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08화 (109/527)

제21장. 심연의 이면에 (4)

적당히 시간을 채운 에반 브리센 후작이 자리를 떠났다.

곧 누군가 플란츠에게 걸어가 어떤 말을 전했고, 이야기를 들은 플란츠가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나가는 것이 보였다. 이래서야 아예 대놓고 왕세자위 쟁탈전을 준비하러 가겠다는 소리와 다를 것이 뭐란 말인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앨런이 툭 던지듯 말했다.

"아무래도 전하 목숨줄이 오늘 내일 하셨던 것을 저만 몰랐나 봅니다."

"또 무슨 소리인가."

"란델 왕자나 브리센 후작이 하고 있는 꼬락서니가 아주 나라를 뒤집어 엎을 모양새 아닙니까. 이래서야 왕세자위가 아니라 정말 왕좌를 둔 전쟁에라도 나서는 길이라 해도 믿겠습니다."

앞길 창창한 젊은 국왕이 이렇게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신경을 안 쓰니 하는 소리였다.

"그 자리에 있는 것이 하루 이틀 간당간당했던 게 아니라서 감흥도 없으십니까?"

"간당간당, 딱 맞는 말이다. 푸큽큭큭!"

앨런 마나실의 입이 열린 것을 오랜만에 본 탓에 옆에 있던 슬레이만의 웃음보가 터졌다.

"란델 왕자와 에반이 저렇게 천지 분간도 못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양을 계속 두고 볼 생각이신지요."

"간당간당한 와중에 그것까지 신경 쓰실 여력이 있겠나. 적당히 넘어가 주게."

르메인이 무조건 칼리안의 손을 들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저런 모습을 지켜보는 마음이 어찌 편하겠냐만은, 어여쁜 제자가 중간에서 혼자 고생을 다 떠안고 있으니 앨런도 얌전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것을 아는 슬레이만은 열심히 한 손을 보태고 있었다.

"제발 그 입들 좀."

당연히 그런 말에 닫아질 입들이었으면 이렇게 기다렸다는 듯 열리지도 않았다.

"덩치만 큰 순한 놈들까지 불러들인 김에 그냥 제가 나서지요. 오래 걸리지도 않을 터이니."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군. 아주 싹 치워버리고 내 영지로 오게. 지키는 것 하나는 참 잘하니 내 잘 숨겨 주지!"

이 곳이 무도회장인 것이 정말 다행이다.

악사들의 음악 소리와 사람들의 말 소리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이 곳에는 침 삼키는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나지 않고 있을 터였다.

르메인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알았으니까, 좀."

대마법사와 소드마스터가 양쪽에서 이러고 있으니 가운데 앉아 있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 한 명만 속이 썩는다. 카이리스를 받치고 선 큰 기둥 세 명이 모여있는 자리에서 방금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아마 아무도 모를 터였다.

르메인이 정말 난처해하고 있음을 알았는지 고맙게도 슬레이만이 나서서 화제를 바꿔줬다.

"1왕자가 거하게 한 탕 하려다 걸렸다면서?"

아.

그냥 아까 하던 얘기가 나은 것 같다.

앨런을 향한 이 철딱서니 없는 질문에 르메인은 다시 한번 이마를 감싸쥐었다. 앨런은 개의치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내 어여쁜 제자 손에 딱 잡혔지. 그럼, 그럼."

"그러고 보면 제자 한번 진짜 잘 두었네. 그 김에 여기 한 번 다시 보게! 자네 제자 손이 어찌나 빠르던지, 아주 그냥 냅다 칼을 휘두르는데······!"

거기까지 말하던 슬레이만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참 1왕자는 살아 계신가? 자네 제자에게 잡혔으면 몸 성하기 힘들었을 것인데."

"마음씨 여린 내 제자가 어디 그리 함부로 손을 쓰던가? 걱정 말게. 잘 살아 계시네."

칼리안은 란델이 장미를 말려 죽였던 것을 앨런에게 아직 말하지 않았다. 칼리안 스스로도 생각의 정리가 필요했던 탓이다. 그것을 알았다면 앨런은 결코 '란델이 잘 살아 있으니 걱정 말라'는 말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무튼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를 둘의 이런 농담같은 말에 결국 더 버티지 못한 르메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르메인, 벌써 가시려고?"

"푹 쉬시지요."

그랬더니 슬레이만의 속 보이는 말에 앨런은 잘가라는 듯 웃어보였다. 결국 르메인은 깊디 깊은 한숨을 남기고 아르피아 궁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해서 처음 넷이 앉아있던 자리에는 이제 슬레이만과 앨런, 둘만 남게 되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 거칠 것 없다는 듯 웃고 떠들던 슬레이만은 어느새 매우 조용한 모습으로 와인을 한 잔 마셨다. 그러더니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딱 셋이 있지."

