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장. 심연의 이면에 (5)
에반 브리센 후작의 눈이 홉떠졌다.
플란츠의 말은 칼리안이 드미레아와 함께 입장했을 때보다도 더 놀라운 것이었다.
"신성 기사라니. 1왕자가 정말 놈들을 왕궁에 불러들였다는 말씀이십니까."
플란츠 역시 칼리안 만큼이나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을 싫어했다. 아니 말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하는 것 자체를 귀찮아하는 성격이라 하는 것이 맞을 터였다.
때문에 플란츠는 정말이라는 말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브리센은 강한가."
강하냐니.
에반은 왜 당연한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브리센의 힘을 모르시는 것도 아니면서 갑자기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궁금해서. 강한지."
"강합니다. 무력도 강하지만 카이리스의 귀족들 중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곳이 바로 브리센이 아닙니까."
이렇게 말한 에반이 자부심 가득한 눈으로 플란츠를 쳐다보자, 플란츠의 한 쪽 입꼬리가 여지없이 올라갔다.
"하는 꼴은 승냥이라서."
실리케, 레넌과 그레이, 앨런의 피어, 칼리안의 오러, 칼리안과 지그프리드의 동맹 등등. 지금껏 에반은 참 많은 것들 때문에 계속 몸을 사려 왔다.
"눈치를 보고, 발을 빼고, 계획을 수정하고, 다시 발을 물리고. 이것만을 반복해왔지 제대로 나선 적은 한 번도 없지 않나. 그리핀은 커녕 사자도 못 되는 승냥이. 그렇게만 보이는데."
플란츠나 에반이나 서로가 혈육이라는 것을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필요에 의한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때문에 플란츠는 왕자로서 말했고 에반은 후작의 입장에서 그 말을 들었다.
따라서 왕자로부터 생각 외로 박한 평가를 받은 에반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불쾌한 감정을 담아 뭐라 말을 꺼내려는데 플란츠가 낮은 목소리를 내며 에반의 말을 막았다.
"내 아우님은 숨 쉬는 것보다 더 많은 생각을 해."
플란츠가 고개를 돌려 에반을 쳐다봤다.
그리고는 사람을 내려다보는 기색이 분명한 눈빛을 한 채로 말을 이었다.
"그래야 사니까."
"그것은······."
"란델 형님은 내 아우님과 다를 것 같나. 내 말이 정말인지 묻는 것을 보니 매일 꽃이나 쳐다보고 있다며 우습게 여겼나본데."
에반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플란츠의 말이 맞았다.
매일 같이 정원에 나가 꽃을 돌보고 책이나 들여다보는 텐실 따위의 핏줄. 그것이 에반이 보는 란델이다.
장자라는 것은 카이리스에서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러니 란델이든 텐실이든 란델을 지지하는 일부 귀족 세력이든. 그정도 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 둘을 상대하겠다면서 그저 잔머리만 굴리지."
"왕자님. 말씀이 너무······."
"장담하는데 계속 이딴 식이면 브리센은 내 아우님은 고사하고 란델 형님도 못 이겨. 도박장 만들어 굴리고 아무 소득 없는 변경백을 데려다 일을 꾸밀 그 시간에, 어떻게 하면 나를 세자위에 올릴지 제대로 궁리해야 하지 않나."
나른하게 내리 떠져 있던 플란츠의 눈에 칼날이 담겼다. 당장이라도 에반에게 검을 뽑아들 것 같은 그런 눈으로 플란츠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 이제. 정신 좀 차렸으면 좋겠는데."
물론 란델을 끌어내리기 전까지만.
숨은 뜻을 가진 말로 플란츠는 이렇게 에반의 정신머리부터 고쳐놓으려 하고 있었다. 칼리안의 말마따나 언제까지고 칼리안 그늘 밑에 있을 수는 없었으니 에반과 브리센이라는 칼을 란델에게 제대로 써먹기 위해서였다.
플란츠의 말에 에반이 조금 더 매서워진 눈을 했다.
어차피 이제와서는 플란츠 외의 다른 왕자들에게 손을 댈 수도 없게 되었다. 망나니인 줄로만 알았던 플란츠에게 이런 말까지 듣고 있으니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넋 놓고 있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제대로 한 번 힘을 써보기로 마음을 먹을 수밖에.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했습니다, 왕자님."
그런 에반의 대답을 들은 플란츠는 그나마라도 이해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과연 에반이 얼마나 머리를 써줄 지는 몰라도 예전보다는 나으리라.
그렇게 에반과 몇몇 대화를 더 나누고 헤어졌을 땐 이미 무도회가 완전히 끝난 뒤였다. 따라서 플란츠도 체르밀로 돌아갔다.
그리고 체르밀 궁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시종을 보게 됐다. 도대체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지는 칼리안도 모른다 했던 바로 그 대단한 시종, 얀이었다.
플란츠를 마주한 얀은 그리 달가워하지는 않는 얼굴로 인사를 올렸다. 그런 얀의 앞을 지나치던 플란츠가 문득 발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너."
