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장. 건드리지 말라고 (2)
- 대사막의 전사와 텐실이 만났다.
고작 그 한 마디에 플란츠의 눈빛이 바뀌자 체이스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한 층 짙어졌다. 그리고 그 미소를 흩어내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내 동생이 많이 무뎌졌기에,"
"하."
체이스가 딱 거기까지 말했을 때 플란츠의 입에서 짧은 웃음소리가 새나왔다. 헛웃음과 비웃음의 중간 쯤 되는 그런 소리였다.
많이 무뎌졌단다.
누가 들으면 칼리안이 그냥 예쁘장한 왕자님이기만 한 줄로 착각할 소리를 한다.
칼리안과 대련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목을 베인다.
그레이가 카이리시스에 들어오는 것을 막겠다며 허리를 부러뜨려 둔 놈이다. 에반 브리센 후작의 의심을 덜고자 일을 좀 벌이겠다 했을 때에는 쉰에 가까운 사람이 죽었다. 그 일을 벌이고 돌아온 키리에로부터 상황을 전해들은 동생 놈은 놀란 기색도 없이 알겠다고만 대답했다.
레이븐이 칼리안만 따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앨런에게도 대서는 그 미친 아르센이 칼리안에게만 꼬리를 내리는 것에도 다 그럴만한 까닭이 있다는 말이다.
"무뎌졌다니."
"정말 많이 무뎌졌습니다."
지금의 칼리안이 어떤지 몰라서 하는 소리는 아닐 것이다. 체이스라면 칼리안의 행적에 대해 플란츠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래서 웃은 것이다.
대체 '과거'에는 어땠길래 라는 뜻의 웃음이었다.
"그래서일까 하는 생각도 했었는데. 아니었나 봅니다."
플란츠의 복잡한 마음에는 관심 없을 체이스가 이렇게 의미심장한 소리를 했다. 평소 플란츠가 그리하는 것처럼 머리와 꼬리는 찾아볼 수 없을 말이었다.
"이 체르밀 궁에 여전히 세 명의 왕자가 살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던 터라."
"당신 동생이 형제들을 죽여 없애기라도 할 줄 알았나보지."
그리고 플란츠는 그 말의 의미와 말에 든 가시까지도 아주 잘 알아들었다.
"내 아우님이 나를 살려 둔 것이 아주 놀라운 일인가보군."
"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내 아우님 마음이 약해져서 나를 살려둔 줄 알았는데 다른 이유가 있었다는 소리인가."
"맞습니다. 눈치가 빠르군요, 플란츠 왕자는. 아무래도 그 덕분인가 싶고."
칼리안이 화를 참고 살려두었을 만큼은 똑똑하다는 소리임을 이해한 플란츠가, 소파에 등을 기대며 나른한 목소리를 냈다.
"칭찬으로 들어야 하나."
"칭찬입니다."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칭찬이었는지는 플란츠가 알아서 걸러들으면 될 일이니까.
"아무튼 그 내용만 전해주면 될 것 같습니다. 텐실과 대사막이 손을 잡았다고."
"궁금해지는데."
서로간에 더는 할 말이 없던 체이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것을 본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내 아우님의 옛 형님께서는 왜 가만히 있는지. 내 아우님은 움직이고 있는데."
"가만히 있지 않아야 합니까."
칼리안은 제 목숨값으로 발칸부터 만들었다.
그 뒤에는 마법사와 기사를 모으고 스스로는 검술과 마법을 수련해가며 아주 열심히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내 아우님이 준비하고 있는 것, 왕세자위에 오르기 위해서만은 아닌 듯한데. 내 아우님과는 다르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유를 모르겠어서."
칼리안은 뭔가를 대비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때문에 카이리스를 최대한 망치지 않으면서 제 힘을 키우려 하는 것이 눈에 훤했다.
자리만을 바랐다면 그렇게 얌전히 앉아서 눈치 싸움이나 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 플란츠와 란델의 목을 꺾는 것만큼 쉬운 일이 칼리안에게 또 있을까.
그러니 궁금한 것이다. 체이스가 칼리안과 같은 것을 안다면 최소한 발칸과 유사한 집단이라도 만들었어야 했다. 그런데 세크리티아의 행보는 매우 평범했다. 그저 세작이 얼마나 많은지를 깨달았을 뿐, 그 외에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글쎄요. 무엇이라 설명을 해야 할까."
체이스가 그렇게 입을 열었다.
깊은 보랏빛의 눈. 하지만 란델의 것처럼 사람의 숨을 죄이는 것이 아닌 통찰이 담긴 눈빛을 한 채였다.
"그것은 내가 건드려야 할 부분이 아닙니다."
체이스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과거와 똑같은 결정을 하고 똑같은 나라를 만들 생각입니다. 그래야 내 동생이 그 힘을 손에 쥔 유일한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까."
플란츠는 대답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대화가 끝났다 여긴 체이스가 밖으로 발을 옮기려 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는지 플란츠를 향해 입을 열었다.
"마나실 경도 내 동생의 비밀을 아는 것 같던데. 혹시 내용을 아는 이가 또 있습니까?"
