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00화 (101/527)

제20장. 이번에는 (2)

실로 비인도적이고 비언어적이며 윤리적이지도 않은데다, 그것을 실현하는 것에도 무리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라는 것은 지극히 불완전하여 머리가 아닌 심장에 한껏 휘둘리기도 하는 존재이므로.

이성의 끝자락을 간신히 틀어 쥔 채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 때릴까.

이렇게.

앨런의 마음속에 오로지 단 한 사람만을 향한 맹목적인 폭력성이 가득 들어앉았다.

두 대도 말고 그냥 진짜 딱 한 대만 때려 보면 안되나.

"카이리스 중앙 귀족들이 모인 자리에 타국의 왕세자를 대관절 왜 부르셨습니까?"

"대화를 나누어보니 그 생각의 깊이가 남다르더군. 나조차도 감탄을 금치 못하였는데 귀족들이라 하여 다르겠나."

앨런의 숨결 하나하나에 짙은 한기가 맺혀있는 것도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연회장으로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던 르메인이 별 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그래서 중앙 귀족들이 모인 자리에 보란듯이 초대를 하셨습니까."

"그래. 초대 자리를 극구 사양하였네만 왕자들도 함께 하는 자리이니 견식을 넓히도록 내가 불러내었네."

"심지어 극구 사양하는 것을 들어 앉혀 놓으신겁니까."

물론 르메인도 칼리안이 마법으로 무엇을 감추고 다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을 저질렀다. 그러니까 체이스 초대하는 것에 신경을 쏟느라 그 뒤꽁무니에 누가 따라다니는지를 떠올리지 않은 것이다.

그제야 앨런은 둔하고 눈치 없기로 얀과 쌍벽을 이룰 경쟁자가 바로 르메인이었음을 다시 깨달았다. 하기사 제 아들 죽어가는 것도 모르던 작자였으니 이 정도 쯤이야.

앨런은 저 혼자 무엇을 생각하고 결론을 내린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르메인을 보며 말했다.

"아무튼 축하드립니다, 전하. 그래도 오늘 전하의 고민거리 하나는 더시겠습니다."

"또 무슨 소리를 하려는지."

앨런이 요즘 참 많이 참았다.

르메인이 체이스만 안 불러왔어도 누구보다 평화로운 마음으로 축제를 만끽했을 것이다. 그것을 방해받았으니 참고 참았던 입이 결국 열렸다.

"오늘 세 왕자 중 한 놈 어디 먼 곳으로 보내버리게 생기셨으니 다른 둘 중에 누구를 남길지만 결정하시면 되겠습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화가 난 앨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카에라의 기사단장 렌을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내로라하는 칼잡이가 넷이나 모인 그 자리에 늙은 마법사는 차마 못 가겠으니, 전하께서는 뒤에 서 있는 저 친구 데리고 다녀오시지요."

그리고는 저벅저벅 걸어가 집무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물론 앨런은 그 정도 상황이라면 키리에가 칼리안에게 사실을 알려주었을 것이라고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 별 일 없이 잘 넘어갈 수는 있을 터였다.

그저 하나만 알고 둘은 계속 모르는 르메인이 한번 더 정신을 차려야 할 때가 온 것 같아서 그리 말했다. 저렇게 아무 생각 없이 굴다가는 조만간 뒤통수 맞기 딱 좋겠다 싶어서였다.

'내로라 하는 칼잡이라니.'

일단 칼리안이 가장 먼저 떠올랐고 그 뒤로 슬레이만과 에반이 떠올랐다. 거기까지 생각해낸 르메인이 길게 탄식했다. 앨런이 화를 낸 이유를 그제야 눈치를 챈 것이다.

"3왕자를 빨리 불러오게."

때문에 르메인은, 테일란과 에반의 사이에 끼인 칼리안부터 일단 꺼내기로 했다.

* * *

- 알고 계십니다.

칼리안만 들을 수 있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것이 칼리안에게는 하늘을 찢는 천둥이었다.

그럼에도 얼굴 표정 눈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저 깍지를 낀 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손이 하얗게 변했을 뿐이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뜬 칼리안이 짧게 대답했다.

"알았어."

그것이 칼리안이 할 수 있는 말의 전부였다. 지금 칼리안은 마음대로 제 감정을 겪어낼 수 있는 처지가 되지 못했으니까.

'정신차리자.'

스스로를 채근한 칼리안이 짧은 한숨과 함께 다시 앞을 쳐다봤다.

란델은 아직 오지 않은 상태였고 플란츠가 이제 막 도착해 자리에 앉은 차였다. 연회장 입구에서 몇몇 안면이 있는 듯한 귀족들과 인사를 나눈 체이스가 저벅저벅 발 소리를 내며 칼리안이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플란츠와 먼저 가벼운 인사를 나눴다.

좋게 말해 가볍다는 것이지 그냥 서로 고개만 까딱한 정도라 하면 맞을 것이다.

그 후에는 플란츠를 볼 때와는 완전히 다른 자상한 얼굴을 한 채 칼리안을 향해 입을 열었다.

