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06화 (107/527)

제21장. 심연의 이면에 (2)

그날 저녁, 텐실의 사신단 대표가 르메인을 찾았다.

석찬에 들기 조금 전이었다. 르메인에게 별다른 일정이 없는 시간이었으니 아무리 갑작스러운 방문이라고는 해도 아예 만나주지 않을 만큼은 아니었다.

"돌아가십시오."

그러나 시종장 라울은 이렇게 말했다.

르메인은 사신단 대표와의 만남을 거절했다. 용무가 바쁘다는 이유였다.

거절의 의사를 전하는 라울의 얼굴에는 아무나가 아무때나 찾아와서 만나뵐 수 있는 분인 줄 알았느냐는 의미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이 순간 라울은 대륙 최강국 카이리스의 국왕 르메인을 보좌하는 대변인이었다. 텐실의 우방국인 카이리스의 국왕을 모시는 시종이 아니었다.

텐실의 사신단 대표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으나 다른 반박도 하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 본국의 갑작스러운 사정으로 신관들의 카이리스 체류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르메인의 얼굴을 보지도 못한 채 사과의 뜻을 전해달라는 말만 남기고 서둘러 왕궁에서 빠져나갔다.

여전히 석찬이 시작되기 전이었다.

그만큼 신속히 물러났다는 뜻이었다.

창가로 걸어간 르메인은 왕궁에서 나가는 텐실의 마차를 무표정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이 집무실만 1년 전으로 돌아간 것은 아닐까 싶을 만큼 지금 르메인의 분위기는 딱 작년 이맘때의 그를 생각나게 했다. 차갑고 무표정했다. 그런 상태로 딱 세 시간 전에 만나본 란델을 생각하고 있었다.

'특별한 이야기를 들은 바 없습니다.'

오후에 르메인의 집무실을 찾았던 란델은 신관들에 대해 묻는 르메인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태연한 얼굴로 그리 말했을 뿐이었다.

그 후 칼리안이 란델을 만났고 신관들이 왕궁을 빠져나갔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모른다면 르메인은 당장 왕위에서 물러나야 할 터였다. 저 신관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란델도 잘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아니 아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말이 되었다.

"란델의 표정이 잊혀지지가 않네."

그 말에 우두커니 소파에 앉아있던 앨런이 르메인을 쳐다봤다.

"어쩌다 란델이 그리 되었을까."

"전하 때문이지요."

언제든 빠지지 않는 앨런의 솔직한 대답에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르메인 역시 그것을 알았다. 때문에 르메인은 지금 스스로에게 굉장히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란델을 만난 직후 칼리안은 곧바로 아르피아 궁에 왔다.

그리고 그들의 정체가 신성 기사라는 것을 알렸다. 칼리안이 그 일을 앨런에게 먼저 알린 이유는 단 하나였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르메인을 보호해달라는 뜻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다시 르메인의 집무실에 들어앉아 있던 앨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는 엘린느의 아들을 만나보신 적 있습니까?"

"리베른의 국왕 말인가."

"네. 맞습니다."

엘린느 리베른을 떠나는 앨런에게 마차를 선물했던 리베른의 국왕이었다. 뜬금없는 말이었으나 앨런의 말은 항상 들을 가치가 있는 것이니 르메인은 그냥 얌전히 대답했다.

"리베른의 국왕은 만나본 적 있으나 왕자는 만나본 적이 없네."

"아주 인물도 그런 인물이 없습니다."

비아냥이 잔뜩 들어간 말. 진심으로 칭찬하는 말이 아니었다.

다만 여전히 그 의도를 알 수 없던 르메인은 그저 다음 말이 이어지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엘린느의 남편이었던 국서 테이안은 사형됐습니다."

"알고 있네."

테이안이 사형되었던 일은 국왕의 남편이 사형된 일이면서 대마법사 앨런 마나실이 깊이 연관된 일이기도 했다. 온 대륙에 소문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에 대해 설명하자면 이랬다.

엘린느가 앨런을 총애하는 것을 남녀간의 문제로 오해한 테이안이 앨런을 독살하려 시도했다. 무력으로는 죽일 수가 없으니 독을 고른 것이다. 그러나 우연한 일로 앨런이 아닌 앨런의 아들이 죽었다. 사건의 배후에 테이안이 있는 것을 안 엘린느는 곧바로 테이안을 사형에 처했다.

