르난의 검격을 되받아쳤다. 그 힘에 밀린 하르난이 한 발 뒤로 물러났다.

하아.

잠시간의 틈을 타 칼리안이 소리 없이 숨을 내뱉었다. 곧 방패를 장검으로 다시 바꿔 든 칼리안이 조소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재밌는 힘을 쓰네."

"누가 할 말을."

무기를 바꿔가며 싸우고 있는 칼리안의 공격을 언급하듯 대답한 하르난이 다시 발을 박찼다.

- 카아앙!

날아오는 검격을 막은 칼리안이 하르난의 검을 밀어낸 뒤 아래로 내리그었다. 하르난이 훌쩍 뛰어 다시 한 걸음 뒤로 물러나듯 공격을 피했다.

- 우웅!

하르난의 검에 검붉은 빛이 다시 얽혀들었다.

지금 당장 저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은 중요치 않다. 때문에 일단 그것을 그들의 '오러' 정도로 이해하기로 한 칼리안의 손에도 한층 짙어진 한기가 어렸다.

- 우우웅!

그리고 둘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다시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칼리안의 신형이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움직이는 동안 하르난 역시 검을 뻗고 들어올리며 공격을 막아냈다.

하지만, 느리다.

- 푸욱!

쇄도하듯 뻗어나간 칼리안의 검이 하르난의 복부를 파고들었다.

짧은 신음과 함께 뒤로 주춤 물러선 하르난의 입에 조소가 어렸다. 그것을 본 칼리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번에도 역시 붉은 기운이 모여들어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젠장."

시스파니안.

역시 조금 덜 사려깊었어야 했어.

하르난이 큭큭거리는 웃음소리를 냈다.

"힘들 것이다, 3왕자."

비웃음이 잔뜩 어린 목소리와 함께 붉은 빛의 잔상이 다시 칼리안을 덮쳐왔다. 그것들은 어김 없이 칼리안의 푸른 검 앞에 막혔다.

- 카앙! 캉!

들어올린 팔에 힘을 주자 붉은 피가 쏟아지듯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딱 그만큼의 통증이 찾아들었다.

칼리안은 이번에도 신경 쓰지 않았다.

상처 하나 없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심장을 향해 달려드는 하르난의 검을 검신으로 막은 칼리안이 단검을 생성한 뒤 지체없이 놈을 향해 날렸다.

- 쌔액!

무기가 끊임없이 바뀌는 칼리안의 공격에도 하르난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칼리안의 '검'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는 태도였다. 하르난은 밀려난 검을 재빨리 틀어 날아오는 단검을 쳐낸 뒤 다시 공격을 가해왔다. 막았고 상처가 벌어졌고 눈 앞이 아찔해졌다.

하아.

다시 한번 숨을 몰아쉰 칼리안의 눈빛이 차게 식었다.

'한 번만.'

- 우우웅!

얼마 남지 않은 오러의 힘을 증폭시킨 칼리안의 신형이 놈을 향해 날듯이 움직였다. 푸른 빛의 잔상이 칼리안의 속도를 따르지 못하고 허공에 길게 이어졌다.

검에 어린 오러가 뻗어나갔고 놈의 붉은 빛이 그것을 막았다.

- 카아앙!

칼리안과 검을 맞대고 선 하르난이 피식 웃는 것이 보인다. 검을 든 채 버티고 선 칼리안의 힘이 빠져나감을 느낀 것이리라.

"여기까지 하지."

끝을 내겠다는 하르난의 말에 칼리안이 마주 웃었다.

그리고 대답 대신 작은 목소리를 냈다.

[윈드 스피어]

오러 말고, 마력.

옛칼리안이 만들어 둔 서클에 잘 쌓아가고 있던 마력. 그것을 움직였다.

바람의 힘을 그득히 담은 마력의 창. 아르센의 것보다 날카롭고 거대한 창이 빛과 같은 속도로 내리꽂혔다.

칼리안의 검을 막고 서 있던 하르난은 피하지 못했다.

- 쌔애액!

- 콰직!

바람의 힘은 상처를 헤집는다.

소름끼치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바람의 힘에 꿰뚫린 하르난의 몸이 형체를 잃은채 천천히 무너지듯 쓰러졌다. 그것을 끝으로 하르난은 더 이상 다른 소리를 내지 못하게 되었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본 칼리안이 뒤로 돌아섰다.

축복의 힘과 오러에 더불어 무리하게 운용한 마력까지.

울컥 치밀어 오르는 피를 되삼킨 칼리안이 나머지 네 명의 전사들을 향해 예쁜 웃음을 만들어보였다.

* * *

"소가주님!"

수련장에 있던 드미레아에게 하인 한 명이 다급히 달려왔다.

흘러내린 땀을 대충 닦아낸 드미레아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고 하인은 당황한 얼굴을 숨기지 못한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지금, 지금 바로 나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하인의 얼굴에서 다급함을 읽은 드미레아가 재빨리 달려나갔다.

수련장 바로 앞에 검은 말이 더운 숨을 몰아쉬며 서 있었다. 말이 밟고 선 땅에 붉은 피가 흥건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칼리안 왕자님."

차마 왕족의 몸에 손을 대지 못한 하인들을 지나쳐 다가간 드미레아가 서둘러 칼리안의 몸을 끌어내려 눕혔다.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칼리안의 손이 드미레아의 어깨를 붙들어 잡았다.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한 목소리가 드미레아의 귀에 가 닿았다.

"내 형님을······ 불러줘."

어깨를 붙들고 있던 하얀 손이 스르륵, 떨어져 내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