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97화 (98/527)

제19장. 형님 (5)

한동안 말 없던 앨런의 입이 열렸다.

"그래요. 이제 정해도 되겠습니다, 왕자님."

이럴 땐 대꾸하지 않는 것이 답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칼리안은 얌전히 앨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왕자님 비밀을 누구에게 알려주실 것인지 미리 정해주시지요. 모르는 놈 얼마 남지도 않았으니 알려주실 순서 정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칼리안이 걱정되는 마음에 서둘러 일을 끝내고 와 보니 이번에는 플란츠에게 비밀을 말했단다.

물론 칼리안은 정말로 플란츠에게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시간이 되돌아갔다는 것과 체이스와의 관계만 말했다. 나머지는 그간 칼리안이 보여준 행동이나 이전에 둘러댔던 말들을 잘 엮은 플란츠가 혼자 알아낸 것이다.

······ 라고는 해도.

아니 아무리 그래도 너무하지 않느냔 말이다. 차라리 얼마나 더 들키고 다닐지를 지켜보는 것이 속이 편할 판이 아닌가?

곧 앨런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했다.

화를 내야 하는데 오늘 체이스의 일로 마음 고생 한 것을 알고 있으니 다른 말을 더 못하는 중이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조금 전 플란츠가 놓고 간 술을 얼른 건넸다. 하다하다 로튼 대장간의 주인에게까지 들킬 뻔 했다는 것, 아니 어쩌면 조금 들켰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절대 말하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이제 정말 더 없을 겁니다."

그나마도 확답이 아니다.

그 말에 하도 기가 차서 결국은 앨런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나왔다. 그와 함께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었다. 스승의 화가 풀렸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아무튼 화가 풀렸다 해서 얽힌 속까지 풀린 것은 아니었으니 앨런은 칼리안이 건네준 술을 혼자 따라 마셨다. 그리고는 저도 모르게 놀란 눈을 하며 물었다.

"왕자님의 형님이 그간 이런 것을 마셨었답니까?"

마시려고 구한 술이 아니라 여기저기 뿌려대려고 구한 것이었으니 모르긴 몰라도 상당한 독주였을 터였다.

아무튼 칼리안은 별다른 대답 없이 앨런의 빈 잔에 술만 더 따라줬다. 제 비밀 지키는 건 젬병이어도 남의 비밀은 잘 지키는 칼리안이니까.

"한 잔 안하시겠습니까? 어차피 다 들킨 판에."

"저 술 끊었어요, 스승님."

여전히 앙금이 남아있는 앨런의 말에 칼리안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 * *

많은 이들이 참으로 속 시끄러운 하루를 보낸 다음 날.

그 원인을 불러온 르메인을 위한 카이리스 국왕 탄신 기념일 축제가 시작되었다.

사실 르메인이라 해서 생일 맞이가 특별히 다르지는 않았다.

눈을 뜨자마자 붉은 석류 주스를 마시는 것도 붉은 색 가득한 음식으로 아침 식사를 시작한 것도 똑같았다. 다만 칼리안과 달랐던 것이 있다면 나이 수 만큼의 라프라니아 꽃을 받지 않았다는 것 뿐이다.

칼리안이야 메를린이 챙겼었다지만 르메인은 아니었다. 때문에 르메인은 이른 아침부터 떨떠름한 표정으로 찾아온 앨런과 그 옆에서 서른 아홉 송이의 라프라니아 꽃을 들고 있는 시종장 라울을 보며 질색하는 얼굴을 했다.

"그것이 무엇인가."

르메인의 질문에 라울이 느리지만 정중한 말투로 대답했다.

"네 전하. 마나실 백작이,"

"버리게."

르메인이 라울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이렇게 말했다.

덕분에 앨런은 하나도 익지 않은 배를 씹은 표정이 됐고 라울이 매우 난처한 얼굴을 했다.

앨런은 르메인이 무엇을 오해할지 익히 예상했다. 때문에 억울했다.

"오해 마시지요."

세상에서 앨런이 꽃을 사 주는 이는 딱 한 명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 베로니카 뿐이었다. 몰래 체이스를 불러오기나 하는 르메인 같은 놈에게 앨런이 무슨 이유로 꽃을 챙겨 주겠는가?

그러니 당연히 그 꽃은 앨런이 준비한 것이 아니었다.

"저는 다른 이유 때문에 따라 들어온 길입니다."

앨런은 르메인의 방에 꽃과 함께 들어온 이유 즉 손에 들린 보고서를 르메인의 책상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매우 마뜩찮다는 얼굴로 말했다.

"꽃은 어여쁜 제 제자가 전해달라 한 것이니 버릴 필요 없이 잘 받으시면 됩니다."

그 말을 들은 르메인의 눈이 다시 라울에게로 향했다. 다시 한번 발언권을 얻은 라울이 조금 더 빠르고 정중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네. 마나실 백작이, 칼리안 왕자님이 보내온 꽃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쓸데 없는 앨런의 이름이 들어가 있었지만 결론은 칼리안이 준비해서 앨런 편에 전한 것이라는 소리였다.

