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98화 (99/527)

제19장. 형님 (6)

시덥지 않은 생일 축하 인사와 형식적인 감사 인사가 오간 뒤 르메인이 세 아들을 향해 먼저 말을 건넸다. 그런데 그 내용이 오래 전 함께했던 석찬 때와는 또 달랐다.

"칼리안. 어제는 평소 외출하는 날이 아니었음에도 왕궁을 벗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스스로 지킬 수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궁 밖에 나가는 것을 허락은 하였으나 너무 잦은 것 같구나."

꼭 흔한 아버지들과 같은 표정을 하며 이런 말을 한 것이다.

"그리고 플란츠. 헤르츠 경은 실력이 뛰어난 자다. 그런 이와 매일 다툼이 있다는 말이 나에게까지 들려서야 되겠느냐."

뿐만 아니라 아르센과 계속 싸움을 해대는 플란츠에게 이렇게 우려 섞인 소리도 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무려 르메인이 잔소리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는 소리다. 앨런의 잔소리를 하도 듣는 바람에 스스로도 잔소리를 하게 된 모양이었다.

일국의 국왕이 아들들을 앞에 놓고 잔소리를 하는 모습에서 느껴지는 이질감 때문에 칼리안은 체이스에 대한 일도 잠시 잊고 웃음을 참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르메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란델을 향해서였다.

"조만간 함께 산책이나 하자꾸나. 곧 장미가 많이 피겠더구나."

"알겠습니다, 전하."

하필 장미 얘기다.

란델은 별다른 기색 없이 간단한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렇게 이어진 대화도 끝이 난 뒤 모두 일어서 나가려는데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르메인이 입을 열었다.

"플란츠. 잠깐 있거라. 전할 말을 내가 잠시 잊었구나."

"네. 전하."

그렇게 플란츠를 남겨놓고 칼리안과 란델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지금껏 칼리안을 기다리고 있던 키리에의 표정이 매우 좋지 않았다. 때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물으려 하는데 뒤에서 칼리안을 불러세우는 소리가 들렸다.

"칼리안. 산책이나 하자꾸나."

르메인이 했던 이야기를 똑같이 꺼낸 것은 란델이었다.

* * *

- 잊고 있어서는 안될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내가.

체이스가 잊지 말아야 했던, 하지만 잊게 되었던 것.

앨런을 찾아오기까지 두 달이 걸렸으면서 그에 대해 말을 꺼내는 것에 또 한번 시간이 필요했다. 체이스는 다시 한참동안 말을 골랐다.

"이런 얘기를 믿을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다시 나오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던지, 어느새 커피잔에서는 더 이상 김이 오르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마나실 경이라면 들어는 주지 않을까 해서."

"말씀하시지요. 듣겠습니다."

앨런은 그 속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조금쯤 짐작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고 체이스는 커피에 시선을 둔 그대로 입만 열어 말을 시작했다.

"시간의 축이 사라졌다 말한 것을 기억합니까."

예상대로 시간의 축이 언급되었다.

"네. 기억합니다."

"지난해 봄, 축이 사라지던 그 날 그 자리에 내가 있었습니다."

죽은 베른이 칼리안의 몸을 지니고 눈을 떴던 바로 그 날을 말하는 것일 터였다. 앨런은 대답 없이 다음 말을 기다렸다.

체이스가 자신의 머리를 툭툭 건드려 보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몇 달 전부터 생소한 기억들이 하나씩,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그렇게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겪지 않은 일에 대한 기억이 하나씩 머릿속에 새겨질 때 얼마나 소름돋는 기분을 느꼈는지에 대해서는 덧붙이지 않았다.

"믿기 힘든 일이었으니 처음에는 그저 긴 꿈을 꾼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다 기억 속의 일들이 그대로 반복되는 것을 느낀 뒤에는 의심을 했습니다. 아, 물론 몇번인가는 내가 미쳐가는 것 같다고도 생각했고."

체이스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상당히 거친 표현이 들어 있었다. 혼자 혼란스러워하던 그때가 생각났는지 기운 빠진 웃음 소리를 내던 체이스가 말을 이었다.

"그러다 결국은 믿을 수 밖에 없게 됐습니다. 단순한 착각 혹은 내가 미쳐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가 겪었던 일을 기억해내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앨런도 잘 아는 바와 같이 체이스는 신중한 사람이었다.

