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11화 (112/527)

제22장. 건드리지 말라고 (1)

엘프들은 선하지 않다.

정확히 말한다면, 모든 엘프가 선한 것은 아니라 해야 할 일이다.

거짓말을 하지 못하고 폭력을 꺼려하며 숲 속에 모여 산다 하여 그들을 '선하다' 할 수 없다는 것을 몸소 겪으며 깨달은 칼리안이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엘프라는 종족에 대한 분별 없는 믿음을 일찌감치 내다버렸다. 물론 칼리안이 알고 있는 유일하게 착한 엘프인 시아를 제외하고서.

"대장이 맞았어! 너무 좋아!"

이렇게 칼리안과 마주 앉아 해처럼 웃는 시아를 어떻게 믿지 않겠는가.

시아는 로브를 쓰고 있던 칼리안을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특징 있는 외형의 레이븐을 알아봤다. 그래서 얼른 레이븐의 앞을 막아서게 되었다고 했다.

"다시 만나니까 정말 기쁘다."

"그래. 나도 정말로 반가워. 깜짝 놀라기도 했고. 장로 제르가 있는 마을에 다시 돌아간다 했던 것을 걱정했는데 여전한 모습을 보니 좋네."

칼리안은 이렇게 말하며, 기뻐해주는 시아를 향해 진심어린 미소를 보냈다.

"여긴 어떻게 왔어. 혼자 온 거야?"

"아니야. 혼자 안 왔어."

시아를 데리고 마법사 협회 건물로 되돌아온 칼리안이 이렇게 물었다. 어느새 칼리안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주변을 가득 채운 책들을 신기하다는 듯 구경하던 시아가 대답했다.

"우리 마을 장로님이 이번에 여기 오는 장로님으로 뽑혔어. 그래서 내가 부탁했어. 대장이랑 히나랑 만나고 싶어서 나도 오고 싶다고 졸랐어."

"왕궁에서 엘프들을 못 봤는데. 전하의 탄신 기념일 축제에 참석한다던 엘프 사절단을 말하는 게 맞아?"

"응, 맞아."

"설마 그럼 장로 제르도 이곳에 와 있다는 소리인가."

"아니야, 대장. 우리 마을 장로님은 이제 제르가 아니야."

"장로가 바뀌었다고?"

"응. 제르는 이제 장로 아니야. 대장로님이 화가 많이 나셨어. 제르랑 루카는 오랫동안 벌을 받을 거야."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둘에 대해 어떤 처벌이 내려졌는지는 굳이 묻지 않기로 했다. 떠올려 보아야 칼리안만 불쾌해지는 이들이었다.

더불어 그보다 더 궁금한 것이 있었다.

"시아. 말 순서가 안 바뀌는데 어떻게 한 거야."

"이거, 나도 생겼어."

곧 시아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여주었다. 그것을 본 칼리안의 눈빛이 아주 잠시 가라앉았다. 칼리안 역시 잘 알고 있는 물건이었다.

"······ 또 있었군."

검은 조약돌.

칼리안이 지닌 것과 완전히 똑같은 알아볼 수 없는 문자가 새겨진 바로 그 신물이었다.

"루카 가방에 하나가 더 있었어. 루카는 어디서 났는지 정말 모른다고 해서 주인을 못 찾았어. 그래서 새 장로님이 나더러 가지고 있으라고 하셨어."

시아가 조약돌을 칼리안 앞에 내려놓더니 생긋 웃으며 말했다.

"맞아. 가져가."

"나 주려고?"

그렇게 질문한 뒤 시아가 이미 대답을 했음을 깨달았다. 돌이 없으면 대답이 빠른 것은 여전한 모양이다.

칼리안이 시아를 보며 마주 웃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시아에게 돌려줬다.

"그래도 돼?"

"그냥······ 응. 빨리 가져가."

어차피 같은 것은 칼리안에게도 있었으므로 굳이 시아와의 대화를 힘들게 이어나갈 필요가 없었다. 나중에라도 필요해지면 시아를 찾아가 돌려받으면 될 일이니까.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여전히 항상 지니고 다니는 같은 돌을 손으로 쥐어 본 칼리안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나가 아니었단 말이지."

분명 시스파니안도 이 돌의 정체를 알아봤다.

주신 세렌티의 개입으로 그 말이 칼리안에게는 전해지지 않았으나 '모르겠다'는 분위기는 아니었었다.

일단 시아는 그에 대해 더 아는 것이 없다 하였으니 칼리안은 돌에 대한 의문을 잠시 접어두었다.

