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94화 (95/527)

제19장. 형님 (2)

아침부터 광장을 오가는 걸음이 분주했다.

르메인의 탄신 기념일 축제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왕궁 만큼이나 광장도 넓었던 탓에 광장 이곳 저곳을 꾸미고 구조물을 설치하는 작업이 오랫동안 진행됐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바쁜 하루를 시작할 때.

- 다각, 다각!

경쾌한 말 발굽 소리가 광장을 울렸다.

작업이 끝나기 전까지 일반인의 광장 출입은 금지되어 있었으니 이것은 광장이 아니라 왕궁을 찾은 손님이 왕도를 지나가는 소리일 터였다.

'이번엔 또 누가 오셨나.'

그런 생각에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이들이 깜짝 놀라며 일제히 몸을 세웠다. 그리고 황급히 고개를 숙여 예를 보였다. 왕궁에 찾아오는 어떤 이가 아니라 왕궁에서 나오는 '어떤 분'이 낸 소리라는 것을 확인한 탓이었다.

"왕자님이시다!"

검은 머리, 검은 정장. 그리고 검은 말.

호위도 대동하지 않고 왕궁 밖을 나올 수 있는 왕자.

당연히 칼리안이었다.

평소의 칼리안은 느릿하게 걸으면서도 유난히 큰 발굽 소리를 내는 말에 오른 채 사람들의 인사를 전부 받아주곤 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바쁜 일이 있는 듯 인사를 건네는 이들에게 가볍게 눈만 맞춰 주며 어디론가 서둘러 가고 있었다.

어딜 그리 바삐 가는지.

자신을 보는 이들의 의문을 뒤로한 채, 달리기 직전의 속도로 움직이는 레이븐에 올라 세뉴 강의 다리를 건넌 칼리안은 정말 오랜만에 바넨샤 거리에 들어섰다.

'로튼 대장간'

그렇게 도착한 익숙한 이름의 상점 안으로 쑥 들어가니 여전한 근육질의 주인이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났다. 그리고 굉장히 어색한 동작으로 인사를 올렸다.

덕분에 주인이 앉아있던 의자가 우당탕 소리와 함께 넘어졌으나 그에 신경 쓸 정신도 없는 듯 했다. 이 모든 것이 예법에는 전혀 맞지 않는 행동들이었으나 오히려 그것이 보기 좋았던 칼리안이 조용히 웃었다.

"오랜만이네."

마치 언젠가 봤었다는 듯한 말.

한참을 정신 없이 헤매던 주인의 머릿속에, 1년 전에 찾아왔던 수상한 소년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아, 혹시 작년에······!"

"기억을 해주는군."

그때 일을 생각하며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냐만은, 칼리안은 일단 이 곳에 직접 오게 된 들뜬 마음부터 해결하고 싶었다.

"얼마전에 내 시종이 좋은 재료 하나를 맡겼을걸세."

그리고는 제 눈을 가리켜보이며 덧붙였다.

"눈 색이 서로 다른 아이인데. 그것도 기억을 하려나."

"네, 왕자님. 기억 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바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그래. 알겠네."

칼리안의 허락을 받은 주인이 물건을 치우면서 걷는 것인지 쓸어버리면서 걷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허둥거리며 가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두 자루의 검을 들고 나와 칼리안의 앞에 공손히 내려놓았다.

"여기 있습니다."

검을 보는 칼리안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토록 기다린 재료, 운철로 만든 검이었다.

키리에가 두 달 동안 밖에 나갔던 이유가 된 물건이기도 했다.

운석을 습득해 직무 정지가 끝나는 날에 맞춰 돌아오느라, 키리에는 이제 막 완성된 이동 마법진까지 이용했다.

"운철이라니,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이런 것을 찾으셨습니까."

"어쩌다보니 그리 되었네."

운석이 떨어진 곳과 시기를 칼리안이 기억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과거 베른이 이것을 매우 탐냈었기 때문이었다.

브리센 상단에서 우연히 운석을 주워 경매를 한다기에 참여했는데 결국은 지고 말았다. 그 일을 너무나 아쉬워하는 베른을 본 체이스가 데블란에게 청해서 검을 하나 선물했는데 그것이 바로 베른과 마지막을 함께했던 세크리티아 왕실의 보검이었다.

참으로 많은 것을 떠올리게 하는, 하지만 정작 가져본 적 없던 그 검을 드디어 손에 쥔 칼리안이 감개무량한 얼굴을 했다.

"최상급 중에서도 다시 최상급에 해당되는 운철이라 합니다, 왕자님. 오러를 쓰신다 해도 몇 대를 걸쳐 모두 견뎌낼 겁니다."

물론 그럴 것이다.

아르센에게 당하지만 않는다면.