"또 보게 되는군요, 칼리안 왕자."

체이스는 아직 칼리안이 무엇을 알게 되었는지를 몰랐다.

칼리안이 잠시 입을 다물고 그 얼굴을 쳐다봤다. 생각해보니 제대로 얼굴을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동안 체이스를 쳐다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

한동안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얼마나 그럴싸한 미사여구를 붙이려고 저러나 하는 눈으로 칼리안을 바라보는 귀족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곧 칼리안이 짧은 말을 덧붙였다.

"참 좋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꺼내져 나온 말인지 모를 귀족들은 그저 '그럼 그렇지.' 하는 정도의 표정이 됐다.

말주변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언제 누굴 만나든 반갑다는 말 밖에 안하는 3왕자가 아니던가. 그나마 상대방이 다른 나라 세자라고 조금 더 길게 말했구나 하는 정도로 여기고 고개를 돌렸다.

체이스가 웃었다.

칼리안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나 역시 같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전날 칼리안이 했던 것과 같은 말로 답을 전해왔다.

그렇게 인사를 주고 받은 체이스와 두 왕자가 자리에 앉으려는데 연회장 안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르메인의 시종장 라울이었다.

안그래도 르메인의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을 귀족들의 시선이 다시 쏠렸다. 그리고 라울은 곧바로 칼리안이 있는 곳으로 다가와 말했다.

"칼리안 왕자님. 전하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그러더니 연회장에 앉아있는 귀족들을 보며 조금 큰 목소리로 르메인의 말을 전했다.

"전하께서 조금 늦으시니 먼저 이야기 나누고 있으라 하셨습니다."

이들은 모두 중앙 귀족이었다.

때문에 만약 작년에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꽤 많은 곳에서 웅성거림이 들렸을 터였다. 귀족들을 전부 모아두고는 정작 본인이 늦는다는 것에 대해 불만을 말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다들 그러려니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둥그렇게 삼삼오오 모여앉은대로 저들끼리 다시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다.

별 것 아닌 듯 보여도 그것은 정말 큰 변화였다.

잠시 그런 분위기를 확인한 라울이 정중한 손짓으로 밖을 가리켜보이며 칼리안에게 말했다.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르메인이 부른다 하니 달리 거절할 수가 없는 일이다. 때문에 칼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라울을 따라 나섰다.

칼리안이 걸어나가는 모습을 잠시 보던 플란츠가 고개를 돌려 맞은편의 체이스를 쳐다봤다. 칼리안이 나갔고 르메인과 란델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니 둥근 원탁에 달랑 둘만 앉아 있게 되었다.

그 시선을 느낀 체이스 역시 플란츠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한참동안 말 없이 서로 쳐다보던 둘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는."

"플란츠 왕자는."

그리고 함께 입을 다물었다.

곧 체이스가 가볍게 손짓을 보였다. 먼저 이야기 하라는 뜻이었다. 플란츠가 사양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는 또 무슨 일로 오셨는지."

또 시비였다.

카이리스의 세 왕자 성격들이 천차만별이며 그 중 둘째가 가장 사납다던 세작의 말이 딱 맞는 소리였다.

아무튼 체이스가 하려던 말은 플란츠의 질문에 대한 답도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때문에 체이스는 본래 하려던 이야기를 그냥 다시 꺼냈다.

"플란츠 왕자는 내가 굉장히 마음에 안 드나 봅니다."

체이스가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고 플란츠의 한 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차피 주변이 소란스러워 서로에게만 말이 들리고 있었으니 딱히 말을 숨길 것도 없었다.

"그보다는 의문이 생겨서 그렇습니다."

"무슨 의문을 가졌기에 나를 마주할 때마다 그리 불편해 하는지."

"굳이 세자께서 여기까지 직접 오실 일이 무엇일까. 정말 마나실 백작을 보러 온 것은 맞을까 하는 의문."

앨런 마나실을 만나기 위해 왔다지만 정작 체이스는 오늘 아침 아주 잠시동안 앨런을 만났을 뿐이었다. 보름이나 체류하겠다 했다면 그만큼 확인해야 할 것이 많다는 소리임에도 만남이 너무 짧았던 것이다.

"맞습니다. 명목상의 일이 아니겠습니까."

작게 웃던 체이스가 의외로 선선하게 플란츠의 말을 인정해버린 뒤 말을 이었다.

"만날 이는 따로 있었고, 잘 만났습니다."

그것이 어쩐지 칼리안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다고 플란츠는 괜스레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혹시 어쩌면 체이스도 칼리안과 마찬가지로 남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때문에 플란츠가 살짝 찌푸린 눈으로 체이스를 쳐다보는데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체이스가 플란츠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최근 플란츠 왕자께서 발칸의 육성에 꽤 열의를 보이신다 들었습니다."

카이리스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다.

플란츠가 또 다른 의미의 불쾌감을 담아 대답했다.