지그프리드 라는 말이 안붙었으니 이번에는 시종 얀을 부른 것이다. 때문에 얀은 오전보다는 조금 더 공손해진 태도로 대답했다.
"네."
"그 시녀 불러. 너 말고."
플란츠는 대체로 말이 짧고 얀은 대체로 눈치가 짧다.
그러므로 2왕자를 쳐다보던 시종의 얼굴에 '좀 알아 들어 처먹게 말해라'와 같은 표정이 떠오른 것은 필연적인 일이라 할 수 있겠다.
괜한 말을 꺼냈다는 표정이 역력한 플란츠가 짜증 가득한 눈으로 얀을 보며 다시 말했다.
"히나라는 그 시녀 나와 있게 하라고. 너 가라고."
"우리 왕자님 다치셨어요?"
어떤 새끼가 꽃 같은 우리 왕자님 건드렸냐고.
딱 그 말이 나오기 직전에 플란츠가 그 입을 대신해 말했다.
"내 아우님이 잘 짖으시니 아우님의 시종도 짖으려 드는군."
그러더니 알아들었든 말든 상관할 바 아니라는 듯 저벅 저벅 걸어서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 * *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체이스가 머리카락을 잘라내고 칼리안이 찾아간 것으로 이미 충분했으니 굳이 입 밖으로 말을 낼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칼리안은 체이스에게 많은 것을 털어냈다.
체이스에 대한 죄책감, 마지막 날에 대한 기억, 그 동안 겪어 온 많은 일들.
그리고 베른까지.
전부 다 체이스의 앞에 내려놓았다.
체이스는 말 없이 전부 받아주었다.
칼리안이 무엇 때문에 베른일 수 없는지 온전히 이해 할 수 있을 유일한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오로지 체이스 뿐이었다.
체이스가 칼리안을 안은 팔에서 힘을 풀었다. 베른은 체이스의 품에서 빠져나온 그 순간부터 다시 칼리안이 되었다.
얼굴을 보고 지낼 수는 있겠지만 형제일 수는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칼리안이 잦아들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중에."
모든 일이 다 끝나면.
그때.
칼리안에게 돌아갈 곳이 생겨도 괜찮게 될 때.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을 믿고 마음을 놓아도 괜찮을 때.
그 때가 되면.
"나중에······."
그 뒤의 말이 차마 이어지지 않았다.
칼리안은 거짓말을 잘 하지 못했으니까.
그것조차 이해한 체이스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이만 돌아가세요. 칼리안 왕자."
이미 너무 늦었으니 돌아가라면서.
그렇게 칼리안의 걸음을 되돌려 보냈다.
* * *
영문도 모른 채 나와 있던 히나는 품 안의 고양이가 체르밀 궁 안으로 달려 들어가는 것을 그냥 두었다. 어차피 4층으로 갈 것이 분명했으니 굳이 붙들 이유가 없었다.
'혼자서 어디를 가셨기에 이렇게 안오시지.'
그리고는 조금 심심해하며 얀을 대신해 칼리안이 오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저도 모르게 나오는 하품을 참을 때 쯤. 자박 자박 하고 멀리서 걸어오는 칼리안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눈치를 챘다.
'아······.'
축복의 힘이 부은 눈은 치료를 안해주는 것인지, 아니면 소용이 없을 만큼 많이 부었던 것인지. 칼리안의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처음으로 보는 그런 모습에 히나가 얼른 칼리안에게 달려갔다. 칼리안의 얼굴에 반가운 빛이 들었다.
"히나."
그리고는 곧 난처한 표정이 되었다.
보이고 싶지 않은 얼굴 탓이다.
"왜 나왔어. 감기 걸릴라. 어서 들어가."
칼리안은 유난히 히나에게 다정하게 굴었다.
그것이 이성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는 것을 히나 역시 잘 알았던 탓에, 나이도 더 어린 칼리안이 이렇게 오빠처럼 구는 것이 재밌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아무튼 무슨 일이 있는 것이 분명한 얼굴을 한 채로도 히나부터 걱정해준 칼리안이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런 칼리안의 앞을 잠시 막아선 히나가 얼른 말했다.
- 들어가면 큰일 나요. 왕자님 눈, 두꺼비.
얀이 또 걱정할걸.
'두꺼비' 빼고는 히나의 수어를 다 알아들은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발을 멈췄다. 그리고 히나는 칼리안의 팔을 붙들고 체르밀 궁의 호숫가로 데려가 바위 위에 앉혔다.
그 큰 눈으로 잠시동안 칼리안을 쳐다보던 히나가 물었다.
- 다, 울었어요?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응' 이라고 대답했다. 말보다는 행동이 더 솔직한 법이라 히나는 웃었다.
- 조금 더 있다가, 들어가요.
히나는 작은 손으로 칼리안의 두 눈을 덮었다. 그리고 남은 한 손으로 칼리안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이제야 비로소 누나 노릇을 해보는 것이다.
히나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빛이었다.
안온한 빛을 머금은 히나의 손바닥 아래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어떤 말을 해 줄 손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히나는 그냥 가만히 칼리안의 등만 토닥토닥 했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토닥이기만 했다.
