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01화 (102/527)

제20장. 이번에는 (3)

쪽지 든 손을 늘어뜨린 칼리안이 조소했다.

"감사를 드려야 하나."

체이스가 베른을 기억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참 좋다'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찰나의 시간조차 무너질 수 없었다.

지금 칼리안을 끊임없이 쫓아다니는 이가 있지 않은가. 마치 체이스에 대한 상념과 과거의 일에 얽매여 허우적거리지 못하도록 붙들어두는 것처럼.

때문에 칼리안은 이 상황이 마치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란델의 말 같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너는 카이리스의 3왕자라고.

태평하게 형님 하나만 지키면 될 왕제 베른이 아니니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그렇지 않으면 내 손에 당장 밀려나게 될 것이라고.

"마음 앓는 것도 하지 말라며 이리 마음을 써주시니······ 깊은 관심에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리하여 칼리안은 들을 이 없을 자신의 빈 방에다 대고 한숨과 비아냥이 섞인 감사인사를 건넸다. 그 후 방 한가운데 우두커니 선 채로 한참을 보낸 뒤에야 체이스에 대한 감정을 조금 더 미뤄둘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온전한 모습으로 간신히 돌아온 칼리안이 제 손에 들린 쪽지를 다시 한 번 읽었다.

- 카이리시스에 입성한 신관 중 '말콤 체티쉬' 없음.

방으로 돌아오니 멜피르 폴룬이 전해온 마법 서적이 도착해 있었다. 칼리안이 주문하지 않은 것이었다. 돌려보내는 대신 익숙한 손놀림으로 두 번째 책을 펼치니 에우리아의 쪽지가 숨겨져 있었다.

그것은 에우리아가 멜피르를 통해 칼리안에게 전달할 내용이 있을 때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굳이 그렇게 할 필요 없이 그냥 사람을 보내 알려줘도 된다 일렀는데 에우리아는 어느새 정보원 노릇에 꽤 심취한 모양이었다. 덕분에 칼리안의 책장에 의미 모를 마법 서적만 잔뜩 쌓여갔다.

아무튼 쪽지의 내용은 전날 칼리안이 에우리아에게 알아봐달라 부탁한 것에 대한 답이었다.

라트란 영지에서 칼리안이 구해 주었던 그리고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의 단전을 회복 불가한 상태로 만들어버린 바로 그 신관에 대한 내용인 것이다. 아무래도 신관 중 안면이 있는 이는 말콤 뿐이었기 때문에 한번 만나보고자 했는데 이번 사절단 일행에 그가 없다고 했다.

그런데 텐실에서는 돌려받았던 신관을 포함한 서른 명의 신관을 보낸다 했었다. 분명 그렇게 말했다.

칼리안이 소파에 앉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말이 좀 다른데. 말콤을 뺀 나머지 신관들은 모두 들어온건지 아닌지도 모르겠고."

곧 칼리안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무릎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 얀이 들어와서는 말린 딸기와 민트를 함께 우린 차 한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칼리안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마나실 백작이 연회장에 오지 않았던데 불러다 드릴까요? 하루종일 고민이 많아 보이셔서요."

얀의 앞에서는 따로 표정 관리를 하지 않았으니, 얀은 무슨 일인지 묻지도 못하고 이틀 내내 걱정만 했을 터였다.

생각해보니 '밖'에 있을 때는 대체로 얀과 상의를 했는데 성인식을 마치고 왕궁에 다시 들어온 뒤에는 얀에게 말해준 것들이 별로 없었다. 그것이 어쩌면 서운했을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에 칼리안이 맞은편 자리를 가리켜 보였다.

"얀. 잠깐 앉아봐. 얘기해줄게."

얀이 화색을 띠며 그 앞에 앉았다.

"내 말 좀 들어봐."

"네, 왕자님."

"텐실에서 서른 명의 신관을 보냈어. 아마 란델 형님이 얽힌 것 같아."

