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장. 형님 (3)
플란츠의 앞에 선 체이스의 발걸음이 멈추었을 때.
르메인의 집무실에 들어서려던 앨런의 움직임도 멈췄다.
앨런이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중얼거렸다.
"······ 어찌 여기를 찾아왔을까."
오찬에 온다던 또 한 명의 손님이 누구인지를 알아챈 순간 앨런은 평소와 달리 전혀 침착하지 않은 얼굴로 르메인의 집무실 문을 노려봤다. 친애해 마지않는 카이리스의 위대한 국왕 전하께서 사상 최악의 개똥같은 일을 벌인 것이다.
칼리안은 과거의 체이스가 카이리스에 왔었다는 말을 한 적 없었다. 만약 올 것을 알았다면 철 모르는 새끼 오리처럼 그렇게 신이 나서 왕궁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을 터였다.
당연한 일이다.
베른이 있던 시간에서 체이스는 왕세자의 몸으로 타국에 올 만큼 위험천만한 일을 벌이지 않았으니까.
'베른이 없는 것이 어떤 영향을 주었기에 체이스가 직접 이 곳으로 왔다는 말인가?'
체이스가 누구를 만나겠다고 이 곳까지 왔을지는 모를 앨런은 그저 이런 생각에 황망해 할 뿐이었다.
게다가 하필이면 체이스와 플란츠가 만난 것 같았다. 둘 모두 베른과 연관된 기억이 없을 텐데도 풍겨오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앨런은 르메인의 집무실에 가려던 것을 미루고 밖으로 향했다. 혹시라도 칼리안이 보기 전에 체이스를 데리고 들어오기 위해서였다.
'흔들릴 것이다.'
칼리안은 분명히 흔들릴 터였다.
준비할 시간을 줘야 했다.
아르피아 궁의 건물 내에서는 공격마법이나 이동마법은 전혀 쓸 수 없었다. 국왕의 안전을 우려한 시스파니안의 혜안에 마음 깊이 감사하며 앨런은 걷는 속도를 더 높였다.
* * *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것이 체이스가 플란츠에게 건넨 첫 마디였다.
왕족 대 왕족.
본래대로라면 체이스와 플란츠의 수행원이 서로가 누구인지를 설명하는 과정이 있었어야 했다. 그런데 체이스가 나선 것이 너무 빨랐다.
그런 체이스가 꺼낸 것은 정말 평범한 한 마디였고 별 다를 것 없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칼리안의 말버릇이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 플란츠는 또 한번 깊은 거부감을 느꼈다. 생전 처음 보는 놈을 상대하는데 왜 자꾸 내 동생 놈 냄새가 나느냐는 말이다.
칼리안이 누구를 닮았는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니 플란츠는 지금 이렇게까지 불쾌한 기분이 드는 이유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반가운 것은 알겠는데."
플란츠가 여전히 체이스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낮은 목소리를 냈다.
체이스는 분명 다른 나라의 세자였다.
게다가 아무리 대국 카이리스라고는 하나 세크리티아가 카이리스의 종속국인 것도 아니었다. 양국의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수행원들이 설명을 하지 않았더라도 둘은 이미 서로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러니 먼저 예를 보여야 할 것은 분명 플란츠였다.
하지만 플란츠는 체이스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감히. 일국의 왕자 앞에서 낯을 가리는 것은 어느 나라의 예법이지."
주변의 공기가 하얗게 얼어붙는 느낌이 든다.
카이리스의 2왕자.
플란츠이기에 보일 수 있는 실로 오만한 태도였다.
로브 안의 이가 체이스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던 시종의 입이 벌어졌다. 동시에 체이스의 뒤에 서 있던 기사에게서 강렬한 투기가 뿜어져 나왔다. 동요하지 않은 것은 오로지 플란츠 자신과 체이스 뿐이었다.
로브 아래로 보이던 체이스의 입술이 작은 웃음을 지었다.
빌어먹을.
저렇게 웃는 꼬락서니도 칼리안과 똑같다.
이런 생각에 플란츠가 다시 날 선 말을 꺼내들려 할 때 체이스가 손을 움직였다. 그는 앞으로 나서려는 기사를 물린 뒤 천천히 손을 올려 후드를 벗었다.
"내가 계속 이런 차림으로 오다 보니."
