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03화 (104/527)

제20장. 이번에는 (5)

칼리안은 무릎에 팔꿈치를 댄 채로 턱을 괴고 있었다.

턱을 괴지 않은 손의 긴 손가락 끝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 톡 톡 톡.

아르센의 집무실은 참 단출했다.

그 흔한 그림 하나 화분 하나 없었다. 책상과 의자 그리고 소파와 테이블이 전부였다. 그런 것에 비해 집무실 크기는 또 상당히 큰 편이라 작게 말하는 소리도 꽤 크게 울리는 곳이었다.

덕분에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의 끝에도 작은 울림이 있었으나 칼리안은 그리 신경쓰지 않았다.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칼리안은 아르센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기다리면서 란델을 생각하고 있었다.

"뭐가 그리 급하셨는지."

칼리안이 실소하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란델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찰 날이 이렇게 빨리 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면 이유를 알기 어려울 일은 아니었다.

그저 칼리안이 그리 중요하게 따져보지 않고 있었을 뿐이었다.

칼리안보다 세 살이 많은 란델은 이제 열 여덟이다. 스무 살이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남지 않았다. 그러니 그 전에는 결정이 될 터였다.

자리에서 밀려나 카이리시스를 떠나야 할지.

세자가 되어 왕궁에 계속 있을지.

'혹은 죽게 될지.'

그런 이유로 란델의 움직임에 대해 이해 아닌 이해를 해주기로 한 칼리안이 다시 한번 쓴웃음을 지었다.

- 똑똑.

그 때 집무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와 함께 아르센이 돌아왔다. 안으로 들어와 칼리안의 맞은편에 앉는 그의 손에는 두세 장 정도 되어 보이는 서류가 있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마나실 군단장님께서 전해드리라 하셨습니다."

아르센이 손에 든 것을 칼리안에게 내밀며 대답했다.

"카이리스로 보내겠다며 텐실에서 전달해 온 신관 명단과, 이전에 카이리스에 머무르던 신관들의 정보입니다."

"스승님이 아니라 전하께서 주신 자료겠군요."

"네, 맞습니다."

두 명단을 양쪽에 두고 살펴볼 필요도 없었다.

기존에 있던 신관들 모두가 지금 오기로 한 신관 명단에 빠짐 없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니 말콤 체티쉬 역시 이번에 방문하기로 한 신관의 명단에 있었다는 말이다.

"방문자 명단에는 있지만 실제로는 없었다는 건데."

마법사들의 정보 수집 방법은 마법사답지 않게 아주 많이 무식한 면이 있었다. 말콤이라는 신관이 실제로 없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몇몇 마법사가 그들 주변에 숨어 있었을 것이 뻔했다. 무슨 방법을 썼든 서른 명이 서로를 부르는 것을 하나하나 훔쳐 들었을 터였다. 그렇게 그들 중 누구도 말콤이라 불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리라.

그러니 에우리아의 정보가 더 정확하다.

"하마터면 그냥 넘어갈 뻔했네요."

사실 이상하다는 것만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이런 방법을 쓰지도 않았을 터였다.

곧 칼리안이 고개를 들어 다시 아르센을 쳐다봤다. 서류는 앨런이 전해달라 한 것이었고 칼리안이 아르센에게 지시한 것은 따로 있었다. 지금 아르센의 눈 밑이 또 시커멓게 변한 것과 관련이 있는 일이었다.

"내가 확인해달라 부탁한 것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네 왕자님. 브리센 후작의 집을 밤새 지켜봤습니다만 특별히 사람이 드나들지는 않았습니다."

칼리안이 플란츠와 손을 잡았으니 란델이 에반에게 손을 뻗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석찬이 끝난 뒤 에우리아를 바로 만날 수가 없었던 탓에 급한대로 빌헬름 관에 있던 아르센에게 부탁을 했었다. 그러니 지금 쯤이면 에우리아의 사람들이 후작의 집 근처에 꼭꼭 숨어 드나드는 이들을 체크하고 있을 터였다.

"신관들이 가짜인 것은 확실한데 브리센 후작과 만나는 것 같은 기미는 없고······."

찻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시며 생각을 정리해 낸 칼리안이 아르센을 보며 다시 말했다.

"전하께 부탁드릴 것이 있다는 말 좀 전해주세요."

