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04화 (105/527)

제20장. 이번에는 (6)

아무래도 이번 생애 르메인의 사인은 심장 쇠약이 아닐까.

시스파니안의 축복이 있다 해도 이쯤 되면 르메인의 심장에 뭐가됐든 문제가 하나 쯤은 생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때문에 앨런은 매우 재밌는 구경거리 하나를 찾았다는 표정으로 딸기 파이 한 조각을 집어 먹었다.

그것을 본 르메인이 불만어린 소리를 냈다.

"지금 먹을 것이 입에 들어가는가."

"들어갑니다."

앨런은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단 것 싫어하는 르메인의 집무실에 항상 설탕 가득한 간식이 준비되어 있는 것은 시시 때때로 찾아와서는 달달한 것만 골라 먹는 한 마법사 때문이었다. 그러니 올 때마다 열심히 집어먹어 주는 것이 그 마법사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아무튼 이런 앨런의 태평한 마음과는 달리 르메인의 심기는 오늘도 편치 않았다. 그것을 본 앨런이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이래서야 탄신일 기념 축제의 주인공이 맞을까 싶을 지경입니다. 얼굴이 또 왜 그렇게 곯아 있습니까."

"셋 중 둘이 또 밖으로 나갔다는데 마음이 편하겠나."

조금 전 라울이 전해주고 나간 소식 때문이었다.

플란츠와 칼리안이 수행원도 없이 달랑 둘이서 말을 타고 나갔다.

맛있다는 듯 감탄한 눈으로 남은 파이 조각을 쳐다보던 앨런은 마치 이 파이 어디서 샀냐고 묻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브리센 후작이 그렇게 생각이 짧지는 않으니 왕자님들께서 어디 한 군데씩 잃어버리고 올 일은 없을 겁니다. 걱정 마시지요."

"어디 한 군데를 잃어버린다니. 정말 그 입을 어찌해야 하는지 모르겠군."

"그냥 두시면 됩니다. 두 아드님도 그냥 두십시오."

지금 앨런은 르메인이 무엇을 걱정하는지에 대해서 잘못 짚었다. 때문에 르메인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아니.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 쪽이 아니네."

둘째는 검을 곧잘 다뤘다.

셋째는 아마 대사막에 던져놔도 괜찮을 것이다.

그러니 르메인이 걱정하는 것은 두 아들의 안전이 아니었다.

"걱정하는 건 브리센 후작 쪽이네."

성격 사나운 둘째는 일단 차치하더라도 셋째가 좀.

특히 브리센을 앞에 둔 셋째는 좀 그랬다.

"브리센만 만났다 하면 뭐든 하나는 부숴놓던 칼리안이 직접 에반을 만나러 갔다 하니 어찌 걱정이 안되겠는가?"

"아직 싸울 때가 아닌 것은 서로가 더 잘 알고 있을 테니 핑계 그만 대시고 이리 와서 앉으시지요."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앨런이 부드럽게 웃으며 앞에 놓인 체스 판을 가리켜 보였다. 란델에 대한 일로 르메인의 시름이 하도 깊어 보였던 탓에 앨런이 한 판 두자 해서 시작했던 것이었다.

그러던 중 시종장 라울이 왕자들의 소식을 전해주고 갔다.

그리고 르메인은 그 말을 듣기가 무섭게 창가로 걸어가 한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두 수만 더 두면 앨런의 승리인 상태였다.

설마 르메인이 그런 이유로 앨런의 앞에 오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르메인은 그럴 인사가 아니지 않은가. 핑계를 댄다 말하면서도 앨런은 그렇게 믿었다.

"곧 란델 왕자님이 도착하실 터이니······."

- 똑똑.

앨런의 말을 자르는 노크 소리와 함께 때마침 란델이 도착했다는 라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에 르메인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란델을 바로 들이라 말했다. 그리고는 앨런을 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 1왕자가 왔으니 아쉽지만 다음에 다시 둬야 되겠군."

그렇게 말하는 르메인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어린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앨런의 착각일 것이다.

설마 아무리 그래도 르메인이 아닌가.

* * *

- 다각 다각.

고아한 자태를 뽐내는 은백색 말과 세상 천지 나보다 높은 사람이라고는 오직 칼리안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한 검은 말이 에반 브리센 후작의 저택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에반과 칼리안이 다시 만났다.