"그 때부터 엘린느의 아들이 꽤 많이 엇나갔지요."

그 때의 일을 생각하다가 잊고 살던 아들이 어쩔 수 없이 떠올랐다. 때문에 앨런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한참 뒤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 놈을 엘린느가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그것까지는 나도 모르는 일이네."

"제 며느리 레이첼의 집을 한 달 동안 청소하도록 시켰습니다."

"청소라니."

리베른에는 다른 왕자나 공주도 없었다.

하나뿐인 왕자에게 하인들이 하는 일을 한 달이나 시켰다는 것이다.

"테이안 때문에 죽은 이의 집에 직접 가서, 테이안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깨우치게 했습니다. 제 아비가 억울하게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 뒤로는 얌전히 지내더군요."

"그런 일이 있었나."

"데블란이 아무리 손이 과했어도 제 자식에게 관심은 가졌습니다. 그러니 란델 왕자가 그렇게 속 시커먼 놈이 된 것은 전하의 잘못이 맞을 겁니다. 그것은 전하께서 반성하실 일이 맞지요."

르메인이 자책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 잘못이라 생각해서 란델을 탓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그렇게 또 한번 르메인의 속내를 꿰뚫어 본 앨런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잘못은 잘못이니 그에 대한 벌은 주셔야 합니다. 증거가 없어 처벌을 못할 뿐이지 부모로서 자식에게 벌을 내리는 것은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여전히 르메인은 앨런에게 배울 것이 많았다.

도무지 왕자의 스승인지 왕의 스승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저 마법사를 보며 르메인이 피식 웃었다.

곧 르메인은 시종장 라울을 불러와 란델에게 몇 가지 말을 전하도록 시켰다. 함부로 타국의 기사를 들여와 왕실의 안전을 위협한 것에 대해 반성할 시간을 가지라는 내용이었다.

* * *

결핍.

부족한 것. 처음부터 없었던 것.

혹은 어느새 잃어버려 사라진 것.

"레이븐은 발목에 티가 있습니다. 내 고양이는 이름이 없고."

칼리안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수련장 밖 잔디밭에 털썩 앉은 채였다.

붉은 장미가 아름답게 피어나는 이 계절에 어울리지도 않을 가을 바람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키리에는 눈 색이 다르고 히나는 말을 못해요."

참 뜬금없는 말이었기 때문에 플란츠는 내 아우님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건지 모르겠다는 얼굴이 됐다. 하지만 칼리안은 계속 말을 이을 뿐이었다.

"얀은······ 얀이고."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다 세어보기 너무 어려운 얀의 이름을 꺼내면서 칼리안은 잠시 웃었다.

플란츠의 얼굴에는 짜증이 섞였다. 체이스의 한탄을 듣고 오자마자 칼리안의 한탄을 듣고 있었으니까.

칼리안은 아직 란델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애초에 뭘 말하자고 만난 것도 아니었다.

란델을 만난 후 아르피아 궁에 들렀다 온 칼리안.

체이스를 만나서 아주 사이 좋게 세뉴 관을 다섯 바퀴쯤 같이 돌아 주고 온 플란츠.

그렇게 칼리안은 칼리안대로 플란츠는 플란츠대로 수련장을 찾아왔고 마주쳤을 뿐이었다.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키리에가 있어서.'

수련장은 넓었고 키리에는 어차피 언제나 있었다. 때문에 오늘따라 왜 그러는지를 묻는 눈으로 쳐다보니 칼리안이 다시 설명했다.

'오늘은 간섭하면 안 될 상태 같습니다.'

칼리안은 딱 그렇게만 말했다. 무엇을 간섭하면 안 된다는 것인지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수련장 앞에 앉아서는 밑도끝도 없이 우울한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아무튼 들어가지 말라 하는데 굳이 들어갈 수도 없었고 칼리안의 입은 이미 열렸다. 그러니 또 어쩌겠나. 들어줘야지.

"제 스승님은 아들을, 그리고 전하께서는 더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심지어 그분은 막내 아들을 이미 잃었다는 것도 모르십니다.

흔들 흔들.

말을 삼키고 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움직이던 칼리안은 맞은편에 앉아있던 원수같은 형을 잠시 쳐다봤다.

"게다가······ 아무것도 가져본 적 없어서 잃어버린 것도 없을 내 형님은. 아마도 여전히, 불행하시고."

