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02화 (103/527)

제20장. 이번에는 (4)

찬란히도 아름다운 지그프리드 관.

대륙에서 가장 화려하다 칭송받는 카이리스 왕궁의 대연회장.

크리스털과 백금이 만들어낸 환상적인 그곳에 귀족들이 모여 갖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왕국의 미래를 점쳐보는 말, 자식을 걱정하는 말, 지식을 뽐내기 위한 말, 제 안위를 도모하는 말, 말, 말.

세상이 뒤집혀도 멈추지 않을 것 같은 이런 말들이 만약 거짓말처럼 일순간에 사라진다면 그 이유가 될 만한 것은 단 하나였다.

- 칼리안.

항상 그래왔듯 이목이 집중되는 것이다.

이 셋째 왕자가 오늘은 무엇을 입고 어떤 장신구를 했으며 무슨 행동과 무슨 말을 할지.

그리고 무엇보다, 누구와 함께 있을지.

지금 상황이 딱 그랬다.

지그프리드 관에 모여 있던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아니 말을 잃은 것에서 모자라 하나같이 경악한 얼굴로 연회장의 입구를 쳐다보고 있었다.

검붉은 재킷을 입고 금사로 수를 놓은 검은 망토를 걸친, 실로 인상적인 칼리안의 예복 차림 때문이 아니었다. 보란듯이 다시 착용한 셔츠 핀의 루비 펜던트 때문도 아니었다.

'플란츠 룬 카이리스 왕자님과 칼리안 레인 카이리스 왕자님 입장하십니다.'

둘이 다시 한 편에 선 것이다.

좌중을 압도하며 들어오는 두 왕자를 본 귀족들이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을 무렵. 둘을 조용히 바라보던 란델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체르밀로 돌아갔다.

그 모습에 귀족들은 다시 저마다의 의견을 조용히 주고 받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와는 전혀 상관 없다는 듯, 옹기종기 모여앉아 평화로운 한 때를 보내는 세 명의 사람이 있었다.

"잘 들어보게. 집중하고."

완벽한 침묵에 잠긴 연회장의 한 구석탱이에서 그들 중 한 명이 이렇게 소근거렸다. 바로 남들 눈에 띄지 않을 곳에 일찌감치부터 자리를 잡고 앉아있던 아르센이었다. 그런 아르센의 말이 향한 곳에는 키리에가, 또 그 옆에는 얀이 있었다.

아무튼 무언가를 잘 들어보라는 아르센의 말에 '이런 곳에 쓰라는 귀가 아닌데' 하는 표정이 된 키리에가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곧 칼리안과 플란츠가 자리로 가 앉자 귀족들의 입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동안 그 소리를 듣던 키리에가 입을 열었다.

"헤르츠 경."

키리에가 제 이름을 부르자 그것 보라는 표정이 된 아르센이 얀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러나 키리에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졌습니다."

아르센이 이겨서 이름을 부른 것이 아니라 져서 불렀다는 소리다. 순식간에 표정을 바꿔 단 얀이 반대로 아르센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것 봐요. 우리 왕자님한테 아무도 그런 말 못한다니까요."

쉽게 말해 지금 둘은 내기를 했다.

칼리안의 어머니를 독살하고 칼리안도 살해하려 한 실리케. 실리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칼리안. 칼리안을 향한 실리케의 칼을 대신 맞은 플란츠. 죽어가는 플란츠를 살려낸 칼리안.

도대체 이것이, 무슨 관계인가.

아무튼 그런 일을 겪으면서 실리케가 물러난 뒤, 칼리안이 플란츠를 도우며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잘 알려진대로 플란츠가 칼리안의 뒤통수를 후려치면서 멀어졌다. 그런데 오늘 또 다시 사이 좋게 입장을 했다.

그랬으니 내막을 모를 귀족들이 이런 결정을 내린 칼리안을 보며 무슨 평가를 할까.

이것을 두고 얀과 아르센의 의견이 갈려 돈을 건 것이다.

귀족들 사이에서 가장 처음으로 나올 말이 무엇일지를.

"우리 왕자님을 호구라고 부를 간 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내기에서 이긴 얀이 이렇게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러자 어딘가 억울하다는 표정이 된 아르센이 그럴 리가 없다는 눈으로 키리에를 보며 물었다.

"정말로 왕자님께서 배포가 크시다 했다는 말인가?"

얀은 귀족들이 칼리안의 배포를 칭찬하리라 했고 아르센은 이 대륙에 칼리안만한 호구가 없다 할 것이라 했다. 배신하고 돌아선 형을 다시 받아 준 꼴이니 분명 그리 말할 것이라고.

헌데 틀렸단다.

아르센은 내기에서 지기는 했으나 꽤 기꺼운 얼굴이 되었다.