"대륙 두 번째 검 씩이나 되는 놈이 무서운 것 참 많기도 하군."

뭐가 그렇게 무섭냐는 눈으로 쳐다보니 슬레이만이 다시 말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우리 세리에, 그리고 멍멍이 얀."

세리에는 슬레이만의 아내였다.

그리고 멍멍이 얀은 공작령에 있는 진짜 강아지 얀을 말하는 것이다. 아무리 제 아들을 닮았어도 어떻게 아들의 애칭을 개한테 붙여주는지. 참으로 슬레이만 답다.

"놈 때문에 남아나는 신발이 없거든."

어쨌거나 지그프리드 영지에 있는 그 갈색 푸들이 두 번째로 무섭다 말한 소드마스터가 앨런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리고 세번째는 자네의 그 주둥이."

앨런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내 주둥이가 우리 어여쁜 왕자님께도 인정 받은 주둥이기는 하지."

둘은 거의 열 살 가까운 나이 차이가 있었어도 정신연령이 꽤 비슷했다. 앨런이 7서클을 달성하여 세월을 거슬러 살기 이전부터 이것저것 다 집어치우고 그냥 친구나 하기로 한 지가 어언 20년이 넘었다.

무서운 것 세 개를 모두 말한 슬레이만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그런데 하나 더 늘었지."

그렇게 말한 슬레이만의 눈이 멀찍이 앉아있는 칼리안의 등을 향했다.

"무서울 만 하네. 우리 왕자님이 보통은 아니시지."

"농담이 아니야. 그런 살기 나도 처음 겪었네. 지금도 오싹오싹해."

목에 남은 흉터를 쓸어내린 슬레이만이 말을 이었다.

"그 날 정말로 죽을 뻔했거든."

"내가 제자 하나는 참 잘 두었다는 말인 건 알아들었네."

슬레이만이야 죽든지 말든지.

앨런은 그저 이렇게 답하며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 * *

에반에 이어 플란츠까지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본 드미레아가 입을 열었다.

"이 정도면 방패 역할은 확실히 한 것 같습니다."

"더할 나위 없었지."

칼리안이 다시 한번 고마움을 담아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드미레아가 흠, 하는 소리를 내더니 칼리안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첫째 왕자님 쪽도 조용해야 할 텐데요."

칼리안이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드미레아 역시 지그프리드였으니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숨길 이유가 없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어제 란델을 만나 겪은 일을 이미 전했었다.

"오래 가지는 않겠지만 당장은 외부의 누구도 만나지 못할 거야. 만약 곧바로 나를 죽일 생각이 있었다면 어제 이미 손을 댔을테지만 그렇지 않았으니 그것도 일단은 괜찮고."

"조만간 다시 부딪히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 심연의 이면에 또 뭐가 있든, 나는 안 져."

칼리안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대답했다.

그리고는 날카로운 눈빛과는 완전히 대비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그리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라서."

아주 자신만만하고 호기로운 대답이었다.

그 말을 들은 드미레아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울었다던데."

아, 이놈의 새끼 코끼리!

순간 할 말을 잃고 멈칫했던 칼리안이 굉장히 어색한 얼굴로 거짓말을 시도했다.

"안 울었어."

"눈이 빨갛게 됐다던데."

"원래 빨개."

드미레아의 얼굴에는 등 뒤로 사탕을 숨긴 어린 동생을 보는 듯한 표정이 나타나 있었다. 지그프리드 집안 사람들은 죄다 할 말을 얼굴로 내뱉는 모양이다.

아무튼 란델이 무서워 울었다는 오해는 벗어야 했으므로 칼리안이 포기한 듯 대답했다.

"그냥. 꿈을 꿨어."

그 말을 들은 드미레아가 잠시 칼리안의 얼굴을 쳐다봤다. 얀이면 모를까 칼리안이 고작 악몽이나 꾼다고 울 만한 놈은 아니었으니까.

드미레아는 가끔 얀이 지어보이는 것과 꼭 닮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얼마나 좋은 꿈이었기에 그러셨습니까."

얼마나 좋은 꿈이었으면 꿈을 꿔서 운 것이 아니라 깨어나서 울었냐고. 그렇게 물었다.

한동안 웃기만 하던 칼리안이 혼잣말같은 대답을 내려놓았다.

"다시는 안 꿀 꿈이라서."

