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93화 (94/527)

제19장. 형님 (1)

도박장의 일이 터진 그날.

칼리안은 밤새도록 증거자료를 훑어봤다.

도박장의 운영과 상납에 대한 내용들이었고 그 안에 에반의 이름은 없었다.

예상했던 일이었으니 크게 상심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주 목적은 플란츠와 칼리안의 관계를 가리는 것이었고 겸사겸사 에반의 세력이나 줄여보자며 던진 돌이었으니까.

그렇게 아침이 되었고 르메인이 칼리안을 불렀다.

키리에가 연관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칼리안은 키리에에 대해서 언급하는 대신 르메인에게 있어 다소 뜬금없는 말을 꺼내들었다.

"브리센 후작이 란델 형님과 손잡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플란츠 형님이 브리센 후작의 손을 잡았습니다. 플란츠 형님의 의도를 후작이 의심하지 못하게 하려고 제가 후작의 도박장을 건드린 것입니다."

그 후 이어진 상황 설명을 들은 르메인은 정말 놀랐다. 어느정도 알고는 있었지만 칼리안의 덫 놓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던 탓이다.

일련의 설명을 마친 칼리안이 르메인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일이 너무 커져서 후작이 다른 마음을 먹으면 상황만 악화될 수 있습니다, 전하."

이 일로 에반을 지나치게 궁지에 몰았다가 에반이 에라 모르겠다 하고 란델에게 손을 뻗거나 혹은 르메인에게 반기를 들까 걱정이 되어 꺼낸 말이었다.

"그러니 조사에서 드러나는 이가 있다면 그 자를 걸러내는 것으로 마무리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르메인이 옆에서 아무 말 없이 앉아있던 앨런을 쳐다봤다. 에반이 지닌 기사단과 발칸의 힘을 잠시동안 재어 보았다.

그 판단의 결과로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래. 그렇게 하마."

"감사합니다."

아무리 세력이 줄어들었다 해도 브리센이다.

여전히 그의 기사단은 건재했다. 지그프리드와 나란히 카이리스 양대 기사가문이라 불리는 그 위명이 실리케의 일 하나로 사라질 리 없었다.

"그렇다면 후작이 누구를 앞세울 것이라 생각하느냐."

"게레스 자작입니다."

"지난 회의에서 텐실에 밀을 보내자 말한 이로구나."

"네. 맞습니다."

"브리센 후작과 친분 있는 이들 중에 도박장을 운영했다 꾸며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의 재력이 있는 귀족들은 많이 있는데. 왜 게레스 자작을 생각했는지 이유를 물어도 되겠느냐."

칼리안의 대답이 곧바로 이어졌다.

"아스트리샤 거리의 건물들 중 상당수가 그의 것이라 들었습니다. 게레스 자작은 그 정도로 재력이 많지만 지닌 사병은 그리 뛰어나지 않습니다. 브리센 후작이 이번 일로 금전적인 손해를 보았다고는 하나 영지에서 올라오는 수익이 있으니 당장 돈이 부족하지는 않을 겁니다. 헌데 전 왕비의 일로 브리센에서 발을 뗀 기사 가문들은 많은 상태입니다. 그러니 후작은 돈보다는 사병을 지닌 귀족을 더 중요하게 여길텐데, 지금 브리센 후작이 버릴 만한 패 중에 사병 없는 귀족은 게레스 자작 뿐입니다."

대답을 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다. 에반 브리센 뿐 아니라 그와 손잡은 귀족들의 상황 역시 정확히 보고 있었다.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 알겠다. 이만 물러가 보거라."

"네, 전하."

조용히 대답한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보인 뒤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유력 용의자에 '샤일 게레스' 라는 이름이 적혀있는 조사관의 보고서가 르메인에게 전달됐다.

그것을 본 르메인이 설탕에 조린 감을 집어 우물거리는 앨런을 쳐다봤다. 그리고는 상당히 뿌듯해하는 눈으로 말했다.

"내 아들이 참으로 비범하군."

어쩐지 '내 아들'이라는 단어에 굉장한 자부심이 들어가 있었다. 때문에 앨런은 얼른 입에 든 것을 삼켜낸 뒤 입을 열었다.

"제 제자가 참으로 비범한 것이지요."

앨런이 우아한 동작으로 감 하나를 더 집어 입에 넣었고, 르메인은 마치 앨런의 말을 전혀 듣지 못했다는 듯한 얼굴로 자신의 말을 이었다.

"누굴 닮아 그리 영특한지. 놀라울 따름이네."

앨런이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만약 입 안에 달달한 감이 들어있지 않았다면, 지는 것 질색인 앨런은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체이스를 닮았지요.

뱀 같은 데블란이나 소 같은 르메인은 안 닮았습니다.