물론 에반 역시 두 왕자가 어제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들었다. 둘의 동맹은 사전에 플란츠가 에반에게 알리지 않은 일이었다. 때문에 당혹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칼리안이 아무런 예고도 하지 않은 채 이렇게 에반을 찾아 온 것이다.

미리 얘기하고 오지 그랬느냐 만나서 반갑다 뭐 이런 인사는 이미 필요하지 않은 사이였다. 따라서 에반은 가장 먼저 이렇게 물었다.

"3왕자께서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에반이 플란츠와 손을 잡기 전 왕궁에서 칼리안을 마주쳤을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그 당시 칼리안이 에반을 상대하며 보여주었던 호의적이지 않은 모습과 에반의 도박장을 칼리안이 없애버렸던 일에 대한 앙금 때문이었다.

아무리 란델의 눈에 띄려 온 길이라고는 해도 목적 자체가 없는 걸음은 아니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곧바로 입을 열어 찾아온 이유를 알렸다.

"어제 석찬에도 들지 않고 그냥 돌아오신 듯 하던데, 맞습니까."

"3왕자님께 허락을 받았어야 할 일입니까?"

에반은 내가 돌아오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는 듯한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물었다.

칼리안이 살짝 웃으며 고개를 돌려 플란츠를 봤다.

생각 깊은 플란츠는 이 자리에서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아주 잘 알았다. 따라서 지금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말 한마디 없이 창 밖만 쳐다보고 있었다.

칼리안이 다시 에반에게 시선을 두며 대답했다.

"어제 중앙 귀족 모임이 끝나자마자 왕궁을 나갔다 들었습니다."

어제의 석찬에 슬레이만과 에반이 모두 참석하지 않아 르메인이 잠시 외롭게 앉아있지 않았던가.

"그렇습니다. 허나 그 일은 이미 왕궁에도 알렸던 일이니 그에 대해 제가 3왕자님께 더 말씀을 드릴 내용이 없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무엇이 이상하다는 말씀이십니까."

"어제 일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았을 텐데 그렇게 서둘러 돌아간 것 말입니다."

에반은 대답 없이 칼리안을 쳐다봤고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어제 중앙 귀족과의 자리에서 내가 중간에 나갔습니다. 다른 귀족은 몰라도 후작은 그 이유를 알고자 해야 맞지 않겠습니까. 나와 란델 형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아야 하는 입장이니. 그런데 귀가를 했다 하여 그것을 조금 생소하다 여기고 있습니다. 검의 길에 오른 분께서 섣불리 아플 것도 없을 텐데."

"고작 그것이 궁금하여 이렇게 굳이 왕궁까지 나와 물으시는 겁니까."

"고작 그것이었으면 이렇게 안 나왔습니다."

계속 얘기해보라는 듯 에반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칼리안의 말이 계속됐다.

"어제 석찬에서 내가 플란츠 형님과의 동맹을 알렸음에도 이렇게 집 안에 꼼짝을 않고 있으니. 궁금해 할 수밖에요"

아르센은 에반의 집에 특별히 사람이 드나들지 않았다고 했다.

에반은 소식의 중요성을 잘 아는 이였다.

도박장의 일이 터졌을 때만 해도 에반에게 곧바로 보고가 가지 않았던가. 그러니 밤새도록 상황을 확인해보려 이리저리 분주해도 모자랄텐데 에반이 지나치리만치 조용했던 것이다.

칼리안의 붉은 눈이 날카로운 빛을 머금었다.

"시기 적절하게 란델 형님께서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을 수도로 불렀다는 이 시기에, 꼭 집을 비우기 힘든 사람처럼 꼼짝없이 집안에 들어와 있는지. 왜 그것이 내 눈에는······. 집을 오래 비워두기 어려울 일이 있어서 일단 돌아왔고 내 속내를 궁금해하기 어려울 만큼 큰 것을 숨겨뒀다는 듯이 보이는지."

"그것은."

"그래서 와봤습니다. 이렇게 굳이."

에반은 입을 다물었다.

칼리안은 한 모금 마신 차를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그레이 브리센, 돌려보내요. 숨겨두지 말고."

"무슨 말씀이신지 모를 말만 하고 계시는군요."

에반은 아무런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마치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듯한 얼굴이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자신의 생각이 맞음을 확신했다.

"란델 형님이 불러서 온 사람을 설득시켜 옆에 붙여놔 봐야 후작에게 도움 될 것 없습니다."

에반이 다른 말 없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것이 칼리안에게는 긍정으로 보였다.

