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장. 이번에는 (1)
플란츠는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네가 그 정도의 언행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무슨 이유로 타국의 왕세자에게 그런 모습을 보였느냐."
전날 플란츠가 체이스에게 무례한 행동을 한 것에 대해 전해 들은 르메인이 생일 축하 인사를 하러 온 플란츠를 따로 남겨놓고 혼을 내기 시작한 탓이다.
"체이스 왕세자는 훌륭한 왕의 재목이다. 충분히 보고 배울 점이 많은 이를 그리 대했다 하니 내가 너를 잘못 보았던 것은 아닌지 참으로 걱정이 많았다."
1년 전 르메인의 앞에서 프레이야를 욕했을 때 르메인은 플란츠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질책하는 표정조차 짓지 않았다. 그 정도의 관심조차 없던 사람이었다. 그랬던 르메인이 실상 아무 상관도 없는 체이스에게 무례를 범했다며 꾸중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플란츠는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르메인을 이렇게 만든 아우님에게 화풀이를 해야 할지. 아니면 고맙다 해야 할지.
"나라의 크고 작음으로 위와 아래를 정하려 하지 말거라. 그것은 만용이니라."
자신의 말을 한 귀로 듣고 고스란히 흘리면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르메인은 여전히 엄한 표정을 한 채 말을 맺었다.
그런 르메인을 보던 플란츠가 조금 늦은 대답을 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주의하겠습니다."
그런데 주의하겠다는 대답과는 달리 플란츠의 말 끝에 웃음기가 있었다. 그것을 느낀 르메인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물론 비웃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다만 혼을 내는데 웃는 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는 아직 생각해본 적 없었기 때문에 잠깐 멈칫했을 뿐이다.
당황한 것이 아니다. 정말이다.
"그래."
결국 르메인은 짧은 대답과 함께 다른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그래서 요즘은 어찌 지내느냐."
실컷 혼낸 것도 모자라 이제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플란츠가 르메인의 얼굴을 다시 쳐다봤다. 그런 반응에 르메인이 말을 덧붙였다.
"내가 나서지 않는 것이 약이라 하여 따로 찾아 부르거나 물어보지 않고 있었다만 사실 그 일이 지나간 뒤 걱정을 많이 하였다."
이 말을 듣고 나서야 플란츠는 르메인이 무슨 일에 대한 안부를 묻는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실리케에 대한 일을 잘 잊고 지내고 있는지를 이제야 묻는 것이다. 그것도 저렇게 조심스러운 표정을 한 채로.
나서지 말라 한 것 역시 앨런의 조언이었을 것이다.
실리케에게 결국 독을 내린 것이 르메인이었으니 플란츠의 앞에서 쓸데없이 얼쩡거리지 말라 했을 테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렇게 대답한 플란츠가 작게 실소했다.
르메인이 이렇게 어려워하는 정도인데 정작 그 일에 가장 크게 관여해놓고는 이래도 죽을거다 저래도 죽을거다 해가며 걱정인지 참견인지를 계속 해대던 웬 놈이 생각난 탓이었다.
혼냈더니 웃는다.
걱정했다 하니 피식 웃는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는 아들의 이상한 반응에 상당히 복잡한 심정이 된 르메인의 표정은 보지 못한 채였다.
* * *
르메인을 만나고 나오면 곧바로 말해주려 했다.
란델과 산책을 끝내고 오면 곧바로 말해주려 했다.
때문에 문 밖까지 체이스를 배웅한 앨런이 키리에를 보자마자 곧바로 들어오라 손짓했을 때 키리에는 정말 난감한 기분을 느꼈다.
"다 들었는가?"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얀을 두고 키리에만 집무실로 불러들인 앨런이 물었고 최근 거짓말이 많이 늘어난 키리에가 시치미를 뗐다. 다만 상대가 앨런이었다.
"자네가 들은 것을 왕자님께 말씀드릴 생각인지 묻는 것이네."
"제가 들은 것은 곧 왕자님께서도 들으신 것이어야 합니다."
"그 귀는 걸러 듣는 것은 모르는 귀인가?"
"모릅니다."
"이 우직한 칼잡이를 어찌하나."
앨런이 허허 웃었다.
"그리고······ 제 이름을 말씀드렸을 때 세크리티아의 세자께서 많이 놀라셨습니다. 칼리안 왕자님의 과거에 대해 제가 직접 알려드린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자네가 '베른'이라는 성을 말해서 체이스가 눈치를 챘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제 말로 인해 확신을 하셨을 것 같습니다."