"세크리티아에 흘러가는 카이리스의 정보가 그 정도로 많을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어쩔 수가 없군요. 전하께서 새 키우는 것을 워낙 좋아하셔서."

별 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대꾸한 체이스가 꽤 의미심장한 얼굴로 아까 꺼냈던 이야기를 다시 언급했다.

"그렇게 열의를 가진 발칸은 플란츠 왕자의 힘입니까."

그 말을 듣자마자 플란츠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타국의 왕세자와 플란츠가 편히 나눌 주제의 말이 아니었다.

"그런 것을 왜······."

그렇게 입을 떼던 플란츠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한동안 말 없이 체이스를 노려보았다.

플란츠의 입에서 본래 하려던 말이 아닌 새로운 말이 나왔다.

"내가 뭔 짓을 하긴 했군. 당신은 그걸 알고."

말투도 호칭도 모두 바뀌었다.

설마 칼리안이 제 과거를 누구에게 말했을까.

체이스는 이렇게 생각을 했었기 때문에 그런 플란츠의 반응을 보며 조금 놀란 얼굴로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봅니다."

아마 칼리안이 얼마나 많은 곳에 얼마나 많은 것들을 들키고 다녔는지 안다면 체이스는 이렇게 여유롭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아직까지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어찌됐건 플란츠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에 대해 체이스에게 더 묻지 않았다. 궁금했다면 이미 칼리안에게 물어봤을 것이다. 세렌티가 찾아와서 미래를 알려주겠다 해도 싫어할 마당에 뭐하러 되돌아온 시간의 일을 알려 하겠는가.

바로 전날과 마찬가지로 체이스의 눈을 응시한 플란츠가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말했다.

"발칸은 내 동생의 것이니. 걱정할 필요 없다."

"꼭, 그래야 할 겁니다. 플란츠 왕자."

체이스가 부드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 * *

'전하께서 체르밀 궁으로 돌아가 휴식하라 하셨습니다.'

라울은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칼리안은 굉장히 허탈해졌다.

기껏 마음 먹고 체이스를 대하고 있었는데 굳이 불러내서는 방에 가서 쉬란다. 무엇을 걱정해서 그랬는지 모르지는 않았지만 맥이 빠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연회장 안에서 두 형님들이 어떤 기싸움을 벌이는지 알았다면 르메인에게 큰 감사함을 느끼며 잘 도망쳤을 테지만, 몰랐으니까.

아무튼 칼리안은 그냥 걸어서 체르밀까지 가기로 했다.

"세크리티아의 왕세자께서 알고 계시는 것에 대해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네 잘못 아니야. 걱정하지 마."

이렇게 말하며 주변을 잠시 둘러보던 칼리안이 큰 숨을 한 번 내쉰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전하께서 좋은 명분을 주셨으니,"

오후 내내 쉴 수 있을 시간이 생겼으니 같이 수련장이나 가자고. 칼리안은 그렇게 말하려 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가 생각나게 된 칼리안이 우뚝 발을 멈췄다.

- 명분.

"명분이라······ 그렇지. 명분이 없던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지, 내가."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 오늘 란델 형님께서 갑자기 산책을 하자시더니 의뭉스러운 말씀을 하셨는데. 무슨 소리였는지 조금 알겠어서."

칼리안과 란델의 대화는 키리에 역시 잘 들었다. 다만 지금 칼리안이 한 이야기와 둘이 나눈 대화의 연관성을 찾지 못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네가 봤다는 서른 명의 신관. 텐실에서 미안하고 고맙다는 명분으로 보냈다는데 그렇다기에는 너무 많거든. 그게 이상해서 내가 그 일을 좀 궁금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갑자기 란델 형님이 브리센 변경백을 부르질 않나, 브리센 자작의 행방을 묻질 않나."

키리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칼리안이 언급한 것 까지는 키리에도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브리센 변경백에 이어 브리센 자작을 내 앞에 꺼내두면 내가 알아서 아이샤 전 왕비를 떠올리고 그 쪽으로 관심을 돌리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 같아서."

"신관들 쪽에서 시선을 돌리게 하려고 왕자님께서 예민하게 여기시는 부분을 언급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응. 아이샤 전 왕비가 브리센에 의해 죽은 것도 알고 계셨고."

만약 아이샤의 죽음이 브리센의 짓임을 란델이 알고 있었다면, 아이샤의 죽음을 떠오르게 할 만한 말로 칼리안의 시선을 레넌에게로 붙들어두려 했을 수 있다.

"내가 실리케의 시선을 돌려놓으려고 썼던 방법을 이번에는 란델 형님이 나에게 건네주신 듯하네. 그런 이유라도 있지 않고서야 이런 바쁜 와중에 갑자기 나를 불러내서는 뜬금없이 브리센 자작의 행방을 물을 사람도 아니고."

그러니 레넌은 그냥 미끼인 것이다.

"산책이나 하자시더니."

먼 곳에 보이는 장미 정원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칼리안이 길게 웃었다.

언젠가 란델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보았던 그 때와 똑같은 웃음이었다.

"산책 좋아하시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