칼리안은 이 집에 들어오는 내내 그레이의 오러를 느끼지 못했다. 단전을 회복하지 못했다는 소리였다. 물론 그 사실을 모를 에반은 그레이의 무력이 강해졌다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그러니 반나절 이상 집을 비우지도 못했던 것이다. 혹시라도 그레이가 다른 마음을 먹을까봐. 브리센이란 항상 그래오던 가문이 아니던가.

잠시 에반에게 생각할 시간을 준 칼리안은 의미심장한 얼굴로 에반의 눈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부러진 허리 나았다 해서 예전만한 실력이 나오지도 않을 텐데요. 나올 실력이나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말을 들은 에반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칼리안의 말을 들으면서도 계속 창 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던 플란츠도 고개를 돌렸다.

칼리안이 어투가 좋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에반이 낮은 음색으로 말했다.

"허리가 부러졌다는 것은 알리지 않았습니다. 변경백의 상태는 '재기가 불가할 만큼의 큰 부상'이라고만 알렸을 뿐 정확히 어디를 어떻게 다쳤는지에 대해서까지는 이야기를 전한 바 없는데 그것을 어찌 아십니까."

"알고 있을 수밖에요."

- 달칵.

별 것 아니라는 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다시 한 번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놨다. 그리고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했으니까."

태연하게 꺼내놓는 저 말에 에반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그리고 플란츠는 한 쪽 입꼬리를 올리며 다시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칼리안이 이것을 알린 이유는 단순했다. 칼리안의 무력 수준을 모르고 있는 에반이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도록 다시 한 번 묶어두기 위함이었다. 란델과 칼리안이 서로 힘겨루기를 할 때 혹시라도 란델 쪽으로 발을 올리면 곤란해질 테니 말이다.

물론 에반이 그 일에 대해 달리 화를 내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지금의 에반에게 그레이는 자식이기 이전에 호시탐탐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새끼 그리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에반은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고르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굳이 기다려서 그 말을 들을 필요는 없었으니 칼리안은 질책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란델 형님이 무엇을 노리고 변경백을 불렀는지도 모르면서 뭘 믿고 옆에 두려 합니까."

그렇게 제 말만 다 꺼내놓은 칼리안은 할 말 끝났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여전히 앉아 있는 에반을 내려다보며 마지막 말을 전했다.

"변경백령 비워두지 말고 당장 보내요."

* * *

에반의 집에서 나온 칼리안은 레이븐의 위에 앉아 눈을 내리 뜬 채 단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왕궁까지는 레이븐이 알아서 찾아갈 수 있었고 플란츠는 굳이 생각에 빠진 칼리안에게 먼저 말을 걸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따라서 칼리안은 그 상태 그대로 왕궁 입구까지 돌아올 수 있었다.

입구에서 레이븐을 멈춘 칼리안은 그제야 비로소 플란츠를 쳐다보며 말했다.

"저는 세이렌 경을 좀 만나고 가겠습니다. 형님 먼저 들어가십시오."

마법 학원은 지금 온 길을 어느정도 되돌아가야 있었다. 그러니 차라리 에반의 저택에서 각자 헤어졌다면 조금 더 빨리 도착할 수 있었을 터였다.

그럼에도 굳이 왕궁 앞을 왔다 돌아가는 것은 칼리안 나름대로 플란츠의 호위를 보아 준 셈이었다.

그것을 왜 모르겠느냐만 플란츠는 그냥 아무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왕궁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플란츠의 뒤로 다각 다각 하며 레이븐이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플란츠는 말을 멈춘 채 조금 전 칼리안의 이야기를 되새겼다.

'내가 했으니까.'

"하."

곧 짧은 웃음과도 같은 소리가 플란츠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어차피 얼굴도 모르는 그레이의 허리를 누가 부러뜨렸든 플란츠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웃은 이유는 그런 말을 에반의 앞에서 서슴없이 꺼내드는 무모하기까지 한 자신감과 싹퉁머리가 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참 대단한 아우님을 두게 됐군."

이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앞으로 걸어가던 플란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말을 멈춰 세웠다. 누군가 그 앞에서 인사를 건네온 까닭이다.

"다시 보는군요, 플란츠 왕자."

이 넓은 왕궁에서 매일 한 번씩은 맞닥뜨리니.

우연에 우연도 이런 악연이 있나.