사실 체이스가 칼리안과 베른을 연관지은 과정은 조금 더 복잡했다. 그리고 그에 있어 키리에가 아주 큰 역할을 한 것은 맞았다.
당연하겠지만 기억을 찾은 체이스는 처음부터 칼리안과 베른을 함께 생각하지 않았다. 연관짓기는 커녕 베른이 어딘가 살아있으리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다만 자신이 기억을 찾았을 그 즈음 가장 떠들썩했던 '실리케 축출' 소식과 죽었어야 했을 3왕자가 실리케를 몰아내는 것에 가장 큰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을 뿐이었다.
'칼리안이 어떻게 살아있을까.'
모든 것이 자신의 기억과 똑같이 굴러가고 있는 상황에서 칼리안과 연관된 것들만 틀어지고 있었다. 그것을 알게 되니 자연스럽게 카이리스 3왕자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칼리안은 리베른으로 돌아갔어야 할 앨런 마나실을 스승으로 삼았고 앨런 마나실이 발칸을 만들었다. 심지어 칼리안이 여섯 번째 검이라는 이야기까지 전해졌다. 호기심에서 알아본 내용이 범상치 않았다.
그때부터 체이스는 칼리안에 대한 모든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가 지난 후 칼리안의 시종 한 명이 어떤 도박장에서 한바탕 칼부림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시종의 이름도 함께였다.
- 키리에.
그때까지만 해도 체이스는 키리에의 성이 무엇인지 몰랐다. 카이리스의 시종들은 대체로 성을 공개하지 않고 일했으니까.
하지만 그 이름만으로도 충분했다. 체이스가 너무나 잘 아는 이름이었다. 베른을 대신해 화살받이가 되어 죽었던 충성스러운 기사가 아닌가.
세크리티아로 와야 할 키리에가 죽었어야 할 칼리안과 함께 있었다. 이제 체이스는 하필 그 둘이 함께하게 된 출발점을 알아보게 되었다.
- 칼리안 왕자가 '어딘가'에서 직접 데려온 아이.
이미 키리에와 도박장을 함께 떠올리던 중이었다.
그랬으니 조금 더 지난 일을 생각해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정작 체이스는 알지도 못하는 '붉은 고니'라는 이름의 세작이 새 판매점의 암호를 모조리 꿰고 있더라는 보고. 그리고 붉은 고니가 도박장 정보를 알아간 바로 그 날 도박장에서 사라진 오드아이의 소년.
체이스는 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 되었다.
카이리스의 왕자이며 소드마스터이자 키리에를 데리고 있는 칼리안이 바로 붉은 고니일 수 있다. 소드마스터이자 키리에와 막역했던 베른은 세크리티아의 세작들을 관리했었다.
······ 그러니 어쩌면. 혹시 어쩌면.
이런 사고의 결과로 체이스는 칼리안을 직접 만나보기 위해 카이리스에 왔다. 자신을 대하는 칼리안의 반응을 보고 예감했다. 키리에를 만났고, 물었다. 그리고 들었다.
'키리에 베른.'
맞았다. 칼리안이 바로 베른이었다.
잊어버려서도 잃어버려서도 안 됐을.
동생이었다.
그렇게 오랜시간 아주 긴 과정을 거쳐 알게 된 사실이었다.
"저 때문에 벌어진 것이니 더더욱 제가 숨겨서는 안 될 일입니다."
키리에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체이스가 키리에의 성을 듣고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은 맞으니까.
앨런이 침음을 흘렸다.
물론 거기에 대해 앨런이 왈가왈부 할 입장도 아니었다.
"그래. 다른 이의 말을 들을 놈이었으면 칼리안 왕자님이 제 등 뒤에 놓을 생각도 안했을 테지."
또 한 편으로는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앨런 역시 이 일을 칼리안에게 숨겨야 할지 고민이 컸던 것이다. 그러니 저 우직한 키리에가 제 소신대로 말을 하도록 두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래도 지금은 귀족들이 많이 모이는 기간이네. 그들 앞에서 평정심 잃은 모습을 보이시지는 않도록 축제 기간만 보내고 이야기하게."
"제가 고민을 해보겠습니다."
다 칼리안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거늘, 그나마도 고민해보고 결정하겠단다.
칼리안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네 밖에 안하는 키리에다.
그리고 앨런은 명색이 칼리안의 스승이며 현명한 대마법사다. 그런데 이 놈의 칼잡이는 곧죽어도 앨런의 말을 바로 듣질 않았다.
"그래. 다 그냥 자네 알아서 하게."
결국은 앨런이 이렇게 한 수를 접고 말았다.
어쩌겠는가?
