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96화 (97/527)

제19장. 형님 (4)

사력을 다해 멈춰야 했던 것이 비단 레이븐만은 아니었다.

마지막 순간에 그토록 찾았던 체이스가 눈 앞에 있었다. 때문에 손과, 발과, 말과, 눈빛까지, 모두 다 잡아당겼다. 칼리안은 정말, 죽을 힘을 다해 잡아당겼다.

"정말 만나고 싶었습니다, 칼리안 왕자."

그렇게 마음을 다스리던 칼리안의 머릿속이 순간적으로 새하얗게 변했다. 지금 당장 칼리안이 하고 싶은 말이 아닌가. 그런데 그 말을 꺼낸 것은 오히려 체이스였다.

아무것도 모를테니 그 이름난 3왕자를 비로소 만났다는 생각 때문에 저리 말하는 것이다.

동요하지 말자.

동요하면 안 된다.

칼리안이 간신히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 역시, 같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을 하고는 있었으나 체이스라는 그 이름만은 입 밖으로 내질 못했다. 이름을 말했다가는 형님이라는 말이 함께 튀어나올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짧은 말 끝에 입을 다물었다.

"인사는 차차 나누셔도 될 터이니 우선 앉으시지요."

눈치 빠른 앨런이 이런 말로 잘 나서 주었다.

덕분에 다른 말을 더 하지 않고 자리에 앉게 된 칼리안이 잠시 고개를 숙였다.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칼리안을 한번 본 앨런이 소리 없이 혀를 쯧 찼다. 똑똑하게 굴던 놈이 체이스 앞에서는 영 맥을 못추고 있지 않은가.

당연한 일이니 탓할 마음은 없었다. 그저 안쓰러운 마음만 들었다. 그리고 이 사달을 만든 그 놈의 르메인이나 빨리 들어와서 오찬을 시작하고 끝내주기를 바랄 뿐이다.

물론 칼리안이 평소답지 않은 것을 눈치 챈 것이 비단 앨런만은 아니었다. 플란츠도 묘한 눈으로 칼리안을 보고 있었다.

'아우님이 오늘따라 왜 저러나.'

이런 얼굴을 한 채였다.

그런 플란츠와 눈이 마주친 뒤에야 칼리안은 비로소 정신을 조금 차렸다.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체이스만은 아니라는 것을 제대로 깨달은 것이다.

이제까지 마음 먹고 잘 적응해 온 칼리안으로서의 생을 한 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다. 그것을 상기한 칼리안은 테이블 밑의 주먹을 꽉 쥐고는 다시 체이스 쪽을 쳐다봤다.

그러다 주먹 쥔 손에 다시 한번 힘을 주어야 했다.

체이스의 곁을 지켜야 했던 베른보다 먼저 발칸의 수도 입성을 막아선, 그리하여 그 목숨으로 세크리티아의 멸망을 사흘 뒤로 미뤄 주었던 테일란 카스트린. 베른의 스승이기도 했던 그가 이제는 제자를 보는 눈이 아닌 매우 흥미로운 상대방을 살피는 얼굴로 칼리안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 스승님.'

칼리안이 왕궁 입구에서 체이스를 발견했을 때 곁에 있던 테일란도 보았다. 때문에 칼리안은 세뉴 관에 들어서기 전에 오러를 가리고 있던 마법을 해제한 상태였다.

들키는 재주가 남다른 칼리안이 이 와중에 이것을 챙길 수 있었던 것이 실로 다행한 일이었다. 만약 테일란이 칼리안의 힘을 느끼지 못했다면 무슨 일이 생겼을지 모를 일이니까.

테일란이 칼리안을 쳐다보는 것을 느꼈는지 앞에 앉아 있던 체이스가 부드러운 웃음과 함께 칼리안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얼마 전에 칼리안 왕자가 검의 길에 올랐다는 소문을 듣고 많이 놀랐습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칼리안은 다시 한번 짧게 대답했고 체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플란츠를 보며 말했다.

"사적인 이야기지만 나로서는 참 부러운 일입니다, 플란츠 왕자. 저런 동생을 두었으니."

그리 부러우면 그냥 데려가서 네 동생 삼으시라고.

체이스를 만났을 그 때부터 심사가 꼬여있던 플란츠는 그렇게 대답을 할까 하다 잠시 옆에 앉은 칼리안을 쳐다봤다.

사실 별 생각 없이 돌렸던 시선이었다.

그런데 칼리안의 얼굴이 보였다. 그래. 그 얼굴이 보였다.

플란츠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제야 알았다.

계속 느껴온 거부감의 이유가 저 세크리티아 놈한테서 칼리안 냄새가 풀풀 났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리고 왜 그렇게 칼리안 냄새가 났는지, 그 이유를.

도저히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알게 되었다.

때문에 플란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체이스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리고 비꼼이라고는 전혀 들어있지 않은 말로 대답을 전했다.

"당연히.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세상 어디에 내어놓아도 자랑스러운 내 동생이 아닙니까."

세상 둘도 없을 다정한 형의 모습이 되어 이렇게 말을 맺었다.