참으로 대단한 아우님과 꼭 빼닮은 웃음을 짓는 옆 나라 왕세자의 모습에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 * *

과거의 형님과 지금의 형님이 또 만났다는 것은 꿈에도 모를 칼리안은 잠시 에우리아를 만나 말을 전한 뒤 왕궁으로 돌아왔다.

밤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있으니 수련장에 갈 생각이었다.

마법이나 검술이나 요 며칠 제대로 훈련을 하지 못했던데다 조용한 방 안에 혼자 있으면 떠올리지 말아야 할 기억에 다시 잠겨들 수 밖에 없을 테니까.

그런 계획을 세우며 체르밀 궁 앞에 도착한 칼리안이 레이븐에서 내려섰다. 그리고 체르밀의 시종에게 레이븐의 고삐를 넘긴 뒤 돌아섰다.

그와 동시에 칼리안의 얼굴에 긴 미소가 드리워졌다.

인공 호수 쪽에 선 채 칼리안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던 깊고도 깊은 푸른 색의 눈을 보았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란델을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란델 쪽에서 칼리안을 기다리고 있던 듯 했다. 덕분에 5층까지 벽을 타고 올라갈 수고가 줄어든 셈이다.

"마음이 급하셨군."

조용히 중얼거린 칼리안은 서두르지 않는 걸음으로 란델의 앞까지 걸어가 예를 취했다.

란델은 고개만 끄덕여보인 뒤 앞서 걸었다. 다른 말은 하지 않았으나 산책이나 다시 하자는 의미인 것은 분명했으니 칼리안은 사양하지 않고 뒤를 따랐다.

호수 가운데 시스파니안 조각상 인근을 지나고 호숫가의 산책로도 모두 지나친 뒤 장미 정원에 이르렀다. 그제야 란델의 입이 열렸다.

"잠시 같이 걷자꾸나."

칼리안의 걸음이 멈췄다.

이미 칼리안은 란델과 함께 걷고 있었다.

"그런 말은 보통 오가는 것이 있을 때 나옵니다."

"그저 같이 걷자는 말에 오가는 것이 필요하더냐."

"정말로 걸음이나 같이 걷자는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손을 잡자는 소리지."

"잘 알아듣는구나."

칼리안이 란델조차 뜻을 가늠하지 못하는 미소를 지은 채 란델을 쳐다보며 말했다.

"손을 잡으려면 주고 받는 것이 있어야 할 텐데요. 제가 가진 발칸이나 플란츠 형님의 브리센처럼 단순히 텐실이라는 배경 말고 눈에 보이는 힘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구나."

"제 것을 받는 대가로 주실 것이 있으니 그런 말씀을 하신 듯 한데, 혹시 제 말이 틀립니까."

"그 역시 틀린 말이 아니다."

"신관을 염두에 두고 계십니까."

"그래."

칼리안이 먼저 말을 꺼낼 필요도 없었다.

란델은 방금 제 입으로 신관들의 정체를 알려왔다.

"카이리스를 찾은 서른 명의 신관. 진짜 신관일 리는 없으니 세작 혹은 자객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그 정도 세력이 아니었나 봅니다. 발칸과 거래가 가능할 만큼의 힘을 지닌 이들이라는 뜻일 테니까요."

억지를 부려 생각해냈던 것.

고작 서른 명이지만 란델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을 만한 무리. 카이리스 곳곳으로 흩어져 치유사 노릇도 할 수 있을 뿐더러 한데 모이면 란델의 검이 될 이들.

"······ 이를테면 신성기사 같은."

텐실의 신성 기사.

란델이 발을 멈추고 칼리안을 쳐다봤다.

어느새 훌쩍 자라 얼추 눈높이를 맞추고 있는 동생을 향해 란델이 말했다.

"네가 너무 많이 자란 것 같구나."

"계속 그리 말씀하지 마십시오. 지금껏 돌봐주기라도 하신 것처럼 들립니다."

칼리안이 조용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사신들이 묵고 있을 곳, 서른 명의 신관들이 묵고 있을 루비아 관을 가리켜 보였다.

"나를 얻으려고 욕심내지도 말고 저기에 있을 당신의 검도 당장 치우십시오."

왕궁 안에 제 검을 몰래 들여오는 놈이라는 것을 안 이상 꿈에서라도 손 잡을 생각은 없어졌다.

"전부, 죽여버리기 전에."

칼리안의 살기 가득한 눈이 심연 가득한 란델의 눈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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