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장. 심연의 이면에 (1)
칼리안이 란델을 만나기 조금 전.
플란츠는 살짝 인상을 찌푸린 채 자신을 막아선 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 아우님의 잘난 형님께서 또 무슨 일로."
체이스는 쓴 것을 삼킨 듯한 얼굴로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체이스는 혼자였다.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항상 함께 다니던 테일란이라는 기사는 보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다른 기사들이나 수행원들도 곁에 두지 않은 채였다. 그리고는 마치 플란츠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플란츠의 앞에 나선 것이다.
"플란츠 왕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왜."
"물을 것도 있고, 얘기도 좀 할까 해서요."
"혼자 온 것 같은데."
"네. 몰래 나온 길입니다. 호위는 귀찮아서."
귀찮아서라니.
카이리스를 정말 무르게 보았음이 틀림없다.
저러다 르메인이 마음을 바꿔먹고 볼모로 삼든 아니면 란델이 숨겨둔 것들이 공격이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찰나의 순간에 떠오른 이런 생각에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누가 누굴 걱정한다고.'
방금 전 칼리안이 플란츠를 왕궁 앞까지 데려다 놓고 다시 나갔지 않은가. 모르긴 몰라도 혼자 있을 때 위험하기로는 이 카이리시스에 플란츠만한 이가 없을 터였다.
아무튼 체이스는 더 없이 차분한 얼굴을 한 채로 말 위의 플란츠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플란츠는 몰랐지만 아마 앨런이 이 모습을 보았다면 꽤나 감탄했을 것이다. 처음 앨런이 칼리안을 만났던 날 말 위의 앨런을 쳐다보던 칼리안이 딱 같은 표정이었으니까.
- 일단 내려라. 얘기 좀 하게.
이런 표정 말이다.
물론 저 모습이 칼리안과 그리도 닮았음을 알았든 아니든 플란츠의 기분은 그리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 터였다.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을 또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기분이 매우 나빴기 때문이다.
"발칸을 두고 참견하더니. 아직 할 말이 남으셨는지."
예의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을 이런 말을 툭 내보낸 플란츠가 가벼운 놀림으로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어차피 플란츠의 언사가 어떤지는 전날에 이미 많이 겪은 터였다. 그러니 이 정도 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체이스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이름이 세뉴 관 맞습니까. 걷기 좋은 곳이 있던데."
"맞아."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플란츠가 마뜩치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냥 이 곳에서 말하면 안되는지를 묻고 싶어하는 것이 그 얼굴에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 다각 다각.
그러나 마치 그 생각에 대한 대답을 하는 듯 왕궁으로 들어오는 한 대의 마차가 보였다.
이렇게 마차며 말이며 끊임없이 드나드는 길 한복판에서 세크리티아의 왕세자와 카이리스의 2왕자가 말싸움이나 할 수가 없는 일이 아닌가.
게다가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칼리안이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플란츠는 굳이 그런 곳에 왜 하필 당신과 가야 하는지를 묻는 대신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던지."
그리고는 주변에 보이는 기사 한 명에게 말 고삐를 넘기고는 저벅 저벅 앞서 걷기 시작했다.
걷는 내내 체이스는 말이 없었다.
물론 플란츠 역시 마찬가지였다.
중간 중간 플란츠를 만난 이들이 예를 보이고는 서둘러 멀어졌다. 요즘이야 조용하지만 혹시라도 플란츠의 심기가 꼬여 있을까 걱정한 탓이다. 그것을 본 체이스가 조용히 웃었고 플란츠는 못들은 척 했다.
곧 둘은 나란히 세뉴 관의 산책로에 들어섰다.
이제 조금씩 울창해지기 시작하는 나무 사이에 발을 디딘 플란츠와 체이스의 입이 또 동시에 열렸다.
"그래서."
"한 가지."
