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10화 (111/527)

제21장. 심연의 이면에 (6)

당돌하기가 짝이 없다.

자의가 아니었다지만 어찌됐건 지금 칼리안은 지그프리드를 방패로 쓰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가림막으로도 쓰겠단다.

"어떻습니까, 지그프리드 공. 어렵지 않은 일일 것 같은데요."

지그프리드의 도움을 얼마나 받을 수 있는가.

그들이 정해 둔 신념의 범위는 과연 어디까지인가.

르메인의 형 아스난은 그것을 가늠하지 못했었다. 둘도 없는 친우였으니 슬레이만이 자신의 부탁을 모두 들어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 지그프리드의 소가주였던 슬레이만은 자신을 도와 검을 들어달라 했던 친우의 청을 단칼에 거절했다.

"칼리안."

때문에 슬레이만은 웃었다.

지금 칼리안은 슬레이만이 허락할 수 있을 경계선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슬레이만이 지그프리드의 신념을 망치지 않으면서 칼리안을 도울 수 있는 일의 범위는 정확히 거기까지였다.

"칼리안. 칼리안······. 으어아하하하!"

왕자를 목전에 두고 그 이름을 몇 번이고 부른 슬레이만이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며 박장대소를 했다. 상처가 또 벌어지는 바람에 히나가 당황한 얼굴을 했지만 신경쓰지 않고 웃었다. 그러더니 맞은편에 앉아 있는 앨런을 보며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새끼가 하도 나만 닮아서 영 비루먹기만 한 줄 알았는데, 사람 하나는 잘 골랐다!"

둘의 대화를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앨런이 조용히 말했다.

"자네 새끼는 자기가 뭘 골랐는지도 모른다네."

정확한 지적에, 얀의 눈에는 그저 꽃같기만 한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슬레이만을 향해 입을 열었다.

"허락의 뜻으로 보면 되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저 대리석 값으로 치기에는 너무 비싸지 않습니까. 하나 더 주십시오."

이렇게 말한 슬레이만이 큼지막한 미소를 지었다. 어딘지 장난스러운 기색이 다분한 얼굴로 흥정을 해왔다.

어쩐 일로 똑똑하게 구는 슬레이만을 본 앨런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리고 칼리안은 별다른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야기 하라는 뜻이었으나 슬레이만은 잠시 말 없이 고개를 숙여 자신의 상처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검에 시선을 두다가, 히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미안하네만, 자리 좀 비켜 줄 수 있겠나?"

고개를 끄덕여보인 히나가 밖으로 나갔고, 슬레이만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

"테일란이 사용하는 검술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전에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는데 이번에는 확실히 알겠습니다. 왕자님과 테일란의 검술이 같습니다."

"어떻게 지금의 카스트린 경과 제가 같은 검술을 사용하는지가 궁금하다는 말씀이십니까."

"왕세자를 호위하는 기사, 그것도 대륙의 첫번째 검인 자가 세크리티아의 다른 기사들을 가르치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일반적인 기사를 가르칠 리 없을 테일란의 검술을 어떻게 칼리안이 알고 있는지를 설명하려면 당연하겠지만 칼리안의 속알맹이가 세크리티아의 왕자였음을, 왕세자 체이스의 동생이었음을 말해주어야 한다.

대답해야 할 내용을 상기한 칼리안이 파리한 얼굴로 웃었다.

어차피 다 알던 사람이 자세한 내용 좀 더 안다고 문제 될 것이 있겠냐만 지금 칼리안은 그런 말을 꺼내들 기분이 아니었으니까.

그런 칼리안의 얼굴을 슬쩍 본 앨런이 입을 열었다.

"설명을 하여도 괜찮은 부분이라면 제가 이야기를 할 터이니 왕자님께서는 들어가시지요. 왕자님의 기사들을 지그프리드 공작령에 숨겨두시고자 하는 일에 대해서도 제가 전하와 얘기를 나누고 따로 왕자님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아는 것이 없을 텐데도 앨런이 이렇게 칼리안을 챙기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둘 모두 부탁드리겠습니다."

스승의 배려에 감사를 전한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슬레이만에게 양해를 구한 뒤 밖으로 나왔다.

앨런은 쉬라 했지만 가야 할 곳이 또 있었다.