목적이 있을텐데 일단 명분은 따로 있어. 란델 형님이 그레이도 부르신 것 같지만 그레이는 네 아버지 눈치 보느라 못 오고 있어. 그리고 란델 형님이 오늘 갑자기 나에게 레넌 브리센 자작의 행방을 물었어.

아무래도 란델 형님이 지금 꾸미고 있는 제일 중요한 일은 신관들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 나한테 브리센 자작 위치를 알려달라고 한 게 너무 이상하잖아. 그것도 이런 날에.

그래서 내 생각은 이래.

사실 란델 형님이 처음에는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을 불러서 내 시선을 돌려놓으려고 했던거지. 그런데 변경백이 못 오게 되니 급하게 다른 미끼를 던진거야.

내가 신관들에게 신경 쓰지 않게 하려고.

"그래서 내 질문은 그거야. 신관들은 왜 왔을까."

얀이 물끄러미 칼리안을 쳐다보다 말했다.

"······ 음."

새끼 코끼리.

이해 못한 것 같다.

사실 특별한 대답을 기대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칼리안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것은 칼리안의 일이니까.

그런데 가만히 앉은 채 칼리안을 계속 보고 있던 얀이 말했다.

"서른 명이나 보낼 수가 없는데요."

얀은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얀의 대답은 보다 근본적인 것에 닿아 있었다.

"보낼 수가 없다니?"

"이번 봄에 카이리스에도 병이 돌았었잖습니까?"

방금 그 말은 칼리안도 익히 잘 아는 사실이었다. 칼리안을 따르던 기사 가문 중 한 곳이 전염병 피해를 입었다 해서 칼리안이 꽤 많은 지원금을 보내지 않았던가.

그런 생각을 하던 칼리안이 고개를 살짝 들었다.

머릿속에 퍼뜩 떠오른 것이 생긴 탓이었다.

칼리안이 비로소 조금 펴진 얼굴로 혼잣말처럼 입을 열었다.

"수해가 있었으면 당연히 병이 돌았을 텐데."

젖은 음식은 썩는다.

젖은 지붕도 젖은 나무 벽도 곰팡이가 슬고 결국은 썩는다.

날은 점점 따뜻해지고 모든 환경이 썩어가는 상황에서 생긴 전염병은 쉬이 가라앉지도 않는다. 멀쩡한 상태에서도 날이 풀리니 전염병이 돌았는데 왕국 전체가 물에 잠긴 뒤라면 말할 것도 없다.

"신관이 꼭 필요할 텐데 신관을 보낸다. 안그래도 신물이 부족하다며 어려움을 겪던 나라에서, 그것도 서른 명이나······ 제 나라 사람들이 죽어가는데 옆나라 왕의 생일을 축하한다며 서른 명이나 되는 신관을 보내는 것은 정말로 미치지 않고서는 하지 못할 짓인데."

"네. 그렇죠."

"내가 그걸 왜 가늠하지 못했을까."

이번에는 칼리안의 생각이 짧았다.

"진짜 신관이 아닐 수 있겠구나."

전부 혹은 눈속임을 위한 일부를 제외한 이들이 가짜 신관이라면 말콤이 없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럼 가짜 신관들은 왜 보냈을까?"

평생 똑똑할 것을 모아서 지금 쓴 듯한 얀을 향해 칼리안이 다시 물었다. 그러자 얀은 왜 그런 것을 자신에게 묻고 있느냐는 듯한 얼굴을 하며 대답했다.

"저도 모르죠."

"아······ 그렇겠구나."

평생 똑똑할 것 모아서 방금 다 썼지 참.

* * *

칼리안에게 호밀쿠키를 선물했던 아이즌 에이프린은 백작이기는 했으나 사실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이였다. 사실 브리센 후작가와 손 잡지 않은 기사 가문의 가주들은 대부분 그랬다.

'이를 어찌해야 하나.'

때문에 아이즌은 지금 다소 난처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지방 귀족의 티 타임에 참석을 하기는 했으나 주변에 친분 있는 귀족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티 타임이 진행되는 동안 대화 나눌 상대가 없어서 난처해 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 아이즌이 알고자 하는 것에 대해 물어볼 만한 이가 없어서였다.