쯧 하고 혀를 찬 플란츠가 체이스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먼저 말하라는 뜻이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플란츠는 고개를 끄덕였고 체이스가 말을 이었다.
"칼리안 왕자, 이틀 전에는 오러가 보였는데 어제는 보이지 않았다고. 카스트린 경으로부터 그런 말을 들었는데 혹시 알고 있는 바가 있습니까. 문제가 있어 그런 것인지 걱정이 되어서."
"걱정하는 것을 보니."
피식 웃으며 입을 연 플란츠가 말을 멈췄다.
걱정이 되어 카이리스까지 오고 걱정이 되어 언제 올지도 모를 나를 계속 기다리고. 그런 것을 보니 아주 둘도 없는 형제였나보다고. 그렇게 말하려다 말았다.
그리고 그냥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마법. 내 아우님 검술이 얼마나 모자란지 알면 안 될 사람이 있어서."
"브리센 후작 말입니까."
"그래."
도대체가 세크리티아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맞기는 한 건지. 모르는 것이 없다.
아무래도 체이스가 가고 나면 나서서 새부터 좀 잡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브리센 후작에게 숨겨야 해서 카스트린 경이 있음에도 오러를 감췄다는 말인데. 오히려 카스트린 경 쪽을 경계해야······."
"당신 쪽은 경계 할 필요 없으니까."
체이스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칼리안이 자신의 앞에서도 오러를 숨기고 있었던 것이 어떤 사고의 결과인지를 알게 됐다.
곧 체이스가 플란츠를 쳐다봤다.
차마 말을 꺼내질 못하고 있는 것이 훤했다. 지금 무슨 말이 목구멍을 치받고 있는지 아주 잘 알아들은 플란츠가 짜증 가득한 소리를 냈다.
"내 아우님도 안다고."
체이스의 발이 멈췄다.
답답함을 참지 못한 플란츠가 계속 말을 이었다.
"내 아우님의 형님께서 내 아우님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것을 내 아우님도 알고 있다고. 아는데 티를 안내는 거라고, 내 동생이."
칼리안이 나한테는 그 말을 한 줄 아냐고.
나도 그냥 눈치 챈 것을 너는 왜 모르냐고.
그보다도 내가 왜 이런 말이나 하고 있냐고.
그냥 둘이 만나면 안되냐고.
도대체 나한테 이게 무슨 짓이냐고.
라고 화를 내는 대신 플란츠는 그냥 세뉴 관을 다 돌도록 말 없이 체이스 옆에서 저벅 저벅 발을 옮겼다.
무슨 말을 하겠느냔 말이다.
저딴 얼굴을 하고 있는데.
* * *
베른이 이제 막 열 살이 되었을 때.
세크리티아의 국왕 데블란이 두 아들을 데리고 바다에 나갔었다. 그리고는 광막한 그 바다 한가운데에 베른을 집어던졌다.
후궁의 아들인 체이스가 왕비의 아들인 베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확인할 겸 '이제 다 큰' 베른에게 국왕인 자신에 대한 두려움도 심어줄 겸 해서 벌인 일이었다.
체이스와 모래성이나 쌓고 놀았던 것이 겪어 본 바다의 전부였던 베른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 깊은 바다에 그대로 잠겨들어갔다. 그것을 본 체이스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베른을 붙들러 뛰어든 뒤 같이 빠졌다. 체이스도 수영을 못했으니까.
결국 기사 테일란이 둘을 모두 건져내왔고 그 후로 베른은 데블란을 일생일대의 원수처럼 여기며 살았다.
자신을 물에 빠뜨려서가 아니었다.
데블란 때문에 체이스가 죽을 뻔했던 탓이었다.
아무튼 칼리안이 그 일을 이렇게 갑자기 떠올린 이유는 바로 란델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란델의 저 눈 때문이었다.
칼리안의 불 같은 눈이 란델의 물 같은 눈을 바라봤고, 란델이 흐트러짐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
란델의 눈은 그 날의 바닷속과도 같았다.