"네, 왕자님. 어떻게 전해드리면 되겠습니까?"

"란델 형님이 이 일에 대해 알고 있는 바가 있는지 그것을 물어봐 주셨으면 좋겠다고요."

"지금 말씀이십니까?"

아르센이 의문 가득한 얼굴로 이렇게 물었다.

플란츠와 투닥거리며 지내기 시작한 뒤로 쓸데 없이 정중하던 아르센의 말투가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아마 예전 같았으면 저 질문은 훨씬 길게 이어졌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베른을 공격했을 당시의 아르센은 반말을 쓰고 있었다. 혹시 그 역시 플란츠와 연관이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문득 든 그런 생각에 칼리안이 소리 없이 웃었다.

시간을 확인해 본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늦은 대답을 전했다.

"아직 특별한 일정이 시작되지 않을 시간이니 전하께서도 충분히 이야기 나누실 수 있을 겁니다."

"죄송합니다. 시간이 아니라, 아직 왕자님께서 란델 왕자님의 의중을 잘 모르시는 상황이기 때문에 여쭤보았습니다. 이 쪽에서 이상함을 느꼈다는 것을 란델 왕자님에게 드러내기에는 너무 이르지 않겠습니까."

"내가 잘못 알아들었네요. 그 신관들 정체 말이군요."

"네, 그렇습니다."

곧 칼리안의 얼굴에 플란츠를 닮은 웃음이 걸렸다.

란델의 의도를 대충 파악해 두었다는 뜻을 담은 비웃음이었다.

그것을 본 아르센이 질색하는 표정을 했다.

플란츠가 종종 칼리안을 만나더니 애한테 이상한 것을 가르쳐놨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런 아르센의 속내를 알 리 없을 칼리안이 손가락 세 개를 펼쳤다. 그리고는 그것을 하나씩 접으며 설명했다.

"의외로 진짜 신관일 수도 있고. 세작일 수도 있고. 자객일 수도 있고. 그도 아니면."

거기까지 말한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르센에게 말했다.

"셋중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속 편하겠네요."

사실 말을 숨긴 네 번째는 조금 억지를 부려 떠올려 본 것이었으니 굳이 아르센에게까지 언급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아무튼 그들을 데리고 뭔 짓을 꾸미려는지 내 추측만으로는 범위를 더 좁히기가 어려워서요. 그냥 직접 알려주게 만들려고 합니다."

"또 덫을 놓으시려는 겁니까."

"내가 잘 하는 게 그 쪽이라."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것이 칼리안이 놓은 덫에 뭐가 걸리는지 보는 것이 아니던가. 때문에 아르센의 눈에 흥미로운 기색이 가득 들어앉았다.

"손자도 잘 맡아 주고 다이아몬드도 사 주고 소금도 보내줬는데. 고마움을 이런 식으로 갚으려는 것을 보고만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아르센이 이상하다는 얼굴을 했다. 칼리안이 언급하는 것은 텐실의 국왕이었다. 란델이 아닌 것이다.

아르센이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왕자님······ 텐실을 잡으시려는 겁니까."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나 전쟁 싫어해요. 그래서 이번에는 되도록 피할 생각이고."

순간 그 말이 아르센에게는 텐실을 못 잡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 싫어서 안 잡는다는 소리로 들렸다.

하긴. 칼리안이니까.

큰 덫 놓는 일이 조금 복잡할 뿐. 칼리안이 지금 고작 왕자의 위치에 있다 해서 전쟁을 일으키지 못할 것도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그런 생각에 빠져있느라 아르센은 칼리안이 말한 '이번에는' 전쟁을 피해 볼 생각이라는 말에 별 의미를 두지 못하고 넘어갔다.

"주제 모르고 자꾸 덤비면 제 핏줄 어찌 될지 생각해보라고. 경고만 해주는거죠."

그렇게 말하는 칼리안의 표정을 본 아르센은 칼리안 따까리나 하면서 평생을 살기로 한 것이 얼마나 잘한 결정이었는지를 잠시 깨달았다.

그렇게 말을 맺은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야 할 곳과 그 곳에 데려갈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가 생각난 칼리안이 짧게 입을 열었다.

"아차."

"잊으신 것이 있습니까."