"그래서, 카이리시스에는 언제까지 있을 거야?"

"대장로님이 대장의 대장한테 할 말이 있댔어. 그래서 아직 조금 더 있다가 갈 거야."

시아의 대장의 대장이라면 르메인이다.

"이번에 우리가 찾아왔는데 왕궁 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왕궁 출입은 허락을 받았는데 그 안에서 자면 안 된다고 대장의 대장이 그랬대."

엘프들의 왕궁 출입은 허가가 되었으나 체류는 허가되지 않았다. 작년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음을 아는 칼리안이 그 말을 듣고 실소했다.

"어쩐지 엘프들이 안 보이더라니."

"대장의 대장이, 대장이 겪은 일 때문에 화가 나서 못 들어오게 했다고 들었어."

돌이 있음에도 대화가 수월하지는 않다.

한동안 시아의 말을 곱씹은 칼리안이 시아의 말을 해석했다.

"전하께서, 내가 겪은 일로 인해 엘프의 왕궁 체류를 불허했다는 말인가."

"응. 맞아. 그렇게 얘기하더라. 그래서 대장의 대장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봐야 한다고 그랬어."

칼리안이 엘프들과 얽혀 겪게 되었던 일에 대해 르메인이 항의 표시를 한 것이리라. 대장로는 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려는 것일 테고.

다른 말 없이 고개만 끄덕여 보인 칼리안은 그 후 잠시동안 시아와 함께 소소한 대화를 조금 나누었다. 그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다른 일은 없었는지 뭐 그런 것들에 대해서. 그 뒤에는 내일 히나와 시아를 만나게 해주기로 약속하며 시아를 돌려 보냈다.

그리고 에우리아를 다시 불렀다.

시스파니안은 기다리라 했지만 무작정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조약돌이 하나가 아니었다면 어딘가에 또 있을 것이라는 소리였으니까.

때문에 란델의 장미와 같은 색을 발하던 이 돌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 * *

세크리티아 새들의 능력은 과연 어느 정도인가.

플란츠는 이제 그것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체르밀 궁은 왕자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르메인의 집무 공간인 아르피아 궁처럼 외부인 방문이 자주 있는 곳과는 완전히 달랐다.

물론 플란츠는 몰랐지만 그 앨런조차도 체르밀 궁의 입궁을 바로 허락받지 못했었다. 그 덕에 굳이 수고스럽게 '워프'를 하여 칼리안의 방으로 들어와야 했지 않았던가.

그러니 르메인이 아무리 체이스를 존중한다 하더라도 타국의 왕세자가 체르밀 궁에 들어오는 것까지 허락해 줄 리가 없었다.

"세크리티아의 왕세자께서 겁이 없으신데. 아니면 생각이 없으신가."

그런데 지금 세크리티아의 기사, 그것도 대륙 첫번째 소드마스터인 기사가 카이리스의 왕자들이 머무는 체르밀 궁에 보무도 당당히 들어와 있는 것이다.

"위조된 것을 들고 올 만큼."

때문에 플란츠는 테일란의 손에 들려 있는 입궁 허가서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물론 그것을 위조할만한 이들은 당연히 왕궁의 허가서가 어떻게 생겼는지 잘 알고 있을 세작들 뿐이다. 그러니 그들이 지닌 능력의 한계치가 궁금해지는 것이다.

플란츠의 말에 한쪽 눈을 살짝 찌푸렸던 테일란이 입을 열었다.

"저하께서 플란츠 왕자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왜."

"만나보시면 알게 되지 않겠습니까."

체르밀 궁의 밖이라 하면 당연히 인공호수나 장미 정원이 있는 곳일 터였다. 수련장으로 이어지는 후원에 체이스가 가 있지는 않을 테니까.

테일란의 말에 플란츠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대꾸했다.

"불러. 여기로."

카이리스 왕궁 안을 혼자 돌아다니질 않나, 위조된 허가서를 들고 이렇게 밝은 시간에 찾아와서는 당당히 밖에 있질 않나. 그 왕세자 대체 뭘 믿고 그리 제멋대로 군다는 말인가.

란델이라도 마주치면 어쩌려고.

"당장."

때문에 플란츠는 이렇게 덧붙인 뒤 그대로 문을 닫아버렸다. 그리고는 소파에 앉아 잠시 눈을 감은 채 동생의 형이었던 이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히나가 첨언을 해 두는 바람에 길고 긴 이름이 더 길어진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가 얼른 달려와 플란츠의 무릎에 자리를 잡고 몸을 뉘였다.

- 똑똑.