이게 다 귀 밝은 놈 옆에 두고 마법 안 쓴 놈 잘못인 것을.
* * *
란델이 칼리안을 깊이 응시했다.
"무리한 부탁이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만."
자칫 전쟁을 부를지도 모를 정보를 알려달라 하고 있으면서 무리한 부탁이 아니라니.
그런 란델을 향해 '레넌을 왜 찾는질 말해주시면 알려드릴지 말지 생각해볼게요' 따위로 대답을 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란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다시 대답했다.
"모르는 것을 계속 물으셔도 답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 말과 함께 자리를 피하려는데 때마침 란델의 시종이 조심스레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얀 역시 그 옆에서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광장에 나가야 할 시간이 되었나봅니다. 일정이 있으니 산책은 여기까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대화를 일단락지은 칼리안이 간단한 예를 보인 뒤 얀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칼리안의 얼굴을 본 얀이 조금 굳은 얼굴이 되어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표정이 너무 안좋습니다. 안그래도 어제부터 계속 말씀도 잘 안하셨는데."
"아니야. 별 일 없어."
거짓말인 티가 팍팍 난다.
아니 대체 어떤 놈이 우리 꽃 같은 왕자님 심기 건드렸냐고.
라고 할 뻔 하다가 오늘 칼리안이 만난 이라고는 위대하신 국왕 전하와 그 국왕 전하의 장자이신 1왕자님 뿐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얀이 얌전히 입을 닫았다.
어느새 옆으로 돌아온 키리에 표정도 그냥저냥 보고 넘기기 어려울 판에 칼리안까지 이러니 사정 모를 새끼 코끼리는 그저 울고 싶을 뿐이다.
아무튼 그런 얀의 사정과는 관련 없이 칼리안은 칼리안대로 곤욕이었다. 란델과의 대화가 꽤 길어진 탓에 칼리안은 제대로 된 고민도 해보기 전에 광장에 불려나가 인사를 마치고 연달아 이어지는 귀족들과의 티 타임에 참석하게 되었으니까.
"반갑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래도 칼리안이 제 스스로 이상한 소문을 만들어 낼 짓을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언제 그렇게 생각이 쌓였냐는 듯 칼리안은 참으로 여유로운 행동과 미소로 귀족들의 인사에 화답했다. 멀리 에반 브리센 후작이 보였지만 서로 반가울 사이가 아니었으니 간단한 시선만 주고 받았다.
그렇게 자리에 앉은 뒤에는 다시 고민을 시작했다.
아이샤가 독살됐음을 말할지 고민하는 것이 아니었다.
란델에게 아이샤의 사망 원인을 알리지 못하는 것은 칼리안의 입장에서 미안함을 느낄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어차피 피해자도 가해자도 모두 죽은 사람이다.
괜스런 전쟁을 일으킬 이유가 없다.
칼리안은 심지어 실리케를 눈 앞에 두고도 참지 않았던가.
때문에 칼리안이 고민하는 것은 조금 달랐다.
레넌 브리센을 꺼내면 안된다.
그레이 브리센이 와서도 안된다.
'계속 숨겨둬야 하나. 아니면······.'
죽여야 하나.
아이샤에 대한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이 맞는지 불분명한 둘을 어찌 처분해야 할지였다.
'아무래도 축제 이후 둘을 만나봐야 할 듯 한데.'
만나보고 그 입을 열어두어도 될 지를 결정해야겠다고. 그렇게 결론이 날 즈음이었다.
"세크리티아의 왕세자, 체이스 듀라한 세크리티아님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기사의 목소리.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체이스가 들어왔다.
칼리안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물론 체이스를 다시 만나게 된 탓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큰 것은 체이스와 함께 들어온 테일란 때문이었다.
지금 이 곳에는 에반이 있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마법으로 오러를 감춘 채였다.
'오러를 감추면 테일란 카스트린의 의심을 살 테고, 감추지 않으면 에반 브리센에게 내 오러가 보일텐데.'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대륙의 첫번째 검에게 의심을 받는 것보다는 에반과 정면 충돌하는 것이 낫다.'
검의 길에 오른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이가 테일란보다 많은 양의 오러를 지니고 있다는 의심을 받는 것보다는, 알고 보니 칼리안의 오러가 자신보다 적은 것을 안 에반이 덤벼오는 편이 나으리라.
"오러는 그대로 감추고 계셔도 괜찮습니다."
그 때 칼리안의 뒤로 걸어온 키리에가 이렇게 말했다.
"······ 왕자님이 누구인지, 세크리티아의 왕세자께서 알고 계십니다."
덧붙여진 말을 들은 순간, 칼리안의 눈이 깊이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