사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메를린의 말을 들은 얀의 의견을 수락한 칼리안이 다시 메를린을 통해 꽃을 준비시킨 뒤 앨런과 라울의 손을 거쳐 르메인에게 전달한 것이라 해야 맞을 테지만. 칼리안도 그런 것을 알아서 챙길 만큼 세심한 성격이 되지는 못했으니 말이다.

어차피 아침 일정으로 르메인에게 인사를 하러 오겠지만 다른 형제들이 있는데 칼리안만 꽃을 들고 가기가 어려워서 미리 보냈을 뿐이었다.

르메인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고 라울은 조심스럽게 책상 위에 꽃을 올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붉은 꽃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앨런이 이 상황을 빚어낸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 질문했다.

"새 결혼은 안 할 요량이십니까?"

그 말에 르메인은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을 얼굴에 드러냈다. 어떻게 보면 답답한 것도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화가 난 듯한 표정이었다.

"그 이야기 좀 그만."

따라서 이렇게 나온 대답에 앨런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지간히도 시달리는 모양이란 생각이 든 탓이다.

그럴만도 한 것이 안 그래도 최근 들어 새 왕비를 맞이하라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왕자가 셋이나 있고 머지않아 란델이 결혼을 해야 할 나이인데 그런 말이 나오니 짜증이 날 수밖에.

- 똑똑.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시종장 라울이 다시 들어왔다.

이제 세 왕자가 탄신일 축하 인사를 위해 올 것이라는 말이 이어졌고 앨런은 그 말을 들으며 밖으로 나왔다.

르메인의 생일을 기념하는 행사가 이어지는 동안 앨런은 체이스와 이야기를 좀 나눠 볼 생각이었다. 앨런을 만나러 왔다던 체이스가 정작 어제 하루 종일 다른 일정으로 바빴던 탓에 앨런과 따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 * *

르니에리에서 벗어나니 이제는 장미다.

이러다가는 세상의 온갖 꽃이 다 꺼려질 것 같은 기분에 꽃봉오리 가득한 장미 정원을 보던 칼리안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별 생각 없이 창 밖을 보았을 뿐인데 기분이 급격히 가라앉았다.

장미를 보니 생각이 났다.

오늘만은 마주침을 피할 수 없을 사람. 바로 란델이었다.

칼리안의 기분이 영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품 속의 고양이가 이상한 울음소리를 냈다.

"므에옹!"

'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가 지금 칼리안의 품에 안겨 있었다.

맞다.

고양이는 아직까지도 이름이 없었다.

레이븐의 이름은 단박에 지었던 칼리안이었으나 고양이 이름은 지어주지 못했고 다른 이들은 칼리안의 고양이에 감히 마음대로 이름을 붙이질 못했다.

아무튼 히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라고만 불리는 녀석을 칼리안에게 맡겨두고 광장의 일을 지원하기 위해 나갔다. 그리고 그 고양이를 칼리안으로부터 다시 받아들며 얀이 말했다.

"이제 가셔야 합니다. 고양이 털 떼세요."

"응."

여전히 정원에 시선이 닿아있던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왕자의 정복에 새하얗게 내려앉은 고양이 털을 마법으로 털어낸 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얀과 키리에를 대동한 채 아르피아 궁으로 갔다. 르메인이 이미 아르피아 궁에 나와 있었으므로 올해에도 그 곳에서 왕자들을 맞이하기로 한 탓이다.

"대화 나누고 나오세요."

그런 말과 함께 르메인과의 대면 자리에 칼리안을 보내 둔 얀과 키리에는 다른 시종들과 함께 르메인의 집무실 밖에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러다 제 옷에도 고양이 털이 붙은 것을 본 얀이 그것을 떼어내는데, 멀리서부터 저벅 저벅 하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르메인은 물론 왕자들까지 모두 집무실 안에 든 상태였고 시종이나 시녀들은 발소리를 내지 않았다. 때문에 누구의 발소리인지 알기 위해 고개를 든 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딱 보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을 청은색의 긴 머리, 체이스였다.

르메인 집무실의 맞은편. 그러니까 앨런의 집무실에 찾아온 체이스가 잠시 발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예를 보이는 시종들 중 키리에를 향해 걸어왔다.

"어제 보았던 아이구나. 칼리안 왕자의 시종이었지."

그리고는 이렇게 아는 체를 했다.

생각지 못한 상황이었으나 그래도 그 동안 얀에게 배운 것이 있었으므로 키리에는 당황하지 않고 정중히 대답했다.

"세크리티아의 왕세자께 인사드립니다. 칼리안 왕자님의 시종입니다."

그러자 체이스가 부드러운 음색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네 검술이 아주 뛰어나다 들었다. 그 술집에서의 일도 들었고. 세크리티아의 새들은 참 부지런하거든."

"저하."