눈 앞에서 시간의 축이 사라진 뒤 변화를 겪었음에도 스스로의 기억이 단순한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온전히 믿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을 터였다.

"마치 앞으로의 일을 보고 온 것처럼."

앨런이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베른과 체이스가 겪었다 말하는 현상이 서로 달랐다.

그러니 체이스는 스스로 시간을 되돌아온 것이 아닐 터였다. 그저 시간의 축이 지워낸 일들을 기억해내고 있을 뿐.

시간의 축이 사라지던 자리에 있던 탓인지 혹은 다른 이유가 더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어찌됐건 중요한 사실은 체이스가 이미 사라진 일들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는 것에 있었다.

"언제부터 언제까지, 얼마큼을 기억하십니까."

앨런의 질문에 체이스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체이스의 말을 들은 앨런은 놀라지 않았다. 들은 말을 되묻지도 않았다. 단지 확인이 필요한 것에 대해 묻고 있었다.

체이스가 작게 웃었다.

"진작 올 걸."

혼자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안 허탈감 때문에 체이스가 잠시 그렇게 웃었다.

"말했듯이 축이 사라진 것은 지난 봄.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은 겨울부터 시작된 일이고 과거의 일들은 거의 다 기억합니다. 앞으로의 일은 때때로 생각 나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고."

그 말에 앨런은 목구멍까지 튀어나오는 질문 하나를 간신히 삼켜 넣었다. 차마 베른을 기억하느냐는 그 말을 먼저 꺼낼 수 없어서였다.

그것을 본 체이스가 입을 열었다.

"그것 때문에 아무래도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축하 할 일이 하나.

그리고 만날 이가 한 명.

그것이 체이스가 이 곳에 온 목적이었다.

"무엇을 확인하고자 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무래도······."

체이스의 말은 잠시동안 이어지지 않았다.

'잊지 말아야 했던' 기억을 다시 떠올리고 있는 것 같았으므로 앨런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체이스가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내 형제가, 여기에 있는 것 같아서."

앨런이 소리내서 웃었다.

긍정할 수도 그렇다고 부정할 수도 없던 탓에 웃었다.

이미 죽었어야 할 왕자가 저렇게 버젓이 살아서는 체이스의 기억과 유난히 다른 행보를 걷고 있으니 어찌 모르겠는가.

"혹, 저하의 아우를 시간의 축으로 살리려 하셨습니까."

시스파니안으로부터 내용을 들었던 칼리안이 이미 아니라는 이야기를 했었지만 직접 답을 듣고자 꺼낸 질문이었다.

"그것을 빼앗기 위해 일으킨 전쟁, 그리고 지키기 위해 받아들인 전쟁입니다. 시간의 축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내 형제가 죽었습니다. 그리 떠난 것을 살리겠다고 시간의 축을 사용할 만큼 내 생각이 짧지는 않습니다."

시스파니안이 이미 답했던 내용과 같았다.

"그러니 나는 끝까지 지켰을 뿐. 손 대지 않았습니다."

상황이 그 지경이면 한번 돌려볼 만 하지 않느냐고.

앨런은 그런 말이 튀어나오는 것을 간신히 삼켰다.

불만과 답답함이 가득해 보이는 앨런의 얼굴 때문에 체이스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 문득 생각났다는 것처럼 화제를 돌렸다.

"어제 나를 보았을 때의 반응을 보니 아무래도 내가 기억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내용에 대해 굳이 이야기하지 말아주었으면 합니다."

다시 칼리안에 대한 이야기였다.

"잘 있는 것을 확인했으니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뭐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앨런은 그저 한참 뒤에 고개만 끄덕였다.

체이스가 꺼내둔 갑작스러운 이야기를 들으며 당황하고 놀란 탓에 잊은 것이 둘 있음을 미처 깨닫지 못한 채였다.

칼리안과 이런 이야기를 할 때 늘 꺼내두던 사일런트를 잊었고, 문 밖에 가만히 서 있던 시종이 있음을 잊었다.

따라서 이번에도, 키리에는 다 들었다.

* * *

산책이나 하자는 말에 칼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앞에 서 있던 키리에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눈치였으나 일단은 란델과의 일이 먼저였다.