* * *

뱀 같은 데블란의 혈육으로 태어나 체이스의 교육을 받고 자란 뒤 소 같은 르메인의 아들로 살고 있는 복잡한 인성의 칼리안은 욕조에 몸을 푹 담근 채였다.

정확히는 따뜻한 물이 받아진 검은 욕조에 몸을 담근 채, 손가락으로는 물 표면을 톡톡 치며 눈을 내리뜨고 있었다. 한마디로, 정말 생각이 많은 상태였다.

때문에 칼리안의 취침 준비를 도우려던 얀은 발소리도 내지 않고 방 밖으로 도로 나왔다. 그리고 할 말이 생겨 칼리안의 방에 들어가려던 키리에를 막아섰다.

"지금 왕자님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키리에는 더 묻지도 않고 곧장 돌아갔다.

그 늦은 시간에 다시 수련장에 가는 모양새여서, 얀이 잠시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박장의 일이 처리되고 두 달이 지났다.

게레스 자작의 모든 재산이 몰수됐다.

사실상 에반의 편에 서 있었다는 것 외에는 도박장과 관련 없는 이였으니 에반과 손을 잡은 매개체가 된 재산만 몰수하여 에반에게 다시 돌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르메인은 키리에에게 살인에 대한 죄를 묻지 않았다. 다만 시종으로서 궁 밖에서 검을 휘두른 것에 대한 책임을 물어 두 달간의 직무 정지 처벌을 내렸다.

근신도 아닌 직무 정지.

왕궁 밖을 나가야 하는 처분이었다.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이 참 묘한 웃음을 지었다.

'안 그래도 다녀올 곳이 있었는데, 잘 됐네.'

외부에 나갈 일이 생긴 와중에 직무 정지라니.

키리에가 왕궁에 없어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터였다. 그러니 그것은 처벌이라기 보다는 왕궁 밖으로 키리에를 내보내기 위한 근사한 핑곗거리라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두 달을 나갔던 키리에가 카이리시스에 돌아온 것이 오늘이었다. 그리고 키리에는 칼리안을 보자마자 짧은 인사만 마치고 곧바로 이렇게 말했다.

'카이리시스로 오는 길에 텐실의 축하사절단 행렬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수가 지나치게 많습니다.'

일반적인 축하 사절단은 호위를 포함해 50을 넘지 않는다.

'백 명 가까이 됩니다. 신관들이 포함된 것 같았습니다.'

칼리안이 눈을 내리떴다.

일반적인 경우의 두 배 가까이 되는 수가 카이리스에 들어왔다.

당연히 칼리안은 곧바로 르메인을 찾아가 이 내용에 대해 물어보았고 르메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일전의 무례를 사과하고 소금 지원에 대한 보답의 뜻으로, 텐실에 돌아갔던 이들을 포함해서 서른 명의 신관을 보내겠다 하더구나.'

그것을 수락하기로 한 르메인의 결정에 대해 칼리안이 왈가왈부 할 수가 없었다. 말만 들어보면 기분은 나쁘더라도 의심할 내용은 아니었다. 텐실에서 신관을 보내온 것이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불안했다.

그 말을 듣고 돌아온 칼리안은 한 나절 동안 테이블을 톡톡 치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하고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의문들 때문에 욕조에 들어가 또 생각에 잠긴 채였다.

"란델 형님이 뭔가를 하려는 것 같은데."

붉은 빛을 내던 장미를 보았을 때에도 그랬다.

근거는 조금도 없으면서 무조건 란델이 떠올랐다. 헌데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키리에의 말을 듣자마자 란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신관을 데리고 도모할 일이 뭐가 있을까······."

이렇게 중얼거린 칼리안이 깊은 숨을 내쉴 때.

발소리도 내지 않고 자리를 비켜준 얀과는 그 배려심의 깊이부터가 다른 한 명의 말이 욕실 밖에서 들려왔다.

"나와."

생각에 잠긴 동생의 깊은 고민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매우 애증하는 둘째 형님의 목소리. 단박에 인상을 찌푸린 칼리안이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

나오라시니 나가야지, 별 수 있나.

많고 많은 생각을 떨치고 일어나 가운을 걸쳐입고 밖으로 나갈 수 밖에.

둘은 여전히 '사이가 좋지 않은' 채였다.

그말인즉슨 여전히 할 말이 있어도 대놓고 하지 못하는 상태라는 소리다.

처음에는 아르센을 통해 간단한 말을 전달하곤 했다.

문제는 아르센이 두 달 사이에 플란츠가 의외로 인내심 많은 성격임을 깨달았다는 것에 있었다. 덕분에 아르센이 플란츠에게 조금씩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물론 플란츠의 인내심이 걸어오는 싸움을 참아줄 만큼은 아니었으니 둘은 얼굴만 보면 서로 으르렁거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저 정도면 말려야 하지 않을까요, 스승님?'