조금 떨어진 체르밀 궁의 창가에서 야옹 야옹 소리가 잠시 들리다 곧 멀어졌다.
* * *
항상 큰 일이 벌어지지만 정작 축제의 주인공은 그 일들에 그리 크게 개입하지 않는 르메인의 탄신일 기념 축제가 끝났다.
그런 개입이야 어찌됐건 아무튼 생일을 보낸 것은 분명 르메인이었다.
그런데 칼리안의 얼굴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르메인을 대신해 나이를 퍼먹은 듯한 모양새였다. 때문에 앨런이 혀를 쯧 차며 말했다.
"효도하시는 겁니까?"
스승의 말을 한참동안 이해하지 못하던 칼리안을 보며 옆에 있던 슬레이만이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왕자님 고생한 것이 얼굴에 다 나온다는 소리입니다!"
그리고는 앨런의 말을 해석해 낸 것이 스스로 참 대견하다는 듯 웃다가 얼굴을 확 찡그리며 가슴팍을 부여잡았다. 분명히 전 날에는 멀쩡하던 슬레이만의 저 널찍한 가슴팍에 팔뚝만한 길이의 자상이 나 있었던 탓이다.
앨런이 그런 슬레이만을 향해 혀를 쯧 찼다.
"둘 때문에 내가 그냥 다시 늙게 생겼습니다."
칼리안이 더 참지 못하고 작은 소리로 웃었다.
그날 아침.
그럭저럭 마음을 잘 추스른 칼리안이 얀과 마주 앉아 아침 밥을 먹고 있을 때 아르센이 찾아왔다. 그리고는 히나를 잠시 데려가야 할 것 같다는 말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이 이지경인 줄은 몰랐던 칼리안은 앨런도 좀 볼 겸 하는 마음으로 히나와 함께 빌헬름 관에 왔다.
그리고 보게 되었다.
처참하게 조각조각 난 채 나뒹구는 바닥의 대리석과 그 위에 널브러져 있는 슬레이만, 그리고 멀쩡한 모습으로 그 옆에 앉아 있던 테일란을.
회의가 있던 얀이 함께 오지 못한 것이 참 다행한 일이었다.
'이 정도는 간지럽지도 않습니다!'
이런 말을 하며 웃던 슬레이만은 곧 졸도했다.
결국은 앨런이 나서서 슬레이만의 커다란 몸을 옮겨다 놨다.
아주 오래 전 슬레이만이 테일란에게 검을 들이댔다가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고 했다. 때문에 슬레이만이 테일란과 한 번 더 붙어볼 날을 그렇게나 기다렸다고 했다. 질 것을 알면서도!
아무튼 그랬던 슬레이만이 어제 무도회 자리에서 술이 부족함을 느꼈고 결국 앨런의 집무실에서 한바탕 더 술판을 벌이며 밤을 샜다. 그렇게 아침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테일란과 마주쳤고, 딱 좋은 숙취 해소 거리로 테일란과의 한 판을 요청했다.
그리고 저렇게 됐다.
반파된 훈련장을 본 칼리안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조금 전 깨어나 앉아있던 슬레이만에게 말했다.
"복구 비용 받을겁니다."
"당연한 말씀을 하십니까. 치료해주신 값까지 제가 잘 쳐서 갚아드리겠습니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슬레이만이 대답과 함께 또 웃었다. 원 없이 싸우고 져서 더는 미련이 없다더니 그 때문에 웃는 모양이었다.
그런 슬레이만을 가만히 지켜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돈 말고 다른 것으로."
그 말을 들은 슬레이만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스쳤다.
"지그프리드의 방패 말고 검을 요구할 생각은 없으니 그 쪽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것은 드미레아의 이름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럼 무엇으로 갚아달라는 말씀이십니까?"
칼리안이 눈을 내리뜬 채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는 결정을 내렸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인 뒤 슬레이만을 향해 대답을 전했다.
"전하께는 내가 허락을 받겠으니, 공의 저택을 좀 빌려주세요."
"카이리시스에 있는 지그프리드의 저택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저택은 무슨 일로 쓰시려는지 먼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슬레이만의 얼굴에 의문이 들어섰고 칼리안이 웃으며 말했다.
"내 기사들을 공의 저택에 숨겨 두고 싶다는 소리입니다. 지그프리드 공작저에도 기사들이 머무는 훈련소가 있지 않습니까."
아이즌이 만든 기사단은 당연하겠지만 아이즌의 영지에 있었다. 그 기사들이 카이리시스로 몰래 들어와 있을 곳으로 지그프리드의 드넓은 저택보다 좋은 곳이 또 어디 있겠나.
"왕자님의 기사들이라면 혹시, 왕실 친위대 카렌과 라온을 대신할 이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습니다."
"대리석 바닥 값이라 하기에는 상당히 비싼 것을 찾으십니다."
"내 생각에는 적당한 값 같습니다만."
훈련장 바닥 부순 값으로 왕자의 사병을 맡아 숨겨주게 생긴 슬레이만이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