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장. 가진 것이 많아서 (6)
그 늦은 밤.
한 마리의 말이 카이리시스를 질주했다.
에반 브리센 후작의 귀는 수도 치안대 안에도 있었다.
그 귀는 수도 내에서 말을 달릴 수 없다는 법도 무시한 채 바삐 달렸다. 도박장에서 발생된 일에 대해 에반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누구보다 빠르게 소식을 전해들은 에반은 일단 침착한 모습으로 그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했다.
과거 아르센을 이틀 재워주기로 했을 때 도박장에 대해 입을 닫기로 했던 칼리안이었다. 물론 약속을 언제까지고 지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빨리 뒷통수를 칠 줄이야.
"플란츠의 배신에 대한 앙갚음이로군."
그리고 이것이 에반의 결론이었다.
에반의 옆에 서 있던 파벨의 단장이었던 기사가 말했다.
"맞습니다. 그런 이유가 아니고는 갑작스럽게 그곳을 공격할 이유가 없습니다."
에반이 칼리안과 플란츠의 사이를 의심하지 않도록 벌인 일이라는 것은 둘 모두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튼 에반이 굉장히 난처해진 것은 사실이다.
증거를 가져갈 것이라면 조용히나 가져갈 것이지 죄 죽여버린 것도 모자라 치안대에 잡혀버리다니.
그런 생각을 하던 에반이 갑자기 주먹을 움켜쥐었다.
칼리안의 시종이 왜 그렇게 바보같이 잡혔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된 까닭이었다.
"일부러 잡혔구나, 일부러."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기사가 물었고 에반이 그를 보며 짧게 설명했다.
"본래는 치안대에서 조사를 했어야 할 일이 아니더냐. 그러니 왕실에서 조사하게 하려고 일부러 잡힌 것이다."
"후작님께서 관여하지 못하게 하고자 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에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끼어들까봐 왕실에서 직접 조사하게 하려고 머리를 썼어."
그 말대로, 에반의 입김을 배제하려면 왕실에서 직접 조사에 나서야 한다. 그런데 왕실에서는 왕족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일이 아닌 이상은 먼저 나설 수 없었다. 당연하겠지만 칼리안이 도박장과 연관이 있을 리 만무하니, 키리에가 연관이 있다 하더라도 왕족 본인의 일이 아닌 이상은 왕실에서 나서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왕족과 연관되지 않은 일에 왕실에서 나서는 경우는 단 하나다. 왕실에서 사건을 조사해달라며 치안대가 요청할 때.
"범인이라고 잡힌 놈이 왕자의 시종이라는데 치안대에서 처벌을 할 수가 있겠나. 그러니 치안대에서는 왕실에 요청을 보낼 테지. 그렇게 되면 왕실은 '어쩔 수 없이' 사건에 대한 조사를 진행할 것이 아니더냐."
"그렇게 된다면 후작님께서 도박장의 일을 조용히 덮으실 수도 없어지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만만치 않은 놈이다. 실로 만만치 않은 놈이야."
에반이 잔뜩 날카로워진 목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 * *
호위 시종일 것이다.
치안대원들의 이런 말에 수도 치안대 대장인 데칼은 고개를 갸웃했다. 3왕자에게 호위가 필요한가? 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지간한 실력자가 아니면 이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대장님.'
마흔 일곱이 죽었다.
검이나 도끼를 쓰든 혹은 금고 안에서 발견되었던 여자처럼 독 묻은 암기를 쓰든, 철창 앞에 죽어있던 남자 한 명을 제외한 모두가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평범한 소년이 마력탄 하나 없이 한 자루 검으로 마흔 일곱의 무사를 죽일 수는 없다. 때문에 그의 대원들이 키리에를 보며 호위 시종일 것이라고 생각을 한 것이다.
'철창 뒤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습니다. 그 아래 사람들이 붙들려 있을테니 풀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아무 저항 없이 붙들려 온 키리에는 치안대 중앙 지부에 도착한 뒤 딱 이렇게만 전했다. 그 외에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데칼의 궁금증을 더 키우고 있었다.
물론 그가 궁금해하는 것은 또 있었다.
'무슨 사정이길래 왕자님의 시종이 이런 일을 벌였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키리에를 보는 데칼의 눈은 마흔 일곱을 죽인 살인자를 보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물론 키리에가 3왕자의 사람이라는 말 때문에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까닭도 있지만 그보다는 데칼 역시 키리에가 알려준 도박장 아래층의 참상을 둘러보고 왔던 탓이 더 컸다.
