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07화 (108/527)

제21장. 심연의 이면에 (3)

칼리안의 옆에 드미레아가 섰던 축제 마지막 날의 이른 새벽.

그날따라 유난히 새들의 지저귐이 컸다.

그리고 칼리안은 그날따라 유난히 긴 꿈을 꾸었다.

지금껏 베른이었을 때의 꿈을 꾼 적이 없었는데 꿈 속의 칼리안은 베른이었다. 거울 속에 비춰지는 연보라색 눈을 보며 청은색의 긴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었다. 그리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일상처럼 체이스에게 갔다.

꿈 속의 체이스가 베른을 보며 웃었다.

베른이 무언가를 말했지만 꿈 속에서는 체이스의 목소리만 들렸다. 다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른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아서 그랬나보다.

- 피곤해 보이는구나. 더 쉬고 오거라.

- 내가 네 형이니라. 네가 아니라 내가 너를 걱정해야지.

그 목소리를 다시 듣는 것이 너무 좋아서, 다른 것에 신경을 쓰지 못할 만큼 좋아서 한참이 지나고 난 뒤에야 깨달았다.

꿈 속의 체이스는 머리가 짧았다.

그랬다. 체이스는 한 번도 머리를 기르지 않았었다.

둘의 머리 색이 완전히 똑같아서였다. 둘 모두 데블란의 얼굴을 닮은 탓에 둘 다 머리까지 길면 재미가 없다며 웃었었다. 그래서 체이스는 항상 머리가 짧았다. 머리를 기른 적 없었다.

그것을, 왜.

몰랐을까.

카이리스를 찾아온 체이스의 모습은, 그래.

베른을 많이 닮아 있었다.

한 눈에 알아봤어야 했던 것을 이제야 눈치챘다는 생각에 그만 정신이 들고 말았다.

"······ 하."

잊고 지내던 기억을 떠올린다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추억이 될 수 있겠지만, 또 누군가는 그 기억 때문에 숨을 참고 버틴다.

날개 접은 새들이 고이고이 울던 그 날 아침.

칼리안은 몸을 일으켜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정신 차려야지······."

속삭임같은 목소리가 촛불처럼 흔들거렸다.

* * *

고양이 찾으러 왔다는 강아지 같은 시종의 얼굴은 어딜 봐도 고양이를 찾으러 온 이의 표정이 아니었다. 이제와서 나이프 던진 일을 사과 받고 싶은 것인지 혹은 다른 일이 있는지 몰라도 아무튼 그랬다.

한 마디로 놈은 마치 백 번 째의 전투에 나서려는 노련한 장수의 그것과 같은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플란츠 왕자님."

"왜."

얀의 방문을 알린 시종 레릭만 밖으로 내보낸 플란츠는 귀찮음과 짜증이 반씩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랬더니 얀은 당장이라도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얼굴이 되서 입을 열었다.

"왕자님 눈이 빨개요."

"원래 빨간데."

주인 닮아서 아침부터 너도 짖냐고.

그런 눈으로 얀을 쳐다보니 얀이 다시 말했다.

"아뇨. 왕자님께서 요즘 계속 기운이 없으셨습니다."

······ 기운이 없기는.

어제 이야기가 끝났을 때 쯤 키리에가 수련장에서 나왔다. 그것을 본 미친 아우님이 대련이나 하자고 했고 수락했다. 죽을 뻔했다.

밤새 잘 아문 목의 상처가 아직도 욱신거리는 것 같다.

살짝 눈을 감은 듯한 플란츠가 무슨 말을 삼키고 있는지 알 리 없을 얀이 오죽했으면 내가 여기 왔겠느냐는 얼굴을 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것 때문에 지금,"

"너. 지그프리드."

플란츠가 얀의 말을 잘랐다.

얀이 다소 굳은 얼굴을 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짧게 입을 열었다.

"왜요."

지그프리드를 불렀으니 공작 아들이 되어 대답하는 것이다.

호칭 한 번에 눈에 띄게 변하는 얀을 본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소파로 가 등을 기대고 앉은 뒤 맞은편을 가리켜보였다. 시종 얀 말고 공작 아들 시로이안과 마주 앉아 할 말이 있다는 뜻이었으니 얀은 사양하지 않고 가 앉았다.

그와 동시에 플란츠의 입이 열렸다.

"불러. 소공작."

얀이 플란츠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드미레아가 이 곳에 오는 것이 어떤 의미인 줄은 아십니까."

"알아."

"혹시 우리가 개입해야 할 만큼의 상황이 생긴 겁니까?"

얀의 말을 들은 플란츠의 한 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그들이 어떤 이들인지, 르메인이 왕위에 오를 때 슬레이만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플란츠가 모를 리 없다.