바라보고 있으면 한없이 잠식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종내에는 간신히 이어 온 실낱같은 숨결조차 놓아버려야 하는 그 마지막 순간을 느끼게 하곤 했다.
그런 란델의 눈에 칼리안이 비춰졌다.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것조차 버거워하던 어린 아이가 깊고 깊은 곳에 숨겨둔 란델의 이면을 찾아 기어코 내려오고 있었다. 어느새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서는 이제는 오히려 란델의 숨통을 옥죄려 하고 있었다.
"항상 궁금하였다."
그렇게 말한 란델이 짧은 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시선에 맞닿아 있는 칼리안의 살기 때문이다. 살의가 아닌 그 어떤 감정도 들어있지 않은 붉은 눈이 란델의 심연을 끊임없이 헤집어놓고 있었으니까.
"네가 어떻게 이리 변했을까."
"덕분입니다."
칼리안은 거짓말을 잘 하지 못했다.
지금의 대답 역시 거짓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오로지 란델 하나만을 향하고 있는 칼리안의 살기 역시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지금 무슨 짓을 한 것인지는 아시는 겁니까. 텐실의 신성 기사를, 타국의 군대를 왕궁 안에 들이셨습니다."
란델은 웃었다.
비웃음이나 악의에 찬 웃음이 아니었다. 살기를 잊기 위해 지어보이는 억지 웃음도 아니었다.
완벽할만큼 무의미한 웃음이었다.
그 웃음을 본 칼리안은 순간적으로 란델을 베어버릴 뻔 했다. 칼리안으로 살겠다 다짐하지 않았었다면, 때문에 란델이 제 핏줄임을 끊임없이 되뇌고 있지 않았다면 이성적인 판단은 완전히 잊어버린 채 그대로 검을 들었을 것이다.
어떻게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까지 무감정한 얼굴을 한단 말인가.
"알고 있다."
그 날의 바다를 생각했던 칼리안은 이제 풀내음 가득했던 날의 시스파니안을 떠올리고 있었다. 지금 란델은 칼리안의 기억을 되짚어 본 이후의 시스파니안과 아주 많이 닮아 있었다. 아무런 감정 없이 칼리안과 베른에 대한 모든 것을 '이해'했다 말하던 바로 그 모습 말이다.
시스파니안은 그녀의 반려였던 하츠아라에게 '인간적인' 많은 것들을 배웠다. 그러나 하츠아라의 죽음과 함께 그에게 배운 것들도 잃어버렸다 했다.
칼리안도 잃은 것이 참 많았는데.
- 당신 역시 잃은 것 때문에 그리 되었을까.
그런 잡스러운 생각이 잠시 들었다.
어찌됐건 왕궁에 제 검을 들인 것이 무슨 짓인지 안다 하니 칼리안은 상념을 버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물리십시오. 제가 가기 전에."
"간다면,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더냐."
"말씀 드렸는데요. 전부 죽여버릴 수 있다고."
경고였다.
사실 그것은 경고일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란델은 그에 대해 '모르는' 것으로 되어 있을 터였다. 신분 상으로 저들은 엄연히 신관이다.
저들 중 한 명의 기사는 '말콤 체티쉬'라는 이름의 신분 증명서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무기를 들고 왕궁에 들지도 않았으리라.
"네가 정말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지는 않는구나. 증거도 없으니."
"제가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겪어 보시던가요."
"네 마법사들과 목적이 같다. 그러니 너와 전하께 해가 될 이들이 아니니라."
"브리센을 견제하기 위해 들여온 이들이니 그냥 모르는 척 두라는 말씀이십니까."