사람이 해서는 안될 짓. 딱 그 말이 맞을 것이다.
때문에 데칼은 지금 키리에를 보며 사람을 죽인 아이가 아니라 짐승을 죽인 아이 정도로 생각하는 중이었다.
"총 열 아홉 명 구조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두 구의 시신이 더 발견됐습니다. 모두 상처가 심각한 상태였는데 검상은 아닙니다."
치안대원 한 명이 데칼에게 다가와 이런 말을 했다.
"격투 도박장이니 서로 싸우다 다친 것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뼈가 많이 부러져 있었고 치료를 받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데칼이 잠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키리에는 들려오는 말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조금 더 빨리 구했더라면 혹은 칼리안에게 부탁을 해봤더라면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기적일지는 모르겠으나 키리에 역시 그들을 구하러 간 것이 아니었다. 그저 칼리안의 필요에 의해 찾아간 키리에가 자신의 복수를 했을 뿐이었으니까.
"그런데 대장님. 그 곳 어쩐지 귀족 세력과 연관이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렇겠지. 그 정도 규모의 도박장인데 귀족과 연관되어 있지 않을 리가 있겠나."
물론 고위 귀족일 것이다.
때문에 데칼은 키리에가 칼리안의 시종임을 밝혔다는 말을 듣자마자 왕궁에 소식을 전했다.
"일단 왕궁으로 기별을 했으니 기다려 보자고. 저 소년이 정말 시종이 맞다면 궁에서 사람이 올 테니까."
그렇게 말한 데칼이 긴 숨을 쉬었다.
이번 일 치안대 선에서 조사할 사건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치 그 생각에 대한 대답인 듯한 말이 들려왔다.
"이 일에 대해서는 더 관여하지 말게. 나머지는 왕실에서 확인할 터이니."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린 데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은색에서 시작해 붉은 빛으로 진해지는 그 머리 색깔.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었다.
"마나실 백작님 맞으십니까?"
왕궁에서 사람이 오리라고는 생각했지만 기사들이 올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앨런 마나실이 왔다.
앨런은 데칼의 인사에 간단히 고개를 끄덕여보인 뒤 키리에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앉아있는 의자에까지 흥건하게 고인 핏물에서 시선을 치운 앨런이 물었다.
"다친 곳은 없는가?"
"괜찮습니다."
짧은 대답이었고 앨런은 손가락을 튕겨 키리에의 몸에 묻은 피를 씻어주었다. 그제야 드러난 얼굴이 생각보다 더 어린 것을 본 데칼이 속으로 놀랐다.
하기사 검의 길에 오른 3왕자의 나이도 이제 고작 열 다섯이다. 그런 3왕자의 측근이라면 저 나이에 그 정도의 무력을 지니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찌됐건 왕실에서 사건을 조사하겠다 하니 데칼로서는 환영할 일이었다. 때문에 키리에는 매우 빠르게 앨런의 손으로 돌아왔다.
"필요하신 내용이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최대한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앨런은 데칼과 몇 마디 말을 나누며 키리에를 인계받았다는 서류에 서명을 했다. 그러고 나니 데칼이 아주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했다.
"그런데 백작님. 증거품의 경우에는 곧바로 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치안대에서 먼저 확인한 뒤에 왕실로 전달될 겁니다."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네."
왕자의 시종이야 왕자의 사람이니 곧바로 내어주었으나 증거품은 치안대에서 찾아낸 것들이므로 바로 인계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른 불만을 보이지 않은 앨런은 가벼운 인사치레를 건넨 뒤 키리에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 * *
아르피아 궁 버금가게 안전하다던 앨런의 마차는 편안하기로는 아마 칼리안의 욕조만큼은 될 터였다. 이전에 이 마차를 타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때와 지금은 남은 체력부터가 달랐다.
그러니 잠이 들 만도 했으나 키리에는 한결같은 얼굴로 앉아있을 뿐이었다. 그것을 보던 앨런이 툭 던지듯 물었다.
"왕자님이 시킨 것이 저들의 몰살이 아니었을 것 같은데. 자네에게 그런 일을 시키실 분이 아니지 않은가."
키리에가 살짝 웃었다.
"굳이 다 죽여 놓고 나니 속은 좀 시원해졌는가?"