- 누구 혹시 3왕자님 왜 안 오시는지 아는 사람?

이런 질문 말이다.

처음에는 조금 늦나보다 했다.

그런데 나머지 두 왕자와 국왕 르메인까지 입장을 했음에도 칼리안이 오지 않으니 당황스러운 마음이 컸다. 르메인이 간간히 칼리안에 대한 칭찬을 하는 것을 보아 르메인의 눈 밖에 나는 등의 좋지 않은 일 때문에 오지 못한 것도 아닌 듯 했다.

그러니 칼리안에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괜한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 계속 문을 흘끔거리며 티 타임을 마치고 나가려는데 한 시종이 다가왔다. 그러더니 스쳐가는 걸음으로 아주 짧은 말을 전하고는 곧바로 멀어졌다.

"가장 마지막에 나오십시오."

아이즌은 그 말을 듣기가 무섭게 구두 끈을 풀었다.

저 시종의 말은 칼리안의 전언일 것이 분명했으니까.

함께 온 하인이 풀린 구두 끈을 얼른 묶어주려 했으나 아이즌은 그것을 거절한 채 먼저 연회장 밖으로 나가라 말했다.

그렇게 허리를 숙인 채 구두 끈 묶기에 열중하고 있을 즈음.

뚜벅뚜벅 하는 발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뭐야."

아이즌의 고개가 움찔했다.

하늘 아래 홀로 고고하다 말하는 것 같은 저 낮은 목소리.

칼리안의 것이 아니었다.

아이즌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들은대로 당장 죽어도 여한 없다는 듯한 표정의 플란츠가 앞에 서 있었다.

'하필 플란츠 왕자라니.'

칼리안을 기다리고 있는데 플란츠를 만나게 되었다. 하필이면 저를 살린 칼리안을 배신한 바로 그 2왕자가 아닌가.

칼리안 왕자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은 차마 꺼내지 못한 아이즌이 적당한 답을 전했다.

"구두 끈을 묶는 것에 익숙치가 않아서 지체하였습니다, 왕자님."

그 말을 들은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고개도 숙이지 않은 채 시선만 내려 아이즌의 구두를 쳐다본 플란츠가 다시 아이즌의 눈을 직시했다.

"헛소리 말고."

그 모습을 본 아이즌이 다시 조금 더 놀랐다.

싹퉁머리 없는 말버릇 때문이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는 세상 어떤 것에도 미련없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더니 어느새 사냥을 앞둔 늑대의 눈이 되어서는 아이즌을 쳐다보고 있던 까닭이다.

플란츠의 목소리가 다시 아이즌의 귀를 파고들었다.

"내 아우님. 왜 찾냐고."

아이즌 역시 아둔한 이는 아니었다.

때문에 아이즌은 그 순간 몇 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조금 전 시종이 전달한 말은 칼리안이 아니라 플란츠의 전언이라는 것. 그리고 지금 자신이 칼리안을 찾고 있었음을 플란츠가 정확히 눈치챘다는 것.

또 어쩌면.

칼리안과 플란츠가 적대 관계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것도.

아무튼 생각에 깊이 잠긴 아이즌이 계속 말을 삼가고 있자 플란츠는 다시 나른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안 믿네. 나를."

플란츠 왕자는 머리 꼬리 없이 말하는 것이 주특기라더니 딱 맞는 소리였다.

지금 플란츠는 칼리안을 찾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도 설명해주지 않고 칼리안과 사실은 무슨 관계인지도 말해주지 않고 그저 칼리안을 왜 찾는지만 묻더니 자신을 믿지 않는다며 질책을 한 것이다.

세상에 이런 고약한 언변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온화한 카리스마를 지닌 칼리안과는 영 딴판인 플란츠와의 대면에 채 적응도 하지 못했는데 플란츠는 기다리지도 않고 계속 말을 꺼냈다.