칼리안의 입에서 한기가 잔뜩 맺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목적이 같다 해서 텐실의 기사들을 발칸과 같은 것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백 번을 양보해서 란델 형님의 말이 진실이라 해도, 브리센을 치기 위해 텐실의 기사를 들인다니. 묵인할 수 있을 일이 아닙니다. 그리 떳떳하시면 숨겨오지 말고 당당히 들이십시오. 제대로 된 명분을 가지고, 제대로 된 방법으로."
발칸은 칼리안이 목숨을 걸고 기회를 얻어 만든 군대였다. 르메인의 허락 아래 정당하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브리센 변경백은 이미 돌아가고 있을 겁니다. 만약 그 쪽을 먼저 없애 둘 생각이셨다면 그 역시 늦었습니다."
그레이 브리센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되자 란델이 다시 한번 칼리안을 쳐다봤다. 이번에도 칼리안은 란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칼리안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숨긴 것이 무엇인지 이제 완전히 알게 되었다.
"브리센 변경백을 카이리시스로 불러내어 변경백령도 비우고 저와 플란츠 형님의 눈도 속일 심산이셨습니까. 그 사이, 텐실의 신성 기사들이 변경백령을 치도록 하기 위해서요."
신성 기사 서른 명이면 주인 없는 변경백령의 기사들은 그리 어려운 상대가 아닐 터였다.
그 후 소식을 들은 그레이가 변경백령으로 돌아오면 그레이도 없앤다. 변경백령의 기사들을 상대한 서른 명 중 스무 명의 신성 기사만 살아남아 있더라도 그레이 정도는 상대할 수 있을테니까.
만약 그레이까지 처치하지 못해도 변경백의 병력을 없앤 것만으로도 브리센에는 꽤 큰 피해를 줄 테니 첫 시도로 그 정도면 충분하다 여겼으리라. 이후에 텐실로부터 군사를 더 지원받아 그것으로 브리센과 전면전을 벌일 예정이었는지 혹은 발칸의 힘을 빌리려 했는지까지는 칼리안도 알 수 없었다.
뭐가됐건 텐실의 기사들이 카이리스에 들어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니 지금 막아야 했다.
"둘째를 염두에 두었는데. 네가 알아낸 것은 의외로구나."
"플란츠 형님만 눈과 귀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플란츠 형님만 속여서 해결 될 일도 아니고요."
"네가 막을 줄도 몰랐고."
"모르셨다니 유감입니다."
칼리안이 모를 것이라 여겼거나.
알아도 막지 않을 것이라 여겼거나.
"기사들은 돌려 보내마. 대신."
란델이 다시 한 번 웃었다.
그리고 칼리안을 쳐다봤다.
그렇게 말한 란델이 조용히 손을 뻗어 장미 덩굴을 살폈다. 그리고는 유난히 비죽이 자라 있던 장미 가지 하나를 꺾어 들었다. 이제 막 피기 시작한 장미 한 송이가 란델의 손에 들렸다.
불안한 기운이 감돌았다.
"너무 그리 자라지도, 벗어나지도 말거라."
칼리안의 눈이 가늘어졌고 란델의 손이 잠시 붉게 빛났다. 그리고 장미는, 언젠가 칼리안의 손에서 사라졌던 그 모습처럼.
- 파스스······.
생명을 잃고 검게 말라가다
불에 타고 남은 재와 같은 모습으로 부서지며 흩어졌다.
항상 평온한 란델의 목소리가 칼리안을 향했다.
"보기에 좋지 않으니."
칼리안은 흩어져 사라져가는 마른 장미를 말 없이 지켜봤다. 그것이 모두 사라지도록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그 뒤에는 다시 란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란델은 지금 그리 말하고 있었다.
왕이 될 자신의 뒤를 받쳐 줄 쓸모 있는 능력 좋은 동생 노릇. 그런 노릇이나 하고 살라고. 그렇게 하면 살려주겠다고.
칼리안의 붉은 입이 긴 호선을 그렸다.
"카밀론 가서 개 키울 겁니다."
란델의 말은 절대 안 듣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