둘의 사이가 얼마나 안 좋은지에 대해서는 세작들을 통해 이미 다 들었을 텐데도, 체이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체이스만 고개를 끄덕였다.

앨런과 키리에는 자신들의 귀를 의심하느라 다른 곳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특히 앨런은 순간적으로 플란츠가 다시 술에 손을 대는지를 의심한 자신의 모습을 반성했다.

체이스가 하필 '동생'이라는 말을 언급하는 바람에 다시 한번 혼이 나가버리는 기분이 되었던 칼리안 역시 그 말을 들었다. 왜 어울리지도 않는 다정한 말을 했는지도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과찬이십니다······ 형님."

칼리안이 작은 웃음소리를 냈다.

플란츠.

또 알아냈구나.

······ 실로 애증하는 형님 같으니.

* * *

르메인을 만나고 나온 슬레이만이 옆에 서 있던 얀을 쳐다봤다. 그리고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가 한 말에 대해서 나도 들었다."

"무슨 말이요?"

"칼리안이 소드마스터에 올랐던 이유에 대해 르메인에게 뭐라 했는지를 말이다."

"아, 그 일이요."

아무것도 모르는 채 말똥말똥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얀을 보며 슬레이만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차마 저 얼굴에 대고 화를 낼 수가 없다.

"그래. 내가 가끔 그런 생각을 하긴 했다. 이 놈이 내새끼가 맞나, 하고."

누가 봐도 슬레이만의 새끼다.

일단 그 머리 색과 눈 색부터가 똑같았으니 나란히 놓고 보면 얀은 분명한 새끼 코끼리였다.

때문에 얀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버지 자식이 맞으니까 지금까지 안 들키고 있죠. 귀티가 영 안나니까요."

누가 봐도 얀은 공작 아들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물론 슬레이만 역시 일국의 공작으로 보기에 어려움이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러니 둘은 어엿한 부자지간인 것이다.

그런 얀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슬레이만이 입을 열었다.

"그렇지. 내새끼가 맞긴 맞지."

"네. 맞죠. 갑자기 그런 말씀은 왜 하시는데요."

그나마 칼리안이 내치지 않고 잘 보듬어주면서 데리고 다니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냥. 내가 마음이 참 복잡해서 그런다."

심지어 칼리안은 얀이 공작 아들이라서 참아주고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그야말로 은인이 따로 없다. 아비로서 칼리안에게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애잔한 얼굴을 한 슬레이만이 곧 손을 들어올려 얀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그래······. 건강하게만 살아라. 너만 좋으면 됐다."

평생 얀을 보며 저 말만 한 탓에 얀이 정말 건강하게만 살고 있다는 것을 왜 모르겠냐만은 이제 와서 또 무슨 말을 하겠는가.

부스스해진 머리를 다시 묶던 얀이 물었다.

"오늘 세크리티아의 세자께서 오셨다던데요. 혹시 만나보셨어요?"

카이리스까지 그렇게나 명성이 자자한 체이스였다. 때문에 실제로 보았을 때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던 터였다. 그런데 칼리안이 오찬에 얀을 두고 가는 바람에 만나보지 못했으니 슬레이만에게 묻는 것이다.

그런 얀을 보며 슬레이만이 험상궂게 웃었다.

"내가 세크리티아 왕세자를 만났으면 오늘 이 왕궁에서 하나는 죽어 나갔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세자를 호위한다는 테일란이라는 기사 말이다. 세자를 내가 만났으면 그 놈도 만났을 것 아니냐. 만났으면 한 번은 겨뤄봐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자 얀은 무슨 되도 않는 말을 하고 있느냐는 듯 대꾸했다.

"아버지가 진다면서요. 레아 아직 어려요. 오래 사셔야죠."

"요 이쁜 내새끼 같으니."

아비한테 한다는 말 한번 곱기도 하다.

* * *

플란츠 덕분에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오찬을 마쳤다.

그렇게 방으로 돌아온 칼리안은 곧바로 테라스에 나왔다.

체이스는 이 곳에 보름을 머물다 간다 했다.

앨런을 만나러 온 길이었으니 앨런과의 대화가 길어진다면 그 일정도 더 늘어날 수 있으리라 했다.

보름은 긴 시간이다.

그러니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나아질 터였다.

- 탁!

그렇게 스스로를 다스리며 테라스 의자에 앉아있는데 누군가 다가와서는 테이블에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술이었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실소했다. 그리고 이런 밝은 대낮에 왜 찾아왔냐는 말 대신 조용한 목소리를 냈다.

"술 끊었습니다."

안마신다는 것과 끊었다는 것은 많이 달랐다. 게다가 그 말은 칼리안의 입에서 나올만한 소리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란츠는 별다른 반응 없이 칼리안의 옆에 앉았다.

"내 아우님께서 술을 끊으셨다니 마실 사람이 없군."

"형님 드십시오. 좋아하셨잖습니까."

"마셨던 적 없는데."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칼리안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려 플란츠를 쳐다봤다.

"그 동안 술을 마신 척 연기를 했었다는 말씀이십니까."