아무튼 칼리안은 매우 흡족한 얼굴로 두 자루의 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흑빛에 가까운 짙은 재색의 날이 예리한 기운을 뻗어내고 있었다.

"둘 중 어떤 것이 왕자님께서 사용하실 검입니까?"

그 질문에, 의미 모를 미소를 지은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둘 모두 내 것이 아니네."

더 효율적인 칼리안만의 검이 있으니 굳이 이 귀한 운철을 낭비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 이유로 결국 이번 생에서도 칼리안이 직접 쓰지는 못할, 두 자루의 검.

둘 중 더 날렵한 검신을 자랑하는 검은 당연히 키리에의 것이었다. 그리고 남은 하나도 칼리안의 것은 아니었다.

검을 들고 가볍게 휘둘러보며 확인하는 모습을 본 주인이 괜스레 뿌듯하다는 듯 다시 말했다.

"제가 다 기쁩니다, 왕자님. 작년에 오셨을 때는 검을 들어올리지도 못하셨······."

······ 아차.

주인의 말과 칼리안의 움직임이 동시에 우뚝 멈췄다.

'내가 입을 잘못 놀렸구나!'

주인은 주인대로 말 실수를 했다고 여겨서였고 칼리안은 칼리안대로 비밀을 또 들켜버린 듯 해서였다.

'아, 맞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에는 제 손으로 검을 들지도 못하던 이가 1년도 안되어 소드마스터에 올라버린 것이다. 그게 말이 되는가? 당연히 안 되지.

또 들켰냐는 앨런의 잔소리가 귓가를 윙윙 울렸다.

"아, 그······."

칼리안이 자연스러운 웃음을 지으려 노력하는 것이 분명한 얼굴로 어색하게 말했다.

"다들 알지 않나. 그 때, 그래. '감기'를 앓던 중이라서."

"아······ 전 왕비의······ 아, 네. 알아들었습니다."

그 때 칼리안이 앓은 감기가 실리케의 독이었음을 모를 이가 카이리시스에 있을까.

주인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하며 의문을 지웠다. 거짓말 못하는 칼리안의 어색한 말도 입 밖에 내기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놓는 이의 난처함 정도로 알아서 잘 이해하고 넘어갔다.

추억이고 나발이고.

칼리안은 그 곳에 더 머물지 못하고 서둘러 나왔다. 더 있었다가는 진짜로 들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른 레이븐에 올라 폴룬 마법학원으로 갔다.

* * *

"새로운 내용은 없었습니까?"

아마도 로튼 대장간의 주인이 보았다면 고개를 갸웃거렸을 것이다. 검을 보며 그렇게나 신나 하더니 그런 얼굴은 어느새 싹 사라져 있었다.

다시 한번 마법사들의 정보망을 한껏 이용한 에우리아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네, 왕자님. 텐실의 신관들로부터는 아직 특별한 움직임이 없습니다.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도 여전히 변경백령에 있습니다."

"플란츠 형님 말만 들으면 당장이라도 올 기세였는데 꽤 느리네요."

그 말에 에우리아가 잠깐 웃다 대답했다.

"아무래도 지그프리드 공작 때문이 아닐까요?"

"지그프리드 공작이라······."

"이동 마법진 덕분에 이전과 다르게 움직이고 있으니까요. 본래 지그프리드령에서 카이리시스로 오려면 두 달 전에 출발을 했었는데 한 달이 채 남지 않도록 움직이지 않으니, 아마도 지그프리드 공작이 이번 축제에는 참석하지 않으리라 여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그프리드 공이 이번에는 오지 않을 줄 알고 카이리시스로 돌아올 생각을 했다는 말입니까."

"네. 제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왕자님. 그래서 호기롭게 이곳에 오겠노라 말을 했는데 지그프리드 공작이 어느새 수도의 공작저에 도착했다 하니 일정을 미룬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레이가 아직 모르는 것.

바로 이동 마법진이다.

슬레이만은 이제 두 달 전에 출발할 이유가 없었다. 이동 마법진이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슬레이만은 딱 닷새 전에 공작령을 떠났고 이미 카이리시스에 있는 지그프리드의 저택에 도착한 상태였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가능성 높은 말입니다. 마법진이 이런 식으로 영향을 미칠 줄은 몰랐는데 나쁘지는 않군요."

그레이가 슬레이만을 피해야 할 이유는 딱 하나였다.

그레이의 오러가 아무리 강해졌다 해도 슬레이만보다 강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슬레이만이 그레이의 오러를 느끼지 못한다면 분명 누구든 이상하게 여길 터였다.

"그럼 그레이는 카이리시스에 오는 것을 탄신일 축제가 지난 뒤로 미루려 하겠네요. 지그프리드 공과 마주치면 안되니까."