"······ 모르는 사람이 누구인지 묻는 것이 빠를 것 같은데."
체이스가 처음으로 당황한 얼굴을 했다.
그것을 본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 * *
앨런이 앞에 놓인 귤 하나를 까서 입에 넣었다.
서류를 보던 눈을 잠시 돌려 그 모습을 본 르메인이, 쓰고 있던 안경을 손가락으로 툭 건드리듯 고쳐 쓰며 입을 열었다.
"실 텐데."
앨런의 인상이 확 찌푸려졌다.
굳이 입에 넣고 씹을 때를 기다려서 시다고 말했다. 노린 것이 분명하다.
뱉을 수도 없고 삼키기도 힘들만큼 신 귤을 간신히 씹어 넘긴 앨런이 툴툴거렸다.
"웃지 마시지요."
서류로 얼굴을 가린 르메인이 괜한 헛기침을 했다.
분명하다. 웃었다.
곧 얼굴을 가리고 있던 서류를 손에 든 르메인이 안경을 벗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앨런의 맞은편으로 와 앉더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기사들을 모을 예정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었네. 때문에 사냥대회도 열어주었던 것이고. 그런데 그들을 수도에 두겠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그래서 이렇게 제가 전해드리고 있는 중인 것 아닙니까."
칼리안이 슬레이만에게 요청했던 일과 관련해서 칼리안을 대신해 르메인에게 허락을 받으러 온 길이었다.
"열 한 곳이나 되는 가문에서 모은 기사단이라 하니 우려가 되는군. 기사는 마법사들과는 다를 수 있네. 그들처럼 맹목적으로 칼리안을 따르지는 않을 테고. 나아가서는 칼리안으로부터 마음을 돌릴 수 있으니까."
"왕자님께서도 그 점은 알고 있습니다. 자칫하면. 왕세자위 싸움이 정말로 내전으로 번질지 모른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감안하고 말한다는 이야기인가."
그 말을 들은 앨런이 귤을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한 조각을 먹어도 시고 여러 조각을 먹어도 십니다."
어차피 칼리안이 직접 키워낸 기사단이 아니었다. 한 가문이 모였든 여러 가문이 모였든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라는 소리일 것이다. 그러니 위험을 감수하는 것도 똑같다는 말로 알아들은 르메인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앨런이 빙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브리센만 있든 브리센 외의 다른 기사들이 있든 전하 목숨 간당간당한 것은 똑같다는 말입니다."
아.
"내 목 얘기였나."
르메인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앨런은 그런 르메인의 모습에 개의치 않고 계속 말했다.
앨런이 신 귤을 하나 더 떼어내어 입에 넣었다. 그러더니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한번 더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만약 그들이 왕궁을 향해 검을 드는 날이 온다면 그 맞은편에는 전하의 셋째 아드님이 있을 터이니 그것은 걱정 마시지요. 제 사람 하나는 확실히 지키는 분이 아닙니까."
그리고 칼리안이라 하여 그들의 배신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 리 없다. 이미 모두 고민을 끝낸 일일 터였다.
"어차피 귀족들은 제 잇속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렇다면 왕자님을 따르는 것이 계속 그들에게 이익이 되면 될 일이니 어려울 것이 없지요."
"그렇다 하나 걱정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생각을 해 보고 내일까지는 답을 주겠네."
"알겠습니다. 그리 하십시오."
르메인이라 하여 무조건 앨런의 말을 다 들어줄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 꺼낸 대답이었다. 어차피 예상했던 대답이었던 탓에 앨런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이렇게 신 귤은 처음 봤습니다."
무언가에 비유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귤 얘기였다. 아직 푸른 빛이 감도는 그 귤은 단 맛을 찾기 어려울 만큼 셨다.
"세크리티아의 왕세자가 가져왔다더군."
"그럼 이것은 세크리티아의 귤입니까?"
"세크리티아의 왕세자가 타국의 것을 들고 올 리는 없지 않겠나."
세크리티아의 귤이란다.
심지어 체이스가 챙겨 온 귤이다.
르메인의 설명이 끝나기가 무섭게 테이블 위에 있던 귤이 바구니째로 사라졌다.
먹지도 못하는 걸 왜 가져가냐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는 르메인에게 앨런이 날카로운 눈매를 둥글둥글하게 만들어보이며 말했다.
"전하께서는 다른 것 드십시오."
체이스가 르메인 먹으라고 보존 마법까지 걸어가며 귤을 가져왔겠는가? 당연히 아닐 터였다. 그런 대단한 귤을 전부 다 어여쁜 제자에게 가져다 줄 생각을 한 앨런이 흐뭇하게 웃었다.
* * *
에우리아는 참으로 마법사다웠다.
칼리안이 내보인 돌에 대해 엄청난 호기심을 보인 것이다.
"시간을 바로잡는 힘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정확하지 않습니다. 내 예상일 뿐."
시아가 대답하는 순서를 바로잡고 시들지 않는 장미에 묶여 있던 시간을 흐르게 했었으니까.