플란츠는 별 것 아니라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서로 숨겼던 것을 하나씩 들켰으니 없는 셈 치면 되겠군."

"술 안 마신 비밀과 제 비밀을 같은 값으로 쳐주신다니. 계산이 참 후하시네요."

칼리안이 소리내서 웃었다.

잠시 뒤 칼리안은 몸을 일으켜 침실에 있는 금고로 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검 한 자루를 꺼내왔다. 오전에 찾아왔던 두 자루의 운철 검 중에 둘 중 덜 날렵하고 더 묵직한 검.

바로 브리센 가의 검술에 맞춰 만든 것이었다.

"레이븐을 주셨으니 그 값이라 생각했는데. 셈이 틀렸네요."

그 검을 플란츠의 앞에 내려 둔 칼리안이 이렇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손바닥의 흉터를 보여주며 말했다.

"레이븐은 그냥 이 흉터 값으로 치고 그 검은 제 비밀 값으로 치면 맞겠습니다. 형님 술 안 드신 것은 그냥 제가 비밀로 삼겠습니다."

플란츠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레이븐은 본래부터 흉터 값이 맞았으니 딱히 할 말도 없었다.

"어차피 헤르츠 경에게 검도 잃으셨으니 형님 쓰십시오."

그 망할 놈의 마법사.

플란츠의 눈매가 급격히 사나워졌다.

잠시 그렇게 짜증을 내던 플란츠가 손을 뻗어 검을 뽑아들었다. 그러더니 곧 부드럽게 뽑혀나온 그 검날에 완전히 매료된 표정이 되었다. 얼마 전 아르센이 검을 부쉈던 일에 대해서는 잊은 얼굴이었다.

칼리안이 설명을 덧붙였다.

"만든 이의 말로는 오러 정도는 충분히 담아낼 것이라 했으니 열심히 수련하시라는 의미로 드리는 겁니다."

"비밀 지키는 값으로는 과한데."

"과하지 않습니다."

칼리안은 그 검이 원래 플란츠가 썼던 것이라는 소리는 굳이 하지 않은 채 이렇게만 말했다.

다만 남은 한 자루의 원래 주인이어야 했을 슬레이만에게 갈 검이 없었다. 그것은 키리에에게 줄 생각이었다.

슬레이만에게 갈 검을 뺏게 된 것은 그냥 모자란 아들 잘 맡아주는 값인 셈 치기로 했다. 칼리안의 계산은 꽤 정확하니까.

곧 검을 옆에 내려 둔 플란츠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설명을 좀 해 줘야 하지 않나."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다른 사람의 동생 소리에 왜 내 아우님이 죽었다 산 얼굴을 하는지."

이해가 되는 듯 하면서도 결코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이미 다 알아내신 것 같던데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칼리안이 짧은 주문과 함께 사일런트를 발현했다. 어느 정도는 이야기를 해 줘야 할 것 같아서였다.

대신 그보다 앞서 한 가지 물을 것이 있었다.

이제는 답을 알 것 같았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물어보고 싶던 말이었다.

"만약······."

그렇게 운을 뗀 칼리안이 아르피아 궁 쪽을 쳐다봤다.

지금쯤 그 곳에 있을 체이스를 떠올리는 것이다.

"형님께서 정말 원하는 것이 생겼다고 했을 때. 그런데 그것이 다른 사람 손에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다른 놈 손에 든 것 뺏는 취미 없는데."

"그것이 정말로 필요하다면. 그래도 그냥 두시겠습니까."

"그래."

왜 그런 것을 묻는지는 몰랐으나 플란츠는 일단 대답을 건넸다.

칼리안이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대체 전쟁은 왜 일으켰는지 생각하는 것은 바보같은 일이다. 누군가 플란츠의 성격을 바꿨든 혹은 플란츠를 대신해 전쟁을 일으켰든, 어차피 지금의 플란츠는 답을 모를 질문이 아닌가.

답을 안다 해서 바뀔 것도 없었으니.

그냥 플란츠가 실제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 확인했으면 그것으로 되었다는 마음이 들었다.

"시간이 거꾸로 흘렀습니다."

그래서 칼리안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플란츠는 칼리안을 쳐다보지 않았고 칼리안의 말이 짧게 이어졌다.

"저는 저 분의 동생이었고 지금은 형님의 동생입니다."

그 이상을 말할 수는 없었다.

남의 것 뺏는 취미 없다는 이 원수같은 형님이 뭘 했는지 어찌 알려주겠는가.

그러다 문득 오찬에서 보였던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며 웃었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렇게 구는 것이 쉽지는 않네요."

플란츠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더 놀라지도 않았다. 하도 놀랄 것이 많다보니 그 정도는 이제 그냥 그러려니 하게 되어 버렸다.

그리고 플란츠는 술을 끊었다던 칼리안의 연세가 실제로 어떻게 되시는지는 묻지 않기로 했다. 똑똑한 플란츠는 모르는 것이 득이 될 때도 있다는 것을 잘 알았으니까.

그래서, 자신이 칼리안의 무엇을 빼앗았는지도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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