그리고 조금 뒤 체이스가 플란츠의 방에 들어섰다.

플란츠의 눈이 잠시 체이스의 목 언저리에 가 닿았다. 꽤 길었던 체이스의 머리가 확 짧아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변화를 제외한다면 체이스 쪽은 칼리안보다 얼굴이 좀 나았다. 물론 정말 나아서 그런 것인지 나은 척을 하는 것인지까지 플란츠가 걱정해 줄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플란츠는 말없이 맞은편 자리만 가리켜 보였다.

자리에 앉은 체이스가 오전의 햇살 아래 플란츠의 무릎 위에서 몸을 말고 누워있는 고양이를 봤다. 그리고는 의외라는 듯 말을 건넸다.

"생각도 못했습니다. 플란츠 왕자와 고양이라니."

"······ 자꾸 들어와서."

누군들 생각했을까.

간단히 대답한 플란츠는 고양이의 목줄을 손으로 가렸다. 딱히 체이스에게 보여줄 필요가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체이스의 짙은 보랏빛 눈을 보며 다소 냉랭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준비성이 대단하시던데."

"혹시 쓸 일이 있을까 해서 마련해 뒀습니다."

출입 허가증을 떠올린 체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여전히 당당한 대답이다.

"내 아우님을 만나기 위한 쓸모인지. 아니면 내 숨을 끊어놓기 위한 쓸모인지."

"글쎄요. 어떤 이유였는지 굳이 말해 줄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후자겠지."

체이스는 대답하지 않았고 플란츠는 실소했다.

"그래서. 세크리티아의 세자께서 여기까진 무슨 일로."

그 말을 들은 체이스가 대답에 앞서 작게 웃었다.

'내 아우님의 형님'이라던 거추장스러운 호칭 대신 처음 체이스를 봤을 때와 같이 자신을 부르는 것을 느낀 까닭이다.

눈치가 빠른 걸까.

아니면 칼리안이 얘기를 했을까.

아무리 체이스라 해도 그것까지 가늠해보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때문에 체이스는 그에 대한 생각을 접어두고 대답했다.

"전해 줄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새들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물어왔기에."

세크리티아의 왕세자가 카이리스에 와서는 세크리티아의 세작들이 알아낸 정보를 카이리스 왕자에게 알려주겠단다.

대충 둘러대도 될 것을 솔직하게도 알려주는 모습이 누군가와 참 많이도 닮았다.

"말해."

"텐실의 신관들 뒤를 쫓아 달리던 브리센 측의 기사들은 플란츠 왕자의 생각입니까."

다만 체이스가 꺼낸 것은 세작들의 소식에 대한 말이 아닌 다른 이야기였다.

"······ 세크리티아의 세자께서 이 곳을 떠났을 때 내가 뭘 해야 할지 확실히 알겠군."

"세작부터 정리해야 되겠다는 생각이라면 접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 동생도 모를 곳으로 다시 숨었으니 쉽지 않을 겁니다. 카이리스에 해가 될 일도 없을 테고."

내 동생.

별 문제 없다는 듯 건네진 대답 속에 예상치 못한 단어가 들어가 있었다.

플란츠의 표정이 바뀐 것을 눈치챈 체이스가 아주 따뜻한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형제가 아닌 것을 받아들인 것과는 별개로, 그래도 한 명쯤은 계속 기억을 해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칼리안 왕자가 나에게 그것들을 다 내려놓고 갔으니 적어도 나는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베른'이라는 그 이름이 가진 의미가 상하지 않을 테니까.

"그래."

플란츠가 그런 체이스를 한동안 쳐다보다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뒤 말했다.

"그럼, 내 아우님의 옛 형님께서 하실 말씀이 뭔지."

호칭이 또 바뀌었다. 체이스가 웃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카이리스 국왕 전하께서도 곧 아시게 되겠지만. 내 새들이 조금 더 빠르니까."

"텐실과 대사막의 전사가 만났습니다. 내 동생에게 전해주면 알아들을 겁니다. 내 생각엔 플란츠 왕자도 무슨 말인지 이해할 것 같지만."

나라가 없는 대사막. 그곳의 전사들.

그들의 무력은 상상 이상이다.

"수해를 잔뜩 입은 텐실이 이제와서 대사막의 전사들과 다시 전쟁을 일으킬 리 없는데."

"네. 신을 모시는 텐실과 신을 부정하는 대사막의 전사들이 서로 손을 잡았다는 소리입니다."

"······ 란델 형님의 힘이 늘어나겠군."

플란츠의 눈이 예리한 빛을 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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