청은색의 긴 머리카락이 잠시 흔들렸고 짙은 보라색의 눈이 플란츠를 향했다.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플란츠 왕자."
그저 설명을 했을 뿐, 그 말에 미안함이나 변명은 들어있지 않았다.
순간 플란츠는 로브 아래 든 생김새가 칼리안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에 저도 모르게 안도했다. 그리고는 이제야 알아봤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 이런."
그렇게 말한 플란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도 천만다행으로 양 쪽 입술이 고르게 올라갔다.
그리고 정말 간신히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만큼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물었다.
"세크리티아 왕세자께서 이 먼 곳까지 무슨 이유로 오셨는지."
플란츠 역시 사과의 뜻 따위를 입에 담을 성격이 아니었다.
일부러 이렇게 삐딱하게 구는 것임을 모를 리 없건만 체이스는 그리 신경쓰지 않는 얼굴로 플란츠의 예를 받은 뒤 답을 전했다.
"축하할 일과 만날 이가 있어 왔습니다."
이렇게 말한 체이스가 잠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칼리안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엄청난 크기의 왕궁을 둘러보며 말했다.
"하여 이렇게 생각지 못한 대화도 나누게 되니, 이 곳이 어디인지 비로소 실감이 됩니다."
너랑 대화하러 온 것은 아니니 텃세 그만 부려라.
체이스의 말이 플란츠의 귀에는 이렇게 잘 바뀌어 들렸다.
사실 플란츠를 보러 온 것은 아니라 해도 먼저 말을 건 것은 체이스였다. 따라서 플란츠의 대답도 계속 곱지 않았다.
"카이리스까지 오셨는데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모르셨을 리 없을 텐데."
텃세 부리는 것이 당연하단다.
알고 왔을테니 그냥 참으라는 상당히 공격적인 말이었다.
플란츠를 보필하게 된 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지만 궁에서는 오래 있었던 시종 레릭은 플란츠의 심기가 뒤틀릴 때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기사 테일란은 체이스가 평소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굴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때문에 이 둘은 지금 굉장히 난감해하고 있는 상태였다.
두 왕족의 대화는 양국의 관계에도 영향을 줄 수 있었다.
때문에 중재가 필요했으나 레릭은 왕자와 왕세자의 대화에 끼어들 수가 없었고 테일란은 나서지 말라는 체이스의 뜻에 반할 수가 없었다.
"실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체이스 저하. 그리고 좋은 아침입니다, 플란츠 왕자님."
그래서 그 둘은 이렇게 들려온 목소리에 세상이 밝아지는 느낌을 받았다.
* * *
아르피아 궁의 밖의 이런 상황을 눈치챈 이는 또 있었다.
르메인에게 얼굴을 비추러 왕궁을 찾아왔던 공작, 슬레이만 혼 지그프리드였다.
"허어······. 르메인. 아주 대단한 이를 초대했군."
슬레이만이 이름을 부르며 편히 대하고 있음에도 마주 앉아 있던 르메인은 그리 언짢은 얼굴이 아니었다.
사실 둘은 꽤 막역한 사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르메인과 슬레이만이 아니라 르메인의 형 아스난과 슬레이만이 둘도 없이 절친한 사이였다. 그러다보니 르메인과도 격이 없어지게 되었고 둘만 있는 사석에서는 늘 이렇게 대화를 해온 터였다. 그러니 아마도 르메인의 앞에서 그를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 사람은 이 세상에 딱 슬레이만 뿐일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는 듯한 슬레이만의 말에 마주 앉아있던 르메인이 물었다.
"세크리티아 왕세자?"
그 말을 들은 슬레이만이 한참을 웃었다.
항상 조용하던 르메인의 집무실이 떠들썩하게 울렸다.
르메인의 아들인 칼리안이 숨겨둔 것을 알았어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슬레이만이다.
뿐만인가. 친우가 왕위에 오르고자 일을 도모하다 실패하여 탑에 갇힐 때에도 코끼리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그런 슬레이만이 세크리티아 왕세자에게 관심을 가지겠는가.
"내가 언제 왕족을 보고 놀라던가! 당연히 검이지."
왕세자와 함께하는 검.
대륙의 첫번째 검, 테일란 카스트린. 그가 왔다는 소리였다.
"세크리티아의 국왕이 아들에게 왕세자위를 내릴 때 테일란을 함께 내렸다 하더니 이 곳까지 함께 왔나 보군."