굳이 다 죽이지 않았더라도 치안대는 올 것이고 조사 결과는 똑같을 것이다. 그러니 칼리안이 정말 도박장의 모든 이들을 전부 죽이도록 시켰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라고 앨런은 생각했다.
"왕자님께서는, 누굴 죽이고 누굴 살릴지 제가 정하면 된다 하셨습니다."
관련된 이들을 하나도 살려두지 않은 것은 아르센이 마차에 불덩이를 집어던진 것과 같은 일이었다. 그날 레딩턴 영지의 운동장을 수도 없이 달리며 배운대로 칼을 썼다.
"왕자님께서 책임져주실 수 있으리라는 것을 믿고 마음껏 복수를 했습니다. 그래서 시원합니다."
앨런은 그런 키리에를 보며 손속이 과했다는 등의 미련한 말은 하지 않았다. 죽일 놈 죽였다는데 뭔 말을 하겠나.
"그래. 다 없애라 시켜서 억지로 없앤 것보다야 나을테지."
"아마 억지로 시키셔서 한 일이었어도 다르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 말에, 묻어두었던 앨런의 궁금증이 다시 떠올랐다.
"자네는 왕자님의 무엇을 보고 그렇게 구는 것인가?"
키리에는 이제 열 일곱이다. 얀과 같은 나이다. 그런 소년이 마흔 일곱 명을 죽이고 와서는 왕자가 그 일을 억지로 시켰어도 선뜻 했으리라 말하고 있으니 궁금할 밖에.
"왕자님께서 보낸 시간에 제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까지는 말씀해주시지 않았습니다만. 왕자님께서는 세크리티아의 왕제이며 기사였다 하셨습니다. 그런 왕자님과 제가 인연이 있었다면 제가 이 곳을 떠나 세크리티아에 갔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게 말한 키리에가 손에 들린 검을 쳐다봤다.
"왕자님께서 처음에는 저만 구해가겠다 하셨습니다. 히나가 함께 있는 것을 모르셨던 것 같습니다. 히나가 함께 있는 것을 알면서도 저만 찾으실 분이 아니니까요. 그러다 저희 둘을 모두 구해주신 뒤에는 제가 아니라 히나에게 계속 질문을 하셨습니다."
담담하게 이어나가는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마른침을 삼켜낸 키리에가 앨런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히나의 귀가 잘린 것인지 자른 것인지, 본래부터 말을 못했는지 물어보셨습니다. 마치 히나를 처음 보신 것처럼요. 그 후에는 저희에게 아무 일이 없었던 것을 알고 다행이라 하셨습니다. 그 날을 떠올리니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제가 무슨 일을 겪고 세크리티아에 갔을지 말입니다."
검의 손잡이를 꾹 쥔 키리에가 말을 맺었다.
"그래서 이렇게 구는 겁니다."
칼리안이 무엇을 구해주었는지 이미 다 알아낸 키리에의 말에 대해, 앨런은 다른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하여간 칼리안은 여기저기 다 들키고 다니는 데에는 남다른 재주가 있는 놈이다. 어떻게든 들키고 있으니.
* * *
그날 새벽, 치안대 중앙지부에 큰 불이 났다.
사람은 다치지 않았으나 지부에서 보관중이던 도박장 관련 증거품이 소각됐다.
에반이 지시한 일은 아니었고 에반의 '귀' 노릇을 했던 이가 멋대로 저지른 일이었다.
"칼리안 그 놈이 어떤 놈인데 증거들을 고스란히 치안대에 다 넘겼겠느냐! 이미 그 놈의 방에 차곡차곡 잘 쌓여 있을게다!"
따라서 귀 노릇을 했던 이는 칭찬 대신 이런 노호성을 듣게 되었다.
에반은 정말이지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네 놈이 지른 불 때문에 오히려 이목만 더 집중될 것이 아니냐!"
결국 에반은 적당히 꼬리만 자르고 끝내려던 계획을 포기했다.
꼬리 대신, 자신을 따르던 귀족 한 명을 골라 잘못을 덮어씌우는 것에 간신히 성공했고 덕분에 또 한번 세력이 줄어들게 되었다.
그 일이 있던 날 밤.
에반의 집 앞을 서성이던 예쁘장한 왕자가 에반의 '귀'를 붙잡아 건넨 온갖 협박에 잔뜩 겁을 먹은 에반의 귀가 치안대에 불을 냈다는 것은 전혀 모르는 채였다.