세크리티아의 세작을 통해 도박장의 이야기를 전해들었다는 소리였으니 깜짝 놀란 기사 테일란이 체이스의 말을 막아섰다.

키리에가 속으로 잠시 웃었다.

칼리안이 비밀을 잘 들키는 것은 아무래도 체이스를 닮은 모양이다. 심지어 체이스는 제 비밀도 아니고 세크리티아의 비밀을 입에 올리고 있었으니 그나마 칼리안이 낫다고 보아야 할 일이다.

아무튼 테일란의 저지에 살짝 웃어보인 체이스가 다시 키리에를 보며 물었다.

"이렇게 기억이 난 것도 인연일테니. 네 이름이나 알고 싶구나."

순간 키리에가 머뭇거렸다.

얀이 얼른 키리에를 쳐다보았다. 왕족이 이름을 물을 때 머뭇거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세크리티아라 해서 다르지 않은 예법이었다.

다행히 체이스는 별다른 말 없이 키리에의 말을 기다렸다.

"키리에, 입니다."

성은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세크리티아에서는 성이 없는 평민도 왕궁에서 일을 한다 했으니 그렇게만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런데 체이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물었다.

"성은 없느냐."

고개 숙인 키리에가 눈을 질끈 감았다.

"제 성은······ 베른입니다."

체이스의 눈이 아주 잠시 놀란 빛을 띄었다. 그러나 곧 다시 웃는 낯이 된 체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키리에 베른. 그것이 네 이름이구나."

"네. 그렇습니다."

이만 체이스의 앞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음에도 체이스는 키리에를 놓아주질 않았다. 소드마스터인 칼리안이 데리고 있는 아이인데다 무력도 강하다 하니 관심이 간 듯 하다고, 얀은 그렇게 생각을 했다.

"신기한 일이구나. 네가 가진 성은 세크리티아의 왕실에 내려오는 아주 오래된 말이다. 알고 있느냐."

칼리안은 베른이라는 이름에 무슨 뜻이 담겼는지 알려준 적 없었다. 그저 좋은 의미라는 말만 했을 뿐 정확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었다.

"세크리티아 왕실에 내려오는 말은 제가 알지 못합니다."

양신 전쟁이 발생했을 때보다도 훨씬 전에 사용했다던 대륙의 고대 언어. 그것이 전해져 내려오는 곳은 오직 세크리티아 뿐이었다. 그러니 카이리스의 키리에가 그것을 알리는 만무했다.

체이스 역시 키리에가 그 뜻을 알고 있기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는지, 다시 입을 열어 설명을 해주었다.

"베른. 잊히지 않을 영웅이라는 뜻을 지닌 말이다. 그러니 너에게도 썩 어울리겠구나. 카이리스에서는 의미가 없을지라도 좋은 뜻이니 기억해두려무나."

"그렇게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도 감사하지 않습니다.

잊히지 않을 영웅이라니.

정말 그런 뜻이라면, 그 말은 완전히 틀렸으니까요.

* * *

앨런은 체이스와 키리에의 대화를 중간에 끊지 못했다.

괜찮겠지 생각해서 그냥 두었던 것인데 베른이라는 이름까지 언급되는 것을 깨닫고는 뒤늦게 후회를 했다.

결국 키리에의 감사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집무실 문을 연 앨런이 서둘러 체이스를 불렀다.

"바깥 분위기가 이렇게나 화기애애하니 홀로 듣고 있기가 적적합니다. 어서 드시지요."

그 말에 고개를 돌린 체이스가 키리에를 보며 짧은 인사를 건넨 뒤 앨런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테일란을 포함한 모든 수행원들을 밖에 둔 채였다.

문이 닫히고 앨런의 맞은편에 앉은 체이스가 뒤늦은 대답을 했다.

"이곳에서 그 말을 듣게 되어 반가운 마음에 대화를 좀 나누느라 늦었습니다."

"네. 듣고 있었습니다."

곧 앨런이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시고 내려놨다.

전날 마신 술 때문인지 속이 타는 느낌이 든 까닭이다.

"커피 좋아하는 것은 여전하군요, 마나실 경."

세크리티아에서는 남작이고 카이리스에서는 백작인 앨런이었으므로 무어라 불러야 할지 고민하다 그냥 존칭만 붙이기로 한 모양이었다.

"항상 일이 많으니 이것이 없으면 이제 불안합니다."

"이해합니다. 항상 있던 것이 없으면 불안한 마음."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한 체이스가 잠시 앨런의 커피잔을 쳐다봤다.

커피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수증기가 흩어지는 모습이 서너 번 쯤 반복되었을 때 체이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항상 없던 것이 생겨나도 불안하더군요."

그 말이 가진 뜻을 가늠하기가 어려웠던 앨런이 체이스를 쳐다봤다.

"잊어서는 안될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내가."

항상 잊고 지내던 기억이 떠올랐다는 그 말을 하기 위해 이 먼 타국까지 찾아온 체이스가 앨런을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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