"그래도 아주 잘 된 일이네."

그것이 칼리안의 능력에 대한 인정이든, 혹은 두려움이든.

이유야 어찌됐건 이제 공적인 자리에서 칼리안을 욕하는 이들이 사라질 정도의 위치에는 올랐다는 소리였으니까.

그것은 그저 인기가 좋은 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궤도였다.

"평생 모실 왕자님께서 그렇게나 인정을 받고 계신다 하니 기분이 좋군. 나는 이 좋은 기분에 왕자님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일을 해야겠네."

그렇게나 좋은 기분으로 이렇게 말하며 싱긋 웃은 아르센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내기로 걸었던 은화 다섯 개를 주지 않은 채였다.

* * *

아들들이 하나같이 똑똑했다.

처세에 능할 뿐 아니라 정치적인 행동도 곧잘 했다.

일반적인 부모라면야 당연히 환영할 일이겠으나 르메인에게는 양날의 검과 같이 느껴졌다.

- 탁.

르메인이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반을 마시고 내려놨다.

본래 르메인의 테이블에는 슬레이만과 에반 브리센 후작, 그리고 앨런이 함께 앉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슬레이만은 그냥 안왔고 에반은 슬레이만이 보기 싫어서 안 왔다.

물론 슬레이만과 에반은 불참을 미리 알렸다.

때문에 르메인은 빈 자리에 누굴 채울지 생각해보다가 그냥 비워두라 일렀었다. 둘이 안오더라도 자리를 채울 만한 한 명이 있었으니까.

그러니 지금 르메인이 혼자 앉아 궁상을 떨고 있는 이유는 멋대로 안오고 있는 앨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쓸데 없는 생각이 자꾸 머릿속을 헤집고 있었다.

- 오늘 연회장에 플란츠 왕자님과 칼리안 왕자님께서 함께 들어왔다 합니다.

조금 전 연회장에 도착한 르메인은 시종장 라울로부터 이런 소식을 전해듣게 되었다.

그 말을 들은 르메인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었다.

칼리안과 플란츠가 거짓으로 등을 돌렸던 사실은 알고 있었다. 때문에 이번에 그 반대의 행보를 보인 것이 란델을 견제할 목적이라는 것 역시 잘 알았다.

둘의 행동이 못마땅해서 인상이 써진 것은 아니었다.

'과연 란델이 순순히 물러나겠는가.'

이런 생각이 떠올랐던 탓이다.

당연하겠지만 르메인은 세 아들을 모두 아꼈다.

하지만 왕의 자리를 물려주는 것은 사랑하는 마음과는 별개의 잣대로 정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므로 란델은 아니었다.

죽어가는 플란츠를 그대로 버려두고 빌헬름 관에서 나왔던 그 날. 란델은 르메인이 생각하는 왕의 재목이 아님을 스스로 증명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르메인은 왕이 되지 못할 나머지 두 아들이 탑에 갇히는 것을 원치 않았으니까.

그런 란델이 혹시라도 벌써부터 다른 둘에게 해코지를 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걱정도 되고 그렇다고 나서서 세자위를 내릴 수도 없으니, 아버지이면서 동시에 왕이어야 할 르메인은 애가 탈 밖에.

아무튼 그런 이유로 잠시 혼자 앉아 있으려니 온갖 상념이 계속 머리를 들이밀었다. 때문에 조금 어두운 얼굴로 짧은 한숨을 쉴 때.

- 드르륵!

르메인 곁으로 누군가 걸어와 털썩 하고 앉았다.

"왕자님들 저리 구는 것이 하루 이틀도 아닌데, 매번 그렇게 오늘 내일 할 상으로 계실 겁니까?"

앨런 마나실의 것으로 배정된 자리였으므로 앉은 이도 당연히 앨런이었다. 사실 자리가 아니었어도 저런 말을 꺼낼 수 있는 이는 앨런밖에 없었다.

낮에 그렇게 화를 내고 나갔던 앨런이었으나, 화를 낸 사람도 화를 일으킨 사람도 그런 것에 오래 신경을 두는 편이 아니었다. 때문에 르메인은 낮의 일에 대해 언급하는 대신 그냥 자연스러운 대답을 꺼내놓았다.

"그것이 어디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어야지."

"뱀 같은 데블란 밑에서 어떻게 체이스 세자가 났는지를 궁금해 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걱정 많고 둔하고 생각도 짧은데 손까지 많이 가는 분 밑에서 저런 아들들이 어떻게 났는지 그것부터가 난제 아닙니까."

그 말에 피식 웃은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생각해도 그것이 참 신기해지고 있는 참이네."

"그런데."

왕자들의 일에 신경쓰지 말라는 말은 이미 여러 번 한 앨런이었으므로 그에 대해 더이상 언급하지 않고 다른 화제를 꺼내들었다.