마법사 협회장 에우리아와 폴룬 상단의 상단주 멜피르 폴룬도 만나야 했고, 먼저 말도 꺼내지 못한 채 칼리안의 도움을 절실하게 기다리고 있을 사람도 만나 볼 때가 되었다.

생각할 것도 가야할 곳도 만나야 할 이들도 이렇게나 많으니, 쉴 틈이 없는 것이 어찌나 다행인지.

그런 생각에 소리 없이 웃던 칼리안이 발을 옮겼다.

* * *

"애옹!"

안아달라고 졸라대는 소리에 손을 뻗어 놈을 안아올렸다.

"도대체, 넌."

창 밖만 쳐다보고 있으면 꼭 이렇게 안아달라고 채근을 하는 것이다. 우울한 생각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듯이.

그러니 정말 뭘 알고서 이러는지 아니면 항상 우연인지 궁금해질 수 밖에.

물론 대답을 들을 수 있을 일은 아니었으므로 플란츠는 그냥 손을 움직여 고양이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그러다 그 목에 채워 놓은 목걸이 색이 조금 바뀐 것을 눈치챘다.

처음에는 몸집이 커져서 새 목걸이를 달았겠거니 했는데 조금 이상했다. 때문에 목걸이에 시선을 둔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분명 히나일 것이다.

칼리안은 지금 머리도 시끄럽고 속도 시끄러운 상태인데다 애초에 이런 것을 할 성격도 되지 못했으니까.

훨씬 더 길어진 이름이 적힌 목걸이로 바꿔 맨 고양이를 잠시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 똑똑.

누군가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플란츠는 대답 없이 잠시 방문 쪽을 쳐다봤다.

매년 그래왔듯 국왕 탄신일 기념 축제가 끝나면 왕자들의 일정은 더 많아진다. 축제 준비로 인해 미뤄뒀던 행사들이 일제히 진행되는 까닭이다.

그랬으니 가장 바쁜 것은 시종들이었고 플란츠의 시종 레릭은 얀과 마찬가지로 회의중에 있었다.

그리고 플란츠는 시녀들과 한 명의 시종 외에는 아직 다른 시종을 더 뽑지 않은 상태였다. 때문에 레릭이 회의에 들어갈 시간에 누가 찾아오면 직접 대답을 해줘야 했다.

"뭐야."

물론 친절한 대꾸는 아니었지만.

플란츠의 말에 들려오는 대답이 없었다.

고양이를 찾으러 히나가 왔나 하는 생각에 방문을 연 플란츠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잠시 뒤, 플란츠의 입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아우님 방은 아랫층인데."

체이스의 기사, 테일란을 향해서였다.

* * *

텐실의 신성 기사를 데리고 그레이가 있는 변경백령을 공격하려 했다. 그리고 계획이 실패했다.

과연 란델이 여기서 멈추겠는가.

"란델 형님은 포기하지 않으실 겁니다."

란델의 입장에서 란델보다 먼저 생각을 해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보가 절실했다. 때문에 에우리아와 멜피르를 찾아온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시간이 촉박하다 생각하는 만큼 분명 다른 일을 벌일 계획을 또 짜고 있을 텐데, 워낙 상식적이지 않은 일을 벌이셨던 분이라서 또 무슨 일을 시도하실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네요."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실소했다.

지나칠만큼 이성적인 란델이 지나칠만큼 비이성적인 행동을 했으니 그것이 웃겨서였다.

곧 칼리안이 에우리아 쪽을 쳐다보며 물었다.

"신성 기사들은 제대로 빠져나가고 있습니까."

"그 쪽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에우리아의 말에 칼리안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이유가?"

그러자 에우리아가 재밌는 일이 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어젯밤에 란슬럿 영지에 있던 기사들이 그들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란슬럿이라면 브리센 쪽에 서 있는 남작이던가요."

"맞습니다. 무력 충돌을 일으킬 분위기는 아니었고 텐실 국경까지 잘 안내하고 올 것 같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섣불리 빠져나가거나 말 머리를 돌려 다른 공격을 꾀하지 못하도록 아예 근처에서 바짝 쫓아가고 있다 전해 들었습니다."