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선 칼리안이 다시 몸을 돌려 아르센을 봤다. 그리고 꽤 의미심장한 얼굴로 농담과 우려가 섞인 말을 했다.

"플란츠 형님 검은 부수지 마요. 귀한 거라서."

안그래도 영 부수기 힘들게 생겼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연구하던 중이었다는 말은 절대 꺼내지 말아야겠다 싶다.

"······ 네."

"그리고."

그런 아르센을 본 칼리안이 씩 웃으며 한 가지 말을 더했다.

"내 새끼 코끼리가 경에게 못 받은 것이 있다고 징징대던데."

······ 에이씨.

아르센이 느릿느릿 돈 주머니를 꺼냈다.

* * *

칼리안은 본래 검은 옷을 좋아했다.

옛 칼리안은 눈에 띄는 것이 싫어서, 그리고 베른은 피가 튀어도 티가 잘 나지 않아서였다.

지금도 칼리안은 그랬다. 검은 옷을 즐겨 입었다.

플란츠는 원래 어땠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원수같은 형님이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까지 칼리안이 알아야 할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플란츠가 언젠가부터 갑자기 밝은 옷을 입기 시작했다는 것도 칼리안은 몰랐었다.

그것을 이제 알았다.

정확히는 그 이유를 이제 알았다.

그래서 플란츠의 시종 레릭이 방문을 닫자마자 칼리안의 웃음보가 터졌다. 한참을 웃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이름표 바꿔드리겠습니다. 제 이름 빼고 형님 것으로."

그리고는 플란츠의 품에 안긴 '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를 가리켜보였다. 플란츠는 뭐 어쩌라는 것이냐는 표정이 되어 대꾸했다.

"짖지 말고."

아마 플란츠 앞에서 그렇게 소리 내서 웃을 위인도 이런 말에 전혀 신경쓰지 않을 위인도 칼리안 외에는 없을 터였다.

곧 고양이를 내려놓은 플란츠가 칼리안을 보며 물었다.

"또 왜."

왜 또 왔나. 그 잘난 시종들은 어디 두고 직접 와서 웃고 난리냐. 아무튼 처 웃지 말고 왜 왔는지 말하고 빨리 꺼져라. 등등이 함축된 말이었다.

"잠깐 저와 가실 곳이 있습니다."

플란츠가 인상을 찌푸렸다.

석찬에 한 번 같이 갔으면 됐지 또 어디를 가자는 말인가.

"브리센 후작 만나러 갑니다. 말 타고요."

칼리안의 말을 들은 플란츠가 잠시 말 없이 무언가를 생각했다. 그러더니 피식 웃으며 칼리안의 속내를 짚어냈다.

"속이는 건가."

역시 플란츠는 똑똑하다. 칼리안이 웃었다.

"네. 두 왕자가 브리센 후작을 만나러 갑니다. 말 타고 보란듯이 드러내놓고 가면 란델 형님께서도 보시겠죠. 지나치게 뻔한 행동이니까요."

지나치게 뻔한 두 동생의 행동을 보면 란델은 분명 이렇게 생각할 터였다.

- 내 신경을 거슬리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하는 행동이다.

그런 행동들이 일부러 꾸며낸 것임을 깨닫는다면, 전날 석찬에 둘이 함께 왔던 것도 혹시 거짓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할 터였다. 그런 상황에서 르메인이 란델을 불러 신관에 대해 묻는다.

그리하면 란델은 칼리안이 신관들의 정체에 대해 의심하고 있으며 한편으로 플란츠와는 일부러 손을 잡은 척 연기를 하고 있다 생각을 하게 될 터였다.

"그렇게 해둔 뒤 오늘 밤에 란델 형님의 방에 찾아 갈 생각입니다. 하루종일 저에 대해 아주 많은 생각을 하셨을테니 많은 것을 설명할 필요도 없겠죠. 그냥 한 마디만 드릴까 합니다."

"같이 손잡고 브리센부터 치자고."

"네. 맞습니다. 저와 손을 잡고 브리센부터 같이 건드리자 할까 합니다. 그럼 란델 형님께서 숨기고 계셨던 것에 대해 제가 알아낸 것들은 전부 입을 다물겠다고요."

"······ 거절하진 않으시겠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저를 손 위에 두고 싶어 안달하시는 분이니."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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