"익히 알려진 사실 아닌가."
슬레이만의 감탄에 적당히 대답하던 르메인이 무언가를 깨달은 얼굴이 되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카스트린 경이 온 것을 어떻게 알았나."
"아, 그의 오러를 느낀 게 아니라 투기를 뿜고 있어서 알아챘네. 내가 과연 카스트린 그 자의 오러를 보고 죽을 날이 있으려나 모르겠군."
"카스트린 경이 왜 이 곳에서 투기를 뿜는다는 말인가?"
"여기 왕자 중 한 놈이랑 세크리티아 왕세자가 싸움이라도 벌이나보지."
그 말을 듣기가 무섭게 르메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르메인의 팔을 슬레이만의 커다란 손이 붙들어 앉혔다.
"국왕 전하 엉덩이가 이렇게 가벼워서야. 마법사가 나갔으니 알아서 잘 하겠지."
"왕자와 세크리티아 왕세자간에 다툼이 있으면 안 되지."
이렇게 대꾸한 르메인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슬레이만의 말을 들어 밖으로 직접 나가지는 않고 대신 창가로 걸어가 멀리 보이는 무리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무리로 다가간 앨런이 체이스를 데리고 아르피아 궁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오래지 않아 플란츠가 자리를 떠나는 것도 볼 수 있었다.
"투기가 가라앉았군. 그것 보게, 별 일 아니래도."
한동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르메인이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슬레이만의 말을 대충 흘려들으며 체이스가 들어오는 모습에 집중한 탓에 창 밖에 있던 또 다른 누군가를 보지 못한 채였다.
저 멀리 왕궁 입구.
제자리에 못박힌 듯 서 있던 한 마리의 검은 말을.
* * *
칼리안이 조용히 웃었다.
"······ 그래서였구나."
아침부터 그리도 설렜던 것이.
도무지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만큼 애가 탔던 것이.
검 때문이 아니었다.
칼리안이 시선을 내렸다.
레이븐의 고삐를 쥔 손이 새파랗게 변해 있었다.
레이븐은 자꾸만 앞으로 달려나가려고 했다.
그것을 말렸다.
죽을 힘을 다해 말렸다.
* * *
그날 오찬에 들기 위해 준비하는 칼리안의 안색이 너무 좋지 않아서 얀의 걱정이 컸다.
"아무래도 오찬을 물리고 쉬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평소 같았으면 웃기라도 하며 대답할 칼리안은 차게 굳은 얼굴로 고개만 가로저었다. 그리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키리에를 데리고 다녀올게. 지그프리드 공이 궁에 들었다 하니 만나고 와."
굳이 그럴 필요 없다는 대답을 하려 했으나 차마 거절하기가 어려운 얼굴이었다. 때문에 얀은 그렇게 하겠다 대답한 뒤 키리에를 불러왔다.
오찬이 있을 자리에 가는 동안 키리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얀보다 더 걱정스러운 얼굴로 칼리안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조금 전 앨런이 보낸 사람이 짧은 말을 전했기 때문이었다.
- 세크리티아의 왕세자가 카이리스를 찾았다.
그 이상의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칼리안의 웃는 얼굴이 왜 저모양인지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마차에서 내린 칼리안이 세뉴 관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복도를 따라 한참 걸어가 연회장의 입구에 섰다.
문을 열려는 기사의 손길을 키리에가 막았다.
이곳까지 걸어온 칼리안의 발걸음 소리가 결코 일정하지 않았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잠시 있다 들어가십시오."
칼리안의 입에서 긴 숨이 들고 났다. 그리고는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지 혹은 키리에에게 건네는 말인지 모를 말을 꺼냈다.
"······ 어차피 모르실테니."
칼리안이 누구인지 체이스는 모른다.
조금쯤 어색하게 굴어도 체이스는 어차피 모를 것이다. 앨런은 이해할 것이고 플란츠는 어색함을 눈치는 채겠지만 크게 관심가지지 않을 터였다. 그러니 괜찮다고 칼리안은 생각했다.
곧 칼리안의 눈이 문 앞에 서 있던 기사들에게 향했다.
문이 열리고 칼리안의 입장을 알렸다.
한 걸음씩 칼리안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비로소 그 얼굴을 마주했다.
······ 형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