시간을 거슬러 온 칼리안에게는 아무 영향이 없었지만 시아와 장미만 놓고 본다면 '시간'과 관계가 있는 것은 맞는 것 같았다.
그런 내용에 대해, 칼리안은 앨런에게만 자세한 내용을 알렸었다.
세렌티가 개입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왕궁의 자리 싸움과는 완전히 다른 어찌 본다면 칼리안 개인의 문제라고도 볼 수 있었으니 그에 대해서까지 마법사들과 에우리아의 힘을 빌리고 싶지 않았던 탓이었다.
"시간이라니. 흥미로운 힘을 가졌군요. 이 문자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요."
물론 에우리아 역시 아는 것이 없으리라는 생각도 한 몫을 했다. 칼리안의 예상대로 돌에 새겨진 문자를 본 에우리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해듣기로는 세크리티아에도 잊힌 문자가 있다고 하였는데 혹시 그것은 아닐까요?"
"아닙니다. 그 쪽은 이미 알아보았습니다."
칼리안 스스로가 잘 알고 있는 언어가 아닌가. 특별할 것 없이 전승되어 내려온 그것을 떠올리며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곧 에우리아는 서재에서 온갖 신학 서적을 가져왔다. 그 중 한 권을 들어올린 칼리안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의외네요. 마법사 서재에 양신전쟁 연대기라니. 마법사들은 세렌티를 믿지 않는 줄 알았는데."
"믿지 않는 것과 부정하는 것은 다르지 않겠습니까. 우리 마법사들은 텐실의 신관과는 다릅니다. 세렌티의 생존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시스파니안께서 그 자리에 있으셨으니까요. 그러니 모든 마법사들은 세렌티에 대해서도 상세히 배웁니다, 왕자님."
옛 칼리안의 기억에는 양신전쟁 뿐 아니라 주신 세렌티에 대한 자세한 지식이 들어있지 않았다. 왕자의 수업에서 배운 것이 전부였다. 독학으로 마법을 익혔기 때문이었다.
종이와 펜을 들어 칼리안이 가진 돌에 새겨진 문자와 돌의 모양을 베껴낸 에우리아가 물었다.
"로젤리타 기간, 그리고 스팅과 네리카 영지 맞으십니까? 루카라는 엘프 소년이 가지고 있었고요."
"네. 맞습니다."
"알겠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제 몫입니다, 왕자님. 그러니 이만 궁으로 돌아가십시오. 확인되는 것이 있으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칼리안이 작게 웃었다. 에우리아가 왜 그러는지를 묻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재밌어서요. 요즘 왠지 내가 하는 일이 없는 것 같아서. 다들 나는 그냥 가라고 하니."
"왕자님께서 직접 움직이시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에우리아가 마주 웃으며 대답했다.
"왕자님은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부리는 분이니까요."
"그래서인가. 모르겠습니다."
더 이상 에우리아에게 도움이 될 것이 없어진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 가지 주의를 덧붙였다.
"그 돌을 처음 얻었을 때 피 냄새가 아주 짙었습니다. 누군가 생명을 잃었던 물건이니 조심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기사들이 맡는 피 냄새가 어떤 의미인지는 에우리아 역시 잘 알았다. 따라서 에우리아는 잘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아침에 슬레이만을 만나고 마법사 협회로 왔다.
에우리아와 멜피르를 만나고 돌아가던 길에 시아를 만났고 다시 협회로 돌아왔다. 그리고 에우리아와 꽤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고 나니 어느새 밤이 되었다.
"아."
밖으로 나오고 나서야 시간이 흘렀음을 알게 된 칼리안이 난처한 소리를 냈다.
"얀이 걱정하겠네."
금방 다녀올 생각이었으므로 행선지도 알리지 않고 키리에도 없이 혼자 나왔다. 분명 안달을 내고 있거나 아니면 사방으로 사람을 보내 수소문을 하고 있을 터였다.
칼리안의 얼굴에 난처한 빛이 떠오르자 여유롭게 걷고 있던 레이븐이 알아서 걸음을 빨리 했다. 그것을 느낀 칼리안이 레이븐의 갈기를 흩뜨리듯 쓰다듬었다. 그렇게 레이븐이 알아서 왕도를 향해 걷고 칼리안은 후드를 깊이 눌러 쓴 채로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잠시만, 레이븐."
이번에는 칼리안이 레이븐을 멈춰세웠다.
그리고 고개를 들며 재밌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레이븐이 멈추지 않았을 만큼 잘 감춰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카이리시스는 넓었다.
어디에서든 한적한 곳은 있었다.
그런 한적한 곳에서 시아도 알아보는 왕자의 검은 말을 향해 몇몇 인영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카이리시스의 축제 기간이었으니 손님들이 참 많이도 찾아온 모양이었다. 때문에 낮에는 시아가, 그리고 밤에는.
"여기까지는 어쩐 일로 오셨을까."
붉은 눈에 아주 반가운 것을 보았다는 빛이 떠올랐다.
"······ 대사막의 전사들."
정확히 자신을 향하고 있는 그들 특유의 투기를 느끼며 칼리안의 웃음이 짙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