"체이스 세자가 이 곳에 오는 길에 이상한 것을 보았다 하더군요."

"이상한 것이라니."

르메인의 질문에 앨런이 물을 한 잔 쭉 들이키고는 입을 열었다.

"텐실의 신관 서른 명을 보았다는데 혹시 그것도 전하께서 허락하신 일입니까?"

어쩐지 또 한 소리 들을 듯한 기분이 무럭무럭 들었으나 그리 한 것을 두고 안 했다 할 수도 없을 일이었다.

때문에 르메인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랬지. 내가 허락했네. 얼마전에 칼리안도 그것을 묻더니 백작도 묻는군."

칼리안이 이미 그 일을 아는 줄은 몰랐으므로 앨런이 잠시 고개를 주억거렸다. 갑자기 칼리안과 플란츠가 함께 연회장에 들어온 이유를 알 것 같아서였다.

"체이스 세자의 말로는 그들이 아마도 가짜 신관일 것이라 했습니다. 전하께 직접 이야기하자니 이 나라에 참견을 하는 것으로 여기실까 우려된다며 그리 말하더군요."

앨런의 말대로였다.

카이리시스로 오는 길에 서른 명의 신관을 보았을 때 곧바로 그들이 가짜임을 파악한 체이스였다.

다만 이것을 국왕에게 직접 전하기에는 자신의 위치가 애매하여 앨런에게 전해달라 했던 터였다.

"이것을 칼리안 왕자님도 알고 있었다면 전하의 두 아드님이 갑자기 함께 나타난 것도 그 일과 관련이 있지 않겠습니까."

"······ 알겠네. 나도 한번 알아보도록 하지."

그렇게 대답한 르메인이 란델의 빈 자리를 한참동안 쳐다봤다.

* * *

석찬이 끝나고 지그프리드 관에도 불이 꺼졌다.

그렇게 밤이 가고 다음 날이 되었다.

플란츠가 생각한대로 르메인은 이번 해에도 사신들과의 일정에 왕자들을 동석시키지 않았다.

작년에는 술 마시는 플란츠 때문에, 그리고 올해에는 오러를 숨겨야 하는 칼리안 때문에.

체이스가 이미 내용을 알고 있으니 칼리안이 앞에 나서도 무관했으나 그것을 르메인에게 알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칼리안은 얌전히 르메인의 결정에 따랐다.

'아우님을 찾는 놈이 하나 있던데.'

그리고 플란츠가 친절하게 잡아 준 약속에 따라 빌헬름 관에 마련된 아르센의 집무실을 찾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있었다. 아이즌 에이프린 백작이었다.

꽤 오랫동안 칼리안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아이즌은 칼리안을 보자마자 아주 반색하며 예를 올렸다.

"칼리안 왕자님을 뵙습니다."

사실 전날의 석찬에서도 칼리안을 보았으나 사람들이 많은 곳이었기 때문에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터였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한 칼리안이 아이즌을 보며 물었다.

"나를 만나고자 청했다 들었습니다."

플란츠였다면 분명 '뭔데' 혹은 '뭐야' 정도로 말을 했으리라. 때문에 아이즌은 이렇게 건네오는 칼리안의 말에 매우 큰 감사함을 느꼈다.

"네, 왕자님. 돌려드릴 것이 있어 이렇게 뵙고자 하였습니다."

그렇게 말한 아이즌이 내민 것은 지난 번에 칼리안이 지급했던 금액의 남은 돈이었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허탈한 듯 웃으며 물었다.

"이것을 돌려주려 온 겁니까. 굳이 돈을 돌려주고자 했다면 에우리아를 통해서도 충분했을 일인데요."

"네, 왕자님. 한 가지 드릴 말씀이 더 있습니다."

곧 아이즌이 고개를 들어 말을 이었다.

"이제 어느 정도 준비가 된 것 같습니다. 그것은 아무래도 직접 말씀을 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기사들의 준비가 벌써 끝났습니까."

"네. 왕궁의 기사단을 대체할 정도로는 충분할겁니다."

기사단 카렌과 라온을 대체할 만큼의 수.

물론 칼리안이 최종적으로 목표한 것은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기사들이었다. 다만 지금 아이즌이 말한 수의 기사들이라 하더라도 상당히 빠른 성과라 할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당장은 다른 문제가 있어서 곧바로 부르기는 어렵겠지만. 날이 되면 연락하겠습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아이즌이 칼리안에게 예를 보인 뒤 밖으로 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던 칼리안은 잠시 눈을 내리뜬 채 무언가를 가늠해보기 시작했다.

란델과 브리센.

과연 어느 쪽에 먼저 검을 드리우게 될 지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