"텐실 치유사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브리센 후작이 알고 있었을리는 없는데. 플란츠 형님께서 브리센 후작을 만났다 하더니 그런 이야기를 했나 보군요."

그 에반이 거기까지 생각을 확장시킬 인물은 되지 못했으니, 텐실의 치유사들이 허튼 짓을 하지 못하도록 국경까지 잘 인도하도록 한 일은 분명 플란츠의 생각일 터였다.

"내 형님께서 이렇게 또 도움을 주시나."

혼잣말과 함께 짧게 소리내어 웃은 칼리안이 에우리아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래도 손 놓지 말고 우리 쪽에서도 계속 지켜봐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걱정 마세요."

에우리아가 이렇게 말하며 다시 한번 웃음을 보였다.

그 후 칼리안이 고개를 돌려 옆에 앉아있던 멜피르를 쳐다봤다. 직접 대면하는 것이 정말 오랜만이었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을 보이는 영지들이 있으면 모두 확인해주세요."

멜피르 역시 에우리아만큼이나 많은 정보를 접하는 인물이었다. 카이리스 곳곳의 영지와 거래를 하고 있는 곳이니까.

"지금까지는 특이한 점이 없었고, 이상한 부분이 있으면 바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곧 미안하다는 듯한 얼굴을 하며 입을 열었다.

"폴룬 상단에 타격이 있을 겁니다. 이번 일로 텐실과의 관계가 틀어지게 된다면 텐실에서 다이아몬드 거래를 중단하겠노라 할 수도 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별 것 아니라는 듯 웃으며 대답한 멜피르가 칼리안의 앞에 무언가를 내밀었다. 주석으로 만들어진 작은 상자였다.

"무엇입니까."

"지금 카이리스에서 다이아몬드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다이아몬드보다 귀한 것이 있습니까."

"열어보십시오."

곧 상자를 열어 본 칼리안이 순간 어리둥절한 얼굴이 됐다. 그 안에 든 것은, 칼리안의 눈동자를 꼭 닮은 선연한 붉은 빛의 보석이었다.

"루비 아닙니까."

"네, 왕자님. 루비입니다."

멜피르가 둥글둥글한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의 아니게 카이리스의 루비 수요가 늘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만. 이것이 다이아몬드를 대체할 만큼일 줄은 몰랐습니다."

"대체하는 정도가 아니라 없어서 팔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세크리티아의 사신단에 루비를 취급하는 이가 있기에 어제 만나보았습니다. 생각외로 굉장히 호의적으로 나오더군요. 그러니 텐실과의 다이아몬드 거래에 대해서는 신경 써주시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아, 하고 칼리안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체이스의 도움이었다.

체이스는 죽었어야 할 멜피르가 살아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멜피르가 누구와 손을 잡았을지는 굳이 오래 고민할 거리도 못 되었을 터였다.

"다행이군요."

플란츠, 그리고 체이스 덕분에 여러 걱정 거리가 덜어진 칼리안이 작게 웃었다.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한 명을 만나볼 일만 남게 된 칼리안은 조금쯤 가벼워진 마음을 한 채로 마법사 협회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레이븐은 칼리안을 태운 채 참으로 편안한 걸음걸이로 발을 옮겼다.

언제나 그랬듯 레이븐이 알아서 왕궁까지 잘 데려다 줄 테니, 칼리안은 입고 온 로브의 후드를 깊이 눌러쓴 채 눈을 감았다. 그런다고 사람들이 칼리안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테지만 그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기에는 조금 피곤한 마음이 들었던 탓이었다.

- 다각, 다각.

어떻게 알았는지 레이븐은 발굽 소리를 크게 내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기특한 녀석이라는 생각에 다시 혼자 웃을 즈음 레이븐이 발을 멈췄다. 그것을 느낀 칼리안이 눈을 뜨고 앞을 쳐다봤다.

칼리안과 마찬가지로 로브를 입고 후드를 쓴 사람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후드 아래 비춰진 모습을 본 칼리안은 레이븐처럼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너······."

무슨 일로 어떻게 여기에 왔느냐고.

그런 질문 대신 칼리안은 웃으며 그 이름을 불렀다.

"시아."

"대장! 오랜만이야!"

앳된 얼굴의 엘프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시아의 대답은 질문보다 앞서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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