"발칸에 싸움 좋아하는 정신 나간 마법사가 하나 있는데, 내일 쯤 그대와 한번 겨뤄봐도 좋겠군."

그리고는 더 볼 일 없다는 듯 연회장 문을 향해 발을 옮기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하필 내 아우님이 내일 구경을 오겠다 했으니."

본래 내일은 사신들과 함께 하는 일정이 있었다.

그러니 그 일정에 칼리안이 참석할 리 없었다. 체이스와 함께 다니는 기사 테일란을 의식한 르메인이 분명 칼리안의 동석을 제외시킬테니까.

그러니 그때 칼리안과 아이즌이 만나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한 플란츠가 이렇게 자리를 마련해 준 것이었다.

그제야 플란츠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한 아이즌이 걸어나가는 2왕자를 향해 고개 숙여 인사를 보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플란츠 왕자님."

물론 플란츠는 그런 것에 화답할 성격이 아니었다.

* * *

석찬까지는 아주 잠시간의 시간이 있었다.

때문에 플란츠는 피곤해진 얼굴로 체르밀 궁에 돌아왔다.

내일 이후의 일정에 대한 시종들의 회의가 있다기에 플란츠는 레릭을 보내고 방으로 오게 된 터였다. 그리고 방문 앞을 서성이는 은발의 시녀를 보았다.

발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린 히나가 플란츠를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것을 본 플란츠가 짧은 한숨을 쉬었다.

아마도 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가 플란츠의 방에.

고양이는 자랐고 문틈은 늘어나지 않았는데 놈은 여전히 자유자재로 드나들고 있었다. 참으로 신기한 족속이 아닌가.

"또 왔나."

- 죄송합니다.

"뭐가."

고양이가 드나드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때문에 대충 대꾸하고 넘긴 플란츠가 방문을 열었다.

- 쾅!

그리고 그냥 닫았다.

안에 뭔가 있었다.

히나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쳐다봤고 플란츠는 잠시 이 곳이 4층이 맞는지를 확인했다. 그리고는 히나를 보며 말했다.

"두고 가. 고양이."

왕궁의 일이 바빴던 터라서 고양이를 맡아주겠다 하니 감사할 일이었다. 때문에 히나는 웃으며 다시 인사를 했다.

- 네. 감사합니다, 좋은, 왕자님.

여전히 저 '좋은' 이라는 단어를 배우지 못한 플란츠였다. 도통 알려주질 않는 것이다.

이번에도 가르쳐 줄 생각은 없었던 히나는 얼른 인사하고 뒤돌아 갔다.

그 모습을 잠시 보던 플란츠가 방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나는 여기가."

방 안의 소파 위에는 '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가 있었다. 그리고 소파와 고양이 사이에 칼리안이 있었다.

"······ 내 방인 줄 알았는데."

보통 어떤 방에 고양이와 고양이 주인이 있으면 그 방은 고양이 주인의 방이 아니던가?

주인도 없는 방에 멋대로 들어온 한 명과 한 마리를 보며 플란츠가 짜증 섞인 소리를 냈고 칼리안이 씩 웃었다.

그리고는 멀리 환하게 불을 밝힌 그리하여 석양 아래 홀로 빛나는 보석 같은 지그프리드 관을 가리켜보이며 뜬금 없는 말을 꺼냈다.

"오늘 석찬에 저와 함께 드시죠."

두 왕자가 다시 손을 잡았음을 알리자는 소리가 아닌가.

"내 아우님께서 또 무슨 일을 꾸미시는지."

"별 것은 아닙니다. 아무래도 란델 형님께서 서른 명이나 되는 가짜 신관을 보내주시려는 것 같아서요."

서른 명의 신관에 대해 칼리안이 신경쓰지 못하도록 란델이 얕은 수를 썼으니 칼리안도 똑같이 되갚아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제가 어디 휘둘리는 건 질색이라 그럽니다."

서른 명이나 되는 가짜 신관으로 뭘 꾸몄든 상관 없다.

칼리안과 플란츠의 동맹에 신경이 쓰여서 제대로 추진하지 못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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