'저 정도면 화목한 것이니 걱정 마시지요.'

그런 둘을 보며 칼리안이나 앨런이 중재를 했을 리 없지 않나.

당연히 내버려뒀다. 나름 괜찮은 구경거리였으니.

아무튼 그런 일의 결과로 칼리안과 플란츠는 그냥 서로 창문을 잠그지 않고 자기로 하는 것에 의견을 모았다. 아르센을 통해서는 제대로 된 의사 전달이 불가능했으니 말이다.

"이런 이른 시간에 무슨 일이십니까."

"변경백이 돌아올 것 같은데."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이 또 카이리시스로 온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아직 맞은 자리가 많이 쑤실 텐데.

이런 생각에, 칼리안이 잠시 실소했다.

"이상하네요. 브리센 후작이 변경백을 불렀을 리는 없을텐데요."

그레이는 더 이상 소드마스터가 아니었다.

플란츠는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물론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어찌됐건 에반이나 란델은 그레이가 더 이상 소드마스터가 아니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소드마스터가 아님을 들키는 순간 목이 떨어지리라는 것을 그레이가 가장 잘 알 테니 그레이는 어떻게든 그 일을 숨겨왔을 터였다.

"후작은 변경백에게서도 오러를 느끼지 못할테니, 혹시 만난다면 자신보다 변경백이 강해졌다 여길 겁니다. 오러가 다 사라져서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테니까요. 그런 변경백을 무턱대로 수도에 불러올 이유가 없습니다. 게다가 변경백령의 사병을 탐낼 이유도 아직은 없고요."

"후작도 정보를 전해 듣고 놀라던데."

"그럼 혹시."

잠시 말을 멈춘 칼리안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켜보였다.

그레이를 부른 것이 란델인지를 묻는 것이다.

"아마도."

플란츠의 고개가 위 아래로 움직였다.

칼리안은 라트란 백작령에서 만났던 신관 말콤 체티쉬가 그레이에게 무엇을 했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저 에우리아가 전해주는 정보를 통해 그레이가 어느새 걷고는 있다는 이야기만 들은 상태였다. 다만 파괴된 단전에는 오러가 다시 쌓이지 않으니 그레이가 실력을 회복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만은 잘 알았다.

"왜 부르셨을까. 왜 오겠다 하는 걸까······."

서른 명의 신관. 그레이.

그리고 란델.

연관성이 떠오르지 않아 생각이 깊어지던 칼리안의 얼굴에 흥미롭다는 듯한 웃음이 드리워졌다.

"재미있는 수수께끼를 내주시는군요, 형님."

칼리안의 혼잣말이었다.

문제가 어렵다고 좋아하는 것이다.

세상에 이런 미친놈이 어딨냐는 눈으로 자신을 보는 또 다른 형의 눈초리는 신경쓰지 않은 채였다.

* * *

앞을 살피던 기사의 눈이 찌푸려졌다.

곧 그가 뒤를 따라오는 일행을 보며 말했다.

"잠시만."

그 말에, 왕도를 따라 카이리시스로 향하던 이들이 말의 고삐를 당겼다. 그 기사만큼 시력 좋은 사람이 일행 중에 또 없었기 때문에 모두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곧 기사가 말 머리를 돌려 일행의 한 가운데 있던 이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는 무슨 일이냐는 듯 고개를 돌리는 그에게 말했다.

"멀리 앞에 텐실의 신관들로 보이는 이들이 있습니다."

평상시와 달리 더 늘어난 텐실의 축하 사절단을 보게 된 이가 비단 키리에만은 아니었다.

모든 왕도는 결국 카이리시스로 통하니, 서로 다른 곳에서 출발했어도 결국 같은 길에서 마주칠 수밖에. 그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으므로 기사의 말을 들은 이가 말했다.

"마주치면, 인사나 하면 되지."

태평한 말이다.

텐실과 그들은 완벽한 적대관계였다.

그럼에도 인사나 하겠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다만 이런 모습을 하루 이틀 대면한 것이 아니었던 기사는 그에 대해 별다른 말 없이 다시 설명했다.

"신관들로 보이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른 명입니다."

고집 피우지 말라는 뜻이 담긴 말을 들은 이가 작게 웃었다.

"인근에서 하루를 보내고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알았어. 거의 다 왔을텐데, 아쉽네."

그제야 고개를 숙여보인 기사가 물러났다.

곧 일행이 지낼 만한 영지를 알아보도록 지시하는 기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가 나지막한 소리로 입을 열었다.

"신관이 서른 명이라."

깊이 내려온 하얀 후드 아래, 붉은 입술이 긴 호선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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