* * *

여전히 한참 시끌벅적한 지그프리드 관에서 나온 뒤 칼리안은 얀도 키리에도 모두 보내고 혼자 발을 옮겼다.

잠깐 다른 생각을 할 시간을 플란츠가 줬으니, 이제 답답하게 구는 것은 그만 하기 위해서 가는 길이었다.

이제야 비로소 체이스를 만나보려는 것이다.

루비아 관의 입구까지 그렇게 거침 없이 움직이던 칼리안의 발이 잠시 멈췄다.

'내일 다시 올까.'

시간이 너무 늦지 않았나.

아무리 그래도 예전처럼 밤새 술 마시고 떠들 수 있을 사이도 아닌데. 그냥 이렇게 무턱대고 찾아가도 괜찮을까.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그래서 그냥 이대로 체르밀 궁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올까 하다가. 그리하면 두 번 다시는 걸음을 하지 못할 것 같아서 억지로 발을 옮겼다. 짙푸른 망토가 칼리안의 걸음을 따라 같이 흔들렸다.

- 에일라.

걸음마다 눈에 보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그 망토 때문인지는 몰라도 문득 푸른 솔새가 떠올랐다.

에일라와의 일을 겪으면서 베른의 모습을 버리고 온전하게 칼리안으로 살겠다고 마음을 먹었었지 않나. 그러니 이번에도 다를 것이 없다고.

같은 형이 아니라 그저 베른에 대한 기억만 가진 다른 사람이니 그것을 잊지 말자고. 그러니 그냥 웃으면서 이야기나 적당히 나누다 오면 되는 일이라고.

그런 생각만 끊임없이 하고 있었다.

그 바람에 눈치채지 못했다.

체이스는 이미 한참 전부터 아주 오래 전부터 칼리안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칼리안."

주저함 가득한 걸음을 지켜보던 체이스가 먼저 칼리안을 불러세웠다.

체이스는 루비아 관 앞에 심겨진 커다란 가문비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 그 큰 나무의 그림자 속에 서 있어서 칼리안에게는 체이스의 발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칼리안의 발이 다시 멈췄다.

목소리를 들었는데, 어디에 있는지도 보았는데, 발이 쉬이 떨어지질 않았다.

오래 전, 베른이 처음 기사가 되겠다고 했을 때.

베른의 고집을 꺾으려던 테일란이 밤새도록 훈련장을 달려보라 시킨 적이 있었다. 지금 칼리안의 다리는 그것을 버텨서 결국 테일란을 설득시켰던 그 날만큼이나 무거웠다.

- 자박

칼리안은 그렇게 발을 떼어냈다가 다시 땅에 붙이기를 몇 번이나 계속했다. 그러다 이대로는 밤새 제 자리에 서 있겠다 싶은 마음에 양 주먹에 힘을 꽉 쥐고는 다시 체이스가 있는 쪽으로 발을 옮겼다.

- 자박

베른이라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잊혀졌으니 미련하게 굴지 말아야 한다고. 이대로 다 내려놓고 세크리티아에 갈 수도 없지 않느냐고. 그런 말로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제 내 이름은 칼리안인 것을.

아는데.

알고 있는데.

"······ 왜."

체이스에게 가까이 간 칼리안의 눈빛이 흔들렸다.

칼리안이 고개를 떨궜다.

아 이건.

반칙이다.

정말 이건 반칙이다.

체이스는 웃었다.

"머리카락, 왜······."

그 긴 머리를 어느새 싹뚝 잘라낸 채로 웃고 있었다.

심장 깊숙이 묻어 둔 기억이 기어코 열렸다.

데블란의 노호성으로부터 베른을 지켜줬을 때가 생각났다. 베른에게 어려운 문제들을 내고는 맞히기를 기다리며 짓고 있던 웃음이 생각났다. 처음 말에 올랐다 떨어졌을 때 베른을 업고 달래주던 목소리가 생각났다. 베른에게 기사 서임을 하면서 지어보였던 아픈 표정이 생각났다.

모두가 죽었던 날.

성문을 막으려 밖으로 나서는 베른을 붙들고 울던 얼굴이 생각났다.

그런 체이스에게.

다녀오겠다고 대답하던 베른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 생각이 쌓인 무게가 너무 커서, 칼리안은 결국 버티질 못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딱 하루만 무너져 내렸다.

"······ 형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딱 한번.

조금만 쉬라고 말하는 체이스의 품에 안겨 울었다.

다녀올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 너무 미안해서.

정말 열 다섯 살 어린애가 된 것처럼, 그렇게나 서럽게 엉엉 울었다.

형님.

형님.

형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