때문에 칼리안은 얌전히 란델을 따라 나섰다.

다음 일정까지 시간이 촉박했으므로 둘은 잠시 아르피아 궁 후원으로 갔다.

한참을 걷도록 란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때문에 칼리안은 이번에 또 무언가 들킨 것이 있는지를 심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미 까발려질대로 까발려진 능력 말고는 다른 것이 없었다.

'아니면 설마 플란츠와 등 돌린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나.'

하지만 그 후로도 란델은 계속하여 말이 없었다.

그래서 정말 이대로 산책이나 하다 돌아가자는 말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자 칼리안은 더 기다리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불편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무슨 꿍꿍이를 가졌는지도 알 수 없을 뿐더러 그간 칼리안을 어떻게 여겨왔는지를 안 이상 좋은 태도로 란델을 대하기가 힘들었다.

"물을 것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레넌 브리센을 찾고자 한다."

나란히 걷고 있었으므로 란델이 칼리안의 표정을 보지는 못했다. 따라서 칼리안은 마음 놓고 미간을 찌푸렸다.

서른 명의 신관과 그레이에 이어 이제는 레넌 브리센이다.

과연 세 가지가 다 란델과 연관 있는 것이 맞기는 한가 싶을 만큼 서로간의 상관관계가 너무 없었다.

"그 자를 왜 저에게 물으십니까."

"휘트린 영지의 수익금이 어느 정도인지를 내가 모르고 있었겠느냐. 네가 브리센 자작을 어떤 방법으로 치웠는지 역시 모르고 있지 않다. 그러니 그의 행방 역시 알고 있지 않더냐."

칼리안이 어느 정도의 영향력이 있는지를 알면서도 그냥 두고 보았다는 말.

"······ 그것을 아시면서 왜 모르시는 척 하셨습니까."

"나에게 해가 될 것이 없지 않더냐."

가만히 두면 알아서 실리케도 없애고 브리센도 야금야금 줄여주니 란델이 칼리안을 막을 이유가 있었겠나.

아무튼 란델이 정황을 이미 다 알고 있다 해서 덥썩 물어버릴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그새 또 들키고 왔느냐며 앨런에게 끝없는 잔소리를 또 들어야 할 터였다. 때문에 칼리안은 일단 발을 뺐다.

"레넌 브리센의 행방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릅니다."

"네가 이렇게까지 경계할 필요 없는 일이다. 굳이 숨겨주는 이유를 모르겠구나."

그 말에 칼리안이 실소했다.

그야말로 의미 없는 말이었다.

"경계할 필요가 없다 하나 제가 이렇게까지 날을 세우게 만든 것은 바로 란델 형님이십니다."

칼리안은 고개를 돌려 란델의 눈을 쳐다봤다.

그리고 체르밀 궁의 계단을 올라갔던 날을 떠올리며 말했다.

"형님이 만들어 두었던 선을 제가 넘었다 여기시는 것 아니었습니까."

란델은 그에 대해 별달리 부정하지 않으며 말했다.

"브리센 자작의 일은 내 개인적인 사정이다. 확인할 것이 있을 뿐, 자리 싸움과는 관련 없는 일이니 그렇게 날 세우지 말거라."

란델의 그 말과 함께 칼리안의 발이 잠시 멈칫했다.

'개인적인. 자리 싸움과 관련 없는.'

저 말 때문에 한 가지 사실이 떠오른 까닭이다.

란델은 자신에게 등을 돌리겠다는 뜻을 명확히 한 칼리안을 굳이 불러내어 레넌의 행방을 물었다. 세자위 싸움과는 관련이 없다지만 란델에게는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소리였다.

서른 명의 신관을 왜 들여왔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레이와 레넌을 불러 란델이 확인하고자 할 일이 무엇인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칼리안은 곧바로 다시 발을 놀렸다. 때문에 란델은 방금 자신이 칼리안에게 무엇을 떠올리게 했는지를 눈치채지 못했다.

'설마. 전 왕비 아이샤의 죽음에 대해 확인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그런 생각에 칼리안이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만약 란델이 이 일을 알게 되면 텐실과의 전쟁이 시작될 지도 모른다.

당연히 그것은 베른의 과거에서는 없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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