"개입해달라 하면 할 것처럼 말하는군."

지그프리드는 옹립하는 자가 아니다.

칼리안도 이것을 알았다. 때문에 기사의 힘이 필요하다 여겼을 때에도 슬레이만이 아닌 아이즌 에이프린 백작을 찾지 않았던가.

"검은 필요 없으니 방패만 들고 오라고."

개입을 원했다면 드미레아가 아닌 슬레이만을 불러오라 했을 것이다. 물론 거절하겠지만.

플란츠가 특유의 나른한 목소리로 읊조리듯 말했다.

"내 아우님은 그조차도 부탁 못할 성격이시니."

란델이 가진 패가 심상치 않았다.

눈에 보이는 기사단이나 마법사단 같은 힘이 아니었다. 정체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힘으로 칼리안을 협박해왔다는 것은 본격적인 싸움까지도 염두에 두었다는 소리였다.

그러므로 지그프리드, 그들의 '이름'이 필요했다.

앨런 마나실과 발칸만으로는 텐실과 브리센 양쪽을 모두 견제할 수 없으니 눈에 띄는 세력이 하나 더 있어야 했다.

둘을 한꺼번에 상대해야 할 상황이 오지 않도록 그들이 당장 덤벼들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그 이름만으로도 양쪽 모두에게 충분한 위협이 되어 줄 수 있을 거대한 집단 말이다.

창 밖을 보며 잠시 무언가를 생각해보던 얀이 대답했다.

"올해에는 소공작도 카이리시스에 왔으니 얘기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을 잠시 멈춘 얀이 플란츠의 눈을 보며 물었다.

"왜 이렇게까지 나서서 도우시려는 건지 궁금하네요. 저는 그냥 이유만 좀 알았으면 해서 온 것인데."

그 말을 들은 플란츠가 자조 섞인 웃음소리를 냈다.

- 형님 때문에 다 망했으니까 이 정도는 이해해주십시오.

상황이 이렇게 된 원인이 플란츠에게 있었다.

칼리안이 강자인 것을 몰랐다면 란델은 우선 브리센과 플란츠만을 목표로 잡았을 것이다. 칼리안은 일단 란델의 눈 밖에 있었어야 했다. 칼리안이 레넌을 물렸든 발칸을 창설했든 제 손 안에서 벗어나지는 못하리라 안심하고 내버려 뒀을 테니까.

그런 란델에게 칼리안이 숨겼던 힘을 들켰다.

거기에 더불어 계속 플란츠와 손을 잡았고 이번에는 아예 대놓고 란델을 방해하기까지 했다. 기사단도 발칸도 미완성인 상태에서 란델에게 칼을 겨누게 된 셈이다.

그러니 이제 란델의 다음 대상은 칼리안이 될 것이다.

쓸 수 없다면 없애버려야 더 방해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결국 칼리안이 플란츠를 살려내는 바람에 일이 이지경이 되어 버린 것이다. 칼리안의 예정에 이런 상황이 있었을 리 없다.

다만 그것을 구구절절 설명해 줄 만큼 친절한 플란츠는 아니었으므로 플란츠는 그냥 간단히 대답했다.

"빚졌으니까."

"플란츠 왕자님께서 빚을 졌는데 왜 드미레아를 부르라 하십니까."

란델과 브리센 쪽으로 잔뜩 날을 세우느라 체이스에게 시선을 안 두려 무리하고 있는 것이 눈에 훤히 보인다. 잠시라도 쉴 틈이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 칼리안이 준 빚을 이렇게나마 갚으려 하는 중이었다. 가진 것도 없는데 빚까지 있어서야 되겠나 싶은 마음에.

"코끼리 그늘이라도 있어야 숨을 좀 쉴 것 같아서."

그것이 플란츠의 생각이었다.

* * *

칼리안은 당황했다.

고양이 찾아오겠다던 새끼 코끼리가 한참을 안 돌아오더니 다른 코끼리를 데려왔다.

"고양이는 어디가고?"

"자던데요. 윗방 침대에서. 쿨쿨. 배까지 뒤집고요. 아무래도 왕자님 방보다 윗방이 더 편한가봐요."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정말 고양이 이름표를 바꿔야 하려나."

아무튼 이렇게 고양이 안부 묻기가 끝난 뒤, 칼리안은 멀뚱히 옆에 서 있던 작은 코끼리를 보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야, 드미레아."

"네. 왕자님."

얀과 얼굴만 비슷하지 성격은 완전히 딴판이다. 얀의 말로는 어머니를 닮았다던데 칼리안은 얀의 모친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아무튼 간단한 인사를 주고 받은 칼리안이 잠시 제 무릎을 톡톡 두드리며 이것이 무슨 상황인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오래지 않아 그 손가락으로 윗층을 가리키며 물었다.