"······ 내 아우님이 미치셨나."

새로 베인 상처보다 엊그제 생긴 멍이 더 아프다.

칼리안의 말이 딱 그랬다.

딱 그만큼 아픈 말로 플란츠를 꾹꾹 눌렀다.

"그리고 저는 온 생을 잃었으니."

남의 상처 눌러놓더니 제 상처를 헤집는다. 더 이상 다른 말도 할 수 없도록 만들어버린 것이다. 치사하기가 이를 데 없다.

독 처먹던 놈이 이번에는 또 뭘 처먹고 이런 소리를 하고 있는지. 플란츠가 짜증 가득한 얼굴을 했다. 칼리안이 실소하며 다시 말했다.

"그렇잖습니까. 왕궁 어디에도 온전한 놈 하나 없는데."

그러더니 손가락 끝으로 등 뒤의 체르밀 궁을 가리켜 보였다.

"저 분은 무엇이 그토록 억울해서 홀로 그리 되셨을까."

뒤에 있을 것이라고는 체르밀 궁 뿐이었으니 플란츠는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지금 칼리안이 누구를 이야기하려 하는지 알아들었다.

"왜 그것이 궁금한지 모르겠지만. 안쓰럽기도 하고 화도 나고. 그냥 그런 겁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데."

"아. 제가 아직 설명을 안 드렸습니까."

"안했어."

칼리안이 란델을 만났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니 플란츠는 그냥 적당히 안좋은 일이 있었겠거니 하고 있었다.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어 조금 전 있던 일을 설명했다.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표정이 굳어지던 플란츠는 란델이 알 수 없는 힘으로 장미를 말라죽게 했다는 말을 들은 뒤 완전히 날카로운 눈이 되어 있었다.

란델과의 일을 모두 전한 칼리안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냥 형님께서 카밀론 가시겠습니까. 조금 무서운데."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말.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올린 플란츠가 대답했다.

"싫어."

"왜 싫으십니까. 이제는 달라졌을텐데."

플란츠를 마음대로 휘두를 실리케가 없음에도 굳이 왜 왕이 되기 싫은지.

플란츠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왕궁 안을 둘러봤다.

고요하고 적막했다. 숨이 막혔다.

곧 칼리안을 향해 고개를 돌린 플란츠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살고싶어서."

잠시 말 없이 그런 플란츠를 응시하던 칼리안이 작은 소리로 웃었다.

플란츠가 살고 싶단다.

이보다 더 기꺼운 말이 어디 있을까.

* * *

- 란델 왕자가 귀족들과의 석찬에서 멋대로 자리를 비운 것에 대한 벌로 3개월간 체르밀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궁 밖에는 적당한 이유를 담은 이런 소식이 전해졌다.

사실 체르밀에 갇히게 된 이유는 텐실의 신성 기사 때문이었으나 그것을 외부에 알릴 수는 없었으니까.

때문에 귀족들 사이에서는 고작 석찬에서 자리를 비운 것 때문에 내린 벌이라 하기에는 조금 과한 벌이 아닌가 하는 술렁거림이 잠시 있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주목되지는 않았다.

축제 마지막 날 마지막 일정인 무도회에서 칼리안이 또 일을 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이번에도 칼리안이 플란츠와 함께 들어올 것인지를 주목했다. 정말로 둘이 손을 잡은 것이 맞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보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문이 열리며 칼리안의 입장을 알리는 기사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와 함께 귀족들의 시선이 칼리안에게로 쏠렸다. 그리고 모두가 입을 벌렸다.

모두의 기대에 부응하겠다는 듯, 칼리안은 혼자 입장하지 않았다.

"칼리안 레인 카이리스 왕자님과······."

그런데 그 옆에 있는 것은 플란츠가 아니었다.

당연하겠지만 앨런 마나실도 아니었다.

그것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거물 중의 거물이었다.

"드미레아 지그프리드 소공작님입니다."

브론즈 색 곱슬머리를 곱게 땋아 올린, 그리고 장식 없는 잿빛 드레스를 입은 드미레아가 칼리안의 옆에 있었다.

그것은 정혼의 의미 따위가 아니었다.

드미레아는 그 이상의 힘을 지닌 인물이니까.

칼리안.

3왕자 칼리안이 지그프리드를 등에 업었음을 선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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