"네. 제가 말씀드린 이유가 맞다면 그렇게 움직일 것 같습니다, 왕자님."

칼리안의 말에 긍정을 표한 에우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는 칼리안을 보며 두 번째로 알아보던 내용에 대해 전했다.

"그리고 텐실의 신관들 중에, 수도로 오는 길에 혹시라도 빠져나와 다른 짓을 하는 인원이 있는지 확인해달라 하신 것도 살펴보았습니다만. 텐실의 신관들은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인원 그대로 어제 카이리시스에 입성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뒤 잠시 생각을 마친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신관 중에 혹시 말콤 체티쉬라는 자가 있는지 알아봐주세요."

"네, 왕자님."

"그 외에도 계속해서 신관들 꼼꼼하게 살펴보세요. 브리센 변경백 쪽도 그렇고."

"네. 걱정 마십시오."

칼리안은 자신의 말에 선뜻 대답하는 에우리아를 보며 한 가지 말을 덧붙였다.

"아무렇지 않게 이것 저것 시키고는 있는데, 마법진 구축 때문에 고생한 협회의 마법사들을 내가 너무 부려먹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앞에 놓여 있던 레몬차를 한 입 마시고 내려놓은 에우리아가 대답했다.

"힘든 일은 해도 하기 싫은 일은 절대 못하는 것이 마법사입니다. 다들 좋아서 돕는 일이니 마음에 두지 않으셔도 됩니다."

칼리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에우리아의 말은 맞았다.

마법사들은 힘든 일은 해도 하기 싫은 일은 절대 못한다. 그래서 빌헬름 관의 발칸 대원들은 오늘도 열심히 힘들 예정이었다.

물론 플란츠 덕분이다.

지금 플란츠가 가르치고 있는 일은 움직임 둔한 마법사들이 죽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주문을 외우고 마법을 발현하는 그 사이를 파고드는 공격에 죽지 않는 것, 그리고 발칸 대원 전체가 마치 한 사람처럼 주문을 외고 마법을 발현하게 하는 것을 1차 목표로 삼았다.

그 결과로 마법사들이 빠릿하게 움직이고 모두가 한 몸처럼 호흡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체력 훈련이 매일같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칼리안이 왕궁 밖에서 에우리아를 만나고 있던 그 시간. 플란츠는 어김없이 빌헬름 관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평소와 달리 산책을 겸해 마차를 타는 대신 천천히 걷고 있었다.

빌헬름 관은 르메인이 있을 아르피아 궁을 지나가야 있었는데, 아르피아 궁 인근에 다다랐을 즈음 시종이 말을 건넸다.

"왕자님. 그런데 오늘 오찬에 함께 하실 손님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란델 왕자님은 다른 일정으로 오찬 참석이 어렵다 하셨습니다."

축제를 앞두고 있었으니 왕자들 역시 다시 바빠졌다. 매 식사마다 모임이 있었다. 더 이상 작년처럼 마음대로 굴 수가 없었던 플란츠 역시 그런 일정에 빠지지 않았다.

"손님 누구."

"마나실 백작을 포함한 두 명이라 하는데 다른 한 명에 대한 정보는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국왕과 왕자들 그리고 앨런과 연관이 있는 누군가라니. 묘한 조합이다.

슬레이만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던 플란츠가 이내 아닐 것이라는 결론을 냈다. 만약 그였다면 굳이 숨길 이유가 없었으니까.

어쨌거나 오찬에 들면 알 수 있을 일이었으니 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플란츠가 무언가를 보고 잠시 발을 멈췄다.

"누구시길래 왕궁에서 얼굴을 가리고······."

뒤에서 같은 모습을 본 시종이 이렇게 작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플란츠가 발을 멈춘 것도 같은 이유였다.

카이리스 왕궁에서, 그것도 아르피아 궁으로 들어가려는 이가 하얀 로브의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이 굉장히 시선을 끌고 있었다.

따라서 플란츠는 제자리에 선 채 계속해서 그를 보게 되었다.

그 시선을 느낀 것인지 혹은 우연인지.

로브를 입은 이 역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플란츠 쪽을 바라봤다. 후드가 없었더라도 눈이 정확히 마주칠 만한 거리는 아니었으나 플란츠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가 정확히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때문에 천천히 상대방을 살피던 플란츠의 눈에 날이 섰다.

"어째서 여기에 있지."

수행원들의 수, 그들의 복장, 호위중인 기사의 기운. 로브 아래 보여지는 긴 청은발.

그리고.

알 수 없는 거부감.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으나 플란츠는 알 수 있었다.

"······ 세크리티아의 왕세자가."

마치 그 말을 들은 것처럼.

하얀 로브의 청년, 체이스 듀라한 세크리티아가 플란츠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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