"형님 생각인가?"

"네. 자기 빚을 왜 지그프리드로 갚겠다 하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이것 참······."

플란츠의 도움을 받게 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브리센과 란델의 눈을 돌리게 해 줄테니 잠시 마음을 놓으라는 뜻임을 칼리안도 알았다.

단 한 순간도 흐트러질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됐으니 혹시라도 더 흔들릴까 체이스를 계속 모르는 척 미뤄왔던 칼리안이었다. 그런 칼리안에게 체이스를 제대로 한번 만나고 올 여유를 준 것이다.

"살고 싶다 하더니, 살려주려 하시네."

참으로 애증하게 된 원수같은 놈 덕에 숨 돌릴 틈을 얻은 칼리안이 웃었다. 그리고 드미레아를 향해 말했다.

"오래 귀찮게 하지는 않을게."

"상관 없습니다. 나는 아버지와 다르니까요."

그 말이 매우 의미심장했다.

어쩌면 지그프리드가 처음으로 왕을 옹립하게 될 날이 올 지도 모르겠다고. 그런 생각이 든 칼리안의 입에 마음에 든다는 듯한 미소가 걸렸다.

* * *

화려했다.

마치 미리부터 준비했다는 듯 칼리안의 재킷 역시 짙은 잿빛이었다. 은으로 된 단추가 샹들리에의 빛을 받아 반짝였다. 짙푸른 색의 망토의 끝에는 은사로 테를 두르고 망토 여밈 장식에는 다이아몬드 펜던트가 흔들거리고 있었다.

변치 않는 다이아몬드.

이번에 처음으로 바꿔 단 저 장식은 신념을 지켜온 지그프리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니 완전한 동맹 선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귀족들은 그렇게 웅성거렸고 그것을 들은 키리에가 드러나지 않게 웃었다.

'매번 같은 것만 하시면 없어 보입니다.'

칼리안의 옷을 완전히 담당하게 된 메를린이 이렇게 말했다.

금고 사정 좋은 칼리안은 그 말을 잘 새겨 들었고, 없어 보이지 않을 것을 새로 구매했을 뿐이었다. 사실 몇 시간 전에 성사된 동맹이었으니 그런것을 따져가며 옷과 장신구를 준비할 시간도 없었다.

이렇게 칼리안을 잘 꾸며 놓은 메를린은 드레스를 갖춰 입고 다시 찾아온 드미레아에게도 무언가를 더 얹어주려 했었다. 물론 드미레아는 사양했다.

드미레아는 사람의 품위가 '그런 것'에서 나오지는 않는다는 말로 매우 화려하게 차려입은 칼리안을 웃게 만들었다. 칼리안도 처음 이 곳의 예복을 봤을때 똑같이 질색했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그런 과정을 거쳐 둘이 함께 입장을 했고 무도회가 진행되는 내내 함께 앉아 있었다.

슬레이만의 저택에 있는 내내 대련도 여러 번 하고 말도 많이 나눠 본 사이였으니 칼리안은 퍽 편안한 얼굴이 되어 이야기를 하고 웃기도 했다.

"두 분께서 꽤 잘 어울리십니다. 안그렇습니까?"

"지그프리드의 소공작이 이 곳까지 나설 줄은 몰랐군."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 웃으며 묻는 앨런의 말에,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앨런이 다시 웃었다.

앞에 앉은 에반 브리센 후작을 쳐다보면서.

아마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놀란 것은 에반일 것이다. 그런 에반이 영 마뜩찮은 얼굴을 하며 슬레이만에게 물었다.

"식성을 바꾸셨습니까."

코끼리가 왜 왕세자위 다툼에 끼어드냐는 말이었다.

상당히 공격적인 목소리였으나 슬레이만은 여유롭게 대답했다.

"칼 쓰는 사람 마음이 칼 잘 다루는 왕자에게 가는 것이 이상할 일인가?"

그리고는 르메인을 향해 자신의 목 근처를 보여줬다.

아주 희미하지만 상당히 긴 흉터가 남아 있었다. 칼리안의 검에 입은 상처의 흔적이었다.

"이것 보십시오. 전하의 아드님께서 이렇게 손이 험하지 뭡니까. 내가 아주 큰일을 당할 뻔 했습니다!"

모두가 웃는 가운데 오직 에반만 웃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에반은 일단 칼리안으로부터 시선을 떼기로 했다. 우선 란델부터 끌어내리고 칼리안과 지그프리드를 떨어뜨려 놓아야 되겠다고 그렇게 계획을 바꾸었다.

지금의 이 상황이 동생 좀 쉬라며 플란츠가 만들어 준 판이라는 것과, 이 일이 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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